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head

 

*

<13>

*

 

*

 

사회활동

인연의 교차로

사회교육

<2020년><10월>

      (성철스님 백일법문-제2장 원시불교사상)

      십이연기의 재해석

      본래 바른 길, 즉 지름길로 가서 부처님 법문을 깨치고 불법을 성취했지 무슨 육도만행을 닦아 성불한다든지 삼아승지겁 동안을 닦아야 한다든지 하는 얘기는 근본 원시경전에는 없는 말입니다. 진여법계로 바로 들어가는 이것이 일승입니다.

      그러면 왜 삼승을 설하였는가? 소승불교와 대립적인 입장에 선 대승불교에서 방편으로 한 것입니다. 부파불교인 소승불교에서는 이들은 순전히 자리에만 치중하고 이타는 행하지 않았다고 대승에서 주장합니다. 이타가 없기 때문에 소승의 자리적인 편견을 부수기 위해서 이타의 육도만행을 강력히 주장한 것입니다. 이것이 보살승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도 중도일승(中道一乘)에서 볼 때는 일종의 방편이지 실지의 구경법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지°관(止觀), 정°혜(定慧)를 함께 닦아서 중도를 정등각하여 진여법계로 들어가면 그만이지 거기에서 보면 무슨 이승이니 삼승이니 하는 헛된 길[空路]은 없습니다.

      원시경전에 부처님 제자들이 깨친 경로가 삼아승지겁이 걸린다고 하는 등의 수증(修證)의 점차(漸次)는 결코 보이지 않습니다. 비구 교진여가 부처님의 중도법문을 듣고 바로 깨치고 나서 ‘집(集)이 곧 멸(滅)’이라고, 즉 생사가 곧 열반이라고 하니 부처님께서 인가하셨다는 말은 내가 앞에서도 여러 번 귀가 따가울 정도로 말했습니다. 말로만 ‘생사 즉 열반’이 아니라 확실히 원융무애한 것을 체득한 것입니다. 그 뒤에도 부처님의 제자가 깨친 사실이 자주 나오는데 그것을 보면 모두가 바로 깨쳐 들어갔지, ‘삼아승지겁을 닦아 성불한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둘러 가는 공로(空路)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일승사상은 대승불교에서 크게 주장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 일승이라는 말이 반드시 대승경전에서 비로소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아함경(阿含經)에 일승도(一乘道)라는 형태로 드물기는 하지만 그 용례가 보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까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여러 비구들이여, 이 일승도(一乘道)가 있어서 중생을 청정하게 하고, 근심과 슬픔을 초월하여 괴로움과 걱정을 멸하며 바른 도리를 증득하여 열반을 증득하게 하니 이른바 사념처(四念處)니라. 어떤 것을 사념처라 하는가. 몸에서 몸[身]을 관하여 열심히 바르게 알고 바르게 상념하여 세간의 탐욕과 걱정을 조복하여 머무르며, 수(受)에서 수를 관하여 마음[心]에서 마음을 관하여 법(法)에서 법을 관하여 머무르느니라. 여러 비구들이여, 이 일승도가 있어서 중생을 청정하게 하고 근심과 슬픔을 초월하며 괴로움과 걱정을 멸하고 바른 도리를 증득하여 열반을 증득하게 하니, 이른바 사념처니라. [南傳大藏經 제16권 상, 相應部經典 5, pp. 357~358]

      여기서 말하는 일승도(ekayana)란 신(身)°수(受)°심(心)°법(法)의 네 가지를 바로 알고 바로 생각[正知正念]한다는 것입니다.
      즉 몸은 청정한 것이 아니며, 수는 즐겁지 못한 괴로움이고, 마음은 항상하지 않는 무상한 것이며, 법은 자성이 없는 무아(無我)라고 관찰하는 것입니다.

(13)

다른 페이지로 가기(14)

<오른쪽 로고 크릭!! web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