(성철스님 백일법문-제2장 원시불교사상)
십이연기의 재해석
만약 연기를 생성에 관련된 것으로 해석하게 되면 전변설(轉變說)에 떨어지게 됩니다. 전변설은 오늘날 하나님격인 범(梵:Brahman)에서 일체 만물이 나왔다고 하는 인도 고대종교의 사상이며, 부처님은 애초부터
이것을 부정하였습니다. 후대의 불교에서는 전변설적인 사고방식을 거부하는데, 유식설(唯識說)은 은연중에 이러한 전변설의 색채가 있다고 해서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연기란 전변설처럼 무슨 본질이 따로 있고 지말(支末)이 따로 있어서 그 본체에서 지말이 생긴다는 것이 아닙니다.
화엄(華嚴)의 법계연기론(法界緣起論)에서 성기(性起)라는 말을 하는데 그 일어난다[起]는 말을, 생겨나서 일어난다는 생기(生起)의 뜻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불법의 근본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부처님께서 연기란 ‘서로
의지해 있는 것[相依性]’이라 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의지하고 나는 너를 의지해 있다고 하셨지 내가 있기 때문에 네가 생겼고 네가 있기 때문에 내가 생겼다는 말은 아닙니다. 즉 연기란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아니라 형제 사이란 말입니다. 시간적으로 연속인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아니라 공간적으로 평등인 형제 사이라는 것이며, 우주가 존재하는 근본원리를 말함이지 성경의 창세기처럼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가를 말하는 그런 이론이 아닙니다. 흔히 나에게 묻습니다. “예수교에서는 구약성경의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세계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불교에서는
이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다고 합니까.”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불교에는 연기법이 있다. 이 우주라는 것, 법계(法界) ° 진여(眞如)라는 것은 누가 만들 수도 없는 것이고 누가 부술 수도 없는 것이다. 법계 그 자체는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고[不生不滅],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不增不減] 것이다. 거기에서는 서로가 의지하여 원융무애하게 존재할 뿐이다.” 이 우주를 누가 만들었다고 하면 외도법인 전변설에 떨어지고 만다. 그러므로 우주의 존재방식을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고 부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연기란 평등하고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 융화하여 무애자재함을 말할 뿐이지 서로 앞서고 뒤서고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학자나 스님들은 원시경전인 아함경을 소승에 소속된 것으로 분류하였는데, 지금까지의 인용 경전과 그 해설에서 그와 같은 취급이 반드시 옳지만은 않다는 점을 다소간 이해하였으리라 봅니다. 그러면 다음에는 그 연기에 생사윤회의 시간적인 해석을 하게 된 까닭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학문이 발달하기 전에는 불교라고 하면 그냥 불교라는 것뿐이었는데,
학문이 발달함에 따라 불교도 역사적인 전개에 따라 근본불교(根本佛敎)․원시불교(原始佛敎)․부파불교(部派佛敎)․대승불교(大乘佛敎) 등으로 분류하여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근본불교란 부처님과 부처님의 직접 제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원초기의 불교를 말하고, 원시불교란 부처님 제자들 이후부터 부파의 분열 이전까지 백여 년 동안의 불교를 말합니다. 그 뒤로 십수 개의 부파가 나누어져 서로 이론적 논쟁을 하게 되었는데, 그 시대의 불교를 부파불교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