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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일) 10 07, 2018 5:38 pm

(Mah?si Say?daw)66~74

The role of kamma in the chain of causation is underscored in the teaching sa³khæra paccayæ vinnænæni- “From sa³khæra there arises rebirth consciousness.” which we have already explained in detail. The dying person is attached to the signs and visions relating to his kamma and so on his death there follow kamma-based rþpas together with rebirth-consciousness conditioned by his death-bed attachment.
Contact with the sense-objects gives rise to feeling which in turn produces desire. It does not matter whether the feeling is pleasant or unpleasant. Pleasant feeling creates attachment to pleasant objects while unpleasant feeling makes us crave for pleasant objects. When the desire becomes strong and develops into frantic craving (upædæna) it results in activity or effort for its fulfillment. People do good or bad deeds which they hope will help to satisfy their needs and desires. It is this kammabhava rooted in craving that gives rise to rebirth. Rebirth is bound up with suffering regardless of the world in which it takes place.
There is no need to dwell on the sufferings in the animal and other lower worlds. Among human beings, too, suffering is an inescapable fact of life. A man’s suffering begins while he is in the mother’s womb. He has to work hard for his living, he is harassed by bullies and tyrants. Even if he escapes from the dukkha inherent in the struggle for survival, he will finally have to face old age, sickness and death. From the time of his conception man is headed towards these inevitable evils of life. He is approaching them at every moment. He may live an apparently care- free, happy life but his næmarþpas are forever in the process of ageing and dis- integration.
There is an Indian story which stresses the inevitability of old age, sickness and death. A man being afraid of old age rose into the air with the elixir of life in his mouth and hid in the sky. Another man hid under the sea to escape sickness and still another hid in a cave in Himalayas to avoid death. When their sons searched for them they found that the first man had become old with all the ugly signs of decrepitude, the second man was sick unto death and the third man was dead. Everyone is subject to old age, sickness and death. Once a man is reborn, there is nothing that will protect him from these evils of existence. Hence the Buddha’s saying in the Dhammapada that there is no place in the sky, on land or in the sea, where one can escape death.

66. 태어남과 괴로움
우리가 이미 상세하게 설명한 바와 같이, 인과의 사슬에서 업의 역할은 “상카라[行]를 조건으로 식(識)이 일어난다, sa?kh?ra paccaya vinn??ani ”라는 가르침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죽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업과 관련된 표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죽은 뒤에는 임종 시의 집착에 의해 조건 지어진 업에서 생긴 물질(kammaja-r?pa)과 재생연결식이 뒤따릅니다.
감각접촉[觸]으로 느낌[受]이 일어나고 이 느낌[受]은 다시 갈애[愛]를 일으킵니다. 느낌이 즐거운지 괴로운 것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즐거운 느낌은 즐거운 대상에 대한 집착을 일으키는 반면, 괴로운 느낌은 즐거운 대상들에 대한 갈애를 일으킵니다. 갈애가 강해지면 광적인 갈애인 집착[取]으로 발전하고, 그러면 그것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행위나 노력이 따르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필요와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선행이나 악행을 합니다. 재생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갈애에 기반을 둔 업으로서의 존재[業有]입니다. 재생은 어느 중생계에서 일어나든지 간에 괴로움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축생계와 다른 악처의 괴로움을 깊이 생각해볼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계에서도 괴로움은 피할 수 없는 삶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괴로움은 어머니의 자궁에 있을 때부터 시작됩니다. 태어난 다음에는 먹고 살기 위해 힘들게 일해야 하고, 악당과 폭군에게 시달립니다.
설사 생존경쟁에 내재해 있는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늙음, 병듦, 죽음과 대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수태의 순간부터 사람은 이러한 피할 수 없는 삶의 괴로움을 향해 갑니다.
매 순간마다 사람은 이러한 삶의 괴로움에 한발 한발 다가섭니다. 어떤 사람은 겉보기에 걱정 없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의 정신-물질은 언제나 늙음과 무너짐의 과정 속에 있습니다.
늙음, 병듦, 죽음의 불가피함을 강조하는 인도의 설화가 있습니다. 한 사내는 늙음을 두려워하여 불로장생의 약을 입에 넣고 허공으로 올라서 하늘에 숨었습니다. 다른 사내는 병듦을 피하기 위해서 바다 속에 숨었으며 또 다른 사내는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히말라야의 동굴에 숨었습니다. 세 사내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찾아 나섰는데 첫째 사내는 아주 추하게 늙어 있었으며, 두째 사내는 병들어 죽어 있었고 세째 사내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늙고 병들고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일단 태어나면 이러한 존재의 괴로움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법구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이건 땅이건 바다 속이건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Death and the other two evils of life are inevitable so long as rebirth takes place within the frame-work of disintegrating næmarþpa. Rebirth leads also to grief, anxiety, lamentations and anguish.
We grieve when a member of the family dies. The grief is overwhelming when we lose someone, e.g., a son or a daughter whom we love dearly. Another cause for grief is the loss of material possessions through evilminded officials, robbers, thieves, destructive fires, floods, cyclones, and hated heirs. Grief is also caused by the affliction of disease and decline of health.
Some sick persons are so much depressed that their mental states become a hindrance to their recovery. In the case of morally scrupulous monks and laymen, any damage to moral life gives rise to anxiety. Thus the rishi Isisinga suffered terrible anguish when his moral integrity was undermined by the seduction of a goddess. Anxiety and repentence also torment those who realize their mistakes after having rejected the right view in favour of a wrong one under the guidance of a false teacher.\nBesides there are many other misfortunes in life e.g. accidents, viz., victimization by robbers, etc., hardship in earning one’s living and, securing the necessities of life and so forth that occasion grief, anguish and lamentation.
There is no need to dwell on the physical sufferings in hell and the animal and peta-worlds. Because of his consciousness man also suffers anguish whenever he is in contact with unpleasant sence-objects. As he had thus to suffer mentally into the bargain, it is for him something like adding insult to injury. This does not apply to the Arahat or the noble one at the anagæmø stage for being free from irritation (dosa), he remains unperturbed in the face of physical suffering and so does the mindful yogø who is free from ego illusion that tends to add to the sense of self-pity. Hence the importance of the Buddha’s teaching that we should be aware of unpleasant feeling when we suffer from it. People are unhappy when they think of the frustrations and misfortunes that beset them in the past or at present or that may beset them in future. They feel bitter and upset when they find themselves in distress and burdened with misfortunes.
All these sufferings are rooted in rebirth. Life is all suffering without the ego and without anything good even if there were such ego to enjoy it.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Pa¥iccasamuppæda, the only thing that links one existence with another is the cause-and-effect relationship. From craving, kammic effort, etc., based on ignorance in one existence, there arise five effects, viz., consciousness, body and mind, sense-organs, contact, and feeling. These effects begin with rebirth and end in death with old age, anxiety and other sufferings in between them.
This teaching of the Buddha will not appeal to common people who harbour illusions of happiness and ego-entity. But impersonality and suffering are the unmistakable facts of existence and life in the deva-world is no exception. Some earth-bound devas have to struggle hard for survival and are more miserable than human beings. They are called vinipæ¥økæ devas and they comprise ghosts, devils, etc that belong to lower order of devas. Some devas in heavens are not happy because they do not have good abodes and enough attendants. Even Sakka, the king of devas, admitted to the elderly thera Mahækassapa that he was not very much luminous as his attainment of deva-world was due to the good kamma which he did long before the proclamation of Buddha dhamma and that he had to hide himself when he saw the devas who outshone him as they had done good kamma in the time of the Buddha.
Thus Sakka was not always happy and so were his female attendants who told Mahækassapa that they were wretched and miserable since they counted for little among the high-ranking queenPA goddesses. Some devas become unhappy on the approach of death that is heralded by the withering of their bedecked flowers, the sweating from their armpits and other sings of senility. Some devas die suddenly while indulging in celestial pleasure just like a man whose life is cut off by stroke. Death may be a matter of seconds like the extinction of the flame of a candle. This is borne out by the story of Subrahma deva.

