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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COLON (목) 10 04, 2018 6:09 pm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일) 10 07, 2018 5:15 pm

(Mah?si Say?daw)5-8
The dhamma is subtle (nipu¼o); it is to be realized only by the wise (pa¼ðitavedaniyo). Here the wise means only those who have wisdom (pannæ) relating to vipassanæ and the path and its goal.
The dhamma has nothing to do with the secular knowledge per se possessed by world philosophers, religious founders, writers or great scientists who can split atoms. But it can be realized by any one irrespective of sex, age or education, anyone who contemplates næmarþpa at the moment of their arising, passes through vipassanæ insights progressively and attains the Ariyan path and its goal.
Taking stock of the nature of all living beings, the Buddha found that most of them were mired in sensual pleasure. There were of course a few exceptions like the five companions of Siddhattha in the forest retreat or the two brahmins who were later to become the two chief disciples of the Buddha. But the majority of mankind regard the enjoyment of pleasure as the summum bonum of life. They are like children who delight in playing with their toys the whole day. The child’s toys and games make no sense to adults but grown-up people too derive pleasure from the toys of the sensual world, that is, from the company of their children and grand children. Such sensual pleasure has no appeal for Buddhas and Arahats. It is highly esteemed by ordinary men and devas because they have no sense of higher values such as jhæna, vipassanæ and Nibbæna.
A person who is thus fond of sensual pleasure ma y be likened to a peasant living in out-of the-way rural areas. To the urbanites those places are wholly devoid of the amenities of life, what with poor food, poor clothes, dirty dwellings, muddy foot-paths, and so forth. But the villagers are happy and they never think of leaving their native place. Likewise, common people and devas delight in their sensual objects. Whatever the teaching of Buddha and the Arahats, they love pleasure and spend all their time indulging in it. They feel ill at ease in the absence of sensual objects. They are so much pleased with their families, attendants and possessions that they cannot think of anything higher than sensual pleasure. Because of their deep-rooted love of pleasure, it is hard for them to understand or appreciate the subtle, profound Pa¥iccasamuppæda and Nibbæna.
5. 법은 현자들만 이해할 수 있다.
법은 미묘한 것이며, 오직 현자들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현자는 위빠사나와 도과와 관련된 통찰지(慧pann?)를 가진 사람을 뜻합니다. 세계적인 철학자, 종교의 창시자, 작가 또는 원자를 분해할 수 있는 대 과학자가 지닌 세속적인 지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하지만 법은 성별, 나이, 교육에 상관없이 위빠사나 통찰로 점진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정신과 물질을 관찰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깨달을 수 있고, 성스러운 도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모든 중생의 본성을 찬찬히 살펴본 부처님은, 중생들이 감각적 쾌락에 빠져있음을 아셨습니다. 물론 싯달타 태자가 숲속에서 정진할 때 수행 도반이었던 다섯 비구(Bhikkhu)나 나중에 부처님의 상수제자가 된 우빠띳사(Upatissa)와 꼴리따(Kolita)와 같은 두 바라문처럼 약간의 예외는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쾌락을 누리는 것이 인생의 최대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하루 종일 장난감을 갖고 놀며 즐거워하는 아이와 같습니다. 아이의 장난감과 놀이는 어른에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른들도 감각적 세계라는 장난감, 즉 아이와 손자들 속에서 쾌락을 즐깁니다.
부처님이나 아라한에겐 이러한 감각적 즐거움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선(禪jh?na), 위빠사나, 열반과 같은 숭고한 가치에 대한 개념이 없는 범부(puthujjana)와 천신들만 감각적 쾌락을 대단하게 생각합니다.
감각적 쾌락을 좋아하는 사람은 외딴 벽지에 사는 농부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도회지 사람에게 이런 곳은 삶의 쾌적한 설비가 없고 나쁜 음식, 초라한 옷, 더러운 주거지, 진흙길 등으로 매우 불편한 곳일 뿐입니다. 그러나 시골 사람들은 행복해할 뿐만 아니라 고향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범부와 천신은 감각적 대상을 좋아합니다. 부처님과 아라한의 가르침이 무엇이건 간에, 쾌락을 좋아하고 쾌락에 빠져서 모든 시간을 보냅니다. 또 감각적 대상이 없으면 쉽사리 불안해합니다.
