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승(一乘), 일불승(一佛乘)이란 진여법계를 지금 바로 깨치는 것입니다. 곧 중도만 정등각하면 진여법계가 그대로 현전하므로 중도를 정등각해서 법계를 그대로 바로 보는이것을 일승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일승은 중도를 내용으로 한 진여법계를 깨치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불법을 성취함에 있어서는 오직 중도를 바로 깨쳐서 진여법계를 바로 증득하면 화장세계에서 임의자재하게 생활할 수 있게 되니 이것이 바로 곧은 길[直路]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부처님 당시에 모든 제자들이 부처님의 법문 끝에 바로 깨쳐서 중도를 증득했지 무슨 다른 길을 빙빙 돌아서 공부를 성취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본래 바른 길, 즉 지름길로 가서 부처님 법문을 깨치고 불법을 성취했지 무슨 육도만행을
닦아 성불한다든지 삼아승지겁 동안을 닦아야 한다든지 하는 얘기는 근본 원시경전에는 없는 말입니다. 진여법계로 바로 들어가는 이것이 일승입니다.
그러면 왜 삼승을 설하였는가? 소승불교에서는 순전히 자리에만 치중하고 이타는 행하지 않았다고 대승에서 주장합니다. 이타가 없기 때문에 소승의 자리적인 편견을 부수기 위해서 이타의 육도만행을 강력히 주장한 것입니다. 이것이 보살승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도 중도일승(中道一乘)에서 볼 때는
일종의 방편이지 실지의 구경법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지°관(止觀), 정°혜(定慧)를 함께 닦아서 중도를 정등각하여 진여법계로 들어가면 그만이지 거기에서 보면 무슨 이승이니 삼승이니 하는 헛된 길[空路]은 없습니다. 원시경전에 부처님 제자들이 깨친 경로가 삼아승지겁이 걸린다고 하는 등의 수증(修證)의 점차(漸次)는 결코 보이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일승사상은 대승불교에서 크게 주장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 일승이라는 말이 반드시 대승경전에서 비로소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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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아함경(阿含經)에 일승도(一乘道)라는 형태로 드물기는 하지만 그 용례가 보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까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여러 비구들이여, 이 일승도(一乘道)가 있어서 중생을 청정하게 하고, 근심과 슬픔을 초월하여 괴로움과 걱정을 멸하며 바른 도리를 증득하여 열반을 증득하게 하니 이른바 사념처(四念處)니라. 어떤 것을 사념처라 하는가. 몸에서 몸[身]을 관하여 열심히 바르게 알고 바르게 상념하여 세간의 탐욕과 걱정을 조복하여 머무르며, 수(受)에서 수를 관하여 마음[心]에서 마음을 관하여 법(法)에서 법을 관하여 머무느니라. 여러 비구들이여, 이 일승도가 있어서 중생을 청정하게 하고 근심과 슬픔을 초월하며 괴로움과 걱정을 멸하고 바른 도리를 증득하여 열반을 증득하게 하니, 이른바 사념처니라.- 여기서 말하는 일승도(ekayana)란 신(身)°수(受)°심(心)°법(法)의 네 가지를 바로 알고 바로 생각[正知正念]한다는 것입니다. 즉 몸은 청정한 것이 아니며, 수는 즐겁지 못한 괴로움이고, 마음은 항상하지 않는 무상한 것이며, 법은 자성이 없는 무아(無我)라고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근본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설한 여러가지 수행법 가운데 사념주(四念住), 또는 사념처를 바로 일승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역(漢譯) 아함경에서는 이것을 다소 다르게 말합니다. 그 한역의 내용 일부를 인증해 보겠습니다.
어느 때 부처님은 비사리(毘舍離)의 미후연못[獼猴池] 곁에 있는 중각 강당에 계시었다. 존자 아난은 이차(離車)에게 말하였다. “여래응등정각(如來應等正覺)께서 알고 보는 바는, 타오르는 번뇌를 떠나 청정한 곳에 뛰어 나는 도를 세 가지 설하여, 일승도로써 중생을 정화하고 근심과 슬픔을 여의며 괴로움과 번뇌를 넘어 진여의 법을 얻게 한다. 무엇이 셋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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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성스런 제자는 청정한 계율에 머무르니 또 이차여, 이와 같이 청정한 계율을 구족하면 탐욕 악 선하지 않은 법을 여의며 내지 제사선(第四禪)을 구족하여 머무른다. 또 삼매를 바르게 받아 지녀서 이 고성제(苦聖諦)에서 여실히 이를 알고, 고집성제(苦集聖諦), 고멸성제(苦滅聖諦), 고멸도적성제(苦滅道跡聖諦)에서 여실히 알고 구족한다. 이차여, 이것을 여래응등정각께서 알고 보는 바, 세 번째로 타오르는 번뇌를 떠나 청정한 곳에 뛰어나는 것을 설하여, 일승도로써 중생을 정화하고 괴로움과 번뇌를 여의며 근심과 슬픔을 멸하여 여실한 법을 얻게 한다고 이름하느니라.” - 이말은 외도의 제자인 이차(離車)에게 부처님의 제자인 아난존자가 대답한 것입니다. 즉 청정한 계율을 지키고, 사선 등의 선정을 구족하며 고집멸도의 사제를 숙지하면, 고난과 근심에서 벗어나 청정하게 되고 참다운 법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계율(戒律)과 선정(禪定), 사제(四諦) 등의 세 가지는 부처님이 중생들을 위하여 일승도로써 시설한 것이라고 봅니다. 한역 잡아함경에는 이 일승도라는 말 외에도 여실한 법을 의미하는 진여라는 말도 나오지만, 이 두 가지가 이에 상응하는 팔리巴利경전에는 없으므로 이 말들은 다소 후대에 삽입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승도는 비단 여기서뿐만 아니라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팔리어 경전에도 나오므로 결코 후대의 대승불교에서 비로소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 일승도라는 의미가 아함경과 대승경에서 똑같이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아함경에서는 일승도가 사념처라고 하는 등 삼승에 대하는 대승불교의 일승과는 거리감이 없지 않습니다.그러나 그 뜻이야 어찌 되었든 일승이라는 말도, 아뢰야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대승불교가 흥륭하기 이전의 근본불교에서부터 일찍이 사용되었다는 점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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