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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8월>

    업보윤회설, 그 오해와 진실4

    ‘여기서는 불교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서 논할 여유는 없다. 다만 불교 업설은 ‘자유와 책임’의 원리로서 해석할 수 있다는 점만은 강조해 두고 싶다. 불교적 업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근거한 능동적 자율적인 행위라는 점에서 ‘자유’사상에 통하고, 업보는 그 누구도 어떤 방법으로도 결코 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책임’사상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초기경전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석존의 가르침이 발견된다.
    허공 속에서도, 바다 속에서도, 바위 틈 속에서도 피할 수 없느니라. 악업을 행한 자가 그 과보를 면할 수 있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나니.
    우리는 불교 경전에서 이러한 ‘자유와 책임’만이 아니라, 나아가 ‘권리와 의무’의 정신도 이끌어 낼 수 있다. 불교는 국가와 사회의 기원을 설명함에 있어 일종의 ‘사회계약설’을 주장한다. 이것은 개인의 권리와 함께 사회 및 국가에 대한 개인의 의무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

    업설에서 ‘자유와 책임’은 ‘권리와 의무’의 정신과 통한다. 불교 업설은 이렇게 ‘자유와 책임’, ‘권리와 의무’라는, 민주시민이 가져야 할 기본요건과 정신을 가르쳐 준다. 불교의 업설과 윤회설은 결코 숙명론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의지에 바탕한 도덕적 행위와 창조적 노력을 설하는, 상식적이고도 미래지향적인 인생관을 함의한다.

    Ⅲ. 불교 共業說의 사회적 의의
    근대 인도에서 불교개종운동을 이끌었던 암베드까르(Bhimrao Ramji Ambedkar, 1891~1956)는 위에서 언급한 막스 베버처럼 불교의 업설을 숙명론 정도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업과 윤회의 교리에 대해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암베드까르는 인도의 불가촉천민들의 고통은 그들 스스로의 과거 업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학대와 잘못된 사회계급제도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업과 윤회의 형이상학은 현재 고통받는 사람들이 전생에서 악업을 행했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이라고 하여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폭압적 현실사회에 면죄부를 준다고 생각하였다.

     

    그러기에 ‘업과 윤회’의 교리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전통적인 불교의 업설에 따르면, 사람의 수명이 길고 짧은 것, 질병이 많고 적은 것, 외모가 단정하고 추한 것, 천하고 귀한 종족으로 태어나는 것,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등의 차별은 모두 과거생의 선업이나 악업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분별업보약경(分別業報略經)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설해져 있다.
    성인을 뵈옵고 기뻐하지 않으면 날 적마다 언제나 어리석어서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고 소경이 되어 볼 수 없으리.
    낯이 두꺼워 부끄러움을 모르고 절제 없이 말을 많이 하는 사람, 그는 업에 따라 과보를 받다가 나중에는 까마귀의 몸을 받으리.

    이러한 가르침은 해석하기에 따라서 일종의 숙명론으로 곡해될 여지가 없지 않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불교의 업설은 숙명론이 아니다. 불교는 과거세의 업뿐만 아니라 현세의 업도 현실을 규정한다고 설한다. 더욱이 불교업설은 과거의 업보다는 오히려 현재의 업에 더 비중을 둔다.

    대승열반경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한다.
    나의 佛法 가운데는 과거의 업도 있고 현재의 업도 있거니와 그대는 그렇지 아니하여 오직 과거의 업뿐이요 현재의 업은 없다.
    이어서 대승열반경은 현재의 과보가 현재의 업에 연유하는 비유를 든다. 즉 어떤 나라의 한 사람이 국왕을 위해 원수를 죽이고 포상을 받는다면, 그는 현재에 선업을 짓고 현재에 즐거움의 과보를 받는 것이 된다[善因樂果]. 또한 어떤 사람이 국왕의 아들을 살해하고 그 때문에 사형에 처해진다면, 그는 현재에 악업을 짓고 현재에 괴로움의 과보를 받는 것이 된다[惡因苦果]는 비유다.

    이 이야기는 비유라기보다는 구체적인 사례에 속한다고 보이며, 이 사례는 업설에 대한 신비주의적 이해에 제동을 건다. 이 사례의 내용을 살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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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8월>

    해탈과 성불

깨우치고 나서 반야를 노래한 것이 많이 있는데,
임제선사께서는 ‘무위진인(無位眞人) 즉 지위가 없는 참사람’이라 하셨다.
우리는 다 지위가 있지만 반야에서는 지위가 없고 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일체개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깨달음이다.

무위진인을 깨닫지 못하고 아집에 사로잡혀서 몸뚱이를 자기자신으로 보는 수준이 있는데,
그것을 임제록에서는 ‘적육단신(赤肉團身) 즉 붉은 고깃덩어리의 몸’이라 표현하였다.
깨달으면 무위진인이지만 깨닫지 못하면 적육단신인 것이다.
성불을 하기위해서는 무상을 철저히 느껴야 한다.

이 몸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초로의 인생임을 철저히 느껴서 깨우침을 구해야,
밤낮없이 정진해서 망상덩어리를 뚫고 나갈 수 있다.
깨우치기도 전에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짐작으로만 해서는 절대 안되는 것이다.
목숨을 걸어놓고 그냥 한길로 들어가야 망상이 녹아진다.
그것이 무위진인(無位眞人)이 되고 확연대오(廓然大悟)가 되고 견성성불(見性成佛)이 되는 것이다.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는 말도 있다, 한번 뛰어서 부처의 자리에 올라간다는 말이다.
이 몸을 가지고 지위가 없는 참사람을 본다는 것이다.
아무리 봐도 금방 없어지는 몸이고 어떠한 생각도 그냥 생겨났다 사라지는 허망한 생각이고 허망한 육신인데,
그것에서 반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옛 선인들은 이를 두고 ‘쓰레기더미에서 보석을 얻은 것’이라 하였다.
이 몸을 가지고 있다가 죽어봐야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것에서 깨우침을 얻고 나면 쓰레기더미에서 보석을 얻은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성불이고 반야이다.
반야를 얻으면,
죽으면 어떻게 하나, 살면 어떻게 하나, 오면 어떻게 하나, 가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근심이 다 없어진다.

마치 고약한 악몽을 꾸던 사람이 꿈에서 딱 깨어나면 일체가 다 없어지듯. 그것이 바로 성불의 세계이다.

‘일조소진세간풍(一朝掃盡世間風)이라 하루아침에 세간의 바람을 쓸어버렸다’는 말인데 옛 스님의 오도송이다. 그것이 성불이고 그것이 반야인 것이다. 망념으로 살다가 반야로 살면 그것이 성불이다.

지금 우리의 생각을 우리는 철저히 믿는데 믿을 것이 못된다. 지금의 생각은 몇 년이 지나면 틀림없이 바뀐다.
그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 생각할 수 있는 생각의 근거는 밖에서 온 것이다.
밖에서 온 것은 손님이고 손님은 떠나게 되어있는 것이다.

보고, 듣고, 느낀 것에서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것을 다 빼고 나면 없는 것이다.
보고, 듣고, 느낀 것 없는 것에서 나타나는 것이 반야이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전부 밖으로부터 온 것이다, 밖에서 온 것은 밖으로 간다.
손님은 반드시 떠나는 것인데, 손님이 와 있는 동안은 가족 같지만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이 허망한 것이다.

지혜를 얻고 난 다음에는 자비로 돌아가는 것이다.
부처님의 종착역이 자비이다. 자비 밖에 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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