그들은 가족과 시종과 소유재산을 지나치게 좋아하기 때문에 감각적 쾌락보다 더 수승한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쾌락에 대한 집착이 뿌리 깊어서 미묘하고 심오한 12연기와 열반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The Buddha-dhamma makes little appeal to the masses since it is diametrically opposed to their sensual desire. People do not like even an ordinary sermon, let alone a discourse on Nibbæna, if it has no sensual touch. They do not seem interested in our teaching and no wonder, since it is devoid of melodious recitation, sentimental stories and hilarious jokes and other attractions. It is acceptable only to those who have practised vipassanæ or who seek the dhamma on which they can rely for methods of meditation and extinction of defilements.
But it is a mistake to deprecate, as some do, the sermons containing stories, jokes, etc as sutta sermons. Suttas differ basically from popular sermons in that they are profound, as witness Anattalakkha¼a sutta, Sa¥ipatthæna sutta and so forth. The doctrine of Dependent Origination too belongs to Sutta Pi¥aka. It is to be labelled Abhidhammæ only because it is preached in the fashion of Abhidhammæ Pi¥aka.
Since our teaching is unadulterated dhamma, some people confuse it with Abhidhammæ and cannot follow it, much less grasp the Path and Nibbæna which it emphasizes. Paticcasamupæda is hard to understand because it concerns the correlations between causes and effects. There is no ego entity that exists independently of the law of causation. It was hard to accept this fact before the Buddha proclaimed the dhamma.
The commentaries also points out the abstruse character of the doctrine. According to them there are four dhammas which defy understanding, viz., the four noble truths, the nature of a living being, the nature of rebirth and dependent origination.\nIt is hard to understand and accept the truth of suffering, the truth about its cause, the truth about its cessation and the truth about the way to its extinction. It is hard to appreciate these truths, still harder to teach them to other people.
Secondly, it is hard to understand that a living being is a næma-rþpa process without any separate self, that the næmarþpa complex is subject to the law of kamma that determines a man’s future life according to his good or bad deeds.\nIn the third place, it is hard to see how rebirth takes place as a result of defilement and kamma without the transfer of næma-rþpa from a previous life.
Lastly it is equally hard to understand Pa¥iccasamuppæda. It involves the above three abstruse dhammas. Its negative aspect concerns the first two noble truths as well as the nature of a living being and rebirth while its positive aspect involves the other two truths. Hence it is most difficult to grasp or teach this doctrine. It may be easy to explain it to one who has attained the path and Nibbæna or one who has studied the pi¥aka but it will mean little to one who has neither the illumination nor scriptural knowledge.
The writer of the commentary on the doctrine was qualified to explain it because he might have attained the lower stages of the path or he might have a thorough knowledge of the Pi¥aka. He refers to its difficulty probably in order that its exposition might be seriously studied by posterity. He likens the difficulty to the plight of a man who has jumped into the sea and cannot get to the bottom.
He admits that he has written the exegesis on the basis of the Pi¥aka and the old commentaries handed down by oral tradition. The same may be said of our teaching. Since it is hard to explain the doctrine, the yogø sho uld pay special attention to it. If he follows the teaching superficially, he will understand nothing and without a fair knowledge of the doctrine, he is bound to suffer in the wilderness of samsæric existence.
The substance of the Pa¥iccasamuppæda teaching is as follows. From ignorance there arises sa³khæra (effort or kamma-formation.) From kamma-formation there arises consciousness of the new existence. Consciousness gives rise to psycho-physical phenomena or næma-rþpa. Næma-rþpa leads to æyatana (six bases). From ayatana arises the phassa (impression). Phassa causes feeling; feeling leads to craving. From craving there results clinging (upædæna). Because of clinging there is the process of becoming (kamma-bhava), from the process of becoming there arises rebirth (jæti) and rebirth leads to old age, death, sorrow, grief, and lamentation. Thus arises the whole mass of suffering.
