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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의 교차로

사회교육

<2020년><10월>

    (성철스님 백일법문-제2장 원시불교사상)

    십이연기의 재해석

    흔히 말하는 소승불교는 바로 그 부파불교를 가리킵니다. 부파 성립 이후의 교단은 거의 소승불교에 의해 지배당하게 되는데, 거기에서 소승불교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근본불교 정신으로 되돌아가려고 일어난 것이 바로 대승불교입니다.
    대승불교운동이 처음 일어난 때는 기원전 1세기경이라고 하며, 그것을 가장 잘 체계화시킨 사람이 용수(龍樹)를 중심으로 한 중관파(中觀派)이고, 그보다 다소 후에 무착(無着)과 세친(世親)을 중심으로 한 유식파(唯識派)가 성립됩니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인도의 불교사상을 오랜 세월 동안 수용하면서 전적으로 대승적인 교학을 발전시켰는데, 그 대표적인 종파가 바로 화엄종(華嚴宗) ° 법상종(法相宗) ° 천태종(天台宗) ° 선종(禪宗) 등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근본이 되는 것인만큼 부처님과 그 가르침을 직접 받은 제자들 당시의 불교가 중심이 되어야 함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시대를 내려오면서 만일 그 근본취지가 변질된 것이 있다면 그 변질된 것은 마땅히 시정되어야 합니다. 이제 문제는 지금까지 내가 설명해 온 바와 같이 근본경전에서 설해진 십이연기법의 근본성품은 진여이며 법계이며 중도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해서 그런 십이연기법을 시간적인 생멸법으로 해석하게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원시불교시대를 지나서 부파불교시대로 오면 각 부파가 서로 자기 파의 변견을 고집하게 됩니다. 한쪽에서는 부처님의 근본교설을 없다는 견해[無見]에 치우쳐 해석하고, 다른 쪽에서는 있다는 견해[有見]에 치우쳐 해석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있다는 견해에 치우친 세력이 컸는데, 그것이 요즘 말하는 소승불교의 실세가 된 것입니다. 있다는 견해에 치우친 것이란 ‘일체의 모든 법에는 실체(實體)가 있다[諸法實有]’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체가 있으므로 고정적으로 생사윤회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서로 의지한다는 성격[相依性] 때문에 연기란 것은 무아(無我)가 근본도리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부파불교에서는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즉 양변을 여읜 중도사상을 모르고 변견에 떨어져 ‘실체는 있다’는 견해를 고집했고, 따라서 십이연기를 그와 같은 실유론적인 성격이 강한 생사윤회하는 법칙으로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해석이 최초로 나온 곳이 원시경전에 나오는 가전연존자와는 이름만 같고 실제로는 다른 가전연자(迦栴延子)가 지은 ꡔ발지론(發智論)ꡕ인데, 거기에서 십이연기를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로써 설명한 것입니다. 그 뒤 오백 명의 존자들이 모여서 가전연자가 지은 발지론에 대한 주석서로서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100권을 지었는데 거기서도 삼세양중인과설을 채택하여 생멸법으로서의 십이연기설을 채택했습니다. 그래서 구사론(具舍論) 등 유부(有部)의 소승불교 전체가 십이연기의 해석을 근본불교와는 다르게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풍조 속에서 용수보살이 나타나서 부처님의 근본불교를 생멸적인 견해로 곡해한 유부의 변견을 부수게 됩니다. 그는 『중론(中論)』을 지어서 중도를 다시 선양하고『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도 중도사상을 가지고 근본불교를 회복시키려고 전력을 기울인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바로 이러한 근본불교에로의 복구운동이 소위 대승불교운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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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10월>

      (성철스님 백일법문-제2장 원시불교사상)

      십이연기의 재해석

      만약 연기를 생성에 관련된 것으로 해석하게 되면 전변설(轉變說)에 떨어지게 됩니다. 전변설은 오늘날 하나님격인 범(梵:Brahman)에서 일체 만물이 나왔다고 하는 인도 고대종교의 사상이며, 부처님은 애초부터 이것을 부정하였습니다. 후대의 불교에서는 전변설적인 사고방식을 거부하는데, 유식설(唯識說)은 은연중에 이러한 전변설의 색채가 있다고 해서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연기란 전변설처럼 무슨 본질이 따로 있고 지말(支末)이 따로 있어서 그 본체에서 지말이 생긴다는 것이 아닙니다.

      화엄(華嚴)의 법계연기론(法界緣起論)에서 성기(性起)라는 말을 하는데 그 일어난다[起]는 말을, 생겨나서 일어난다는 생기(生起)의 뜻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불법의 근본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부처님께서 연기란 ‘서로 의지해 있는 것[相依性]’이라 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의지하고 나는 너를 의지해 있다고 하셨지 내가 있기 때문에 네가 생겼고 네가 있기 때문에 내가 생겼다는 말은 아닙니다. 즉 연기란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아니라 형제 사이란 말입니다. 시간적으로 연속인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아니라 공간적으로 평등인 형제 사이라는 것이며, 우주가 존재하는 근본원리를 말함이지 성경의 창세기처럼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가를 말하는 그런 이론이 아닙니다. 흔히 나에게 묻습니다. “예수교에서는 구약성경의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세계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불교에서는 이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다고 합니까.”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불교에는 연기법이 있다. 이 우주라는 것, 법계(法界) ° 진여(眞如)라는 것은 누가 만들 수도 없는 것이고 누가 부술 수도 없는 것이다. 법계 그 자체는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고[不生不滅],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不增不減] 것이다. 거기에서는 서로가 의지하여 원융무애하게 존재할 뿐이다.” 이 우주를 누가 만들었다고 하면 외도법인 전변설에 떨어지고 만다. 그러므로 우주의 존재방식을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고 부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연기란 평등하고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 융화하여 무애자재함을 말할 뿐이지 서로 앞서고 뒤서고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학자나 스님들은 원시경전인 아함경을 소승에 소속된 것으로 분류하였는데, 지금까지의 인용 경전과 그 해설에서 그와 같은 취급이 반드시 옳지만은 않다는 점을 다소간 이해하였으리라 봅니다. 그러면 다음에는 그 연기에 생사윤회의 시간적인 해석을 하게 된 까닭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학문이 발달하기 전에는 불교라고 하면 그냥 불교라는 것뿐이었는데, 학문이 발달함에 따라 불교도 역사적인 전개에 따라 근본불교(根本佛敎)․원시불교(原始佛敎)․부파불교(部派佛敎)․대승불교(大乘佛敎) 등으로 분류하여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근본불교란 부처님과 부처님의 직접 제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원초기의 불교를 말하고, 원시불교란 부처님 제자들 이후부터 부파의 분열 이전까지 백여 년 동안의 불교를 말합니다. 그 뒤로 십수 개의 부파가 나누어져 서로 이론적 논쟁을 하게 되었는데, 그 시대의 불교를 부파불교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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