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활동

인연의 교차로

사회교육

<2020년><8월>

    해탈과 성불

자신의 문제는 일체 없기 때문에,
아직도 참사람을 모르고 허망한 생각과 허망한 육체에 매여서 온갖 고통을 당하고 있는
중생들을 이끌어주고 살펴주고 깨우쳐주는 자비를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승불교는 무상에서 시작해서 반야로 자비로 돌아가는 것이다.
무상을 느끼고 도를 닦아야 한다. 무상을 느끼지 못하고 도를 닦는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면서 자신의 몸이 영원할 것이라 믿는 이에게는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마음 참정신을 찾아서 일체 근심걱정이 없어지고 나면 그 다음 할 일은 자비밖에 없다.
그래서 자비는 지혜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을 설명하기를 화엄경에서는 보현행원(普賢行願) 즉 원력을 세워서 자비행을 닦는 것이라 하였고,
법화경에서는 관세음보살보문품이다. 관세음보살보문품을 보면 전부 자비행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풍이고 부처님의 역사이다.

불교의 가는 길이 있는데, 그 길을 초기불교에서는 윤회에서부터 해탈하는 것이고,
대승불교에서는 무상을 느끼고 그 무상에서부터 반야를 체험하고 그 반야에서부터 자비행을 닦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좋은 일이라는 것이 복을 구하는 구복(求福)행위이다. 또 수행자들은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도 부처님같이 자비행 공덕행을 닦으면,
구경성불(究竟成佛)하게 된다는 것이다.

관세음보살보문품을 자꾸 읽고 자비행을 닦으려고 애를 쓰고,
보현보살행원품을 자꾸 읽고 그렇게 원력을 세워서 공덕행을 닦으려고 애를 쓰면 전부가 구경성불하게 된다.
 

이것이 중생무변서원도의 원력이다.

공덕을 한번 심는 것이 바로 흙더미에서 보석을 캐어내는 것이다.
이몸을 가지고 닦지않고 아무리 가꾸어봐야 이 몸은 반드시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몸이 가기 전에 공덕을 자꾸 닦으면 그 공덕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 분이 바로 아미타불이다.
아미타불은 보신불로 그 공덕의 보답으로 이루어진 몸이라 한다.
본래의 참사람은 바로 비로자나불이다.
광명변조(光明遍照)라 하여 그 광명이 온 우주에 찼고,
불신(佛身)이 충만어법계(充滿於法界)라 부처님의 몸이 법계에 가득하다는 것이 비로자나부처님이다.
온갖 곳에 다니면서 자비행을 하시는 분이 천백억화신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부처님들의 수인에서도 나타나듯 비로자나부처님의 근원과 이상을 나타내는 것은 수인(手印)이고,
혼자 생활할 때에는 고요히 선정에 드는 선정인(禪定印)이다.
쓸데없는 것을 너무 많이 보지 말고, 쓸데없는 것에 너무 시달리지 말고,
때때로 가만히 자기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나를 찾고 나를 키워야 한다.
일이 있을 때는 열심히 일하고 일해서 남는 것이 있으면 나눠주고,
할 일이 없을 때에는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옛 도인들의 모습이다.
우리도 부처님같이 자꾸 공덕행을 닦아서 구경성불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아지랑이와 같이 허망한 생각과 파초와 같이 허약한 이 몸일지라도 이렇게 불법을 만났을 때,
자꾸 공덕을 닦으면 그렇게 성불을 해서 우리도 부처님과 같이 넓은 세상을 만날 수 있으니까!
이렇게 사람된 기회를 잃어버리지 말고 열심히 공덕을 닦아서 다 함께 구경성불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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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8월>

    업보윤회설, 그 오해와 진실3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처럼, 인간의 운명은 인간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깨달아, 세상의 지식과 인생의 지혜를 부단히 배우고, 합리적인 계획을 세우고, 부지런히 노력하고 행동하며, 겸허히 기다리고 인내한다. 이렇게 불교 업설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인간으로 하여금 건전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근본 원리이자 기초인 것이다.

