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불교 무아성과 융의 ‘자아’는 제6식 즉 의식에서 논의가 되므로 상호 비교가 가능하다. 무아설에서도 경험적으로 ‘자아’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란 점, 그리고 ‘무아’를 깨쳐나가고 노력해야할 주체로서 자아의 능동성을 인정한다는 점, 그러나 ‘자아’의 틀을 깨야한다는 점에서 융이 자기실현에서 ‘자아’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과 일치한다. 융은 ‘자아’가 개인 의식의 중심체로서 심리적 주체란 점을 강조한 반면에, 불교에서는 ‘자아’는
경험상으로 있어 보이는 가유(假有)에 불과하며 이것이 실체가 아니며 실재가 아니란 점을 강조한 면이 서로 다르다. 융은 이 ‘자아’가 사후에도 영속되는 어떤 개체성이 있는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으며 따라서 윤회에 연관하여 논의하지 않는다. 불교는 윤회를 인정하면서 제6식에 나타나는 자아는 영속성이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논의의 복잡성이 야기된다. 윤회설을 무아와 병립시키기 위하여 업(業)의 개념이 도입된다. 한 개체의 자아는 신체적 사멸과 함께 단절되지만 자아가 행한 업은 상속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행위로 된 업이 어떻게
새로 태어난 다른 자아와 연결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일어나며, 이에 대한 답으로 제8식인 아라야식 설이 대두된다. 아라야식은 모든 개체의 의식들이 생겨나는 근거인 바다와 같은 모체로서의 식이며, 각 개의 자아들이 행하는 업들이 종자로서 갈무리되는 장식(藏識)의 의미를 갖는다. 아라야식과 융의 집단 무의식은 다같이 무한한 것이며, 자아는 여기서 나타나는 작은 물방울에 불과하다. 아라야식 자체는 불생불멸인 전체이며, ‘자아’의 의식은 업의 흐름을 따라서 인과의 법칙으로 일시적 생과 멸을 하는 유한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무아설은
이 자아가 아트만이 아니란 점과 아라야식에서 생멸하는 가유인 점과 업에 따라 윤회하는 점을 말하고 있다.
자아의 유한성과 의식 밖의 무의식의 세계의 존재를 인정하는 점에서 유식불교와 분석심리학은 유사하지만, 업의 상속과 윤회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점에서 둘은 크게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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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은 자아 의식에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무의식 상징의 이해 등을 통해 무의식을 의식에 확충해 감으로써 자기실현에로 나간다고 본다 .
불교는 이 ‘자아’가 허상임을 강조하고, 아라야식의 견분(見分)을 영원한 자아로 착각하는 제7식의 아집을 깨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피상적으로는 자기 실현과
불교의 견성이 서로 반대로 보인다. 즉 ‘자아’를 더욱 확충하는 길과 ‘자아’를 깨버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피상적 차이는 ‘자기원형’과 아라야식의 진여 또는 여래장설과의 심층 비교에서 상호 소통으로 바뀌게 된다. 이 점은 이부영의 논문 ‘불교와 분석심리학’ 19) 에서 논의된 바 있다. 진여(眞如)와 자기(自己)가 근원적 본성의 실체란 관점에서 두 학설은 기본 바탕을 함께 하고 있다. 자기는 전일(全一)의 경지에 이르는 원동력이면서 동시에 전일의 경지 바로 그 자체이므로 진여의 사상과 흡사하다. 자아를 확충하여 자기에
이르는 것과 자아라는 작은 울타리를 깨버리고 진여에 합일하는 점이나, 실체의 본성에 이르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중생(자아)은 그 속에 불성(佛性)을 갊아 있다는 여래장(如來藏) 사상이 모든 자아는 원초적으로 전일성(全一性)에 이르려는 동인을 갖추고 있으며 이것이 ‘자기원형’ 이라는 융의 학설이 크게 보아서는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불교의 무아설과 융의 자기실현설은 아라야식과 집단무의식의 유사성, 진여 또는 여래장 사상과 자기원형의 유사성 등에서 상호소통이 가능하다. 자아를 버리는 것과 자아를 확충하는
것이 상반되는 것 같지만 실재인 자기 또는 진여를 회복한다는 관점에서는 두 사상이 회통의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불교는 윤회설을 인정하고 업과 종자설을 기본 기작으로 도입한 점이 분석심리학과 다르다. 분석심리학은 원형의 무시간성 내지는 인류 보편성을 인정하면서도 자아의 윤회 가능성을 전혀 논하지 않는 가운데 자아의 자기확충만을 고려한 점에서 결과적으로 의식의 세계에 국한된 점이 제한적이라 보며, 이는 서구적 객관적 과학논리에 바탕한 측면에서 이해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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