6.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
불법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추구하는 감각적 욕망에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인 법문은 말할 것도 없고, 감각적인 재미가 없다면 열반에 대한 법문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가르침에 관심이 없는 듯하며, 그도 그럴 것이 선율적인 독송, 감동적인 이야기와 재미나는 웃음거리와 다른 매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르침은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있거나, 믿을 만한 명상법이나 번뇌(kilesa)를 소멸하는 방법을 찾고 있던 사람들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처럼 설화와 웃음거리가 담긴 법문을 비난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상응부』「무아상경(Anattalakkhana sutta)」(S22:59), 『중부』「대념처경(Satipa??h?na sutta)」(D22)등에서 보듯 경전은 심오하기 때문에 대중적인 법문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연기법은 경장에 속하지만, 아비담마로 분류되는 이유는 아비담마의 형식으로 설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르침은 순일한 법이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은 이를 아비담마(abhidhamma)와 혼동해서 가르침이 강조하는 도와 열반을 이해하기는커녕 따라오지도 못합니다. 연기는 원인과 결과가 서로 결부되어 있어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연기법에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자아라는 실재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법을 선포하시기 전에는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주석서에는 이 연기법의 심오한 성질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사성제, 생명 있는 존재의 본성, 재생과 연기의 성질은 이해하기 어려운 네 가지 법이라고 합니다.
(1) 괴로움의 진리[苦諦]와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集諦],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滅諦],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의 진리[道諦]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사성제(四聖諦)의 깊은 뜻을 파악하기는 더 어렵고 남에게 가르치기는 더욱 더 어렵습니다.
(2) 중생은 어떠한 개별적인 자아가 없는 정신-물질[名色]의 과정이며, 그러한 정신-물질의 복합체는 자신의 선업과 악업에 따라 내생을 결정짓는 업의 법칙에 따른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3) 전생에서 정신-물질의 전이 없이 번뇌와 업의 과보로 어떻게 재생(再生)이 일어나는지를 알기란 어렵습니다.
(4) 연기를 이해하는 것도 역시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연기는 앞서의 세 가지 심오한 법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기의 소극적인 측면은 고제(苦諦)와 집제(集諦), 중생과 태어남의 성질이고 그 적극적인 측면은 멸제(滅諦)와 도제(道諦)를 포함합니다. 그래서 이 연기법을 이해하거나 가르치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어쩌면 도와 열반을 얻었거나 삼장(三藏)을 공부한 사람은 연기의 교의를 쉽게 배우겠지만, 경전지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의미 없는 일입니다.
연기법에 대해 해설한 「청정도론」의 저자 붓다고사는 적어도 도의 가장 낮은 단계인 예류과를 얻었거나 삼장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갖추었기 때문에 연기법을 해설할 자격이 되었습니다.
붓다고사는 후대사람들이 그 해설을 진지하게 공부하도록 하기 위해서, 어쩌면 그 어려움을 언급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붓다고사는 이 어려움을 바다에 뛰어들어 바다 밑바닥에 이르지 못한 사람의 곤경에 빗대고 있습니다. 또한 붓다고사는 구전에 의해 전해 내려온 삼장과 옛 주석서에 기초하여 주해를 썼다고 인정합니다.
우리의 가르침도 또한 이와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리를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수행자는 반드시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만약 가르침을 피상적으로만 따른다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연기법에 대한 어떤 지혜도 얻지 못한 채 윤회의 황야 속에서 괴로움을 겪어야 합니다.
