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활동

인연의 교차로

사회교육

<2020년><8월>

      업보윤회설, 그 오해와 진실6

    이 경은 빈곤을 사회악의 근본 원인으로 보면서, 사회악의 해결을 위해서 개인적 선보다도 사회적 선에 더 적극적으로 호소한다.

    또한 공업 사상은 현대인에게 시민사회운동이나 NGO활동, 공공질서 준수 등의 필요성을 역설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이용하는 버스의 예를 들어 보자. 버스를 안전하게 이용하려면 승하차시 등에 우선 개인적으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개인적인 주의만으로는 부족하다. 운전기사의 노동 환경, 버스 정비 시스템, 신호체계, 도로 사정 등의 모든 조건이 잘 갖추어져야 한다. 다른 차량들도 모두 교통질서를 잘 지키며 안전 운행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들에 대한 점검은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시민 모두가 연대의식을 갖고 공동으로 실천해야 할 일이다. 시민사회운동의 당위성과 필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불교 공업설은 결국 우리에게 성숙한 시민의식을 갖고 모두의 안전을 위한 시민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묵시적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Ⅳ. 업설의 결과론적 측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사회는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성격과 구조를 지니며 인간관계 또한 매우 다양한 양상이다. 현대사회는 거대한 조직에 바탕한 대형화, 대량화, 집단화의 사회로서, 그만큼 사회적 리스크도 높다. 이러한 리스크 사회에서는 윤리적 동기론에 의존할 수만은 없다. 일정 정도 윤리적 결과론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불교는 흔히 ‘마음’과 ‘의지’를 중시하는 동기론의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자이나교에서는 오랫동안 불교를 철저한 동기론으로 비판해 왔다. 자이나교의 한 경전은, 불교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만약 어떤 사람이 쌀자루를 사람인 줄 알고 쇠꼬챙이로 찔렀다면 그는 살인죄를 저지른 것이 되고, 사람을 쌀자루로 착각하여 쇠꼬챙이로 찔러 죽였더라도 그는 살인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며, 불교를 無作用論이라고 비판한다.
    과연 불교는 이처럼 극단적인 동기론일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불교는 근본적으로 동기론의 입장에 서 있기는 하지만, 자이나교에서 비판하는 정도의 동기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교는 일정 정도의 결과론을 수용한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에 대해 몇 가지 근거를 밝힌다.

    첫째, 故意性이 없는 행위에도 과보가 있다는 내용이 『賢愚經』에 나온다. 부처님 당시 어떤 사미승(아들)이 비구 스님(아버지)를 부축하다가 잘못하여 스님을 넘어뜨려 죽게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는 인과가 있었다. 오랜 과거생에는 죽은 비구 스님이 아들이었고 사미승은 아버지였다. 아들이 아버지를 몹시 귀찮게 하는 파리를 몽둥이로 쫓으려다 그만 아버지를 죽게 하였다는 것이다. 의도적인 살인은 아니지만 그에 상응하는 과보가 따른다는, 결과론에 해당되는 사례임이 분명하다.
    둘째, 『中阿含』「思經」에서, 석존은 “만일 일부러 짓는 업이 있으면, 나는 그것은 반드시 과보를 받되, 현세에서 혹은 후세에서 받는다고 말한다. 만일 일부러 지은 업이 아니면, 나는 이것은 반드시 그 보를 받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不必受報)”라고 설한다.
    이 마지막 부분의 ‘不必受報’는 문법적으로 분명히 부분부정인데도 우리말 번역에서는 “만일 일부러 지은 업이 아니면, 나는 이것은 반드시 그 과보를 받지 않는다고 말한다”라고, 완전부정으로 잘못 번역되어 있다. 하지만 부분부정으로 해석하면 불교는 동기론과 일정 정도의 결과론을 동시에 수용하는 것이 된다.
    셋째, 10악업 가운데 意業의 하나인 愚癡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10악업 중, 의업에 속하는 악업은 탐, 진, 치의 셋이다. 이 마지막 ‘치’가 바로 우치다. 종종 邪見이라고도 한다. 구사론의 해석에 의하면 사견은 ‘선과 악 그리고 그 업보 등에 대해 그릇되게 생각하고 심지어 무시하는 견해’이다. 우치든 사견이든, 여기에는 분명 ‘고의성’은 없다. 그런데도 이것은 악업이기에 거기에는 과보가 따르기 마련이다.

    따라서 어리석음, 즉 고의성이 없는 악업에 대한 과보를 설하는 것이 되어 이것은 결국 결과론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고 하겠다.

    (6)

사회활동

인연의 교차로

사회교육

<2020년><8월>

    해탈과 성불

좋은 것도 구하지 않고 나쁜 것도 구하지 않는 것이다.
구하지 않으면 그것이 자유이고, 평화이며 윤회는 끝이 나는 것이다.
모든 되풀이되는 것은 구함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구하고 나면 그 구한 것은 없어지고, 그래서 또 구하고 또 없어지기를 반복하므로 영원히 구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영원히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멈추어야 한다.
이렇게 되는 이유가 어떤 관찰에서부터 시작되는가 하면 바로 무아(無我)이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구했는가?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이다. 그런데 그것이 망상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나라는 허상에 매여서 이렇게 구하고 또 구해서 끊임없이 고통을 반복했음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깨닫고 보니 ‘나’라는 것이 없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무아이다.

나를 위해서 구했지만 가만히 들여다 보니 ‘나’라는 것이 없는 것이다.
‘나’라는 것이 있으려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고,
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모두가 시시각각으로 변해간다.
일생을 살면서 나의 모습은 계속 변해가고 있기 때문에 ‘나’라고 할만한 모습이 없는 것이다.

지금의 내 모습 역시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모습일 뿐이다.
‘나’라는 것을 깊이 관찰해보면 ‘나’라는 것은 없는데 생각으로 '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아상(我相)이라 하고 아집(我執)이라고 한다. 무아(無我)를 철저히 보면 더 이상 구할 것이 없다.

 

이것이 해탈인데 무아를 보지 못하므로 끊임없이 구하여 돌고 도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윤회와 해탈의 모습이다.
해탈이라는 것은 구하지 않는 것이지 따로이 다른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것이 따로 있다면 이것 역시 묶이는 것이다. 일체의 구함이 없는 무구(無垢)의 세계가 바로 해탈이다.
또 구함이 없는 것이라 해서 구함이 없는 것을 구한다면 이것 또한 속박이다. 여기까지가 소승불교라 하겠다.

그런데 이것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다. 해탈 다음엔 무엇이 오는가?
부처님께서는 해탈에 대한 내용을 설명하시지 않으셨다. 하지만 후일 제자들이 그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부처님께서 해탈하신 이후 설법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기도 하고 머무르시기도 하시면서,
엄청난 힘이 나왔는데 그 힘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문제로 출발한 것이 바로 대승불교이다.
그러므로 대승불교는 부처님께서 해탈하신 이후의 불교이다. 해탈 후에는 반야(般若)이다.
그래서 반야는 무아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몸이라는 것은 파초(芭蕉)와 같은 것이라 하였다.
껍질은 있지만 알맹이가 없는 파초와 같다고 하여 파초허질(芭蕉虛質)이라고도 했다.
몸은 그만큼 허하고 부실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생각을 가지고 사는데 그 생각은 이 생각 일어났다가 저 생각이 일어나고 저 생각 일어났다가,
이 생각이 일어나므로 아지랑이와 같이 허망하다.

몸은 허깨비와 같고 생각은 아지랑이와 같이 허망한데 거기서 지혜를 얻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불이다.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