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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12월>

      (성철스님 백일법문-제2장 원시불교사상)

      십이연기의 재해석

      연기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며 법을 보는 사람은 연기를 보느니라.
      緣起를 見하는 者는 法見하며 法見者는 緣起를 見하느니라. [中阿含經 p. 241]
      발가리(跋迦梨)여, 법을 보는 사람은 나를 보며 나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느니라. 발가리여, 법을 보아서 나를 보며 나를 보아서 법을 보느니라. [相應部經典 三卷 p. 190]
      연기를 바로 보는 것이 법을 바로 보는 것이며, 법을 바로 보는 것이 성불(成佛)이라는 말입니다. 여래는 법계를 정등각하고 연기를 직접 깨치고 중도를 직접 증득했습니다. 여기에서 그 직접 증득하고 바르게 깨친 연기는 곧 법이며 곧 중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님이 분명히 교시되어 있습니다. 한편 법계라고 하면 화엄종의 법계연기에서만 주장하였지 근본 원시경전에는 그런 이론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는데, 이미 앞의 예문에서 드러나듯이 원시경전에서도 연기법과 관련하여 법계설이 설해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에서 예문 한 가지를 더 들어 보겠습니다.
      사리불(舍利弗)은 잘 법계에 도달하였느니라. [南傳大藏經 相應部經典 第二卷 p. 81]
      이는 부처님만이 법계에 도달했다는 것이 아니라 제자인 사리불도 법계에 잘 도달하였다고 부처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상의 여러 가지 원시경전을 살펴본 까닭은 천태대사나 현수대사 같은 그런 큰스님들이 아함불교(阿含佛敎)를 소승이라 하여 무시하다시피 했으므로 후대에서도 아함(阿含)이라 하면 으레 소승불교 계통의 경전으로만 인식하고 대승적인 법계연기 ° 진여연기를 원초적으로, 그리고 산발적으로 설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역의 아함경이나 이에 상당하는 팔리어의 남전대장경에 표현되어 있는 근본불교는 결코 후대에서 잘못 이해한 유부(有部)의 소승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근본불교에 있는 중도사상°연기사상°진여법계사상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화엄의 법계연기사상입니다. 화엄의 법계연기가 부처님의 진여법계연기 이론을 정통적으로 계승한 것이라면, 선종은 실천면에서 진여자성을 확철히 깨쳐서 진여법계를 직접 증득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중도를 정등각하여 진여법계를 증득하여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해 내려온 것이 다름 아닌 선종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설명한 연기법을 한 게송을 지어 읊어 봅니다.

      가이없는 풍월은 눈[眼] 속의 눈이요, 다함 없는 하늘과 땅은 등불 밖의 등불이러라
      버들은 푸르고 꽃은 예쁜데 십만의 집에 문을 두드리는 곳곳마다 사람이 답하네.
      無邊風月眼中眼이요 不盡乾坤燈外燈이라 柳靑花明十萬戶에 叩門處處有人應이로다.

      삼천대천세계의 곳곳마다 버들은 푸르고 꽃은 예쁜데 여기 불러도 “예” 하고 저기 불러도 “예” 합니다. 곳곳마다 부처님 없는 곳이 없고 곳곳마다 진여 아닌 곳이 없습니다. 다함이 없고 한이 없는 연기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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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12월>

    무엇이 업(Karma)을 운반하는가?

    무엇이 한 생에서 다음 생을 업의 종자를 운반하는지는 불교 초기부터 불교도들이 관심을 갖는 주제였다. 빠알리 전승은, 발견할 수 있는 자아가 있어야만 환생이 일어나고 다음 생에 업이 계속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환생은 식()의 연속성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각 순간의 마음은 동일한 인과적 연속성의 구성원들처럼, 직전의 순간과 다음 순간으로 연결된다. 기억들, 습관들, 업력 등의 보존되는 것은 심상속(心相續, mindstream) 연속성을 통해서이다. 죽으면 심상속은 새로운 물리적 신체를 지원하는 일을 맡으면서 계속된다. 발견할 수 있는 자아가 없이, 이 비인격적인 과정이 일어난다. ()들의 인과적 연속성이 없기 때문에, 사람은 명목상으로 확인된다.

    빠알리 경전들과 주석서들은 업을 예시하기 위해서 종자의 비유를 가끔 사용하지만, 그들은 업이 어떤 실질적인 본성을 가진 종자를 남겨두는 것이라고 설명하지 않는다. 업은 잠복해 있다가 적당한 조건들이 합쳐지면 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행동은 지속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어딘가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면, 선율의 음표는 류트 속에 머물지 않고, 류트가 연주될 때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보다는, 류트와 공기와 음악가에 의존해서 선율이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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