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활동

인연의 교차로

사회교육

<2019년><12월>

SNS News & Buddhist Forum

(배포처: 사찰 또는 마켓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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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메아리 “SNS news Forum”지면에 지역 또는 단위 사찰 단체 PR을 돕기위해 특별-안내기사를 담아 배포에 따른 효율을 기하고자 합니다. 후원자 요청을 지면에 알맞게 자유롭게 편성하고, 이에 따른 추가배포 인쇄분량 경비부담을 후원-동참($65-50)으로 추가배포 인쇄물을 보충해 나가고자 합니다.


붓다의 메아리 “SNS news Forum * 인연의 교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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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의 교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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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활동

인연의 교차로

사회교육

<2019년><12월>

인터넷 sns 불교도 공유담론에서 불교사회교육의 새 지평을 펼친다.

<< ‘붓다가 혁명을 일으켰다’라고 말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붓다께서는 ‘내가 있다.존재한다’는 전제에 도전하였던 것이다. 깨달음을 언급하지 못하면 불교는 성립하지 않는다. >>

_깨달으면 無我(무아)를 아는 철학자가 된다._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일반심리학으로는 결코 성립되지 않는 경지이다.
‘出世間’이라는 말로 구별하고 있는 것은 일반 상식의 범위와 관계가 없는, 그 범위를 초월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불교심리학을 공부하는 사람에 대한 주의도 포함된다.

애써 노력하여 머리로 이해하여도, 마음으로 리스트(목록)를 기억하고 있어도 ‘이해하였다’는 것은 되지 못한다. 실천으로 마음의 차원을 초월하여 출세간의 경지를 체험해야 한다.
깨달음을 언급하지 못하면 불교는 성립하지 않는다. 불교심리학의 경우도 깨달음의 경지를 철저하게 분석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도 실천하지 않은 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불교는 종교나 철학에 반론하기 위하여 나타난 것은 아니다. 무수히 많은 종교나 철학의 근저가 되는 ‘내가 있다’는 전제가 사실로 부합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조사했을 뿐이다.
결론은 ‘내가 있다’란 교묘한 착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 종교나 철학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는 간접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내가 있다’는 전제에 어떤 식으로 도전하면 좋을까? ‘내가 있다’는 실감은 ‘나’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관찰해보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발견될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는 위빳사나라는 자기관찰방법이 설해져 있다. 자기관찰을 하면 여러 정보가-그것은 물질적인 흐름이기 때문에-眼耳鼻舌身에 접촉한다. 닿을 때는 受(수 : 감각 vedana)가 생겨난다. 감각에 대해서 ‘기분 좋은 것을 본다. 기분 나쁜 것을 본다’ 등으로 우리는 생각한다.↓

 

깨달으면 無我(무아)를 아는 철학자가 된다.

 

깨달음의 제1계단 預流果(예류과)가 되는 것은 철저한 철학자로 되는 것이라 하였다. 철학자라 하면 무언가 사물을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이 경우는 사물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사물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차이는 결정적이다.
인간은 어떤 형태로 생각하고 있을까? 인간은 대개 ‘내가 있다’는 전제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있다’는 개념을 증명하여 보려고 하지 않는다. 前提(전제)이기 때문에 증명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전제가 만약에 올바르지 않다면, 인류가 쌓아온 일체의 철학․종교 등은 표적을 벗어나 버린다. 근거가 없는 것으로 되어버린다.

‘붓다가 혁명을 일으켰다’라고 말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붓다께서는 ‘내가 있다’는 전제에 도전하였던 것이다.
‘왜 自我意識(자아의식)이 생겨나는가? 그 카테고리는 무엇일까? 정말 실체로서 변하지 않는 自我(자아)라는 것은 있는가’라고 관찰해보신 것이다. 그래서 발견하신 사실이 불교인 것이다.

다양한 원인에 의해서 일어나는 ‘본다’는 일시적인 기능임에도, 그 감각에 대해서 ‘<나>는 보았다’라고 연상한다. 그래서 ‘나는’이라는 도깨비개념이 갑자기 생겨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유감스럽지만 ‘나’라는 개념 없이는 우리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체 지식이 ‘나’라는 실체가 반드시 있다는 착각의 전제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그 ‘나’라는 개념이 受(감수성, 느끼는 것)에서 생겨난다. 무엇을 느끼는가 하면 눈으로 느끼고, 귀로 느끼고, 코로 느끼고, 혀로 느끼며, 신체로 느끼고, 그리고 마음으로 느끼는 6개의 장소에서 무엇이든 느끼는 것이다.
그러므로 ‘느끼는 것은 6개 있다’라고 말해도 상관없고, 하지만 ‘느낌만은 하나이다’라고 말해도 상관없다. 느낌은 순간이라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변해 가는 無常인 것이다.
따라서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가 無常이다’, ‘<나>는 변화하지 않는 실체가 없으므로 <無我>다’라고 말해도 올바른 결론인 것이다.  

_아비담맛타 상가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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