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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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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백일법문-제2장 원시불교사상)
십이연기의 재해석
“벗 사리불이여, 생(生)은 자기가
지은 것입니까. 벗 사리불이여, 식(識)은 자기가 지은 것입니까, 식은 남이 지은 것입니까, 식은 자기가 지은 것이며 남이 지은 것입니까, 식은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원인 없이 나는 것입니까?”
“벗 구치라여, 식은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식은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식은 자기가 지으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식은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원인 없이 나는 것도 아닙니다. 명색(名色)에 연(緣)하여 식(識)이 있습니다.”
“벗 사리불이여, 이 말한 바의 뜻을 어떻게
알아야 하겠습니까?” “벗이여, 비유하면 두 개의 갈대 묶음이 서로 의지하여 서 있는 것과 같이 명색에 연하여 식이 있으며, 식에 연하여 명색이 있습니다. 명색에 연하여 육처(六處)가 있으며, 육처에 연하여 촉(觸)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모임입니다. 벗이여, 만일 그들의 갈대 묶음 가운데서 하나를 제거해 버리면 나머지 하나는 넘어져 버리며, 다른 것을 제거해 버리면 그 다른 것이 쓰러져 버립니다. 벗이여, 그와 같이 명색의 멸함에 의해서 식의 멸함이 있으며, 식의 멸함에 의해서 명색의 멸함이 있으며, 명색의
멸함에 의해서 육처의 멸함이 있으며, 육처의 멸함에 의해서 촉의 멸함이 있으며, 이와 같은 것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멸함입니다.” [南傳大藏經 13 相應部經典 2卷 pp. 164~166]
사리불은 연기를 두 개의 갈대 묶음이 서로 의지하여 서 있는 것에 비유하여, 명색(明色)을 연하여 식(識)이 있고,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명(無明)을 연하여 행(行)이 있고 행을 연하여 무명이 있으며, 무명의 멸함에 의하여 행의 멸함이 있으며, 행의 멸함에 의하여 무명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무명(無明)이
아버지가 되고 행(行)이 자식이 되어서 무명(無明)이 행(行)을 낳는다는 식이 아니라 무명(無明)과 행(行)은 서로 의지하는 형제지간이라는 것입니다. 갈대 묶음 가운데 하나를 빼 버리면 다른 하나는 설 수 없으니, 이것은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이 없다는 뜻을 비유하여 말한 것입니다. 명색이 멸하면 식이 멸하고, 식이 멸하면 명색이 멸하는 것이지 시간적으로 고정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남전대장경과 한역대장경(漢譯大藏經)에 다 있습니다. 이에 의하면 연기는 갈대 묶음이 서로 의지해 있는 것과 같아
하나는 주체가 되고 다른 하나는 객체가 된다는 것보다는 평등한 입장에서 말씀한 것입니다.
즉 연기란 인연하여 일어나는 것이라는 뜻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없던 것이 새로 탄생하여 생겨난다는 생성의 기본원리라기보다는 모든 일체 만물이 존재하는 존재의 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흔히 연기를 만물이 어떻게 생겼나를 설명하는 가르침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시간적 해석이 됩니다. 연기는 본래 존재의 모습을 말하는 기본원리였었는데, 후대에 오면서 생성의 원리를 말하는 시간적 관계로 보게 된 듯합니다. 그러나 연기란
우선적으로 만물이 어떻게 존재하느냐,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를 밝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연기의 근본 성품에는 앞의 남전장경에서 본 것처럼 진여(眞如)의 의미도 포함되고 있는데, 진여는 나고 죽고 하는 것이 본래 없으며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것이 본래 없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서로 의지해서 존재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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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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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백일법문-제2장 원시불교사상)
십이연기의 재해석
간략하지만 이와 같은 설명을 통해 연기설이 어떻게 해서 유부(有部)적인 소승의 생멸적 견해로 해석되게 되었는가 하는 역사적 과정이 대강 짐작되리라 생각합니다. 지금에는 어느 학자도 십이연기를 반드시 생멸적이며 시간적으로만 해석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구태의연하게 생멸적인 소승유부의 주장을 고집하게 되면, 이 사람들은 시대에 역행하는 사람들인
동시에 부처님의 근본 뜻을 등지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이 십이연기와 관련하여 언급해야 할 문제가 사성제(四聖諦)입니다. 십이연기와 사성제는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이 사성제를 해석하는 방법에는 모두 네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생멸사제(生滅四諦)입니다. 이것은 대개 소승의 유부(有部)에서 주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법의 자성을 ‘있다[有]’라고 보기에 이 ‘있다’고 하는 관점에서 보면 제법은 생멸한다는 피상적인 관찰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래서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보지 못하고 고(苦) ° 집(集) ° 멸(滅) ° 도(道)의 사제를 순전히 생멸적으로 해석합니다.
둘째는 무생사제(無生四諦)입니다. 이것은 ‘생멸사제’의 반대로서 사제는 생(生)하지도 않고 멸(滅)하지도 않는다는 해석입니다. 대승불교 가운데 반야경(般若經)이나 삼론종(三論宗)의 공사상(空思想)에 근거하여 주장한 해석입니다. 공사상에서 볼 때는 사제란 생멸하는 것이 아니라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것이라 합니다.
셋째는 무량사제(無量四諦)입니다. 이것은 보살승(菩薩乘)에서 주장하는 것입니다. 보살이란
육도만행(六途萬行)을 근본으로 삼고 행동을 강조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견해는 육도만행을 하듯이 모든 것이 다 한이 없고 끝이 없다[無量無邊]는 견지에서 사제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문․연각은 이 무량사제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넷째는 무작사제(無作四諦)입니다. 이것은 주로 『법화경』을 받드는 일승원교(一乘圓敎)의 해석입니다. 여기서는 사제를 생멸(生滅)°무생(無生)°무량(無量)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생멸하는 당체(當體)가 그대로 실상(實相)이라는 것입니다. 곧 생사(生死)가 열반(涅槃)이며 번뇌(煩惱)가
보리(菩提)이므로, 끊어야 할 고(苦)도 집(集)도 없고 닦고 증득해야 할 멸(滅)도 도(道)도 없으므로 어떤 인위적인 지음도 요청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변견이나 사견(邪見)이나 할 것 없이 전체가 다 중도 아닌 것이 없으니 부처와 마구니가 한계선이 없어지고 화합하는 때입니다. 이것이 원융무애한 중도사제(中道四諦)입니다.
원래 사제(四諦)는 자세히 알고 보면 십이연기와 별개의 도리가 아닙니다. 사제 중에서 괴로움을 말하는 고제(苦諦)와 괴로움이 생기는 것을 뜻하는 집제(集諦)는 괴로움이 생기는 과정을 말하므로 십이연기의
순관(順觀)에 해당합니다. 또 사제에서 괴로움이 멸하는 멸제(滅諦)와 그 멸하는 길을 말하는 도제(道諦)는 괴로움이 소멸하는 과정을 말하므로 십이연기의 역관(逆觀)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십이연기와 사제는 서로 대등한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이연기가 존재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고 법계 연기이고 보면, 사제 역시 생멸적인 사제만으로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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