67. 슬픔과 탄식
무너지고야 말 정신-물질의 테두리 안에서 재생이 일어나는 한 죽음과 다른 두 가지 삶의 괴로움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재생은 슬픔, 근심, 탄식, 번민에 이릅니다. \n우리는 가족의 일원이 죽을 때 슬퍼합니다. 우리가 끔찍이 사랑하는 아들이나 딸을 잃었을 때 슬픔은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또 다른 슬픔의 원인은 못된 관리, 강도, 도둑, 화재, 홍수, 태풍, 가증스런 상속자들로 인해 재산을 잃는 것입니다. 또한 슬픔은 질병에 시달리고 건강이 나빠지면 일어납니다. 어떤 환자는 너무나 의기소침 하여 회복하는데 걸림돌이 됩니다.
도덕적으로 양심적인 비구와 재가자의 경우 계행이 훼손되면 근심합니다. 그래서「알람부사 본생경(Alambus? J?taka)」(J. 523)에 나오는 선인 이시싱가(Isisinga)는 자신의 청정한 계행이 한 천녀의 유혹으로 훼손되자 극심한 번민에 괴로워했습니다.
그릇된 스승의 지도 속에서 삿된 견해에 찬동하여 바른 견해를 저버린 뒤에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사람들의 근심과 후회도 고통스럽습니다.
이 외에도 슬픔, 번민, 탄식을 일으키는 사고, 강도에 의한 고통, 생계를 꾸려 나가고 생필품을 확보하는 어려움과 같은 다른 많은 삶의 불행도 있습니다.
지옥, 축생, 아귀계의 육체적 고통은 깊이 생각해볼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識]이 있기 때문에 괴로운 감각 대상과 맞부딪칠 때마다 고통에 휩싸입니다. 게다가 정신적으로도 고통스럽기 때문에, 엎친 데 덮친 격입니다.
성냄으로부터 자유로운 아라한이나 불환자인 성자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으며 육체적인 고통을 겪더라도 평온합니다. 자아가 있다는 전도된 인식이 없는 사념처 수행자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괴로운 느낌으로 고통 받을 때, 그 괴로운 느낌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중요한 것입니다.
과거에 자신이 겪었고 현재 겪고 있는, 또 미래에 겪을 좌절과 불행을 생각할 때 사람들은 불행합니다. 곤경에 처해 있고 불행에 눌려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가슴 아프고 심난합니다.
이러한 괴로움은 다 태어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삶이란 자아가 없는, 설령 즐기는 그러한 자아가 있다 해도 즐길 만한 좋은 것이 없고, 모두 괴로움인 것입니다.
연기법에 따르면, 한 생이 다른 생과 연결되는 유일한 고리는 원인과 결과 관계입니다. 한 생의 무명에 토대를 둔 갈애, 업의 노력 등에서, 식(識), 정신-물질[名色], 여섯 감각장소[六入], 감각접촉[觸], 느낌[受]의 다섯 가지 과보가 생겨납니다. 이러한 과보는 재생으로 시작하여 늙음과 근심, 그리고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다른 괴로움을 거쳐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부처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행복과 자아가 실재한다는 전도된 인식을 가지고 있는 보통 사람에게는 호소력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아와 괴로움은 틀림없는 존재의 현실로 천신계의 삶도 예외가 아닙니다.
일부 땅에 붙어사는 신[地神]170들은 생존을 위해 처절하게 노력해야 하므로 사람보다 더 비참합니다. 그들을 위니빠띠까 천신(vinip?tika-deva)171이라고 하는데, 낮은 천신의 부류에 속하는 귀신이나 악령 따위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하늘의 어떤 천신들은 거처도 좋지 않고 시종들도 많지 않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습니다.
170. 땅에 붙어사는 신(地神 bhumma-deva)은 천상에 거주하지 않고 외딴 곳에 있는 숲이나 산이나 사당 등을 의지해서 사는 신을 가리킨다. 이들 가운데서 힘이 강한 신들은 두 가지 원인이나 세 가지 원인을 가진 재생연결식을 가진다. 그들은 대개 공덕이 모자라서 어렵사리 살아가는 저열한 신들을 포함한 회중들을 거느리기도 한다. 레디 사야도는 이런 공덕이 모자라는 저열한 신들이 바로 원인 없는 재생연결식을 가지고 태어난 신들이라고 말한다,
171. 위니빠띠까(vinip?tika)천신은 위니빠띠까 아수라(vinip?tika-asura)라고도 하는데, 타락한 아수라라는 뜻이며 그들은 사악도에 속하는 저급한 아수라가 아니라 선처에 속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들은 노란색, 흰색, 검은색, 황금색, 검푸른 색등이고 몸도 크거나 작거나 길어서 다르다. 인식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세 가지 원인을 가진 자가 있고, 두 가지 원인을 가진 자가 있고, 원인 없는 인식을 가진 자가 있다. 이들은 천신들처럼 큰 위력을 가지지는 못하였으며 가난한 인간들처럼 위력이 없고 겨우 몸을 가리는 천조차도 얻기 힘들고 괴로움에 압도되어 머문다. 어떤 자들은 상현(上弦)에는 고통을 받고 하현(下弦)에서 즐거움을 얻는다고 한다.(AA.iv.25~26) 이들은 마을이나 마을 가까운 곳에 살면서 마을 사람들이 버린 음식 등을 먹고 사는 정령들로 음식을 구하지 못하면 사람들을 괴롭히거나 홀린다고 한다.
천신들의 왕인 제석조차도 불법이 선포되기 훨씬 전에 쌓은 선업으로 천신계에 태어났기 때문에 자신은 그다지 빛나지 않는다는 것과 부처님 시절에 선업을 쌓아서 자기보다 더 빛나는 천신들을 보면 숨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마하깟싸빠(Mah?-Kassapa) 장로172에게 고백했습니다.
172. 마하깟싸빠(Mah?kassapa) 장로는 마가다(Magadha)의 마하띳타(Mah?ttha)에서 바라문으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삡빨리(Pippali)였다. 그는 결혼을 원치 않았으나 부모의 강권에 못 이겨 자신이 만든 조각과 똑 같은 여자가 있다면 결혼을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부모들은 그 요건을 만족시키는 밧다 까삘라니(Bhadd? K?pil?n?)라는 처녀를 싸갈라(S?gala)에서 발견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혼 상대자라고 만인이 인정해야 한다.’는 편지를 주고받다가 편지를 들켜 빼앗겼다. 양가의 부모는 마침내 그들을 강제로 결혼시켰다. 그러나 서로의 합의로 첫날밤에 잠자리를 꽃줄로 갈라놓고 각기 따로 잠을 잤다. 삡빨리는 엄청난 부자였다. 그는 60여개의 호수를 소유했고 정원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인근 40여개 마을에 흩어져 살았다. 어느 날 그는 쟁기질하는 논에 갔다가 벌레가 새에 쪼여 먹히는 것을 보고 그것이 자신의 죄임을 직감하고 출가를 결심하였다. 동시에 아내 밧다도 까마귀들이 곤충을 잡아먹는 것을 보고 출가를 결심했다. 그들은 함께 머리를 자른 뒤 발우를 손에 들고 우는 하인들을 뒤로 한 채 집을 떠났고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그 후 가섭은 죽림정사(Ve?uvana)의 향실에서 부처님을 뵙고 먼저 제자가 되었고 밧다는 나중에 빠자빠띠고따미(Paj?pati Gotam?)의 비구니 교단에 출가했다. 마하깟사빠는 부처님의 반열반 후 교단을 이끌고 1차 결집을 주도한 분으로 두타(頭陀)제일이라고 불렸다.
이와 같이 제석은 항상 행복한 것만이 아니며, 제석을 시중드는 천녀들도 높은 지위의 여왕인 천녀들 가운데 있으면 자신은 아무 보잘 것이 없기 때문에 비참하고 불행하다고 마하깟싸빠(Mah?-kassapa) 장로에게 말씀드린 것처럼 항상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천신들은 몸에 장식한 꽃이 시들고, 양 겨드랑이에서 땀이 나고, 다른 늙음의 징조들로 죽음이 닥쳐오는 것이 예고 될 때 불행해집니다173. 또 어떤 천신들은 천상의 쾌락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마치 뇌졸중으로 목숨이 끊어지는 사람처럼 갑자기 죽게 됩니다. 죽음은 촛불이 꺼지는 것처럼 한 순간의 문제일수도 있습니다. 『상응부』「수브라흐마경(Subrahm? sutta)」(S.i.53)에 나오는 수브라흐마(Subrahm?) 천신이야기가 이를 뒷받침합니다.
173.『중부』 주석서(MA.iv.170)에 따르면 천신들에게 죽음이 임박했을 때 (1) 화환이 시들고 (2) 옷이 낡고 (3) 겨드랑이에서 땀이 나고 (4) 몸에 나쁜 색깔이 나타나고 (5) 신이면서 신의 자리에 앉아있지 못하는 것의 5가지 조짐이 나타난다고 한다.

Subrahma deva was having a good time when his attendants, the goddesses who were singing and plucking flowers on the tree died suddenly and landed in hell. Subrahma deva saw them suffering in hell and at the same time he foresaw that he too would die in a few days and share the fate of his attendants. Being much frightened, he came to the Buddha and asked the Lord to show him the place where he could live without fear. The Lord then says that he sees no way to salvation for every living being other than the practice of bojjhanga dhamma (links of enlightenment such as mindfulness), the dhutanga (ascetic practices) and sammuppædhæna (ritht exertion), that serve to put an end to defilements, the control of senses (indriyasamvarasøla) the control of that helps to keep off the defilements and Nibbæna which means renunciation of everything.
On hearing this, the deva and his attendants attained the first stage on the holy path. What we should note here is the sudden death of the goddesses. The fate of those who thus die suddenly while engaged in the pursuit of pleasure is indeed terrible for they are likely to land in hell as a result of unwholesome kammic impules. If there is any sign that heralds the approach of death, it creates fear and adds to their suffering.
Suffering that stems from attachment to pleasure is not confined to the sensual sphere. For it is the lot, too, of the Brahmas in their immaterial or formless (arþpa) worlds. In the Brahmæ world there is no pleasure of sex or any other sensual pleasure. The Brahmæs only see, hear or think and the objects of their seeing, etc. have no sexual overtones. But as Visuddhimagga says, some people develop a craving for the sensual pleasure of the Brahmæ world because they believe either through hearsay or speculation that such pleasures are superior to those of the human and deva-worlds. It is no other than their sensual craving that leads to the attainment of rþpajhæna, arþpa jhæna, samæpatti and finally lands them in the rþpa or arþpa brahmæ worlds.
It is not surprising that some people think or speak of the sensual pleasure in the Brahmæ world. Those who are well aware of the true teachings or the Buddha will reject the idea but it probably appeals to ignorant people. The Indian religious books portray Brahma with his wife and some regard even Nibbæna as a heavenly abode with celestial mansions where we can dwell with our families and attendants.

