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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2월>

붓다의 근본교리(중도실상)

연기의 가르침, 이해하기(학습과제)-성철스님3

 

그리고 이제 십이연기와 관련하여 언급해야 할 문제가 사성제(四聖諦)입니다. 십이연기와 사성제는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이 사성제를 해석하는 방법에는 모두 네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생멸사제(生滅四諦)입니다. 이것은 대개 소승의 유부(有部)에서 주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법의 자성을 ‘있다[有]’라고 보기에 이 ‘있다’고 하는 관점에서 보면 제법은 생멸한다는 피상적인 관찰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래서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보지 못하고 고(苦) ° 집(集) ° 멸(滅) ° 도(道)의 사제를 순전히 생멸적으로 해석합니다. 둘째는 무생사제(無生四諦)입니다. 이것은 ‘생멸사제’의 반대로서 사제는 생(生)하지도 않고 멸(滅)하지도 않는다는 해석입니다. 대승불교 가운데 반야경(般若經)이나 삼론종(三論宗)의 공사상(空思想)에 근거하여 주장한 해석입니다. 공사상에서 볼 때는 사제란 생멸하는 것이 아니라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것이라 합니다. 셋째는 무량사제(無量四諦)입니다.이것은 보살승(菩薩乘)에서 주장하는 것입니다. 보살이란 육도만행(六途萬行)을 근본으로 삼고 행동을 강조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견해는 육도만행을 하듯이 모든 것이 다 한이 없고 끝이 없다[無量無邊]는 견지에서 사제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문․연각은 이 무량사제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넷째는 무작사제(無作四諦)입니다.

이것은 주로 『법화경』을 받드는 일승원교(一乘圓敎)의 해석입니다. 여기서는 사제를 생멸(生滅)°무생(無生)°무량(無量)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생멸하는 당체(當體)가 그대로 실상(實相)이라는것입니다. 곧 생사(生死)가 열반(涅槃)이며 번뇌(煩惱)가 보리(菩提)이므로, 끊어야 할 고(苦)도 집(集)도 없고 닦고 증득해야 할 멸(滅)도 도(道)도 없으므로 어떤 인위적인 지음도 요청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변견이나 사견(邪見)이나 할 것 없이 전체가 다 중도 아닌 것이 없으니 부처와 마구니가 한계선이 없어지고 화합하는 때입니다. 이것이 원융무애한 중도사제(中道四諦)입니다.

원래 사제(四諦)는 자세히 알고 보면 십이연기와 별개의 도리가 아닙니다. 사제 중에서 괴로움을 말하는 고제(苦諦)와 괴로움이 생기는 것을 뜻하는집제(集諦)는 괴로움이 생기는 과정을 말하므로 십이연기의 순관(順觀)에 해당합니다.
또 사제에서 괴로움이 멸하는 멸제(滅諦)와 그 멸하는 길을 말하는 도제(道諦)는 괴로움이 소멸하는 과정을 말하므로 십이연기의 역관(逆觀)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십이연기와 사제는 서로 대등한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이연기가 존재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고 법계 연기이고 보면, 사제 역시 생멸적인 사제만으로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태대사나 현수대사가 아함경을 소승으로 취급하여 아함의 연기를 생멸연기로 해석하고, 아함의 사제도 생멸사제로 간주한 것은 결단코 잘못된 것입니다.
부처님은 중도를 정등각했다고 선언하였는데, 중도가 즉 연기이며, 연기가 즉 법성이며, 법성이 즉 법계이며, 법계가 즉 사제입니다. 이것은 전체가 다 동체이명(同體異名)입니다. 중도 하나를 가지고 이렇게도 표현하고 저렇게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법실상이라든가 법계연기라든가 그 모두가 법계 ° 연기 ° 법성 이것을 벗어나서 더 묘한 이론은 없습니다.
따라서 부처님이 설명하신 근본불법은 제법실상과 법계연기를 주장하는 천태 ° 화엄과 같은 일승원교의 입장이지 절대로 소승의 생멸변견적(生滅邊見的)인 불교는 아닙니다.

