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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6월>

    불교의 무아설과 융의 자기실현 비교고찰5

아라야식은 부파불교의 업 사상과 식 사상을 결합하였다. 일체의 행위가 종자가 되어 아라야식에 함장된 후 연을 만나면 현현하여 과보로 나타난다고 본다. 본 논고의 무아설과 관련하여 보면, 아라야식은 아트만과 같은 영속 불변의 개체가 아니란 점이다. 아라야식은 일체의 기세계와 유정생명의 기반이 되는 근본식으로서 아라야식이 바다에 비유될 때 개체의 생명체는 파도 또는 물방울에 비유된다. 각 개인의 존재는 생노병사를 거듭할 뿐 그 안에 영속적 아트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개체의 생성과 사멸을 담지하는 것은 바다와 같은 아라야식인데, 이것에는 개체성이 없고 온 누리의 일체 현상이 해류와 같이 흐름을 이루고 있다. 이 흐름은 인과의 법칙에 따라 종자로 있다가 생명체로 생장을 하는 과정일 뿐 아집의 대상으로 착각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아라야식 사상은 불교의 무아사상과 윤회사상을 결합 조화시킨 대승불교의 인식론적 결정판이라 할수 있다.14)

Ⅴ. 분석심리학에서의 자아와 자기
융의 분석심리학에서는 마음의 구조를 크게 의식(意識)과 무의식(無意識)으로 나누고, 의식은 각 개인이 현재 인식활동을 하는 사고, 감정, 감각, 직관의 4가지 기본 기능을 포함한다.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는 섬과 바다에 비유되며, 자아(自我:Ego)는 의식의 중심을 이루는 콤플렉스이다. 의식은 자아와 심리적 내용의 관계를 유지시키는 기능이라 할 수 있으며, 의식은 항상 변하며 무의식과 내용을 주고받는데 그 중심이 자아라고 할 수 있다. 무의식은 자아가 의식하지 못하는 일체의 정신활동 또는 심리 현상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영역은 무한하여 국한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무의식은 개인 무의식(personliche unbusste)과 집단 무의식(kollective unbewusste)으로 나뉜다. 개인 무의식은 한 개인의 삶에서 체험한 내용 중 의식 밑으로 잠수해버린 것들로 성적욕망, 심리적 갈등, 희구, 괴로운 감정, 의식하지 못한 약한 지각 등이다. 집단 무의식은 한 개인의 삶을 넘어서 인류 보편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아라야식과 유사성이 있다. 특히 원형(原型:Archetype)은 신화의 근원이고 종교적 심성의 뿌리로서 역사와 문화, 인종과 지리적 차이를 뛰어넘어 인류보편의 원초적 심리유형이다.   

 

‘자아(自我 Ich,Ego)’는 의식이라는 유한한 심리영역의 중심이고, 여기에 대하여 의식과 무의식 전체 정신의 중심을 ’자기‘라고 한다. 경험적으로 인식되는 ’나‘라는 것은 우리의 정신의 일부인 의식의 중심일 뿐이다. 인간은 출생이후 자아 의식이 점차 분화 발달하는데, 중년에 이르면 의식에 대한 집착이 강해져서 무한히 넓은 무의식의 세계와 단절되는 위기를 맞을 수 있다15). 자아가 사회적 평가에 맞추어 만든 페르조나(persona)에만 집착하다보면 사회적 성숙기인 중년에 이르러 한쪽의 극단으로 치닫기 때문이다. 자아가 의식에만 매달리어 그를 뒤받치고 있는 더 넓은 무의식의 세계를 못 보게 되어 반쪽의 삶으로 균형을 상실하게 되어 난관을 맞게된다. 이러한 위기의 극복을 위해서는 자아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서 무의식 세계로 확충해 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자기(自己,Selbst)’는 의식과 무의식을 일관하여 전일성(全一性)을 갖는 개체성이며, 이것은 자아를 포함하며, 자아의 사회적 역할인 페르조나와, 자아의 무의식에 드리워진 그림자, 대극적 특성인 아니마, 아니무스 등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무한한 세계인 무의식에로 확충 발전해 간다. 이것은 반쪽으로 갇혀 살지 않고 전체가 되고자 하는 원초적인 기능이므로 융은 자기원형(自己原型, Archetypus des selbst)으로 이 개념을 도입했다.16)
자기는 한 개인으로 하여금 사회적 기대 역할인 페르조나 또는 자아의식에 고착된 기계적인 삶, 의식계에만 갇혀진 반쪽의 삶을 너머 전 생명력을 하나로 통합 분출하는 통일적이고 전체적인 정신을 회복하도록 한다. 이 전체성의 회복은 그러나 자신의 개성을 잃어버린다는 뜻이 아니고 진정한 의미의 개성(Individualitaet), 자신의 본성을 되찾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전일(全一)적 인간성이 어떤 일정한 형식으로 정의된 특정한 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독특성을 지닌 다양한 형태의 자기 고유의 모습이며, 동적으로 변화되어 가는 자기 원형이다.