68. 수브라흐마 천신 이야기\n수브라흐마(Subrahma) 천신174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나무 위에서 노래를 부르며 꽃을 따고 있던 그의 시종인 천녀들이 갑자기 죽어서 모두 무간지옥에 태어났습니다. 수브라흐마 천신은 시종들이 무간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동시에 자신도 며칠 뒤에 죽어서 그들과 똑같은 운명에 처할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174. 주석서(SA.i.88f.; DA.iii.750; MA.i.190f)에 따르면 수브라흐마(Subrahma)는 삼십삼천의 천신이었는데 하루는 1천명의 요정들을 거느리고 난다와나(Nandavana)로 놀러 갔다. 5백 명의 요정들은 나무아래에 앉아 있었고, 다른 5백 명의 요정들은 나무위에 올라가서 화환을 던지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나무위에 있던 5백 명의 요정들은 순식간에 사라져서 무간지옥에 태어났다. 수브라흐마는 사라진 5백 명의 요정들이 모두 무간지옥에 태어났음을 발견하고 자기 운명을 조사해보니 자신도 7일밖에 더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려움과 슬픔에 휩싸인 수브라흐마는 위안을 얻기 위해 부처님을 찾아왔고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예류과를 얻었다.
“깨달음의 구성요소[七覺支]와 두타행(頭陀行) 이외에는 감각기능[根]을 단속하는 계 이외에는\n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것[出離] 이외에는 중생들의 안전을 나는 보지 못하노라.”(S.i.53)
소스라치게 놀란 천신은 부처님을 찾아가서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곳을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번뇌를 끝내는데 이바지 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 [七覺支法], 두타행(頭陀行)175, 네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176을 닦고, 번뇌를 피하는데 도움을 주는, 감각기능을 단속하는 계 그리고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출리(出離)를 뜻하는 열반 이외에 구원에 이르는 다른 길은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법문을 듣자, 천신과 그 시종들은 성스러운 도의 첫째 단계인 예류과를 성취하였습니다.
175. 두타행(頭陀行 dhuta?ga)은 「청정도론」(Vis.Ⅱ)에 상세히 나오는데 다음과 같은 13가지가 있다. 부처님 당시 이 두타행에 으뜸인 분이 바로 제 1차 결집을 주도한 마하깟사빠(Mah?-kassapa)였다. (1) 분소의(糞掃衣)를 입는 수행 (2) 삼의(三衣)만 수용하는 수행 (3) 탁발음식만 수용하는 수행 (4) 차례대로 탁발하는 수행 (5) 한 자리에서만 먹는 수행 (6) 발우의 탁발음식만 먹는 수행 (7) 나중에 얻은 밥을 먹지 않는 수행 (8) 숲에 머무르는 수행 (9) 나무 아래 머무는 수행 (10) 노천에 머무는 수행 (11) 공동묘지에 머무는 수행 (12) 배정된 대로 머무는 수행 (13) 눕지 않는 수행
176. 네 가지 바른 노력으로 옮긴 삼마빠다나(samm?-ppadh?na)는 사정근(四精勤)으로 번역했고 영어로는 four effort, four supreme efforts라고 한다. 이 사정근에는 (1) 이미 일어난 불선법을 버리려는 노력 (2)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선법을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노력 (3)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한 법을 일으키려는 노력 (4) 이미 일어난 선한 법을 증장시키려는 노력 등 네 가지가 있다. 이 사정근(四精勤)은 팔정도의 6번째인 바른 정진(正精進)의 내용이며, 다섯 가지 기능(五根 panca-indriya)과 다섯 가지 힘(五力 panca-bala)의 두 번째인 정진(viriya)의 내용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가 눈 여겨 봐야 할 것은 천녀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입니다. 쾌락을 쫒는데 몰두하다가 갑자기 죽는 이들은 불선한 업의 충격파로 지옥에 떨어지기 쉬운 운명이기 때문에 참으로 무시무시합니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어떤 조짐이 보이면, 두려움이 일어나 그들을 더욱 더 고통스럽게 합니다.
쾌락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되는 괴로움은 비단 욕계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괴로움은 또한 무색계의 범천들의 운명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범천계에는 성적인 쾌락이나 다른 감각적 쾌락이 없습니다. 범천들은 그저 보고, 듣고, 생각하기만 할뿐, 그들이 보고, 듣는 대상들에는 성적인 연상이 없습니다.
하지만「청정도론」(Vis.XVII.264)에 나와 있듯이, 일부 사람들은 소문이나 추론을 통해서 범천계의 감각적 쾌락은 인간계와 천신계의 감각적 쾌락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범천계의 감각적 쾌락에 대해 갈애를 일으킵니다. 이는 다름 아닌 바로 궁극적으로 색계 범천계나 무색계 범천계에 태어나게 하는 색계선, 무색계선을 증득하도록 하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입니다.
일부 사람들이 범천계의 감각적 쾌락을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은 놀랍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을 잘 아는 사람은 이러한 관념을 부정하겠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에겐 아마도 호소력이 있을 것입니다. 인도의 종교서적들은 범천을 아내와 같이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고177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열반을 자신의 가족, 시종들과 함께 살 수 있는 천상의 궁전이 있는 극락세계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177. 불교에 따르면 욕계 천상의 신들은 아내를 거느리고 있지만 범천의 신들은 이미 거친 감각적 욕망을 제거했기 때문에 아내가 없으며 성별의 구분도 없다. 그래서 독신수행을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라고 한다. 이렇듯 brahma-cariya의 일차적인 의미는 성행위를 완전히 여읜 삶을 뜻하며, 이것이 출가 수행자의 청정하고 거룩한 삶을 가리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Kæmaupædæna here means not only the excessive craving for sensual pleasure. It means also the developed forms of craving for the material and immaterial (rþpa and arþpa) worlds. Hence according to Visuddhimagga, the yogø can do away with this inordinate craving only at the last stage of the holy path and it is this craving that lies at the root of every effort to attain rþpa or arþpa jhæna.
For ordinary people such jhæna means rþpa or arþpa jhæna. For ordinary people such jhæna means rþpa or arþpa kammic effort based on sensual craving and this leads to rebirth in rþpa or arþpa world of Brahmæs. From the time of rebirth there arises the ceaseless ageing (jaræ) of næmarþpa or either of the two phenomena of life. The senility of the Brahmæ is not apparent like that of a human being but still it leads to decay and when his course is run, he cannot avoid death.
Being free from hatred, the life of a Brahmæ is not subject to grief, worry, anxiety and so forth; and the lack of physical sensitivity makes him free from physical suffering. He cannot, however, escape birth, old age and death that are inherent in every kind of existence. So escape from old age and death presupposes the effort to rule out the possibility of rebirth.
In order to avoid rebirth, we must seek to avoid wholesome of unwholesome kamma and negation of kammic existence calls for negation of attachment and craving. For this purpose the mental process must end in feeling and stop short of developing the desire for anything. This denial of desire through the contemplations, anicca, dukkha and anatta of everything arising from the senses is the only way to avoid craving, rebirth and other links in the causal sequence that leads to old age and death. This means the temporary extinction of suffering which the yogø can overcome once and forever when he develops vipassanæ insight on the holy path.

69.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은 모든 종류의 지나친 갈애를 뜻한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k?m?-up?d?na)은 단지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지나친 갈애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색계와 무색계까지 확장된 형태의 갈애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청정도론」에 따르면, 수행자는 성스러운 도의 마지막 단계에 가서야 비로소 이 지나친 갈애를 없앨 수 있고 이 갈애는 색계선과 무색계선을 얻고자 하는 모든 노력의 근저에 도사리고 있는 갈애입니다.
범부에게 있어 그러한 선정은 감각적 쾌락에 토대를 둔 색계나 무색계의 업의 노력을 뜻하며 이는 색계범천이나 무색계범천계에 태어나게 합니다. 그렇게 태어난 순간부터 정신-물질이나 삶의 두 현상 중 어느 하나에 끊임없는 늙음이 진행됩니다. 범천이 늙는 것은 사람이 늙는 것처럼 그렇게 명확하게 드러나진 않지만 그래도 쇠해가는 것만은 확실하며, 그 진행이 끝나면 범천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성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범천의 삶은 슬픔, 근심, 걱정 등을 겪지 않습니다. 또한 몸의 감성 물질이 없기 때문에 범천은 육체적인 고통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범천도 모든 유형의 존재에 내재해 있는 태어남, 늙음, 죽음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늙음과 죽음에서 벗어나려면 재생의 가능성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재생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선업과 불선업을 피하고, 집착과 갈애를 부르는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를 거부하려는 노력을 취해야 합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정신적 과정은 반드시 느낌[受]으로 끝나야 하고, 무언가에 대한 욕망으로 발전하는데 까지는 이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감각장소[處]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의 무상? 고? 무아를 철견하는 관찰을 통해 욕망을 제거하는 것이 갈애, 재생, 늙음, 죽음에 이르는 원인과 결과의 다른 연결고리를 피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는 성스러운 도에서 수행자가 위빠사나 지혜를 계발하였을 때 일거에 완전히 극복할 수 있는 괴로움의 일시적 적멸(tada?ga-nibbuti)을 뜻합니다.