연기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무명(無明)에서 업형성력인 상카라[行]가 일어납니다. 상카라[行]에서 재생연결식[識]이 일어납니다. 재생연결식[識]에서 정신-물질[名色]이 일어납니다. 정신-물질[名色]에서 여섯 감각장소[六入]가 일어납니다. 여섯 감각장소[六入]에서 감각접촉[觸]이 일어납니다. 감각접촉[觸]에서 느낌[受]이 일어납니다. 느낌[受]에서 또 갈애[愛]가 일어납니다. 갈애[愛] 때문에 집착[取]이 생겨납니다. 집착[取]이 있기 때문에 업으로서의 존재[業有]가 있습니다. 업으로서의 존재[業有]에서 태어남[生]이 있고, 태어남[生]은 늙음, 죽음, 근심, 탄식, 비탄으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괴로움의 총체적인 무더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According to the Buddha, avijjæ is ignorance of the four Noble Truths, viz, the truths about suffering, its cause, its cessation and the way to its cessation. In a positive sense avijjæ implies misconception or illusion. It makes us mistake what is false and illusory for truth and reality. It leads us astray and so it is labelled micchæpa¥ipatti-avijjæ.
Avijjæ therefore differs from ordinary ignorance. Ignorance of the name of a man or a village does not necessarily mean misinformation whereas the avijjæ of Pa¥iccasmuppæda means something more than ignorance. It is misleading like the ignorance of a man who has lost all sense of direction and who therefore thinks that the east is west or that the north is south. The man who does not know the truth of suffering has an optimistic view of life that is full of dukkha (pain and evil). It is mistake to seek the truth of dukkha in the book for it is to be found in one’s own body.
Seeing, hearing, in short, all næma-rþpa arising from the six senses are dukkha. For this phenomenal existence is impermanent, undesirable and unpleasant. It may end at any time and so all is pain and suffering. But this dukkha is not realized by living beings who look upon their existence as blissful and good.
So they seek pleasant sense-objects, good sights, good sounds, good food, etc. Their effort to secure what they believe to be the good things of life is due to their illusion (avijjæ) about their existence. Avijjæ is here like the green eye-glass that makes a horse eat the dry grass which it mistakes for green grass. Living beings are mired in sensual pleasure because they see every thing through rose-coloured glasses. They harbour illusions about the nature of sense-objects and næmarþpa.
A blind man may be easily deceived by another man who offers him a worthless longyi, saying that it is an expensive, high quality longyi. The blind man will believe him and he will like the longyi very much. He will be disillusioned only when he recovers his sight and then he will throw it away at once. Like-wise, as a victim of avijjæ, a man enjoys life, being blind to its anicca, dukkha and anatta. He becomes disenchanted when introspection of næma-rþpa makes him aware of the unwholesome nature of his existence.
Introspection of næma-rþpa or vipassanæ contemplation has nothing to do with bookish knowledge. It means thorough watching and ceaseless contemplation of all psycho-physical phenomena that comprise both the sense-objects and the corresponding consciousness. The practice leads to full awareness of the ir nature. As concentration develops, the yogø realizes their arising and instant vanishing, thereby gaining an insight into their anicca, dukkha and anatta.
Avijjæ makes us blind to reality because we are unmindful. Unmindfulness gives rise to the illusion of man, woman, hand, leg, etc., in the conventional sense of the terms. We do not know that seeing, for instance, is merely the næma-rþpa or psycho-physical process, that the phenomenon arises and vanishes, that it is impermanent, unsatisfactory and unsubstantial.
Some people who never contemplate die without knowing anything about næma-rþpa. The real nature of næma-rþpa process is realized by the mindful person. But the insight does not occur in the beginning when concentration is not yet developed. Illusion or the natural way of consciousness precedes contemplation and so the beginner does not gain a clear insight into the nature of næmarþpa.
It is only through steadfast practice that concentration and perception develop and lead to insight-knowledge.
If, for example, while practising mindfulness, the yogø feels itchy, he is barely aware of being itchy. He does not think of the hand, the leg, or any other part of the body that is itchy nor does the idea of self as the subject of itchiness, “I feel itchy” occurs to him. There arises only the continuous sensation of itchiness. The sensattion does not remain permanent but passes away as he notes it.
