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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활동

인연의 교차로

사회교육

<2020년><8월>

    해탈과 성불

좋은 것도 구하지 않고 나쁜 것도 구하지 않는 것이다.
구하지 않으면 그것이 자유이고, 평화이며 윤회는 끝이 나는 것이다.
모든 되풀이되는 것은 구함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구하고 나면 그 구한 것은 없어지고, 그래서 또 구하고 또 없어지기를 반복하므로 영원히 구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영원히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멈추어야 한다.
이렇게 되는 이유가 어떤 관찰에서부터 시작되는가 하면 바로 무아(無我)이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구했는가?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이다. 그런데 그것이 망상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나라는 허상에 매여서 이렇게 구하고 또 구해서 끊임없이 고통을 반복했음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깨닫고 보니 ‘나’라는 것이 없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무아이다.

나를 위해서 구했지만 가만히 들여다 보니 ‘나’라는 것이 없는 것이다.
‘나’라는 것이 있으려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고,
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모두가 시시각각으로 변해간다.
일생을 살면서 나의 모습은 계속 변해가고 있기 때문에 ‘나’라고 할만한 모습이 없는 것이다.

지금의 내 모습 역시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모습일 뿐이다.
‘나’라는 것을 깊이 관찰해보면 ‘나’라는 것은 없는데 생각으로 '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아상(我相)이라 하고 아집(我執)이라고 한다. 무아(無我)를 철저히 보면 더 이상 구할 것이 없다.

 

이것이 해탈인데 무아를 보지 못하므로 끊임없이 구하여 돌고 도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윤회와 해탈의 모습이다.
해탈이라는 것은 구하지 않는 것이지 따로이 다른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것이 따로 있다면 이것 역시 묶이는 것이다. 일체의 구함이 없는 무구(無垢)의 세계가 바로 해탈이다.
또 구함이 없는 것이라 해서 구함이 없는 것을 구한다면 이것 또한 속박이다. 여기까지가 소승불교라 하겠다.

그런데 이것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다. 해탈 다음엔 무엇이 오는가?
부처님께서는 해탈에 대한 내용을 설명하시지 않으셨다. 하지만 후일 제자들이 그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부처님께서 해탈하신 이후 설법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기도 하고 머무르시기도 하시면서,
엄청난 힘이 나왔는데 그 힘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문제로 출발한 것이 바로 대승불교이다.
그러므로 대승불교는 부처님께서 해탈하신 이후의 불교이다. 해탈 후에는 반야(般若)이다.
그래서 반야는 무아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몸이라는 것은 파초(芭蕉)와 같은 것이라 하였다.
껍질은 있지만 알맹이가 없는 파초와 같다고 하여 파초허질(芭蕉虛質)이라고도 했다.
몸은 그만큼 허하고 부실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생각을 가지고 사는데 그 생각은 이 생각 일어났다가 저 생각이 일어나고 저 생각 일어났다가,
이 생각이 일어나므로 아지랑이와 같이 허망하다.

몸은 허깨비와 같고 생각은 아지랑이와 같이 허망한데 거기서 지혜를 얻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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