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이제 십이연기와 관련하여 언급해야 할 문제가 사성제(四聖諦)입니다. 십이연기와 사성제는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이 사성제를 해석하는 방법에는 모두 네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생멸사제(生滅四諦)입니다. 이것은 대개 소승의 유부(有部)에서 주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법의 자성을 ‘있다[有]’라고 보기에 이 ‘있다’고 하는 관점에서 보면 제법은 생멸한다는
피상적인 관찰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래서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보지 못하고 고(苦) ° 집(集) ° 멸(滅) ° 도(道)의 사제를 순전히 생멸적으로 해석합니다. 둘째는 무생사제(無生四諦)입니다. 이것은 ‘생멸사제’의 반대로서 사제는 생(生)하지도 않고 멸(滅)하지도 않는다는 해석입니다. 대승불교 가운데 반야경(般若經)이나 삼론종(三論宗)의 공사상(空思想)에 근거하여 주장한 해석입니다. 공사상에서 볼 때는 사제란 생멸하는 것이 아니라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것이라 합니다. 셋째는 무량사제(無量四諦)입니다.이것은 보살승(菩薩乘)에서 주장하는 것입니다. 보살이란 육도만행(六途萬行)을 근본으로 삼고 행동을 강조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견해는 육도만행을 하듯이 모든 것이 다 한이 없고 끝이 없다[無量無邊]는 견지에서 사제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문․연각은 이 무량사제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넷째는 무작사제(無作四諦)입니다.
이것은 주로 『법화경』을 받드는 일승원교(一乘圓敎)의 해석입니다. 여기서는 사제를 생멸(生滅)°무생(無生)°무량(無量)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생멸하는 당체(當體)가 그대로 실상(實相)이라는것입니다. 곧 생사(生死)가 열반(涅槃)이며 번뇌(煩惱)가 보리(菩提)이므로, 끊어야 할 고(苦)도 집(集)도 없고 닦고 증득해야 할 멸(滅)도 도(道)도 없으므로 어떤 인위적인 지음도 요청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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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일체의 변견이나 사견(邪見)이나 할 것 없이 전체가 다 중도 아닌 것이 없으니 부처와 마구니가 한계선이 없어지고 화합하는 때입니다. 이것이 원융무애한 중도사제(中道四諦)입니다.
원래 사제(四諦)는 자세히 알고 보면 십이연기와 별개의 도리가 아닙니다. 사제 중에서 괴로움을 말하는 고제(苦諦)와 괴로움이 생기는 것을 뜻하는집제(集諦)는 괴로움이 생기는 과정을 말하므로 십이연기의 순관(順觀)에 해당합니다.
또 사제에서 괴로움이 멸하는 멸제(滅諦)와 그 멸하는 길을 말하는 도제(道諦)는 괴로움이 소멸하는 과정을 말하므로 십이연기의 역관(逆觀)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십이연기와 사제는 서로 대등한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이연기가 존재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고 법계 연기이고 보면, 사제 역시 생멸적인 사제만으로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태대사나 현수대사가 아함경을 소승으로 취급하여 아함의 연기를 생멸연기로 해석하고, 아함의 사제도 생멸사제로
간주한 것은 결단코 잘못된 것입니다.
부처님은 중도를 정등각했다고 선언하였는데, 중도가 즉 연기이며, 연기가 즉 법성이며, 법성이 즉 법계이며, 법계가 즉 사제입니다. 이것은 전체가 다 동체이명(同體異名)입니다. 중도 하나를 가지고 이렇게도 표현하고 저렇게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법실상이라든가 법계연기라든가 그 모두가 법계 ° 연기 ° 법성 이것을 벗어나서 더 묘한 이론은 없습니다.
따라서 부처님이 설명하신 근본불법은 제법실상과 법계연기를 주장하는 천태 ° 화엄과 같은 일승원교의 입장이지 절대로 소승의 생멸변견적(生滅邊見的)인
불교는 아닙니다.
일승도(一乘道)라고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흔히 이것은 대승불교에서만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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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에서 ‘시방 국토 가운데 오직 일승법이 있으니 모든 부처님의 방편설은 제외한다’라고 설하시어, 부처님의 근본 뜻은 일승(一乘)에 있음을 천명하셨습니다. 때로는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의 이승(二乘)도 말하고, 때로는 이승에 보살(菩薩)을 더한 삼승(三乘)도 말씀하지만 그것은 방편이며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이유에서 삼승을 말씀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첫째 성문승(聲聞乘)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지만, 항상 생멸(生滅)의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성제(四聖諦)를 설할 때도 생멸적인 관점에 서서 해석하며, 열반을 증득해도 유여열반(有餘涅槃)이요 무여열반(無餘涅槃)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둘째는 연각승(緣覺乘)입니다. 스스로 인연을 관찰하여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인연을 관해도 생멸적인 변견으로 관하는 것이지 중도 정견(中道正見)으로 바로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역시 무여열반을 성취하지 못합니다. 셋째는 보살승(菩薩乘)입니다. 성문과 연각승은 순전히 자기의 이익[自利]에만 치우쳐 혼자 가만히 앉아서 자기의 해탈만 추구하여 모든 것이 다 소극적입니다. 이에 반(反)하여 보살은 자신의 이익[自利]보다 타인의 이익[利他]이 근본이 되어서 남을 위해서는 나의 해탈은 그만두고 지옥을 하루에 천번 만번 가도 좋다고 하는 대보리심을 내어서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의 육바라밀을 비롯한 수많은 수행[六度萬行]을 닦습니다. 일체 중생을 위해서 무량한 아승지겁 동안 육도만행을 닦으며, 한없는 세월 동안 중생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남을 위해서
남을 도우며 살면서 마침내는 무상정각을 이룹니다. 이러한 사람을 보살승이라고 하며, 이승과는 달리 유여열반이 아닌 무여열반을 증득합니다. 그러면 부처님의 근본 관점은 어느 곳에 있느냐 하면 성문승도 연각승도 보살승도 아닌 오직 일승(一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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