Di¥¥hupædæna means the attachment to the view which rejects future life and kamma. Hence ucchedadi¥¥hi which insists on annihilation after death is a kind of ditthupædæna. A person who holds such a belief will have no need to do good or avoid evil. He will do nothing for other worldly welfare and seek to enjoy life as much as possible by fair means or foul. As he has no moral scruples, most of his acts are unwholesome kammas that create deathbed visions and lead him to the lower worlds.
This is evident in the story of Nandaka peta. Nandaka was a general in the time of king Pingala who ruled Surattha country that lay north of the present province of Bombay in West India. He clung to false views such as that it was useless to give alms and so forth. After his death he became a peta on a banyan tree but when his daughter offered food to a monk and shared her merit with him, he had an unlimited supply of celestial drinks and food. He then realized the truth of the kammic law and repented of his adherence to false views in his previous life. One day he led king Pingala to his abode and entertained the king and his followers to a celestial feast. The king was much surprised and in response to his inquiry, the peta gave an account of his rebirth in the lower worlds as a kammic result of his false views, immorality and vehement opposition to alms-giving; and the sudden change of his fortune following his sharing of merit acquired by his daughter. He also described the suffering that he would have to undergo after his death, the terrible suffering in hell that he was to share with those who held wrong views and vilified the holy men during their earthly existence.
The moral of the story is that attachment to wrong views (e.g. that an act has no kammic result, etc) leads to unwholesome acts and rebirth in the lower worlds. The commentary also says that clinging to uccheda (annihilation) belief leads to deva or Brahamæ worlds if annihilation is supposed to follow demise or those higher planes of existence, but devas and Brahmas apparently do not believe in their annihilation after death. By and large the belief in annihilation makes people prone to misdeeds.
Kammic deeds may also be motivated by eternity-belief (sassatadi¥¥hi). The belief creates the illusion of personal identity, the illusion which makes a man believe that it is his permanent self that will have to bear the consequences of his good or bad deeds in a future life. So he devotes himself to what he regards as good deeds. Some of his deeds may be bad in fact but in any case his deeds, whether good or bad, that arise from eternity-belief leads to rebirth and suffering.\nStill, another mainspring of kammic deed is superstitious belief. There are many superstitions, as for example, that seeing a ma n of low class brings about misfortune, that the bee- live or an Iguana in a house is a sure omen of poverty. Under the influence of such beliefs, a person may do evil, such as treating an outcaste cruelly or killing the bees. This is borne out by the Cittasambhþta jætaka.
In the jætaka the bodhisatta was a man of low candæla class called Citta. Ænandæ was then his cousin named Sambhþta. They made their living by dancing with bamboos. One day the daughter of a merchant and the daughter of a high-caste brahmin who were very superstitious went for a picnic with their attendants. At the sight of the two dancers, they considered it an il omen and returned home. Their irate followers then beat the two men for denying them the pleasure of the picnic. The two dancers then went to Taxila and disguised as brahmins they devoted themselves to learning. Citta became a student leader by virtue of his intelligence. One day their teacher sent them to a place where they were required to recite the brahmanical parittas. There having got his mouth burnt by drinking hot milk unmindfully, Sambhþta uttered “Khalu, Khalu” in his dialect and Citta was so absent- minded as to say, “niggala, niggala”-spit out, spit out,“ these slips of the tongue led to their undoing for their high caste brahmin students found out their secret. They were beaten and expelled from school.\nOn the advice of their teacher they became rishis (forest ascetics or hermits). After their death they passed on to the animal world, first as two deers and as two eagles in their next existence. Then citta became the son of the chief Brahmin and remembered his three previous lives. He led the life of a hermit and attained jhæna and psychic powers. Sambhþta became a king, he remembered his low caste life and spent his time in the pursuit of sensual pleasure.
By means of his psychic power, Citta knew his brother’s spiritual immaturity and after waiting for 50 years he came to the king’s garden. The king recognized the hermit as his brother in a previous life and was prepared to share royal pleasures with him. But being aware of the kammic effects of good and bad deeds, the bodhisatta had pledged himself to a life of self-restraint, renunciation and detachment. He reminded the king of their close associations in their previous lives, to wit, as low-caste candælas, as deers and as birds. His object was to point out the erratic course of kammic life and to urge the king to become an ascetic for further spiritual progress. But it was hard for Sambhþta to give up his worldly pleasures. So the bodhisatta returned to the Himalayas. Then the king became disenchanted with his worldly pleasures and went to the Himalayas where he was welcomed by the hermit. There as a hermit he devoted himself to spiritual exercises and attained jhæna and psychic powers.