2. 인간 평등의 원리적 토대
동서고금을 돌아보면, 인류 역사는 차별의 역사요 불평등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분과 계급은 물론 종교와 직업, 인종과 성별에 따른 불평등은 오랫동안 인류 역사 발전에 걸림돌이 되어 왔다. 오늘날 인류 사회에서 극단적인 노예제도는 사라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인도의 바르나-카스트제도와 같은 계급차별이 행해지고 있는 지역이 적지 않다.
지구촌 한켠에서는 ‘인간 해방’을 넘어 ‘동물 해방’을 외치고 있지만, 반면에 선진국에서도 인종 차별이 엄존하고, 문명국가에서도 남녀 차별이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학벌이라든가 출신지에 따른 차별 등의 악습이 현존하고 있다.
이러한 차별은 모든 사람이 진정한 자유를 실현하는 인류 역사의 궁극적 이상을 성취하기 위해서 가능한 한 빨리 축출되어야 한다.

불교 업설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 또는 인격의 기준을 그 무엇도 아닌 오직 인간의 행위(karma) 자체에 둠으로써 불합리한 것들의 개입을 차단하고 인간 평등의 실현을 위한 토대를 마련한다.

초기경전은 다음과 같이 설한다.
태어남에 의해 천민〔領群特〕이 되는 것도 아니고, 태어남에 의해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업에 의해 천민이 있게 되고, 업에 의해 바라문이 있게 된다.
이것은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에 의해 귀천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행위와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 교단에 들어오는 사람들도 근본적인 차별이 있을 수 없고 모두가 평등하다. 석존은 이것을 바다의 비유를 통해 다음과 같이 설한다.

 

마치 갠지스 강, 야수나 강, 아찌라와띠 강, 사라부 강, 마히 강과 같은 큰 강들이 바다에 모여 들면 이전의 이름을 잃고 단지 바다라는 이름을 얻는 것과 같이 四姓도 여래가 가르친 法과 律을 따라 출가하면 이전의 종성을 버리고 똑같이 釋子(석가세존의 자식)라고 불린다.

인간의 가치는 권력이나 재력, 가문이나 직업 등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업설에 따르면,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위해 남에게 악을 행하여 괴롭히거나 피해를 주고 무례하게 구는 사람은 가치가 없는 천한 사람이며, 부지런히 선을 행하여 나와 남을 이롭게 하고 선행을 자랑하거나 과시하지도 않으면서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사람은 가치 있는 귀한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게, 자율적으로 선 또는 악을 선택하고 행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평등하다. 따라서 불교 업설은 인간 평등의 원리적 토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석존이 불교 업설에 근거하여 당시 인도 사회의 사성계급제도를 비판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3. ‘자유와 책임’의 민주주의 원리
민주주의는 인류가 일구어 낸 역사의 아름다운 꽃이다. 민주주의는 역사의 당연한 귀결이며, 국민은 국가의 주인이기에 국민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보장되어야 하고 책임과 의무는 존중되어야 한다. 물론 다수결의 원리 때문에 민주주의는 우민 정치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최선이 아니라는 비판도 있지만, 민주주의는 아직까지는 그 대안이 없는, 적어도 차선의 정치제도라 할 만하다.

일찍이 막스 베버는 불교의 업설은 영원히 사회에 대한 비판정신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인권사상의 발전에 방해가 되며, 인간의 공동의 권리라든가 공동의 의무를 문제 삼지 않으며 국가라든가 시민과 같은 개념을 발생시키지도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말은 결국 불교는 어떠한 정치적 사회적 목표를 내세우지 않으며, 동시에 민주주의와 무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분명 막스 베버의 실수라고 생각한다. 실수는 원천적으로 베버가 불교 업설을 지극히 개인적인 숙명론으로 오해한 데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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