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활동

인연의 교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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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6월>


참회의식<보살오법참회문>

(1) 참회
(법사)
시방 삼세의 부처님께서는 다섯 가지 눈으로 세간을 비추어 보시어, 저희들의 진여 본성과 인연 따라 나타난 모습과 살아가는 모습 그 어느 것 하나 모르시는 것이 없으며, 저희들이 지은 죄와 복을 환하게 다 아십니다.

(대중)
제자 0 0 0 는 헤아릴 수 없는 겁을 살아오면서 선지식을 만나지 못해 많은 죄를 지었사오며, 계를 지키지 못하고 무거운 죄를 범했나이다. 불법을 헐뜯고, 착한 삶을 살지 못하여 불성을 잃고 일천제의 인연을 구족하였으나 다행히 이생에서 불법승 삼보를 만나 여러 죄를 없앨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제자는 머리 조아려 예경하며 원하옵나니 ,모든 악의 구름을 제거하고, 위없는 지혜를 일으키도록 하여지이다.
<참회를 마치고 五體作禮>

(2) 청불
(법사)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이루시기 위해 처음 보리도량에 나아가실 때, 진리에 미혹하여 늙고 죽는 괴로움을 되풀이하며 무명의 긴 밤을 살아가는 중생들을 가엽게 보시고, ‘모든 질병과 고통으로부터 중생을 구원하는 법의 약을 베풀어, 메마른 중생들에게 법의 비를 두루 내려주리라’ 자비의 원을 세워 진리를 환하게 깨달으셨습니다.

(대중)
온 누리에 지금 계시는 부처님께서는 인연 있는 중생들은 이미 제도하시었으나 중생들이 대부분 게으르고 나태해서 방편으로 열반을 보이셨을 뿐 지금도 이곳에 저희들과 함께 머무시옵니다. 제자가 부처님께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청하옵니다. 부처님, 오래 오래 머무옵소서.
일체의 보살들이 위없이 높은 뜻을 일으켜 열심히 정진하여 부처 없는 세계에서 등정각을 이루어 널리 여러 중생들을 제도하고자 하는 원을 세웠으나 자애로움이 어찌 부처님만 하겠나이까? 그러므로 지심으로 청하옵니다. 부처님, 오래 오래 머무옵소서.
<청불을 마치고 頭面作禮>

(3) 수희
(법사)
다른 사람 이득 보면 심장에 살 맞은 듯, 다른 사람 행복하면 두 눈에 못 박힌 듯, 여러 세상 거치면서 시기하고 질투하며, 아만이 가득하고 사납고 어리석은 이 모든 죄의 업장은 삼악도에 떨어져서 부처님을 뵈올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임을 오늘 이 자리에서 한 마음 깨달아 이제부터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나의 행복으로 크게 기뻐하는 대수희심을 일으키도록 합시다.

(대중)
시방 삼세의 부처님과 한량 없는 그 제자들이 처음 한 생각을 일으켜 깨달음을 이루는 날까지 사방에 평등하게 보시하면서 청정하게 금계를 지키고, 선정과 지혜와 해탈과 무량한 지견을 얻는 것을 제자는 따라서 기뻐하리니 지혜로운 마음은 밝게 빛나고, 어둡고 미련한 마음 소멸되어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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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6월>

    불교의 무아설과 융의 자기실현 비교고찰6

자기실현은 개성화이며 자아의 성숙을 의미한다. "자아성숙의 궁극적 목표가 페르조나가 아니라는 자각으로 나의 사명과 집단 정신을 구별하되 사회적 의무와 규범의 필요성을 자기의 전개성(全個性)에 합치되는 범위에서 인정하며, 때로는 능동적으로 사회에 참여하며, 때로는 여기서 물러나 안의 세계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다" 고 이부영은 기술한 바 있다. 17)
자아의식이 페르조나에 집착하여 사회적 역할에만 고착되고 무의식의 세계와의 단절이 일어나면 정신적 불균형에서 위기가 도래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개인이 무의식 세계와의 통합을 추구하고 균형있는 정신의 성숙을 위해서는 무의식을 의식화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런데 무의식의 내용을 알아 가는 과정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자아이다. 자기실현의 성패와 수준은 개체의 자아의 태도에 달려있다. 자아가 무의식에 관심을 두고, 무의식이 꿈 등 상징을 통해서 제시하는 의미를 이해하여 전일성을 회복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나 자아가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일은 유한한 작업이 아니다. 무의식은 무한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실현은 무의식을 전부 의식화하여 완전해지는 것이(Vollkommenheit) 아니라 비교적 온전해지는 것이(Vollstandigkeit)라 한다. 18)