일승도(一乘道)라고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흔히 이것은 대승불교에서만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법화경에서 ‘시방 국토 가운데 오직 일승법이 있으니 모든 부처님의 방편설은 제외한다’라고 설하시어, 부처님의 근본 뜻은 일승(一乘)에 있음을 천명하셨습니다. 때로는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의 이승(二乘)도 말하고, 때로는 이승에 보살(菩薩)을 더한 삼승(三乘)도 말씀하지만 그것은 방편이며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이유에서 삼승을 말씀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첫째 성문승(聲聞乘)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지만, 항상 생멸(生滅)의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성제(四聖諦)를 설할 때도 생멸적인 관점에 서서 해석하며, 열반을 증득해도 유여열반(有餘涅槃)이요 무여열반(無餘涅槃)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둘째는 연각승(緣覺乘)입니다. 스스로 인연을 관찰하여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인연을 관해도 생멸적인 변견으로 관하는 것이지 중도 정견(中道正見)으로 바로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역시 무여열반을 성취하지 못합니다. 셋째는 보살승(菩薩乘)입니다. 성문과 연각승은 순전히 자기의 이익[自利]에만 치우쳐 혼자 가만히 앉아서 자기의 해탈만 추구하여 모든 것이 다 소극적입니다. 이에 반(反)하여 보살은 자신의 이익[自利]보다 타인의 이익[利他]이 근본이 되어서 남을 위해서는 나의 해탈은 그만두고 지옥을 하루에 천번 만번 가도 좋다고 하는 대보리심을 내어서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의 육바라밀을 비롯한 수많은 수행[六度萬行]을 닦습니다. 일체 중생을 위해서 무량한 아승지겁 동안 육도만행을 닦으며, 한없는 세월 동안 중생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남을 위해서 남을 도우며 살면서 마침내는 무상정각을 이룹니다. 이러한 사람을 보살승이라고 하며, 이승과는 달리 유여열반이 아닌 무여열반을 증득합니다. 그러면 부처님의 근본 관점은 어느 곳에 있느냐 하면 성문승도 연각승도 보살승도 아닌 오직 일승(一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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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2월>

붓다의 근본교리(중도실상)

연기의 가르침, 이해하기(학습과제)-성철스님4

 

일승(一乘), 일불승(一佛乘)이란 진여법계를 지금 바로 깨치는 것입니다. 곧 중도만 정등각하면 진여법계가 그대로 현전하므로 중도를 정등각해서 법계를 그대로 바로 보는이것을 일승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일승은 중도를 내용으로 한 진여법계를 깨치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불법을 성취함에 있어서는 오직 중도를 바로 깨쳐서 진여법계를 바로 증득하면 화장세계에서 임의자재하게 생활할 수 있게 되니 이것이 바로 곧은 길[直路]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부처님 당시에 모든 제자들이 부처님의 법문 끝에 바로 깨쳐서 중도를 증득했지 무슨 다른 길을 빙빙 돌아서 공부를 성취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본래 바른 길, 즉 지름길로 가서 부처님 법문을 깨치고 불법을 성취했지 무슨 육도만행을 닦아 성불한다든지 삼아승지겁 동안을 닦아야 한다든지 하는 얘기는 근본 원시경전에는 없는 말입니다. 진여법계로 바로 들어가는 이것이 일승입니다.