The watching consciousness promptly notes every psycho-physical phenomenon, leaving no room for the illusion of hand, leg and so on.
Illusion dominates the unmindful person and makes him blind to the unsatisfactory nature (dukkha) of all sense-objects. It replaces dukkha with sukha. Indeed avijjæ means both ignorance of what is real and misconception that distorts reality.
Because he does not know the truth of dukkha, man seeks pleasant sense-objects. Thus ignorance leads to effort and activity (sa³khæra). According to the scriptures, because of avijjæ there arises sa³khæra but there are two links, viz, ta¼hæ and upædæna between them. Ignorance gives rise to craving (ta¼ha) which later on develops into attachment (upædæna). Craving and attachment stem from the desire for pleasure and are explicitly mentioned in the middle part of the doctrine of Pa¥iccasamuppada. When the past is fully described, reference is made to avijja, ta¼hæ, upædæna, kamma and sa³khæra.
7. 무명(無明)이란 무엇인가?
부처님에 따르면 무명(無明)은 고? 집? 멸? 도의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무지입니다. 적극적인 의미로 무명은 착각이나 전도된 인식을 뜻합니다. 무명으로 인해 허망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무명은 중생을 타락된 길로 인도하기 때문에 그릇된 도 닦음의 무명(micch?-pa?ipatti-avijj?)으로 분류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명은 일반적인 무지와는 다릅니다. 사람이나 마을의 이름을 모르는 것은 반드시 그릇된 정보를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12연기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은 단순한 무지 이상입니다. 이는 오해로 방향감각을 완전히 상실하여 동쪽이 서쪽이고 북쪽이 남쪽이라고 생각하는 무지한 사람과 같습니다. 괴로움의 진리[苦諦]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괴로움으로 가득 찬 삶에 대해 낙천적인 생각을 갖습니다.
괴로움의 진리[苦諦]는 자신의 몸 안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책에서 찾는 것은 잘못입니다. 보고 듣는, 즉 여섯 감각장소[六入]에서 일어나는 정신-물질[名色]은 모두 괴로움입니다. 왜냐하면 현상의 존재는 무상하고 바람직하지 않으며 즐겁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상의 존재는 어느 때라도 끝날 수 있어서 모든 것은 고통과 괴로움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좋고 축복된 것으로 여기는 중생들은 이러한 괴로움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즐거운 형상, 좋은 소리, 맛있는 음식 따위의 감각대상을 찾아다닙니다. 이 세상에서 좋은 것으로 믿어지는 것을 얻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은 존재에 대한 전도된 인식 때문에 생깁니다. 여기서 무명은 말에게 푸른색 안경을 씌워 마른 풀을 푸른 풀이라고 착각하게 하여 그것을 먹이는 것과 같습니다. 중생들은 장밋빛 안경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기 때문에 감각적 쾌락에 탐닉해 있습니다. 그들은 감각대상과 정신-물질[名色]의 성질에 대해 환상을 품고 있습니다.
앞을 못 보는 장님에게 싸구려 롱지(Longyi)를 건네주면서, 이것은 값비싸고 훌륭한 재질의 롱지라고 하면 쉽게 속아 넘어갑니다. 장님은 그 사람을 믿고 건네받은 롱지를 아주 좋아할 것입니다. 하지만 장님이 시력을 회복하고 나면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고는, 즉시 그 롱지를 내던져버릴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명으로 덮인 범부는 무상? 고? 무아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삶을 즐깁니다. 그러나 정신과 물질에 대한 성찰로 자기 존재의 불건전한 속성을 알아차리면 뒤바뀐 인식은 사라집니다.