70. 재생의 원인이 되는 사견에 대한 집착
사견에 대한 집착(di??hi-up?d?na)은 내생과 업을 부정하는 견해에 집착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죽고 나면 모든 것이 소멸한다고 주장하는 단견(斷見)은 사견에 대한 집착의 일종입니다. 그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선행을 하거나 악행을 삼가야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저 세상의 행복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것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능한 한 삶을 즐기려 할 것입니다. 의심이 없기 때문에 그가 하는 행위 대부분은 악처에 태어나도록 하는 임종의 표상을 일으킬 불선업입니다. 이는「아귀사」(Pv.iv.3; PvA.244ff)에 나오는 난다까(Nandaka)아귀178이야기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178. 「아귀사(餓鬼事)」에 따르면 난다까(Nandaka)는 불멸후 200년경 서인도의 수랏타(Surattha)국의 삥갈라(Pi?gala) 왕의 장군이었다. 그는 단멸론자(斷滅論者)였는데 죽어서 윈드야(Vindhay?) 숲에 사는 아귀(peta)로 태어났다. 하지만 불심 깊은 그의 딸 웃따라(Uttar?)가 한 아라한 비구에게 아버지 이름으로 보시를 하였다. 그 순간 난다까는 천상의 행복을 얻게 되었다. 그러자 난다까는 삥갈라왕이 단견을 버리게 하려고 담마아소카(Dhamma-Asoka) 왕과 회담을 마치고 돌아오는 왕을 자신의 처소로 초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라고 훈계했다고 한다.(Pv.iv.3; PvA.244ff)
난다까는 오늘날 서인도의 뭄바이 지방 북쪽에 있는 수랏타(Surattha)국을 다스리던 삥갈라(Pi?gala)왕의 장군이었습니다. 난다까는 보시 등을 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는 삿된 견해를 고수하였습니다. 그리고 죽어서는 뱅골 보리수에 사는 아귀가 되었지만 난다까의 딸이 한 비구에게 음식을 보시하고 자신의 공덕을 아버지와 함께 나누자 천상의 음료수와 음식을 무한정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난다까는 그제야 업의 법칙을 이해하고 전생에 삿된 견해를 고수했던 것을 후회했습니다. 하루는 삥갈라 왕을 자신의 처소로 데려와서 왕과 시종들을 천상의 잔치로 접대하였습니다. 왕은 깜짝 놀라서 어찌된 영문인지 물었고, 난다까는 삿된 견해를 지니고, 도덕적이지 못한 삶을 살고, 보시를 극구 반대한 업보로 악처에 태어났으며, 자기 딸이 공덕을 나누어 줌으로써 한순간에 자신의 처지가 바뀌게 된 경위를 들려주었습니다. 난다까는 죽고 나서 겪을 괴로움, 즉 인간계에 있을 때 삿된 견해를 지니고 성자를 헐뜯었던 자들과 함께 나누어야 할 지옥의 무시무시한 고통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행위에는 아무런 업보가 없다는 등의 사견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불선한 업을 지으면 악처에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주석서는 또 단멸이 죽음이나 상위 중생계를 수반하게 되어 있다면 단견에 대한 집착으로도 천신계나 범천계에 이를 수 있다고 합니다.179하지만 천신들과 범천은 확실히 자신들이 죽은 뒤에 모든 것이 끝난다고 믿는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대체로 단견은 사람들로 하여금 악행을 짓도록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179. 「청정도론」(Vis.XVII.265)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다른 사람은 욕계의 행복한 존재나 색계와 무색계 존재 가운데 어느 한 곳에서 이 자아라는 것이 끊어질 때 모든 것은 완전히 끊어진다는 단견을 가져 거기에 이르는 업을 짓는다. 그의 업이 업으로서의 존재[業有]이고, 업으로부터 생긴 무더기들이 재생으로서의 존재[生有]이다. 인식을 가진 존재 등은 이 안에 포함된다. 견해에 대한 집착은, 그 종류를 분석하고 또 종합하여 설명한 욕계, 색계, 무색계의 세 존재 모두에게 조건이 된다.”(Vis.XVII.265)
업의 행위는 상견(常見)에 의해서도 유발될 수 있습니다. 이 상견은 개인의 실체가 있다는 전도된 인식을 유발하며, 이 전도된 인식으로 사람은 내생에 자신의 선업이나 악업의 과보를 받아야 하는 것은 바로 영원한 자아라고 믿게 됩니다. 그래서 상견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선행이라고 여기는 일을 하는데 전념합니다. 그의 행위들 중 몇몇은 사실 악할 것이지만 어쨌든 상견에서 비롯된 그의 선하거나 악한 행위들은 재생과 괴로움에 이릅니다.
게다가, 또 다른 업의 행위의 주요 동기는 미신에 대한 믿음입니다. 수많은 미신들이 있는데, 예를 들면, 하위 계급의 사람을 보면 재수가 없다든지, 집에 벌집이 있거나 이구아나가 살면 반드시 가난해질 징조라는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미신의 영향으로 사람은 불가촉천민180을 잔인하게 다루거나, 벌을 죽이는 것과 같은 악행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찟따삼부따 본생경(Cittasambh?ta J?taka)」(J.498)에서 입증됩니다.
180. 카스트제도는 인도의 독특한 봉쇄적 신분계급이다. 카스트(caste)라는 용어의 어원은 라틴어의 castus(순혈)와 포르투갈어의 casta(혈통)로부터 만들어진 말이라 한다. 인도에서는 베다시대 이래로 출생에 의해 사회적 신분과 직업 등 일체를 카스트에 따라 구분하여 규정함으로써 특이한 사회계급 제도를 구성하고 있다. 고대사회에서는 사제(司祭)인 바라문(br?hma?a), 왕후나 무사인 찰제리(k?atriya), 농? 공? 상업에 종사하는 서민인 바이사(vai?a), 노예인 수드라(??dra)의 4성의 구별이 있었지만, 점차로 가지를 쳐서 부(副)카스트가 생기고 잡종계급도 생겨 종교적, 역사적, 사회적으로 복잡한 모습을 나타내게 되고 종족, 종교, 직업 등에 따라서도 가지를 쳐서 현재에는 그 세분된 수가 2천 내지 3천에 이른다고 한다. 다른 카스트 사이에는 식사와 결혼이 금지되고, 극히 복잡하고 엄격한 풍습과 계율을 지킨다. 현대에는 바라문 계급은 그 특성을 고집하고, 크샤트리아는 서북 인도의 라지푸트족 및 지주계급 등에 그 모습을 전하고, 바이샤는 일반 상업자에 의해 대표되고 있다. 또 카스트에도 들지 못하는 최하층 계급으로서 불가촉천민(outcaste)이 있는 바, 인도 독립 후로는 평등한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아 이 불가촉천민의 출신자로서 지도적 역할을 떠맡고 있는 사람도 많다. 카스트제도는 현재 인도공화국의 헌법에 의해 부정되고 있지만 농촌에서는 아직도 실제문제로 남아 있어 인도의 근대화를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으며, 이 카스트 문제의 해결이 인도국가의 발전과 국민의 번영의 관건이 되어 있다.
이 본생경에서 보살은 하위 계급인 짠달라(ca???la)181에 속하는 찟따(Citta)라는 이름의 사내였습니다. 그때 아난다(?nanda)는 삼부따(Sambh?ta)라고 하는 보살의 사촌동생이었습니다. 그들은 대나무를 가지고 춤을 추며 먹고 살았습니다. 하루는 미신을 너무 믿는 장자의 딸과 상위 계급의 바라문의 딸이 시종들을 데리고 소풍을 나왔습니다. 그 두 춤꾼을 보자 재수 없다고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자 소풍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게 된 성난 시종들은 두 사내를 두들겨 팼습니다.
181. 짠달라(ca???la)는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을 말한다.
그 뒤 두 춤꾼은 탁실라(Taxila)182로 가서 바라문으로 위장하고 공부에 몰두했습니다. 머리가 좋았던 찟따는 학생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하루는 스승이 그들을 바라문교의 호주(護呪)183를 암송해야 하는 곳으로 보냈습니다.
182. 탁실라(Taxila)는 현재 파카스탄 라왈핀디 부근의 지명으로 빨리 경전에서는 딱까실라(Ta?kkasil?)로 나온다.「본생경」은 이곳을 간다라 왕국의 수도이자 학문의 큰 중심지로 언급하고 있다. 그렇지만 비하르의 날란다에 있는 것과 같은 강연장과 거주지역을 갖춘 대학 도시는 아니었다. 탁실라에서 교사는 제자들을 유숙시켰고 그들은 하숙비를 스승과 가족에게 현금이나 용역의 형태로 지불했다.
183. 호주(護呪)로 번역되는 빠릿따(paritt?)는 질병이나 악령의 해코지나 다른 여러 위험들로부터 보호하는 주문을 뜻한다. 이 호주는 빨리 5부경에 보호의 목적으로 독송되는 경으로 등장한다.「밀린다왕문경」에는 「보경(寶經 Ratana Sutta)」(Sn.222~238), 「온호주(蘊護呪 Khandha-paritta)」, 「공작호주(孔雀護呪 Mora-paritta)」(J.ii.33f), 「다작가 호주(Dhajagga-paritta)」(S.i.218f), 「아따나니야 호주(??n?tiya-paritta)」, 「앙굴리말라 호주(A?gulim?la-paritta)」(M.ii.97ff)를 들고 있다. 이밖에도 상좌부 불교권에서는 「길상경(Ma?gala sutta)」(Sn.258~269)와 「자애경(Mett? Sutta)」(Sn.258~269)도 호주에 넣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길상경」, 「자애경」, 「앙굴리말라경」등은 지금도 상좌부 불교국가에서 아침저녁으로 널리 독송되고 있다.
거기서 뜨거운 우유를 무심코 마시다가 입을 덴 삼부따가 짠달라 계급이 쓰는 말로 “칼루, 칼루!(뜨겁다)”라고 외치자, 찟따도 무심결에 “닉갈라! 닉갈라!(토해버려)”라고 외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혀를 잘못 놀린 것이 화근이 되어 상위 계급인 바라문 학생들에게 정체를 들키고 말았습니다. 둘은 흠씬 두들겨 맞고는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스승의 권유에 따라 그들은 숲속에 들어가 선인(仙人)184이 되었습니다. 죽어서는 축생계에 태어났는데 처음엔 두 마리 사슴으로, 그 다음 생에는 두 마리의 독수리로 태어났습니다. 그 다음에 찟따는 바라문 수장의 아들로 태어나서 자신이 살아온 세 전생을 기억했습니다. 그는 선인이 되어 선정과 신통력을 얻었습니다. 삼부따는 왕이 되어 자신이 전생에서 낮은 계급이었음을 기억하고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면서 세월을 보냈습니다.
184. 선인(仙人)이라고 번역한 isi(산스크리트어는 rishi)는 숲속고행자를 뜻한다. 영어로는 hermit, forest ascetic등으로 표현한다.
신통력으로 동생이 아직 영적으로 미숙하다는 것을 알고는 50년을 기다린 다음에 왕의 정원으로 갔습니다. 선인이 전생에서 자신의 형이었음을 알아본 왕은 선인에게도 왕의 쾌락을 나누어 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선행과 악행의 과보를 아는 보살은 제어(sa?vara), 출리(nekkhamma), 이욕(vir?ga)의 삶을 살기로 맹세하였습니다.
보살은 왕에게 전생에 그들이 최하위계급의 짠달라로, 사슴으로, 독수리로 서로 가까운 사이였음을 상기시켰습니다. 삶에서 업의 변덕스러운 과정을 지적하여 왕이 영적인 진보를 더 이루기 위해 사문이 될 것을 촉구하는 것이 보살의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삼부따가 세속적 쾌락을 저버리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보살은 히말라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 뒤 왕은 세속적 쾌락에 환멸을 느끼고는 히말라야로 들어갔고 거기서 선인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선인이 된 왕은 영적인 수행에 매진해서 선정과 신통력을 얻었습니다.

What we wish to emphasize in this story is the evil kammas that arise from superstitions. The role of superstition as the cause of evil deeds is also evident in the story of Koka, the hunter. In the time of the Buddha there was a hunter called Koka in a certain village. One day he set out with his dogs to hunt in the forest. On the way he met a monk who was out on his begging round.
The hunter considered this encounter an omen that boded no good. As luck would have it, he did not get any animal for food on that day. On his return he again met the monk. Now blind with fury and ill will, he set his dogs on the monk. The monk had to run and climb up a tree. He sat on a branch that was not very high. The hunter poked at the feet of the monk with the sharp end of an arrow. The latter had to lift his feet one after the other and at last his robe got loose and slipped down. It fell upon the hunter and seeing him thus wrapped up in the robe, the dogs mistook him for the monk and attacked him. Thus he was killed by his own dogs. Then realizing that they had killed their master, the dogs ran away.
The monk got down from the tree and reported the matter to the Buddha. Thereupon the Lord says, “The foolish man wrongs a person who has never wronged another. He wrongs a person who is free from defilements. But his evil deed boomerangs on him just like the particle of dust that returns to us when we throw it against the wind.”\nHere the hunter’s terrible death, his rebirth in the lower worlds and suffering arise from an evil deed that in turn is rooted in his superstition. Some people get alarmed when an astrologer says that the positio n of planets bodes no good for them. So they offer flowers and candles to the Buddha image, give dænæ to the monks, hear the sermons and practise meditation. Some have the partitas recited by monks to stave off the impending evil that they associate with their unpleasant dreams.
Their good deeds lead to good rebirth but like the other rebirths that stem from evil deeds, it too is fraught with suffering. Some ignorant people do evil to keep off the misfortunes that might befall them. The jætakas mention the animal sacrifice of some kings that involves the killing of four goats, four horses, four men and so forth as propitiatory offerings to gods. On one occasion this kind of rite was planned by king Kosala in the time of the Buddha.
The king had taken a fancy to a married woman and so one day he sent her husband on an errand to a distant place. Should he fail to accomplish the task entrusted to him and return to the capital on the same day, he was to be punished. The man carried out the king’s order and returned before sunset but the city- gate was closed and so being unable to enter the city, he spent the night at Jetavana monastery.
Overwhelmed with lust and evil desire, the king could hardly sleep in his palace. He heard the voices of the four men who were suffering in hell for having committed adultery in their previous lives. It was perhaps by virtue of the Buddha’s will and psychic power that the king heard these voices from hell. The king was frightened and in the morning he sought the advice of the Brahmin counseller. The Brahmin said that the voices portended imminent misfortune and that in order to stave it off the king should sacrifice elephants, horses, etc., each kind of animals numbering a hundred.
The king made preparations for the animal sacrifice. How cruel is human nature, that dictates the sacrifice of thousands of lives to save one’s own life! Among the potential victims there were human beings and hearing their cries, queen Mallika approached the king and asked him to seek the advice of the Buddha. The Buddha assured the king that the voices had nothing to do with him. They were the voices of four young men who having seduced married women in the time of Kassapa Buddha were now suffering in Lohakumbhi hell. They were now repentent and belatedly trying to express their desire to do good after their release from hell. The king was very much frightened and vowed never to lust for another man’s wife. He told the Buddha how the previous night had seemed very long because he could not sleep. The man who had fetched what the king wanted said too that he had travelled one yþjana the previous day. There-upon the Buddha uttered the verse: “To one who cannot sleep, the night seems long; to the weary traveller, a yþjana is a long distance. Similarly for the foolish man who does not know the true dhamma, the life-cycle is long.” After hearing this gæthæ, many people attained sotæpæ¼na and other stages on the holy path. The king ordered the release of all living beings that were to be sacrificed. But for the Buddha’s words, he would have done unwholesome kammas and this story shows how superstitious beliefs lead to evil deeds.

