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활동

인연의 교차로

사회교육

<2020년><2월>

붓다의 근본교리(중도실상)

연기의 가르침, 이해하기(학습과제)

성철스님 12연기의 재해석

십이연기에 대한 해석의 문제인데, 여기에는 시간적 인과(因果)관계로 보는 해석과 존재의 원리로 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두가지 해석이 서로 비등하게 주장되기도 하였으나, 아무래도 연기 본래 의미는 존재의 원리로 보는 것이 보다 합당한 해석이라고 봅니다. 또 하나 십이연기에서 연기를 소승의 유부적(有部的)인 생멸(生滅)의 견해로 볼 것이아니라 법계(法界)의 연기, 중도(中道)의 연기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견해에 의하면,  원시경전인 아함경은 대승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소지를 적지 않게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실례는 『가전연경』 등에서 일부 확인되었습니다. 그럼  존재의 법칙인 까닭을 살펴 보겠습니다.

 

그때 존자(尊者) 마하구치라는존자 사리불(Sāriputta)에게 이렇게 물었다. “벗 사리불이여, 노사(老死)는 자기가 지은 것[自作]입니까, 노사는 남이 지은 것[他作]입니까, 노사는 자기가 지은 것이며 남이 지은 것입니까, 또 노사는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원인 없이 나는 것입니까?”

“벗 구치라여, 노사는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노사는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노사는 자기가 지으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노사는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원인 없이 나는 것도 아닙니다. 생(生)에 연(緣)하여 노사(老死)가 있습니다.”

 

“벗 사리불이여, 생(生)은 자기가 지은 것입니까. 벗 사리불이여, 식(識)은 자기가 지은 것입니까, 식은 남이 지은 것입니까, 식은 자기가 지은 것이며 남이 지은 것입니까, 식은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원인 없이 나는 것입니까?”

“벗 구치라여, 식은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식은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식은 자기가 지으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식은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원인 없이 나는 것도 아닙니다. 명색(名色)에 연(緣)하여 식(識)이 있습니다.”

“벗사리불이여, 이 말한 바의 뜻을 어떻게 알아야 하겠습니까?”

 

“벗이여, 비유하면 두 개의 갈대 묶음이 서로 의지하여 서 있는 것과 같이 명색에 연하여 식이 있으며, 식에 연하여 명색이 있습니다. 명색에 연하여 육처(六處)가 있으며, 육처에 연하여 촉(觸)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모임입니다. 벗이여, 만일 그들의 갈대 묶음 가운데서 하나를 제거해 버리면 나머지 하나는 넘어져 버리며, 다른 것을 제거해 버리면 그 다른 것이 쓰러져 버립니다. 벗이여, 그와 같이 명색의 멸함에 의해서 식의 멸함이 있으며, 식의 멸함에의해서 명색의 멸함이 있으며, 명색의 멸함에 의해서 육처의 멸함이 있으며, 육처의 멸함에 의해서 촉의 멸함이 있으며, 이와 같은 것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멸함입니다.” [南傳大藏經 13 相應部經典 2卷 pp. 164~166]

 

사리불은 연기를 두 개의 갈대 묶음이 서로 의지하여 서 있는 것에 비유하여, 명색(明色)을 연하여 식(識)이 있고,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명(無明)을 연하여 행(行)이 있고 행을 연하여 무명이 있으며, 무명의 멸함에 의하여 행의 멸함이 있으며, 행의 멸함에 의하여 무명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무명(無明)이 아버지가 되고 행(行)이 자식이 되어서 무명(無明)이 행(行)을 낳는다는 식이 아니라 무명(無明)과 행(行)은 서로 의지하는 형제지간이라는 것입니다.

갈대 묶음 가운데 하나를 빼 버리면 다른 하나는 설 수 없으니, 이것은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이 없다는 뜻을 비유하여 말한 것입니다. 명색이 멸하면 식이 멸하고, 식이 멸하면 명색이 멸하는 것이지 시간적으로 고정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남전대장경과 한역대장경(漢譯大藏經)에 다 있습니다. 이에 의하면 연기는 갈대 묶음이 서로 의지해 있는 것과 같아 하나는 주체가 되고 다른 하나는 객체가 된다는 것보다는 평등한 입장에서 말씀한 것입니다.

