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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8월>

    해탈과 성불

    종범스님

    불교를 믿는 목적으로 해탈(解脫)과 성불(成佛)을 이야기 한다.
    그렇다면 해탈이란 무엇이고 성불이란 무엇일까?

    해탈이라는 말과 성불이라는 말은 불교의 오랜 역사에서 비롯되었다.
    해탈은 남방불교인 소승불교에서의 목적이며 성불은 북방불교인 대승불교에서의 목적이다.
    해탈과 성불의 차이점을 보기 위해서는 해탈 이전의 문제, 즉 성불 이전의 문제를 보아야 한다.

    왜 해탈을 해야 되는가 하는 것이다. 해탈이라는 것은 윤회로부터의 해탈이다.
    윤회라는 것은 속박이고 얽힘이다. 집착에 얽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탈이라는 것은 무소착(無所着) 즉 집착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해탈하기전의 윤회의 과정은 인과의 과정에서 살아가고 있는 세계이다.
    그런데 윤회의 세계 중에서 가장 좋은 세계는 천상(天上)이다.
    그래서 세속적인 불교의 목적중의 하나가 바로 생천(生天) 즉 천상에 나는 것이다.

     

    초기불교의 목표는 재가불자들은 내생에 생천하는 것이고 출가한 비구, 비구니는 해탈하는 것이었다.
    요즘은 생천이라는 말보다 극락왕생(極樂往生)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대승에서 비롯된 것이다.
    육도를 윤회함에 있어 좋은 일을 많이 하면 육도 중 가장 좋다는 천상에 나게 되고,
    나쁜 일을 많이 하면 육도 중 가장 나쁘다는 지옥에 나게 되는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것이 모두 바깥으로부터 온다는데 있다.
    바깥 환경으로부터 얻어진다는 것이다.
    내가 좋은 환경을 맞이하기 위해서 노력하면 좋은 환경이 온다.
    그러나 이것은 바깥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다시 바깥으로 가게 되어있다.
    이것이 무상이다 유루법(有漏法)이라고도 하는데 새는 그릇에 아무리 물을 가득 채워놓아도 새어서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윤회이며 인과이며 중생세계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을 보고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발견한 것이 해탈이다.

    이런 것은 부처님 이전에도 다 있었다.
    가장높은 곳인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에 태어나셨지만 그 세계도 완전치 못함을 알고 내려오셔서 다시 정진하여 해탈을 얻으신 것이다. 해탈은 풀려난다는 말이다.
    지옥에 가는 것도, 천상에 가는 것도, 좋은 것도 그만두고, 나쁜 것도 그만두고 일체의 것에서 끝나는 것이다.
    그것을 적멸이라 하고 이것을 해탈이라 한다. 초기경전에서 해탈을 네 구절로 묶어둔 내용이 있는데,
    ‘아생이진(我生已盡)이라, 나의 태어남은 끝났다.’
    ‘범행이립(梵行已立)이라, 내가 할 일은 다 했다.’
    ‘소작이작(所作已作)이라, 내가 만들어야 할 것은 다 만들었다.’
    ‘불수후유(不受後有)라, 다시는 내생을 받지 않는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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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8월>

      업보윤회설, 그 오해와 진실7

    넷째, 석존은 제자들에게 나쁜 결과를 방지하기 위해서 ‘조심하고 주의하라’고 늘 가르친다는 점이다. 석존 재세시에, 어느 날 투라난타 비구니가 실수로 디딜방아의 공이를 건드려 잠자던 아이를 죽게 했을 때, 석존은 그것이 고의가 아닌 것을 알고 바라이죄로 단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라이죄가 아니라고 했다 해서 그것을 ‘일반적인 죄에서도 자유롭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교단 내의 행동 규범과 일반 사회의 법이 일치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석존은 투라난타에게 “그러나 남의 방아 공이를 함부로 건드리지 말아라”는 주의를 주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주의 의무’에 상응하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의 현행 형법에서는 고의범보다는 가볍지만 과실범에게도 ‘주의 의무 위반(Verletzung der Sorgfaltspflicht)’이라는 죄목으로 처벌을 내리고 있으며, 업무상과실범에게는 더 무거운 처벌을 내리고 있는데, 이것이 석존의 뜻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Ⅴ. 인과응보의 심리적 해석
    甲이 형편이 어려운 乙을 도와주었는데 을이 훗날 성공하여 갑에게 은혜를 갚았다든가, 병이 정을 구타하였는데 정에게 다시 구타당했다든가, 누군가가 도둑질하다가 붙잡혀 감옥에 갔다든가 하는 것은 모두 인과응보의 구체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운명은 이러한 구체적인 개별 행위에 의한 인과응보에 의해 규정되기도 하지만, 선업이나 악업의 축적에 의해 형성된 성격과 인격에 의해 규정되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전자의 경우를 기계물리적 인과응보라 한다면 후자의 경우는 생물화학적 인과응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木村泰賢은 전자를 업의 반동적 현현이라 부르고, 후자를 업의 능동적 현현이라 부른다. 그는 업의 능동적 현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慈善心에 의해 보시를 행한다고 하자.
    이 결과로서 자기의 성격이 점점 유연하게 되고,

     

    드디어 자선 박애의 사람, 더 나아가 절대적 愛他心의 권화인 보살로까지 재생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업의)능동적 방면의 현현이고 소위 同類因果에 속하는 것이다. …(중략)… 생각컨대 우리들의 세계는 결국 우리의 성격이 만든 것이라고 보는 것이 석존의 眞諦的 견지일 것이다.

    사람의 성격과 인격은 (유전자 등에 의해) 선천적으로 규정되기도 하지만,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바뀌기도 한다. 업의 창조적 역동성과 가변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업설은 숙명론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며, 이것은 불교가 아니다.

    현대인들에게는 (기계물리적인)윤리학적 인과응보보다 (생물화학적인)심리학적 인과응보가 더 설득력이 있을 수 있다. 업과 윤회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는 미래 불교학의 주요 과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심리학적 해석의 하나로 양심에 입각한 인과응보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겉으로 보아, 선을 행한 사람이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받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만족하고 행복해 한다면 이 역시 인과응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악을 행한 사람이 외견상 성공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마음속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괴로워한다면 이 역시 인과응보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양심의 감도가 다르다는 점에서 반론이 제기 수도 있겠지만, 악을 행하고 법망을 피해 도망 다니는 죄인의 마음이 결코 평안하고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상식적이고 일반론적으로 볼 때, 이러한 심리적 인과응보의 현상을 부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근래 우리 사회에는 명상에 관한 관심이 늘어가고 있다. 종교를 떠나 직접 명상 수행하는 사람들도 꾸준한 증가 추세다. 그것은 절대 빈곤을 극복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관, 인생관이 ‘물질’에서 ‘마음’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사람들은 이제 마음의 평화가 행복이자 성공이고, 마음의 고통이 불행이자 실패라는 것을 깨달아 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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