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만 보면 허깨비이고 파초고 아지랑이와 같지만 그기에서 반야가 나타나면 어마어마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해탈한 다음에는 해탈한 정신으로 사셨는데 그것을 해탈지견(解脫知見)이라고 한다. 그 해탈지견이 바로 반야이다.
중생의 생각은 허망할 뿐이고 인간의 육체는 허해서 없어진다. 그러므로 생각을 믿어서도 안되고 육체를 믿어서도 안된다. 이렇게 환상과 같고 허망한 생각만 일어날 뿐인데, 여기서 깨달음의 지혜가 나타나면 어마어마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반야이다.
깨달음을 얻으면 반야의 세계는 밝은 것도 아니고 어두운 것도 아니고, 긴 것도 아니고 짧은것도 아니고 등등 무수히 많은 말씀이 전해져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반야인가 한다면 그것은 생각일 뿐이다.
길다느니 짧다느니 죽는다느니 산다느니 하는 것은 모두 망념이고 관념이다. 관념을 잘 정리해놓은 것이 개념이고 개념을 체계화 한 것이 학설이고 논문이다. 망상을 체계화 하고 입자화 한 것이 개념이다. 개념도 전문화가 되면 조작적 개념이라 한다.
과학계는 과학계 나름대로 문학계는 문학계 나름대로 개념을 조작한다. 개념조작을 잘하는 사람들이 신학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오늘의 조작으로 모자라서 내일의 조작이 나온다. 그래서 신용어들이 계속 나오고 학설은 계속 변해가는 것이다. 본래 관념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반야는 모든 관념에서 해방되고 관념을 초월한 것이다. 그래서 무념이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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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에는 무념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육조단경은 반야바라밀의 금강경을 보고 깨달은 후 설한 것이므로, 육조단경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은 금강경이다. 그래서 무념이라는 말을 많이 쓴 것이다. 형상을 관찰한다는 것은 자기의 생각으로 보이는 것인데, 자기의 생각으로 형상이 관찰되어진것을 모르고, 완전히 자기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집착하는 것이 중생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이일체상 즉명제불(離一切相 卽名諸佛)이라, 일체의 상(相)을 떠나면 부처다.’ ‘제상비상이면 즉견여래(諸相非相 卽見如來)라, 모든 형상이 상이 아님을 본다면 바로 여래를 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상은 개념 즉 망념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상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자신의 허망한 생각으로부터 해방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무념이고 반야이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개념으로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에 설명이 안되는 것이다. 무념이 망념을 뚫고 들어갈 수가 없다. 스스로 망념을 깨지 않는다면 방법이 없는 것이다.
옛 선지식이 반야의 세계를 설명하기 힘듦을 말하기를, ‘태허공(太虛空)으로 입을 만들고 초목와석(草木瓦石)으로 종종광방광(種種光放光)하여, 진미래겁(盡未來劫)토록 밤낮없이 설명해도 반야의 세계를 알려줄 수 가 없다.’고 하였다. 이것이 반야의 세계요, 무념의 세계요, 깨달음의 세계요, 성불이다, 이것을 견성이라 한다.
견성은 무아로부터 오는 것이다. 내가 없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서부터 반야를 개발하면, 억만겁이 지나도 달라지는 것이 없고 세상 어디에도 비유할 바가 없다. 그 기쁨을 어디에 비유할 것이며, 그 광명을 어디에 비유하겠는가?
그분이 바로 석가여래요, 그분이 바로 아미타불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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