Ⅵ. 불교의 무아설과 융의 자기실현
불교의 무아설을 종교적 측면, 역사적 측면, 문화적 측면 등 다양한 방법으로 고찰할 수 있는데 본 논문에서는 무아설을 논리적 측면, 존재론적 측면, 인식론적 측면에서 종합 검토하였다. 이 장에서는 아트만의 실체론적 존재론이 갖는 논리적 모순점을 초월적으로 해결을 시도하는 우파니샤드의 관점을 간략히 살펴봄으로써 다음에 이어지는 불교적 관점들과 대비하였다.
아트만설은 윤회사상의 가장 단순한 해결책이지만 불변적 존재의 논리적 난제를 낳는데 우파니샤드는 이러한 철학적 문제를 종교적 초월로 회피하였다. 반면에 불교는 무아설을 주장함으로써 윤회사상과의 정합적 이론체계 구성이라는 과제를 앉게 된다.
이의 해결을 위한 존재론적, 인식론적 추구가 불교철학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에서는 아트만 사상에 영향을 받아 인무아(人舞我)사상의 존재론적 논의가 주류를 이루었다. 존재론적 실체의 부정은 연기(緣起) 사상으로 해명하였으며, 존재론적 범주인 오온(五蘊)을 도입하고 각각에 존재론적 실체가 없음을 제시함으로써 무아설을 입증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론적 실체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경험적 주체의 존재와 윤회는 무아설과 논리적으로 대립이 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업(業)에 의한 윤회인 업감연기(業感緣起)설을 발달시켰다. 존재론적 무아설이 윤회문제 해결을 위하여 업감연기설을 제안하였으나 윤회주체가 사멸 재생할 때 업의 연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관한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으며 이에 인식론적 과제로 되었다. 이에 부파불교의 6식에 제7식과 제8식이 추가되어 심층심리의 연구가 유식불교의 주요 업적이 되었다. 제8식인 아라야식은 인식주체뿐만 아니라 일체의 기세간이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임을 주장하였고, 이에 윤회는 아라야식의 깊은 바다에 파도가 생겨났다 다시 사라짐을 반복하는 것으로 비유되었다.
무아설과 윤회의 정합적 이해를 위한 철학적 노력이 결과적으로 심리학적 측면이 강조되는 인식론적 논의로 이어졌다. 이에 유식 불교의 무아설은 현대심리학중 심층심리를 다루는 정신분석학 및 분석심리학과 상호 비교가 요청된다.
유식불교와 분석치료의 심리학적 비교 시론은 최동훈과 이부영이 일찍이 시도한 바 있으며, 이죽내 교수는 불교유식학과 정신 개념의 대비 등 일련의 연구를 했다. 필자는 융의 원형과 아라야식의 종자설을 비교하여 유사점과 상이점을 논한 바 있으며, 본고에서는 불교의 무아설과 융의 자기 실현을 비교 고찰 하고자 한다.
유식불교의 무아설은 5위 100법으로 분류되는 일체의 현상에 영속적이고 불변부동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존재가 없다는 형이상학적 실재의 부정이다. 이 주장은 정신(心法)뿐만 아니라 물질까지(色法) 포함하는 광범위한 점이 분석심리학의 정신세계에 국한된 점과 차이가 있다.
이제 무아설을 정신에 국한하기로 하고 심식(心識)에 한정하면 감각의 5식과 제6의식, 제7말나식, 제8아라야식에 관한 무아설로서, 영원한 불생불멸의 개체인 아트만의 존재를 부정하며, 인식주체로서의 절대적 개체가 없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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