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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12월>

불서 강해 시리즈25

법상과 비법상의 차이점

그렇다면 법상과 비법상을 어떻게 분별하겠는가!

법상은 중생 분별계를 떠났을지라도 오히려 지키던 법, 가졌던 법, 분별계를 떼이므로 얻은 법은 남아있게 마련입니다. 이 일체분별은 없다할지라도 법 하나는 가지고 놓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법상의 법집입니다.

비유하면 배를 타고 저 언덕까지 갔을지라도 이 배가 나를 이곳까지 오게해준 고마움만 생각하고 차마 배를 떠나 언덕에 오르지 못한다면, 배에 집착하여 언덕을 모르게 됩니다. 이는 법에 집착하여 피안을 모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법상의 집이 있으면 다시 4상에 착하게 될 것입니다. 법에 걸림이 있을 때는 분명히 거기에 걸려있는 놈이 있을텐데, 그놈이 바로 아상이요, 인상이 됩니다. 또한 자기가 처한 바 법을 둘도 없는 정법으로 집착할지니 이미 정법이 있는 바에야 사법(邪法)이 있을지니, 이것이 중생상이요, 이 법은 만고불변의 대진리라 할지니 그것이 수자상입니다.

법상이 아무리 4상을 여윈다하더라도 법집에 불과한 연고가 이것이요, 이것이 법집에 속한 법상입니다.

또 4상을 없애되 중생집을 떼었으므로 일체 중생계에 분별이 없고, 법집을 떼었으므로 일체법에 집착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4상으로부터 중생집을 떼고, 중생집에서 법집을 떼어서 집착이 없는 법을 얻었다 할지라도 법을 여윔은 진제(實相)로 알지니, 이것이 비법상입니다.

비유하면,

불서 강해 시리즈26

배를 놓고 피안에 올랐다하더라도 피안에 오른 줄 알면 실은 못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피안은 법을 놓고 취함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배는 놓는 것도 태워지는 것이요, 배를 취해도 태워지는 까닭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저 언덕은 오름없이 오르는 것이며, 배는 버림없이 버리기 때문입니다. 배를 버림없이 버릴 줄 모르면 항상 이 배에 실려있음이니, 이 배에만 실려있으면 법상, 비법상 할 것없이 4상에 취함이 되는 것입니다.

비법상에 취하면 법을 돈연히 떼임이 못되고 법상을 상대함이 되는 것이니, 비법상은 아상이요, 법상은 인상입니다. 또 법상과 비법상이 상대되었으니, 사법(邪法)이 멸하지 못함인지라 중생상인 것입니다. 또 법상을 떼임으로해서 피안에 달한 느낌이 있을지니 이것이 수자상입니다.

비법상이 아무리 법상을 여윈다 해도 법집에 불과한 것이니, 진제에는 도달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법집에 속한 비법상입니다.

이 비법상을 다 떼어 버리면 어디일까?

물론 진제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제를 취함이 있으면 실제로 비법상을 떼임이 아니요, 따라서 이른 곳도 진제가 아닐 것입니다.

진제는 법상을 떼인 것도 아니요, 비법상을 떼인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법상-비법상에 착한 것도 아닙니다.

진제는 법상-비법상을 떼고 붙임에  있는 것도 아니요, 이를 떼지도 말고 붙이지도 말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진제는 법상-비법상을 떼이든 붙이든 간에 함께 착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법상을 떼이면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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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12월>

불서 강해 시리즈27

만일 비법상을 떼어 어디로 가는 데가 있다면 비법상은 떼임이 없이 떼어야 할 것이니, 비법상을 떼이든 놓든 모두 착이 되는 것을 모르는 것이 됩니다. 이는 떼임이 없이 떼어야 할 것이니, 진제는 떼든 떼지 않든 본래가 부동인 것입니다.

사념처(四念處)에 의지하라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즈음에 아란존자가 물었습니다.

"부처님,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는 그 무엇에 의지하여 마음을 닦아야 합니까?"

"[4념처]에 의지하여 닦으라."

4념처는 4념주라고도 하는데 몸과 감각과 마음과 법에 있어 마음을 모아 관하는 방법입니다. 즉 관신부정(觀身不淨), 관수시고(觀受是苦), 관심무상(觀心無常), 관법무아(觀法無我)가 그것입니다.

관신부정이란 <몸은 부정한 것으로 알아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공부도 잘되고 마음도 편안합니다. 몸이 깨끗하다는 애착심을 갖고 있으면 공부도 안되고 마음도 어지러워집니다.

몸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끊임없이 부정한 것을 흘러내고 온갖 부정물로 이루어져 있으니 애착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눈에는 눈물이 나오고, 코에는 콧물이 나오며, 입에는 침이 나오고, 귀에는 귓밥이 나오며, 대-소변이 나오고, 땀구멍마다 조금도 쉴사이없이 땀을 솟아냅니다. 그래서 코가 찌를 듯한 땀내가 나는데도 중생은 몸이 부정한 것인 줄 모릅니다.

불서 강해 시리즈28

관수시고란 <받는 것은 괴로운 것인 줄 알아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감각적인 것은 모두 고통이 따른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마음을 더럽히고 흔들고 공허하고 쓰리게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감각적인 것들을 마군이라 합니다. 그것이 설사 잠시의 즐거움이 있는 듯이 보일지라도 실은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원만한 자기의 성품이 손상되고, 성품이 가지는 공덕을 도적맞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괴로움의 씨앗을 남기고 떠나게 됩니다.

관심무상이란 <마음은 떳떳함이 앖어 끊임없이 변하는 것으로 알아라>는 뜻입니다.

마음은 항상 그냥 있는 것 같아도 끊임없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으며, 안팎에서 일어나는 조건에 따라 바뀌고 변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24시간 동안 잠시도 쉬지않고 흔들립니다. 그러니 마음이 자꾸만 어두워집니다. 바람이 불면 강물 바닷물이 흙탕물로 변하고, 바람이 잠잠하면 다시 맑은 물로 밖륍니다. 인간의 마음도 이 원리와 똑같다고 봐야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흔들릴까요? 1찰라 900번 흔들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24시간 동안은 과연 얼마나 흔들릴까요! 자그만치 64억9만9천9백80번....

마음이 이토록 요란하기 때문에 중생의 마음가운데는 8만4천번의 번뇌망상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하루속히 이 번뇌망상을 떼어내라고 야단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니 번뇌망상을 떼어내기 위해서는, 마음을 흔들질 말고 가만히 있을 수 있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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