71. 미신과 나쁜 재생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미신에서 비롯되는 악업입니다. 악업의 원인이 되는 미신의 역할은 「법구경」주석서(DhA.iii.31f)에 나오는 사냥꾼 꼬까(Koka)이야기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부처님 당시 어떤 마을에 꼬까라는 하는 사냥꾼이 살았습니다. 하루는 사냥꾼이 개를 데리고 사냥을 하러 숲으로 들어갔는데 중간에 탁발을 나가던 한 비구를 만났습니다. 사냥꾼은 이를 나쁜 징조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사냥꾼은 그날따라 양식에 쓸 짐승을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사냥꾼은 또 그 비구를 만났습니다. 증오심과 격노에 눈이 먼 사냥꾼은 비구를 향하여 개들을 풀었습니다. 비구는 도망쳐서 나무위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비구는 그다지 높지 않은 가지위에 앉았습니다. 사냥꾼은 날카로운 화살촉으로 비구의 발을 찔렀습니다. 그래서 비구는 왼쪽 발을 들어 올렸다 오른쪽 발을 들어 올렸다 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나중에는 가사가 느슨해져서 밑으로 흘려 내렸습니다. \n가사는 사냥꾼의 몸 위로 떨어졌고, 그렇게 가사를 두른 것을 본 개들이 비구인줄 착각하고 사냥꾼을 공격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냥꾼은 자신의 개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자기 주인을 죽인 것을 알게 된 개들은 도망쳐 버렸습니다.
비구는 나무에서 내려와 이 사실을 부처님께 보고 드렸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정하고 허물없는 사람에게 어리석은 자가 악행을 하면 그 결과가 다시 그에게 돌아가나니. 마치 바람을 향해 뿌린 먼지처럼.” (Dhp.125)
이 이야기에서 사냥꾼의 참혹한 죽음, 악처에 태어난 것, 괴로움은 모두 악행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악행은 사냥꾼의 미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점성가가 별자리가 자신에게 안 좋은 징조라고 이야기 하면 화들짝 놀랍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상에 꽃과 초를 공양 올리고, 비구들에게 보시를 하고, 법문을 듣고 명상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즐겁지 못한 꿈과 관련된 임박한 악운을 막기 위하여 비구들에게 호주를 외게 합니다. 그들의 선행은 좋은 재생에 이르지만 악행에서 비롯된 다른 재생과 마찬가지로 이 또한 괴로움이 따릅니다.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은 닥쳐올지 모르는 불운을 막기 위해 악행을 합니다. 본생경은 신들을 달랠 재물로 네 마리 염소, 네 마리 말, 네 명의 사람을 죽이는 몇몇 왕의 동물 공희제(供犧祭)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법구경」 주석서(DhA.ii.5ff)나 「로하꿈비 본생경(Lohakumbh? J?taka)」(J. 314)등에 보면 부처님 당시에도 빠세나디 꼬살라왕185이 이러한 공희제를 거행하려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185. 빠세나디 꼬살라(Pasenad?-Kosala)는 마하꼬살라(Mah?-kosala)의 아들이었다. 그는 그 당시 인도 최고의 상업도시이자 교육도시로 알려진 딱까실라(Takkasil?)로 유학하여 릿차위(Licchav?)의 마할리(Mah?li)와 말라(Malla)의 반둘라(Bandhula)왕자 등과 함께 공부하였으며 여러 학문과 기술에 능통하였다고 한다. 그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자 마하꼬살라왕은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DhpA.i.338) 그는 선정(善政)에 힘썼으며 뇌물과 부패를 청산하려고 애썼다고 한다.(SA.i.109) 그의 정비는 말리까(Mallik?)였는데 부처님께 크나큰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그녀가 기증한 정사도 있었다. 그는 부처님과 같은 해, 같은 날에 태어났다고 하며, 그래서 일찍부터 부처님과 교분을 맺었으며 죽을 때까지 헌신적인 부처님의 신도였다. 그가 얼마나 부처님을 존경하고 흠모하였는지는 『중부』「법탑경」(M89)등 여러 경전에서 나타나고 있다.
여러 문헌(DhpA.i.339; J.i.133; iv.144등)에 따르면 그는 석가족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부처님과 인척관계를 맺고 싶어 하였다. 자부심이 강한 석가족은 마하나마(Mah?-n?ma)와 하녀 사이에 난 딸린 와사바캇띠야(V?sabhakhattiy?)를 보냈으며, 이들 사이에서 난 아들이 바로 위두다바(V?d?dabha) 왕자이다. 위두다바 왕자가 커서 까삘라왓투를 방문하였다가 이 이야기를 듣고 격분하였고, 그래서 후에 위두다바는 석가족을 정복하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참한 살육을 하였다고 한다. 이 위두다바는 빠세나디 왕의 총 사령관인 디가까라야나(Digha-k?r?yana)의 도움으로 모반을 일으켜 왕이 되었으며, 빠세나디는 마가다(Magadha)로 가서 아자따삿뚜의 도움을 청하려 하였지만 그가 라자가하(R?jagaha)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성문은 닫혀 있었다. 노후한 몸에 피로가 엄습한 그는 성 밖의 객사에서 그날 밤에 죽었다고 하며 아자따삿뚜가 그의 시신을 잘 수습하였다. 이에 아자따삿뚜는 위두다바를 공격하려다가 대신들의 조언으로 그만 두었다고 한다. (M.ii.118; MA.ii.753; DhpA.i.353; J.iv.150)
그에게는 브라흐마닷따(Brahmadatta)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부처님의 문하에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고 하며(ThaA.i.460) 그의 여동생 수마나(Suman?)공주도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제따 숲을 기증한 제따(Jet?) 왕자도 그의 아들이었다. 부처님께서 후반부의 24여년 간을 사왓티(S?vatthi)에서 머무실 정도로 꼬살라와 부처님과는 인연이 많은 곳이며 『상응부』의 세 번째 상응인 「꼬살라 상응」(S3)은 모두 빠세나디 왕과 관계된 가르침일 정도로 부처님과는 가장 인연이 깊었던 왕이었다. \n후대 주석서인「아나가따왐사(An?gatava?sa)」에 따르면 빠세나디는 4번째 미래불이 될 보살이라고 한다.
어느 때 빠세나디 꼬살라 왕은 한 결혼한 여자에게 연정을 품어서, 그녀의 남편을 먼 곳에 심부름 보냈습니다. 그가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고 당일에 도성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처벌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사내는 왕명을 완수하고 해가 지기 전에 돌아왔으나 성문이 닫혀 있어서 도성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기원정사(祇園精舍)에서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욕정과 삿된 욕망에 사로잡힌 왕은 왕궁에서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왕은 전생에 간통을 범했기 때문에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네 명의 사내들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왕이 지옥에서 나는 이러한 소리를 들은 것은 어쩌면 부처님의 의지와 신통력에 의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왕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아침에 고문인 바라문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바라문은 그 소리는 불운이 곧 닥쳐온다는 전조이므로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각각 백 마리씩의 코끼리와 말 등을 공희제에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n왕은 공희를 지내기 위한 준비를 했습니다. 자기 한 목숨을 구하기 위해 수많은 산목숨을 희생시키도록 지시하니 인간의 본성이란 이 얼마나 잔인합니까! 산 재물들 가운데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그들의 울음소리를 들은 말리까(Mallik?) 왕비186가 왕에게 가서 부처님께 조언을 구할 것을 청했습니다.
186. 말리까(Mallik?)는 꼬살라(Kosala)국의 빠세나디(Pasenadi) 왕의 정비였다. 말리까(Mallik?)는 재스민 꽃을 뜻하는데, 원래는 꼬살라의 화환 만드는 사람의 딸이었다. 16살 때 하루는 바구니에게 세 그릇의 유미죽을 가지고 친구들과 정원으로 가던 길에 부처님을 뵙자 그 죽을 드리고 예배를 올렸다. 부처님께서는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는 미소를 지으셨다. 아난다(?nanda) 존자가 부처님께 미소 지으신 이유를 여쭙자, 바로 그날 꼬살라의 정비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J.iii.405; SA.i.110ff). 부처님께서는 말리까의 행운을 설명하기 위해서 「꿈마사핀다 본생경(Kumm?sapinda J?taka)」(J.416)을 설하셨다.
그 날 빠세나디왕은 아자따삿투왕과 싸우다가 크게 패하고 실의에 빠져 돌아오는 길에 말리까의 목소리에 끌려 화원으로 들어왔다. 말리까는 왕이 오는 것을 보고는 앞으로 나가 말의 고삐를 잡았다. 왕은 지쳤기 때문에 이내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잠에 들었고 말리까는 왕을 정성으로 모셨다. 말리까의 상냥함에 만족한 왕은 바로 그날로 그녀에게 수많은 보석을 하사하고 왕궁으로 데려가 정비로 삼았다. 그 날부터 말리까는 왕의 총애를 받는 아내가 되었고 또 부처님의 헌신적인 신자가 되었다.
말라까는 빠세나디왕과의 사이에 딸을 하나 두었지만 경전에는 이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 딸은 「밀린다왕문경」(M.ii.110)에서 왕의 유일한 딸이라고 하는 와지리(Vaj? r?)인것 같다. 빠세나디왕은 태어난 아기가 딸인 것을 알고 크게 실망했지만 부처님께서 여자도 때로는 남자보다 지혜롭다고 왕에게 용기를 주셨다.(S.i.86f).
「밀린다왕문경」(Mil. 115, 291)은 그녀를 선업의 과보가 현생에서 바로 결실을 맺고 그 명성이 천신들에게까지 미친 일곱 사람들 중의 한명으로 거론하고 있다. 그리고 말리까는 뛰어난 여신도(up?sika) 가운데 하나로 언급되고 있다.(A.iv.348). 말리까는 어느 때 부처님께 왜 어떤 여자들은 평범한 용모에 가난한데 반해, 어떤 여자들은 아름답고 부유한지를 여쭈었고 부처님은 아름답고 부유한 여자들은 전생에 화내지 않고 보시에 힘썼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셨다.(S.i.75)
말리까는 왕의 모범적인 아내이자, 부처님의 헌신적인 신자였지만 생전에 어떠한 도과도 얻지 못했다.「법구경」 주석서(DhA.iii.119ff)는 말리까가 욕실에서 애완견과 성적으로 그릇된 행위를 한 황당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빠세나디왕이 그 광경을 우연히 보았지만, 왕에게는 욕실의 조명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라고 거짓말을 둘러댔다. 하지만 임종의 순간 말리까는 자신의 그릇된 행위를 떠올렸고 그 때문에 무간지옥에 태어나 7일 동안 고통을 받다가 도솔천으로 올라갔다.
부처님께서는 왕에게 그 소리는 왕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안심시켜 주었습니다. 그 소리는 까사빠 부처님187 당시에 결혼한 여자들을 유혹한 네 명의 젊은이가 지금 로하꿈비(Lohakumbh?) 지옥188에서 고통을 받으며 내는 소리이며 그들은 지금 뉘우치고 있으며 뒤늦었지만 지옥에서 벗어나고 나면 선행을 하겠다는 생각을 말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187. 까사빠 부처님(Kassapa Buddha)은 행운의 겁(賢劫 bhadda-kappa)에 출현한 과거 네 분의 부처님 가운데 세 번째 부처님으로 고따마 부처님의 바로 전대에 출현하신 부처님이다.
188. 로하꿈비 지옥(Lohakumbh?-niraya)은 쇠솥지옥이란 뜻이다. 로하꿈비야(Lohakumbh?ya) 지옥이라고도 한다. 이 지옥에 태어나는 중생들은 극심한 열에 의해 고통을 받는다.(SNA.i.59; J.iii.22; v. 269). 이 지옥은 전 지구의 밑바닥에 걸쳐 뻗쳐있고, 수는 4 나유타(nahuta)이며, 깊이는 10만 유순이라고 한다. 그리고 용해된 쇳물로 가득 차 넘치는 큰 쇠솥과 같이 생겼다고 한다.(SNA.ii.480).
왕은 크게 놀라서 이제 남의 아내에게 욕정을 품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왕은 부처님께 잠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에 간밤이 어떻게 아주 길게 느껴졌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왕의 원하는 것을 가지고 온 사내는 어제 1유순(由旬)189이나 되는 먼 길을 다녀왔다고 했습니다.
189. 유순(由旬)으로 음역한 요자나(yojana)는 고대 인도의 길이 단위로서 소를 멍에 매어 쉬지 않고 한 번에 갈수 있는 거리이며 대략 7마일 즉 11km의 거리라고 한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다음 게송을 읊으셨습니다.
“잠 못 이루는 자에게 밤은 길고, 지친 여행자에게 1유순은 멀며, 참된 가르침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에게 생사윤회의 길은 멀어라.”
이 게송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성스러운 도의 예류과와 그 밖의 다른 과를 얻었습니다. 왕은 공희제에 쓰려고 했던 중생들을 풀어주라고 명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이 없었다면 왕은 불선업을 지었을 것이기 때문에 이 이야기도 미신을 믿으면 어떻게 악행을 하게 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Good or evil kammas are also born of religious attachments. By and large people believe that theirs is the only true religion, that all other religions are false. So they try to spread their religion, convert other people by force or otherwise persecute the non-believers. All these evils had their origin in religious upædæna or fanaticism.
Again kammic deeds may stem from attachment to ideology or views on worldly matters. Some people seek to impose their creed on other people by every means in their power, they propagate it in various ways and they discredit or slander or undermine the unity of those who do not agree with them. All these efforts and activities form the kamma-bhava due to upædæna. In short, all obsessions with practices, and beliefs other than the ego-belief mean excessive attachment to views that leads to kammic deeds.