그러면 왜 삼승을 설하였는가? 소승불교에서는  순전히 자리에만 치중하고 이타는 행하지 않았다고 대승에서 주장합니다. 이타가 없기 때문에 소승의 자리적인 편견을 부수기 위해서 이타의 육도만행을 강력히 주장한 것입니다. 이것이 보살승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도 중도일승(中道一乘)에서 볼 때는 일종의 방편이지 실지의 구경법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지°관(止觀), 정°혜(定慧)를 함께 닦아서 중도를 정등각하여 진여법계로 들어가면 그만이지 거기에서 보면 무슨 이승이니 삼승이니 하는 헛된 길[空路]은 없습니다. 원시경전에 부처님 제자들이 깨친 경로가 삼아승지겁이 걸린다고 하는 등의 수증(修證)의 점차(漸次)는 결코 보이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일승사상은 대승불교에서 크게 주장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 일승이라는 말이 반드시 대승경전에서 비로소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아함경(阿含經)에 일승도(一乘道)라는 형태로 드물기는 하지만 그 용례가 보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까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여러 비구들이여, 이 일승도(一乘道)가 있어서 중생을 청정하게 하고, 근심과 슬픔을 초월하여 괴로움과 걱정을 멸하며 바른 도리를 증득하여 열반을 증득하게 하니 이른바 사념처(四念處)니라. 어떤 것을 사념처라 하는가. 몸에서 몸[身]을 관하여 열심히 바르게 알고 바르게 상념하여 세간의 탐욕과 걱정을 조복하여 머무르며, 수(受)에서 수를 관하여 마음[心]에서 마음을 관하여 법(法)에서 법을 관하여 머무느니라. 여러 비구들이여, 이 일승도가 있어서 중생을 청정하게 하고 근심과 슬픔을 초월하며 괴로움과 걱정을 멸하고 바른 도리를 증득하여 열반을 증득하게 하니, 이른바 사념처니라.- 여기서 말하는 일승도(ekayana)란 신(身)°수(受)°심(心)°법(法)의 네 가지를 바로 알고 바로 생각[正知正念]한다는 것입니다.
즉 몸은 청정한 것이 아니며, 수는 즐겁지 못한 괴로움이고, 마음은 항상하지 않는 무상한 것이며, 법은 자성이 없는 무아(無我)라고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근본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설한 여러가지 수행법 가운데 사념주(四念住), 또는 사념처를 바로 일승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역(漢譯) 아함경에서는 이것을 다소 다르게 말합니다. 그 한역의 내용 일부를 인증해 보겠습니다.

어느 때 부처님은 비사리(毘舍離)의 미후연못[獼猴池] 곁에 있는 중각 강당에 계시었다. 존자 아난은 이차(離車)에게 말하였다. “여래응등정각(如來應等正覺)께서 알고 보는 바는, 타오르는 번뇌를 떠나 청정한 곳에 뛰어 나는 도를 세 가지 설하여, 일승도로써 중생을 정화하고 근심과 슬픔을 여의며 괴로움과 번뇌를 넘어 진여의 법을 얻게 한다. 무엇이 셋인가.

이와 같이 성스런 제자는 청정한 계율에 머무르니  또 이차여, 이와 같이 청정한 계율을 구족하면 탐욕 악 선하지 않은 법을 여의며 내지 제사선(第四禪)을 구족하여 머무른다. 또 삼매를 바르게 받아 지녀서 이 고성제(苦聖諦)에서 여실히 이를 알고, 고집성제(苦集聖諦), 고멸성제(苦滅聖諦), 고멸도적성제(苦滅道跡聖諦)에서 여실히 알고 구족한다. 이차여, 이것을 여래응등정각께서 알고 보는 바, 세 번째로 타오르는 번뇌를 떠나 청정한 곳에 뛰어나는 것을 설하여, 일승도로써 중생을 정화하고 괴로움과 번뇌를 여의며 근심과 슬픔을 멸하여 여실한 법을 얻게 한다고 이름하느니라.” - 이말은 외도의 제자인 이차(離車)에게 부처님의 제자인 아난존자가 대답한 것입니다. 즉 청정한 계율을 지키고, 사선 등의 선정을 구족하며 고집멸도의 사제를 숙지하면, 고난과 근심에서 벗어나 청정하게 되고 참다운 법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계율(戒律)과 선정(禪定), 사제(四諦) 등의 세 가지는 부처님이 중생들을 위하여 일승도로써 시설한 것이라고 봅니다. 한역 잡아함경에는 이 일승도라는 말 외에도 여실한 법을 의미하는 진여라는 말도 나오지만, 이 두 가지가 이에 상응하는 팔리巴利경전에는 없으므로 이 말들은 다소 후대에 삽입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승도는 비단 여기서뿐만 아니라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팔리어 경전에도 나오므로 결코 후대의 대승불교에서 비로소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 일승도라는 의미가 아함경과 대승경에서 똑같이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아함경에서는 일승도가 사념처라고 하는 등 삼승에 대하는 대승불교의 일승과는 거리감이 없지 않습니다.그러나 그 뜻이야 어찌 되었든 일승이라는 말도, 아뢰야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대승불교가 흥륭하기 이전의 근본불교에서부터 일찍이 사용되었다는 점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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