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제1계단 預流果(예류과)가 되는 것은 철저한 철학자로 되는 것이라 하였다. 철학자라 하면 무언가 사물을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이 경우는 사물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사물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차이는 결정적이다. 인간은 어떤 형태로 생각하고 있을까? 인간은 대개 ‘내가 있다’는 전제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있다’는 개념을 증명하여 보려고 하지 않는다. 前提(전제)이기 때문에 증명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전제가 만약에 올바르지 않다면, 인류가 쌓아온 일체의 철학․종교 등은 표적을 벗어나 버린다. 근거가 없는 것으로 되어버린다.
‘붓다가 혁명을 일으켰다’라고 말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붓다께서는 ‘내가 있다’는 전제에 도전하였던 것이다. ‘왜 自我意識(자아의식)이 생겨나는가? 그 카테고리는 무엇일까? 정말 실체로서 변하지 않는 自我(자아)라는 것은 있는가’라고 관찰해보신 것이다. 그래서 발견하신 사실이 불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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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원인에 의해서 일어나는 ‘본다’는 일시적인 기능임에도, 그 감각에 대해서 ‘<나>는 보았다’라고 연상한다. 그래서 ‘나는’이라는 도깨비개념이 갑자기 생겨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유감스럽지만 ‘나’라는 개념 없이는 우리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체 지식이 ‘나’라는 실체가 반드시 있다는 착각의 전제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그 ‘나’라는 개념이 受(감수성, 느끼는 것)에서 생겨난다. 무엇을 느끼는가 하면 눈으로 느끼고, 귀로 느끼고, 코로 느끼고, 혀로 느끼며, 신체로 느끼고, 그리고 마음으로 느끼는 6개의 장소에서 무엇이든 느끼는 것이다. 그러므로 ‘느끼는 것은 6개 있다’라고 말해도 상관없고, 하지만 ‘느낌만은 하나이다’라고 말해도 상관없다. 느낌은 순간이라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변해 가는 無常인 것이다. 따라서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가 無常이다’, ‘<나>는 변화하지 않는 실체가 없으므로 <無我>다’라고 말해도 올바른 결론인 것이다.
_아비담맛타 상가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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