72. 종교에 대한 집착
종교에 대한 집착으로 선업이나 악업을 짓기도 합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만이 진리이며 남의 종교는 모두 거짓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를 전도하려고 하고, 강제로 다른 사람을 개종시키거나 믿지 않는 사람들을 박해합니다. 이러한 모든 악행은 종교에 대한 집착인 광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또한 업의 행위는 이데올로기나 세속적 문제의 견해에 대한 집착에서도 유발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될 수 있는 한 모든 수단을 써서 자신의 신조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려 하고, 그 신조를 온갖 방법으로 전파하며,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의 단합을 해치거나 명예를 훼손하거나, 중상을 일삼습니다. 이러한 모든 노력과 행위는 집착에서 비롯된 업으로서의 존재[業有]입니다.
요컨대, 자아가 있다는 믿음으로 하는 수행과 신앙에 사로잡히는 것은 곧 업의 행위에 이르는 견해에 지나치게 집착함을 뜻합니다.

Some people believe that they can attain salvation through certain practices that have nothing to do with the four noble truths. Such a belief is called sølabbatupædæna. It is sølabbatupædæna too to worship animals, to adopt the animal way of life, to perform certain rites and ceremonies in the hope of attaining salvation.
According to Vøsuddhimagga, some people rely on these practices as the way to salvation and do kammic deeds that lead to rebirth in the human world, the deva world and the material (rþpa) and immaterial (arþpa) worlds.
The Visuddhimagga refers only to kammas leading to the human and other higher worlds. It makes no mention of the kammas leading to the lower worlds. It does not follow, however, that sølabbatupædæna does not give rise to bad kammas. The commentary does not mention the evil kamma arising from sølabbatupædæna only because it is too obvious to need allusion. It is said in the Kukkurava¥økæ and other suttas that a man is reborn as an ox or a dog if he lives to the letter like those animals in deed, word or thought or he is reborn in hell or in animal world if he accepts the false belief but does not practise it fully. Needless to say, the killing of animals as a sacrifice to gods that arises from this upædæna leads to the lower worlds, and so do other misdeeds resulting from the upædæna that is bound up with certain forms of worship, rites and ceremonies.
In short, every belief in the efficacy of a practice as an antidote to evil is sølabbatupædæna. According to the commentaries on Visuddhimagga it is sølabbatupædæna even to rely entirely on conventional morality and mundane jhæna as the way to liberation. The arþpa jhænas attained by Ælæra and Udaka originated in this upædæna and so do the deeds of many people that are based on faith in God. All these leads to rebirth and suffering.

73.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
어떤 사람들은 팔정도와 무관한 수행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한 신념을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s?labbata-up?d?na)’이라고 합니다. 동물을 숭배하고, 동물의 사는 방식을 따르고, 구원을 얻으려는 바람에서 어떤 종교적 의식과 의례를 집행하는 것도 바로 이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입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어떤 사람들은 구원에 이르는 길로써 이러한 계율과 의식(s?labbata)에 의존하고 인간계나 천상계나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나는 업의 행위를 합니다.
「청정도론」은 인간계나 다른 상위의 세계들에 이르는 업만을 말하고, 악처에 이르는 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이 악업을 야기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주석서가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되는 악업을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언급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 뿐입니다.
『중부』「견서계경(犬誓戒經 Kukkuravatika Sutta)」(M57)과 다른 경들은 소나 개와 똑같이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하면서 살면 소나 개로 태어나고, 사견을 받아들이되 철저히 실천하지 않는다면, 지옥이나 축생계에 떨어진다고 설합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이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 때문에, 제물로 바치기 위해 동물을 죽인다면 악처에 이르게 되고, 어떤 형태의 숭배나 의례나 의식과 결부되어 있는 집착에서 비롯된 다른 악행들도 악처에 이르게 합니다.
요컨대, 괴로움에 대한 해결책으로 행하는 계율과 의식(s?labbata)이 효과가 있다는 모든 믿음은 다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s?labbata-up?d?na)입니다. 「청정도론」주석서들에 따르면 해탈에 이르는 방법으로 인습적인 도덕과 세간계의 선정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 또한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입니다.
알라라나 웃다까가 얻은 무색계 선도 이러한 집착에서 비롯된 것이며, 유일신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여 많은 사람들이 짓는 행위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 집착에서 비롯된 모든 행위로 인하여 재생과 괴로움에 이릅니다.