정신-물질에 대한 내관(內觀)이나 위빠사나의 통찰은 책속의 지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감각대상과 그에 상응하는 식(識)으로 구성된 정신-물질적 현상을 철저히 주시하고 끊임없이 알아차리는 것을 뜻합니다. 수행(bh?van?)은 정신-물질의 본성을 철저히 알도록 해줍니다. 집중이 계발됨에 따라 수행자는 정신과 물질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알아서 무상? 고? 무아에 대한 통찰지를 얻습니다.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무명이 우리로 하여금 실상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알아차리지 못해서 인습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인 남자, 여자, 손, 다리 등과 같은 전도된 인식이 생깁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보는 것이 무상하고 불만족스러우며 실체가 없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단지 마음과 몸, 즉 정신-물질의 진행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한 번도 수행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정신-물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죽습니다. 하지만 알아차림이 있는 사람은 정신-물질과정의 진정한 본성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중이 계발되기 전에 처음부터 통찰지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전도된 인식, 즉 자연스러운 마음의 방식이 관찰에 앞서기 때문에 초보 수행자는 정신-물질의 성품에 대한 분명한 통찰지를 얻지 못합니다. 꾸준한 수행을 통해서만 집중력과 지각력이 계발되어 통찰지에 이릅니다.
예를 들어 만일 사념처(四念處)를 닦는 중에 수행자가 가려움을 느낀다면 수행자는 그냥 가렵다는 것을 알 뿐입니다. 그에게는 손이나 다리, 몸의 어느 부분이 가렵다거나, 가려움을 느끼는 것이 자기라는 생각, ‘내가 가렵다’라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단지 지속적으로 가려운 감각이 일어날 뿐입니다. 그러한 감각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시하면 사라집니다. 지켜보는 마음은 모든 정신-물질적 현상을 바로 주시하여 손, 다리라는 전도된 인식이 일어날 여지가 없습니다.
알아차림이 없는 사람은 전도된 인식에 지배되어 모든 감각 대상의 불만족스런 성품인 둑카(dukkha)를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알게 됩니다. 참으로 무명은 실체를 모를 뿐만 아니라, 실체를 왜곡하는 전도된 인식입니다.
사람들은 괴로움의 진리[苦諦]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즐거운 감각 대상을 추구합니다. 이렇게 무명은 노력[業]과 상카라[行]로 인도합니다. 경전에 따르면 무명으로 인해 상카라[行]가 일어나지만 그 사이에는 갈애[愛]와 집착[取]이라는 두 개의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무명(無明)은 갈애[愛]를 일으키고 갈애[愛]는 이후 집착[取]으로 발전합니다. 갈애와 집착은 감각적 욕망(k?m?)에서 나오는데, 이는 연기법의 중간 부분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연기와 관련된 과거는 무명(無明), 갈애[愛], 집착[取], 업(業), 상카라[行]입니다.

People do not know that craving is the origin (samudaya) of suffering. On the contrary they believe that it is attachment that makes them happy, that without attachment life would be dreary. So they ceaselessly seek pleasant sense-objects, food, clothing, companion and so forth. In the absence of these objects of attachment they usually feel ill at ease and find life monotonous.
For common people life without attachment would be indeed wholly devoid of pleasure. It is ta¼hæ that hides the unpleasantness of life and makes it pleasant. But for the Arahat who has done away with ta¼hæ, it is impossible to enjoy life. He is always bent on Nibbæna, the cessation of conditioned suffering.
Ta¼hæ cannot exert much pressure even on the yogøs (meditators) when they become absorbed in the practise of vipassanæ. So some yogøs do not enjoy life as much as they did before. On their return from meditation retreat they get bored at home and feel ill at ease in the company of their families. To other people the yogø may appear to be conceited but in fact his behaviour is a sign of loss of interest in the workaday world. But if he cannot as yet overcome the sensual desire, his boredom is temporary and he usually gets readjusted to his home life in due course. His family need not worry over his mood or behaviour for it is not easy for a man to become thoroughly sick of his home life. So the yogø should examine himself and see how much he is really disenchanted with life.
If his desire for pleasure lingers, he must consider himself still in the grip of ta¼hæ. Without ta¼hæ we would feel discomfited. In conjunction with avijjæ, ta¼hæ makes us blind to dukkha and creates the illusion of sukha. So we frantically seek sources of pleasure. Consider, for example, men’s fondness for movies and dramatic performances. These entertainments cost time and money but ta¼hæ makes them irresistible although to the person who has no craving for them they are sources of suffering.