즉 연기란 인연하여 일어나는 것이라는 뜻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없던 것이 새로 탄생하여 생겨난다는 생성의 기본원리라기보다는 모든 일체 만물이 존재하는 존재의 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흔히 연기를 만물이 어떻게 생겼나를 설명하는 가르침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시간적 해석이 됩니다.  후대에 오면서 생성의 원리를 말하는 시간적 관계로 보게 된 듯합니다.

그러나 연기의 근본 성품에는 앞의 남전장경에서 본 것처럼 진여(眞如)의 의미도 포함되고 있는데, 진여는 나고 죽고 하는 것이 본래 없으며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것이 본래 없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서로 의지해서 존재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연기를 생성에 관련된 것으로 해석하게 되면 전변설(轉變說)에 떨어지게 됩니다. 전변설은 범(梵:Brahman)에서 일체 만물이 나왔다고하는 인도 고대종교의 사상이며, 부처님은 애초부터 전변설적인 사고방식을 거부하는데, 유식설(唯識說)은 은연중에 이러한 전변설의 색채가 있다고 해서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연기란 전변설처럼 무슨 본질이 따로 있고 지말(支末)이 따로 있어서 그 본체에서 지말이 생긴다는 것이 아닙니다.

(6)

사회활동

인연의 교차로

사회교육

<2020년><2월>

진오스님-Viet Nam 농촌학교 108해우소 신축지원 마라톤

불서 강해 시리즈11

이 세상엔 부자도 없고, 가난뱅이도 없습니다. 오로지 마음 먹기에 따라서 부자도 되고 가난뱅이도 됩니다.

아무리 경제적인 여유가 풍부하다 하더라도 정신적인, 마음적인 여유가 없으면 가난뱅이요, 죽 한끼 쑤어 먹을 쌀 한 톨 없는 사람이라도 정신적인, 마음적인 여유가 있으면 부자입니다.

모든 것은 우리가 마음 먹기에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마음만 알면 우주를 다 안다고 하셨습니다.

*잊었다가 알게 되면 그것이 깨달음이다.

깨닫는다 함은 쉽게 말해서 주머니 속에 돈을 넣어놓았는데, 순간 잊어버렸다가 나중에 알게 되는 것도 깨달음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천 번 잊고, 몇 천 번 깨닫습니다. 그러니 깨달을 각()자를 어떻게 다 번역하겠습니까? 자기의 마음을 알게 깨달아야 합니다. 마음이 우주에 가득 찼기 때문에 마음만 알면 우주를 훤히 압니다.

, 마음을 깨닫는 것이 불()입니다.

불서 강해 시리즈12

마음을 깨달으면 일체 중생의 마음을 다 압니다. 부처 불()자 한 자를 번역하려 해도 수천 만권이상의 책이 되는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해석하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분량이 됩니다. 그래서 불교는 몹시 어렵습니다.

<보살>이라는 뜻도 너무너무 방대합니다. 우리말로 풀이하려면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대로 풀이해본다면, ()를 닦는 것이 보(), ()을 닦는 것이 살()아나 복혜(福慧)를 같이 닦는다는 뜻인데, 한마디로 <큰 마음>이란 뜻입니다. 일체 중생을 나처럼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꼼짝꼼짝하는 불성(佛性)이 같다는 뜻입니다.

*성불은 언제 하는가?

잣나무에도 불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잣나무는 언제 성불(成佛)할까요?

허공이 땅에 떨어질 때 성불합니다. 그렇다면 허공이 땅에 떨어질 때가 언제쯤일까요? 잣나무가 성불할 때 허공이 땅에 떨어집니다.

허공이 땅에 떨어진다는 말은 망상이 없을 때를 말합니다. 사람은 물론 잣나무도 망상만 없으면 성불합니다.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