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범스님
불교를 믿는 목적으로 해탈(解脫)과 성불(成佛)을 이야기 한다. 그렇다면 해탈이란 무엇이고 성불이란 무엇일까?
해탈이라는 말과 성불이라는 말은 불교의 오랜 역사에서 비롯되었다. 해탈은 남방불교인 소승불교에서의 목적이며 성불은 북방불교인 대승불교에서의 목적이다. 해탈과 성불의 차이점을 보기 위해서는 해탈 이전의 문제, 즉 성불 이전의 문제를 보아야 한다.
왜 해탈을 해야 되는가 하는 것이다. 해탈이라는 것은 윤회로부터의 해탈이다. 윤회라는
것은 속박이고 얽힘이다. 집착에 얽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탈이라는 것은 무소착(無所着) 즉 집착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해탈하기전의 윤회의 과정은 인과의 과정에서 살아가고 있는 세계이다. 그런데 윤회의 세계 중에서 가장 좋은 세계는 천상(天上)이다. 그래서 세속적인 불교의 목적중의 하나가 바로 생천(生天) 즉 천상에 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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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의 목표는 재가불자들은 내생에 생천하는 것이고 출가한 비구, 비구니는 해탈하는 것이었다. 요즘은 생천이라는 말보다 극락왕생(極樂往生)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대승에서 비롯된 것이다. 육도를 윤회함에 있어 좋은 일을 많이 하면 육도 중 가장 좋다는 천상에 나게 되고, 나쁜 일을 많이 하면 육도 중 가장 나쁘다는 지옥에 나게 되는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것이 모두 바깥으로부터 온다는데 있다. 바깥 환경으로부터 얻어진다는 것이다.
내가 좋은 환경을 맞이하기 위해서 노력하면 좋은 환경이 온다. 그러나 이것은 바깥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다시 바깥으로 가게 되어있다. 이것이 무상이다 유루법(有漏法)이라고도 하는데 새는 그릇에 아무리 물을 가득 채워놓아도 새어서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윤회이며 인과이며 중생세계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을 보고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발견한 것이 해탈이다.
이런 것은 부처님 이전에도 다 있었다. 가장높은 곳인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에
태어나셨지만 그 세계도 완전치 못함을 알고 내려오셔서 다시 정진하여 해탈을 얻으신 것이다. 해탈은 풀려난다는 말이다.
지옥에 가는 것도, 천상에 가는 것도, 좋은 것도 그만두고, 나쁜 것도 그만두고 일체의 것에서 끝나는 것이다. 그것을 적멸이라 하고 이것을 해탈이라 한다. 초기경전에서 해탈을 네 구절로 묶어둔 내용이 있는데, ‘아생이진(我生已盡)이라, 나의 태어남은 끝났다.’ ‘범행이립(梵行已立)이라, 내가 할 일은 다 했다.’ ‘소작이작(所作已作)이라, 내가 만들어야 할 것은 다 만들었다.’ ‘불수후유(不受後有)라, 다시는 내생을 받지 않는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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