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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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육

<2020년><6월>

불교의 무아설과 융의 자기실현 비교고찰4

예로 안근(眼根)을 눈(眼)과 시신경과 두뇌피질의 시각영역 중 어디까지로 봐야하며, 안식(眼識)은 두뇌피질의 시각 신경군과 여기서 나오는 정보를 처리하여 사물의 형태와 색갈을 판별하고 그려내는 정보처리 영역이 신경집합의 어디에 의지하고 있는지 명확하지 않다. 그러므로 오근은 지각 기능 중 생리적 기관에 대응하고, 오식은 생리적 정보의 처리 해석 구상 기능에 대응한다고 대체적 구분을 할 수 있으나 엄밀한 해부 조직학적 분리는 어렵다.
전5식의 각각과 제6식인 의식(意識)의 관계도 엄격한 생리현상적 구분은 어렵다. 의식은 두뇌의 정보처리능력인 기억, 분별, 계산, 상상과 감정과 의지 등을 포함하고 있는데 5식의 작용도 정보처리 과정이 주요 작용이므로 기능 면에서 유사하며, 두뇌의 신경 구조면에서 6식과 전5식의 영역 구분이 명료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두뇌 피질에서 언어 영역과 시각 영역이 다른 점이 확실하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분리가 확실하지만, 언어와 시각의 종합 영역등 두뇌의 복잡한 기능까지 고려하면 상호 겹침 때문에 명확한 분리가 어렵다. 이에 6식의 각각이 독립된 주체인가 아니면 별개의 주체들이 모인 집합체인가의 문제가 유식불교 이전부터 제기되었었다. (팔식체일(八識體一),팔식체별(八識體別)의 문제) 유식불교에서 호법(護法) 계열에서는 독립된 8식의 입장을 명확히 하고 있다11).

현대 인지과학에서도 유사한 문제가 제기되어 왔으며, 민스키 등이 제안한 사회로서의 마음은 호법의 학설과 상통한다고 하겠다.
제6식은 지(知) 정(情) 의(意)라는 일상적 정신활동을 총칭하는 것으로 부파불교에서는 제6식까지만 마음의 세계로 인정했다. 부파불교의 무아론은 5온(색수상행식)의 각 요소에 영속불변의 주체가 없다는 설로서 마지막 요소인 식(識)에 주체가 없음은 곧 6식 각각에 아트만이 없다는 뜻으로 보았다. 이때 제기되는 문제점은 윤회는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며, 이에 대해서 부파불교는 ‘업’의 인과적 연속성으로 답하였다.
이러한 답은 인식과 업의 윤회 사이에 밀접한 관련을 맺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다. 개인의 인식 활동과 업의 윤회가 독립된 측면으로 기술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아트만적 인식 주체가 없는데, 우리의 일상 의식을 주관하는 경험적 주체의식은 어디서 나오는가 하는 문제를 답하지 않는 점이다. 경험적 인식 주체의 기원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유식불교에서 제7식을 도입하는 소이이다. 제7식은 말나식(末那識:manas)이라 부르며, 사량식(思量識)이라고도 한다. ‘나’라는 아(我)의식의 경험적 주체의식은 제7식이 다음에 나오는 아라야식을 상분(相分)즉 대상으로 집착함과 동시에 견분(見分)을 자아라고 착각하여 상일주재(常一主宰)하는 나의 실체라고 사량집착한다. 말나식은 오염된 식으로 생존본능이 강한 자아의식으로 4가지 근본적 번뇌의 뿌리이다. 아치(我癡: 미무아지리(迷無我之理), 아견(我見:망집아지오견(忘執我之惡見), 아만(我慢:어소집아상거오(於所執我上踞傲), 아애(我愛:탐착어소집지아(貪着於所執之我)라는 번뇌가 항상 따른다. 여기서 아의식의 시간적 연속성이 특징이며, 생사를 넘어 상속된다고 본다. 그러므로 말나식은 개체의 신체적 사멸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이어지는 의식이며, 찰나생 찰나멸하는 제6의식과는 달리 간단없이 연속된다12).
그러므로 말나식은 프로이드적 정신분석학의 무의식에 속한다고 볼수 있으며, 융의 개인무의식에 대응한다고 볼 수 있다. 제8식은 아라야식(阿賴耶識)이라 부르며 유식불교의 핵심적 식이며 무아설과 윤회설의 조화를 인식론적 관점에서 이루는 관건이다. 아라야식은 장식(藏識)이라 하여 능장(能藏), 소장(所藏), 집장(執藏)의 세 가지 뜻을 갖는다. 아라야식의 특성은 세친의 ‘유식3십송’에 의하며, 김동화의 「유식철학」에 상세한 해설이 있다13). 능장의 의미는 일체 현상의 업을 종자로 함장한다는 뜻으로 갈무리하는 주체란 뜻이고, 소장의 의미는 종자가 갈무리되는 처소의 뜻으로 수동적 의미가 있으며, 집장의 의미는 제7말나식이 아라야식을 집착하여 아트만적 주체라고 믿고 집착한다는 뜻이다. 아라야식은 그 보는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 명칭을 갖는다. 제7말나식이 집착하여 아집의 영속적 주체로 착각하고 있을 때를 아라야식(Alaya)라 하고, 선악 업보의 과보가 이루어지는 곳이란 의미에서는 이숙식(異熟識)이라 하고, 일체의 종자를 집지(執持)하고 있다는 의미에서는 아타나식(阿陀那識)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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