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오원수의 돈오점수는 화엄성기설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지눌은 불심인 선과 불어(佛語)인 교가 서로 다르지 아니함을 ‘여래출현품’의 여래심 교설에서 확인하였으며, ‘신화엄경론’에서 선교일원인 화엄교의 오입문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원돈성불론’을 짓고 원돈신해문을 시설한 것입니다. 지눌은 불심인 선과 불어(佛語)인 교가 서로 다르지 아니함을 ‘여래출현품’의 여래심 교설에서 확인하였으며, ‘신화엄경론’에서 선교일원인 화엄교의 오입문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원돈성불론’을 짓고 원돈신해문을 시설한 것입니다.
‘원돈성불론’에서는 ‘신화엄경론’의 ‘부동지불(不動智佛)’설을 의용하여 “수심인은 먼저 자심의 일용무명분별의 종자로써 제불의 부동지를 삼은 후에 의성수선(依性修禪)하는 것이 묘(妙)하다”고 강조합니다. 지눌은 ‘신화엄경론’에 의거한 이러한 수행을 성기문으로 보았습니다. 초심범부가 자기 마음의 근본보광명지를 깨닫고, 이 깨달음에 의지하여 닦아서 결국에는 보현행을 이룬다는 것이 원돈신해문의 돈오원수입니다. 이는 의상이 누누이 강조한, 오오척신이 구래 십불 그 자체임을 바로 보아 십불로 출현케 한 것과 통한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의상의 특징적인 증분법성의 성기사상이 보조선의 돈오점수설에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아울러 지눌이 의상의 ‘일승법계도’설을 인용하여 해설한 내용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선과 화엄의 교섭이 이루어지는 수행가풍 속에서 조선시대 설잠(雪岑)은 ‘법성게’를 선적으로 주석함으로써, 화엄과 선의 일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설잠은 법성에 초점을 맞추어 ‘법성게’를 주석했으니, ‘대화엄일승법계도주병서’입니다. 설잠은 서문에서 의상이 처음 ‘일승법계도’를 만든 법성원융의 본래면목이 교망(敎網)으로 인해 상실되었다고 개탄하고, 그 개요인 210자의 종지를 법성으로 파악하고 그 소식을 간명하게 드러내고자 함을 밝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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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게’가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등의 증분4구로써 대화엄의 중중무진법계를 다 설해 마친 것인데, 의상법사가 자비심으로 연기분을 시설하였다고 하며, 법성외에 따로 일단 진성이 있는 것은 아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법에는 심천이 없으나 깨달음에는 선후가 있기 때문에 중생이 증득할 수 있도록 방편으로 진성을 가작한 것이지 법성을 따로 두고 하는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후 선수행자의 교과서처럼 중시된 ‘선가귀감’에서, 서산은 간화선을 중심으로 하는 조사선을 펴고 있지만, 교의 수행방편 또한 선수행과 동등하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수행가풍 속에서 ‘법성게’는 그 독송만으로도 공덕이 한량없음을 믿어 널리 유통되었습니다. 영·정조 시대에는 전국 사찰의 대소설재에 ‘법성게’가 독송되지 않는 곳이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일승법계도’는 조선시대에 또 한 번의 주석이 이루어졌으니, 도봉유문(道峯有聞)의 ‘법성게과주’입니다. 유문은 ‘법성무이상(法性無二相)’ ‘이사무분별(理事無分別)’로 법계를 원증하도록 한 것이 의상의 종안(宗眼)이라고 피력합니다. 그리고 ‘법성게’ 전체를 연기적 실천의 입장에서 의상의 법성을 드러내려는 해설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 후로도 참선·간경·염불의 삼문수업과 참선·간경(경학)·염불·송주·가람수호 등 오종의 수행가풍 속에서, 의상계 화엄전통은 끊이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왔습니다.
의상 화엄은 지눌과 설잠의 경우처럼, 조사선과의 교섭이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 화엄이 조사선과 교섭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의상의 법성성기 사상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의상이 설파한 ‘행해본처(行行本處) 지지발처(至至發處)’의 불사가 면면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2016.09.06 법보신문 / 정리=김규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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