A more obvious example is smoking. The smoker delights in inhaling the tobacco smoke but to the non-smoker it is a kind of self- inflicted suffering. The non-smoker is free from all the troubles that beset the smoker. He leads a relatively care- free and happy life because he has no craving for tobacco. Ta¼hæ as the source of dukkha is also evident in the habit of betel-chewing. Many people enjoy it although in fact it is a troublesome habit.
Like the smoker and the betel-chewer people seek to gratify their craving and this ta¼hæ, inspired effort is the mainspring of rebirth that leads to old age, sickness and death.
Suffering and desire as its cause are evident in everyday life but it is hard to see these truths. For they are profound and one can realize them not through reflection but only through the practice of vipassanæ.
8.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무지
사람들은 갈애가 괴로움의 일어남(samudaya)이란 것을 모릅니다. 오히려 집착으로 인해 행복해 하고, 집착이 없으면 삶이 따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즐거운 감각대상, 음식, 의복, 무리, 벗들을 찾습니다. 집착할 대상이 없으면 불안해하고 삶을 무료하게 여깁니다.
범부들은 집착이 없으면 삶에 아무런 즐거움이 없습니다. 삶의 즐겁지 못한 모습을 가리고, 그것을 즐거운 것으로 착각하게 하는 것이 바로 갈애입니다. 그래서 갈애를 제거한 아라한은 삶을 즐기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아라한은 조건 지어진 괴로움이 소멸된 열반에 항상 마음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수행자가 위빠사나 수행에 매진하면 갈애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몇몇 수행자는 과거와는 달리 삶을 즐기지 않게 됩니다. 집중 수행처에서 집으로 돌아가면 종종 가정생활을 지루해 하고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것에 대해 불안해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수행자가 잘난 체하는 듯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상 그의 행동은 이 무미건조한 세상사에 대해 흥미를 잃었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나 감각적 욕망을 여전히 극복할 수 없다면 수행자가 느끼는 따분함은 일시적인 것으로 머지않아 가정생활에 다시 적응하게 될 것입니다. 가정생활에 대해 완전히 환멸을 느낀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가족들이 수행자의 이런 일시적 기분 상태나 행동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자신을 조사해보고 얼마나 진정으로 삶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지를 가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즐거움에 대한 욕망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여전히 갈애에 휘둘리고 있다고 알아야 합니다.
갈애가 없다면 좌절감을 맛볼 것입니다. 무명과 갈애로 인하여 우리는 괴로움(dukkha)을 보지 못하고 행복(sukkha)에 대한 환상을 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친듯이 즐길 거리를 찾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영화나 연극을 좋아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유흥에는 시간과 돈이 들지만 사람들은 갈애로 인하여 이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갈애가 없는 사람에게는 이들 유흥거리는 괴로움의 원천일 뿐입니다.
더 분명한 예는 흡연입니다. 흡연자는 담배연기를 들이마시는 것을 즐기지만 비흡연자에게는 일종의 자학적 괴로움입니다. 비흡연자는 흡연자를 괴롭히는 여러 가지 번거로움이 없습니다. 비흡연자는 담배에 대한 갈애가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걱정 없고 행복한 삶을 누립니다.
괴로움의 원천인 갈애는 비틀(betel)잎을 씹는 습관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틀잎 씹기를 즐기지만 실제로는 번거롭기 짝이 없는 습관입니다.
흡연자와 비틀잎 씹는 사람처럼, 사람들은 갈애를 충족시키고자 하며, 이 갈애가 부추긴 노력이 늙음, 병듦, 죽음으로 이어지는 재생의 주된 원인이 됩니다.
괴로움과 그 원인인 욕망은 일상생활에서 분명히 볼 수 있지만 이러한 진리를 전체적으로 알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 진리는 심오하며, 사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