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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12월>

      달라이 라마 수미산

      (주: 성철 스님도 말했다. "나는 진리를 위해 불교를 택한 것이지, 불교를 위해 진리를 택한 것이 아닙니다. 불교 이상의 진리가 있다는 것이 확실하면 당장 [승복을] 벗어버릴 겁니다." <설전>)

      나는 더이상 수미산을 믿지 않는다. 이는 사성제(四聖諦 苦集滅道)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주론이 아니라) 사성제에 있다. 부처는 인도와 태국의 크기를 잰 적이 없다. 부처는 지질학자가 아니다. (사성제는) 지구가 구형인지 평평한지와 관계 없다. 하하하하. 빅뱅이론을 우리 불교도들은 매우 쉽게 받아들인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빅뱅은 한 차례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전, 그그전...' 하는 식으로 무한 번 있었다. 하나의 빅뱅이 일어나려면 원인이 있어야 하는데 그건 직전의 빅뱅이다. 그런 식으로 끝없이 과거의 빅뱅으로 연결된다. 불교 우주론은 성주괴공(性住壞空)이 끝없이 반복된다.

      신경생물학과 뇌과학은, 신경과 여러 감정 사이의 관계를 연구한다. 밀교 수행도 신경계와 관계가 있다. 그래서 불교 수행자들과 신경생물학자들과 뇌과학자들 사이의 대화가 유익하다. 그들의 과학적 발견은 우리에게, 우리의 불교적 설명은 그들에게, 서로 도움이 된다. 아원자물리학과 양자물리학과 불교 연기론에 의하면, 그 어떤 것도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다른 것들로 인해 존재한다. 하나의 사건은 수많은 다른 요인으로 인해 일어난다.
      서구 심리학은 고대 인도 심리학에 비하면 유치원 수준이다. 인도 전통 심리학이 훨씬 더 발전했다. 그래서 많은 현대 서구 과학자들이 불교 심리학과 고대 인도 심리학을 배우고자 한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과학과 기술을 좋아했다. 인도로 망명한 후에 과학자들과 대화와 토론을 했다. 어느 날 한 미국인 선불교도에게 '과학자와 토론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조심하세요. 과학은 종교를 살해합니다." 그때 산스크리트어 불경이 생각났다. 부처님은 "내 말을 나에 대한 귀의나 믿음을 이유로 받아들이지 말고 철저히 조사하고 실험해 본 다음에 받아들여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과학자들과의 대화는 전혀 위험한 일이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이 아직도 불교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더이상 수미산은 믿지 않는다. 그런다고 불교가 위태로와지는 것은 아니다. 하하하하 하하하. 기본적으로 사성제와 순수한 의식과 이런 (수미산을 믿는) 무지의 제거 가능성에 대해서, 현명하고 실제적인 과학자들은 그냥 부인하지 않고 흥미를 보인다."
      "현명한 과학자들과 아주 유명한 과학자들이, 예를 들어 리처드 데이비슨(Richard J. Davidson 위스콘신 대학 심리학 정신의학 교수. 달라이 라마의 오랜 절친) 같은 과학자들이, 마음을 열고, 내생이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인다. 마음은,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과학자들과 대화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아니다. (주: 서구 과학자들이 불교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불교에 대해 사유를 하게 되면, 불교인들이 의심없이 불변의 진리로 믿는 윤회론 등에 대해서 반박하기 힘든 비판을 할 수 있다. 이는 무척 위험한 일이다. 아직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고 있을 뿐이다.) 과학이 100프로 확실하게 증명한 것은 우리 불교도들이 받아들이면 된다. 수미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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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12월>

    (성철스님 백일법문-제2장 원시불교사상)

    십이연기의 재해석

    본래 바른 길, 즉 지름길로 가서 부처님 법문을 깨치고 불법을 성취했지 무슨 육도만행을 닦아 성불한다든지 삼아승지겁 동안을 닦아야 한다든지 하는 얘기는 근본 원시경전에는 없는 말입니다. 진여법계로 바로 들어가는 이것이 일승입니다.

    그러면 왜 삼승을 설하였는가? 소승불교와 대립적인 입장에 선 대승불교에서 방편으로 한 것입니다. 부파불교인 소승불교에서는 이들은 순전히 자리에만 치중하고 이타는 행하지 않았다고 대승에서 주장합니다. 이타가 없기 때문에 소승의 자리적인 편견을 부수기 위해서 이타의 육도만행을 강력히 주장한 것입니다. 이것이 보살승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도 중도일승(中道一乘)에서 볼 때는 일종의 방편이지 실지의 구경법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지°관(止觀), 정°혜(定慧)를 함께 닦아서 중도를 정등각하여 진여법계로 들어가면 그만이지 거기에서 보면 무슨 이승이니 삼승이니 하는 헛된 길[空路]은 없습니다.

    원시경전에 부처님 제자들이 깨친 경로가 삼아승지겁이 걸린다고 하는 등의 수증(修證)의 점차(漸次)는 결코 보이지 않습니다. 비구 교진여가 부처님의 중도법문을 듣고 바로 깨치고 나서 ‘집(集)이 곧 멸(滅)’이라고, 즉 생사가 곧 열반이라고 하니 부처님께서 인가하셨다는 말은 내가 앞에서도 여러 번 귀가 따가울 정도로 말했습니다. 말로만 ‘생사 즉 열반’이 아니라 확실히 원융무애한 것을 체득한 것입니다. 그 뒤에도 부처님의 제자가 깨친 사실이 자주 나오는데 그것을 보면 모두가 바로 깨쳐 들어갔지, ‘삼아승지겁을 닦아 성불한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둘러 가는 공로(空路)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일승사상은 대승불교에서 크게 주장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 일승이라는 말이 반드시 대승경전에서 비로소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아함경(阿含經)에 일승도(一乘道)라는 형태로 드물기는 하지만 그 용례가 보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까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여러 비구들이여, 이 일승도(一乘道)가 있어서 중생을 청정하게 하고, 근심과 슬픔을 초월하여 괴로움과 걱정을 멸하며 바른 도리를 증득하여 열반을 증득하게 하니 이른바 사념처(四念處)니라. 어떤 것을 사념처라 하는가. 몸에서 몸[身]을 관하여 열심히 바르게 알고 바르게 상념하여 세간의 탐욕과 걱정을 조복하여 머무르며, 수(受)에서 수를 관하여 마음[心]에서 마음을 관하여 법(法)에서 법을 관하여 머무르느니라. 여러 비구들이여, 이 일승도가 있어서 중생을 청정하게 하고 근심과 슬픔을 초월하며 괴로움과 걱정을 멸하고 바른 도리를 증득하여 열반을 증득하게 하니, 이른바 사념처니라. [南傳大藏經 제16권 상, 相應部經典 5, pp. 357~358]

    여기서 말하는 일승도(ekayana)란 신(身)°수(受)°심(心)°법(法)의 네 가지를 바로 알고 바로 생각[正知正念]한다는 것입니다.
    즉 몸은 청정한 것이 아니며, 수는 즐겁지 못한 괴로움이고, 마음은 항상하지 않는 무상한 것이며, 법은 자성이 없는 무아(無我)라고 관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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