무의식을 바다에 비유할 때 의식은 바다의 작은 섬에, 자아는 그 섬의 중심으로 비유되고 , 자기는 자아의 의식 한계를 넘어서 무의식까지 포함하는 전일성을 주는 원초적 가능성이다. ‘자기실현(自己實現)’은 이러한 가능성을 자아 의식이 받아들여 실천에 옮기는 능동적인 행위이다.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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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6월>


참회의식<보살오법참회문>

한 생각 수희하는 마음을 내니, 공덕은 시방세계 충만하옵고, 지혜는 부처님과 같아지이다.
<수희를 마치고 오체작례>

(4) 회향
(법사)
낳고 죽는 세계를 오고 가면서 태어나면 결국은 죽음이 오고, 존귀한 몸 언젠가는 천해집니다. 생각컨데 열반을 얻지 못해도 법신은 언제나 변함없이 청정하며 반야의 묘해탈을 구족했나니 이제부터 이 법신의 이익을 구하도록 합시다.

(대중)
지금까지 제가 지은 복업(福業) 있으면 이 모든 공덕을 모아 일체 모든 중생에게 보시하여 회향하고, 위없는 불도를 함께 성취 하오리다.
허공처럼 광대하고 분별없는 참지혜로 법계가 다하도록 금강 같은 공(空)의 지혜 변함없이 실현하여, 나라는 생각 없는 무행(無行)의 신통으로 중생 소원 있는 곳에 빠짐 없이 응하리다.
<회향을 마치고 두면작례>

(5) 발원
(법사)
지성스런 마음으로 큰 원을 세워 서원대로 불도를 실천합시다.

(대중)
지혜로운 마음은 사나운 바람같고, 선정의 힘은 금강같아지이다.
지금 이 회향을 마친 후에는 생각마다 자비로운 생각이 되고, 애착하는 생각을 버리고 떠나 환희로운 마음으로 일체 중생을 제도하리니, 몸과 수명을 버리고 떠날 때에는 부처님께서 광명을 내어 일체의 어려움을 없애주소서. 도솔천에 화생하여 자씨 미륵존불을 뵈옵고, 여러 가지 공덕상을 갖추며, 육근이 두루 총명하여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묘법을 듣고 곧바로 무생법인을 얻게 하소서. 모두가 불퇴전지에 머물어 대신통력을 타고 시방세계에 두루 돌아다니면서 일체의 부처님을 공양하고, 무량한 아름다운 음성으로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오리다. 갖가지 중생의 세계에 언제라도 몸을 나투어 태양처럼 세상을 비추어서 일체의 어두운 곳에 빠짐없이 밝은 등불이 되오리다. 불도를 얻어 법륜을 굴리고 열반을 보일지라도 중생들이 모두 성불하지 않으면 보현 문수의 원을 버리지 않겠나이다.
<발원을 마치고 洗心作禮>

 

쑷타니빠다의 행복의 경(독송용 게송)

분수에 알맞는 장소에 살고, 일찌기 공덕을 쌓아서, 스스로 바른 서원을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행복이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섬기고, 아내와 자식을 돌보고, 일을 함에 혼란스럽지 않은 것,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행복이옵니다
나누어주고 정의롭고, 친지를 보호하는 것과, 행동함에 비난받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행복이옵니다
악을 싫어하여 멀리하고, 술 마시는 것을 절제하고,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행복이옵니다
존경하는 것과 겸손한 것, 만족과 감사할 줄 아는 마음으로, 적당한 때에 가르침을 듣는 것, 이것이야말로 더없는 행복이옵니다
인내하고 온화한 마음으로, 수행자를 만나서, 적당한 때에 가르침을 논의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더없는 행복이옵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