The last upadana (attavædupædæna) is attachment to ego-belief. It is the strong conviction about the ego-entity, the firm belief that the ego-exists permanently, that it is the agent of every deed, speech and thought.
Few people are free from this upædæna. The average man believes that it is “I” who sees, hears, moves, etc. This illusion of ego-entity is the mainspring of self-love and concern about the welfare of one’s self. The universality and omnipotence of self- love are underscored in Queen Mallikæ’s reply to king Kosala.
Mallikæ was originally the daughter of a flower vender. One day she met the Buddha on the way and offered her food. After eating the food, the Lord told Ananada that the girl would become the queen of king Kosala. On that very day king Kosala who was defeated in the battle fled on horseback. Utterly exhausted and forlorn, the king rested in the flower garden where he was tenderly attended on by Mallikæ. Being much pleased, the king took her to the palace and made her his chief queen. The Buddha’s prophecy came true because of her recent good kamma and her good deed in the past existence.
But Mallikæ was not as good looking as other lesser queens. Moreover, as a woman born of a poor family, she felt ill at ease among the courtiers. So in order to cheer her the king one day asked her whom she loved most. The answer which he expected was “Your Majesty. I love you most.” He would then tell her that he too, loved her more than anyo ne else and this demonstration of his love would, so he thought, increase their intimacy and make her more at home in the palace.
Nevertheless, as an intelligent woman who had the courage of conviction, Mallikæ replied frankly that she there was no one whom she loved more than herself. She asked the king whom he loved most. The king had to admit that he too loved himself more than any one else. He reported this dialogue to the Buddha. Then the Lord said, “There is no one in this world who loves another person more than himself. So everyone should have sympathy and avoid ill-treating another person.”
In this saying of the Buddha the word “self” or Pæ¹i: atta does not mean the atta or ætman of the ego-belief. It refers only to self in its conventional sense or the self that a man speaks to distinguish his own person from other living beings. But the ego-belief is also a source of self-love.
The more powerfull the belief is, the greater is the love of oneself. We do not love anyone more than our own selves. One loves one’s wife or husband or child only as a helpmate, an attendant or a support. Marital or parental love is no more real than love of precious jewellery. So if a person says that his love of someone is greater than his love of himself, his words must be taken with a large grain of salt. In case of life-and-death crisis even a mother will not care for her child.
Once a woman travelling with a caravan across the desert was left behind with her child, as she was asleep when the caravan departed. As the sun rose higher in the sky, the sands became hotter and she had to place her basket and then her clothes under her feet. Still the heat became more unbearable till at last she was forced to put down her child under her body. Hence the saying that even a mother will sacrifice her child for self-preservation.
Because of this self-love based on ego-belief, man seeks his welfare or the welfare of his family by fair means or foul. He does not hesitate to do evil that serves his interests. But the belief in a permanent self also leads to good kammas. Some people are motivated by the belief and so they practise søla, dæna, jhæna, etc., for their welfare in afterlife. As a result they land in deva and Brahma worlds but there they have to face again old age, death, and other evils of existence.
In short, every effort to seek one’s welfare in the present life or hereafter is rooted in egobelief. Such kammic effort differs from that arising from kæmupædæna only in that its mainspring is obsession with personal identity whereas in the case of the latter the driving- force is craving for sensual pleasure. Nevertheless for those who are strongly attached to ego-belief, egoism is closely bound up with sensual desire.\nAs for the Ariyas who are wholly free from ego-belief, they are motivated only by kæmupædæna when they do good. Thus the dæna, søla and bhævanæ of Anæthapindika, Visækha, Mahænæma and others on the holy path may stem from their desire for better life in the human and deva-worlds or for the attainment of higher stages on the path.

74.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
마지막 집착은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atta-v?da-up?d?na)입니다. 이것은 자아의 실재에 대한 강한 확신이고, 자아는 항상 존재하며 모든 행동, 말, 생각의 주인공이라는 확고한 믿음입니다.
이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보통사람들은 보고, 듣고, 움직이는 주체는 “나”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자아의 실재에 대한 전도된 인식은 자기사랑과 자신의 행복을 신경 쓰는 주요 동기입니다. 자기 사랑이 얼마나 보편적이고 무한한 힘을 지니고 있는지는『상응부』「말리까경(Mallik? sutta)」(S.i.75)에 나오는 빠세나디 꼬살라왕의 질문에 대한 말리까 왕비의 대답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말리까는 원래 꽃장수의 딸이었습니다. 어느 날 길에서 부처님을 뵙고 자신의 음식을 드렸습니다. 식사를 다하시고 난 세존께서는 아난다에게 소녀는 꼬살라 왕의 왕비가 될 것이라고 예언 하셨습니다. 바로 그날 꼬살라 왕은 전쟁에서 패해서 말을 타고 도망쳐 나왔습니다. 완전히 지치고 절망에 빠진 왕이 화원에서 쉴 때 말리까가 상냥하게 왕을 받들었습니다. 크게 기뻐한 왕은 말리까를 왕궁으로 데리고 가서 정비(正妃)로 책봉했습니다. 말리까의 최근의 선업과 전생의 선업 때문에 부처님의 예언은 실현되었습니다.
하지만 말리까는 다른 비빈들만큼 그렇게 예쁘지는 않았습니다. 게다가 가난한 가문의 출신인 말리까는 왕궁사람들 속에서 기를 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말리까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 하루는 왕이 왕비에게 누구를 가장 사랑 하냐고 물었습니다. 왕이 기대하던 대답은 “폐하를 가장 사랑합니다.”였습니다. 그러면 왕도 누구보다 왕비를 더 사랑한다고 말할 작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표현으로 자신과 왕비가 더 친밀해지고 왕비가 왕궁에서 맘 편히 지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의 용기를 지닌 지혜로운 여인인 말리까는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고 솔직하게 대답했습니다. 말리까는 왕에게 누구를 가장 사랑하는지를 물었습니다. 왕도 역시 다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왕은 이러한 대화내용을 부처님께 보고 드렸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자기 자신보다 남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연민의 정을 느껴야 하며 해코지 하지 않아야 합니다.190”
190. 경전에 나오는 부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마음으로 모든 방향으로 찾아 보았건만, 어느 곳에서도 자신보다 사랑스러운 자 얻을 수 없네,' 이처럼 다른 이들에게도 각자 자신이 사랑스러운 것, 그러므로 자기의 행복을 원하는 자, 남을 해치지 마세." (S.i.75; Ud.47; S3:8)
이 부처님의 말씀에서 빨리어로 아따(atta)라고 하는 “자기 자신”은 유신견에서의 자아나 아뜨만191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습적인 의미에서의 자아나 다른 중생들과 자기 자신을 구별하고자 말하는 자아만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유신견은 또한 자기 사랑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유신견이 강할수록 자신에 대한 사랑도 더 큽니다.
191. 아뜨만(atman)은 힌두교와 인도철학에서 말하는 자아(自我), 개아(個我), 진아(眞我)로 만물 속에 내재하는 영묘한 힘을 뜻한다. 인도의 철학자들은 이 말을 둘러싸고 많은 학설을 전개하였다. 우파니샤드나 베단타학파에서는 이것을 보편적 실재라고 생각하여 세계원리인 브라만(梵)과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하였으며, 현실의 나인 아뜨만은 브라만과 하나가 됨[梵我一如]으로써 최고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상키아 학파에서는 아트만을 순수 정신원리인 푸루샤(purua)로 보고, 물질적 원리인 프라크리띠(prakti)와 대치시킴으로써 세계의 생성을 설명한다. 이들은 이러한 불변하는 아뜨만이 매생을 재육화 한다고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윤회의 주체가 없는 연기적 흐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힌두교의 윤회는 이 아뜨만의 전변이지만 불교의 윤회는 갈애를 근본원인으로 한 다시 태어남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남을 더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아내나 남편, 또는 자식을 배우자, 동반자, 조력자로써만 사랑할 뿐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이나 아버지의 사랑은 보석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현실적입니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가 누구에 대한 사랑은 자신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크다고 말한다면 그러한 말의 신빙성을 의심해야 합니다. 생사의 위기에 부딪치면 어머니도 자기 자식을 돌보지 않게 됩니다.
어느 때 사막을 가로질러 가는 대상(隊商)과 함께 여행을 하던 여인이 잠들어 있을 때 대상들이 떠나는 바람에 아이와 함께 뒤에 남게 되었습니다. 태양이 하늘 높이 솟아올라 모래가 점점 뜨거워지자 엄마는 광주리를 놓고 자기 발밑에 옷가지를 두었습니다. 계속해서 모래가 참을 수 없을 만큼 뜨거워지자 결국 엄마는 아이를 자기 몸 아래에 두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마저도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자식을 희생시킨다.”는 이야기가 있게 된 것입니다.
유신견에 토대를 둔 이 자기사랑 때문에,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행복이나 자기 가족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또한 자신의 이익을 채우기 위해 악행도 서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항상 하는 자아에 대한 믿음으로 선업을 짓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신견에 자극 받아 내생의 행복을 위해 보시, 지계, 선정 등을 닦습니다. 그 결과 천신계와 범천계에 태어나지만 거기서도 역시 늙음, 죽음, 다른 삶의 괴로움을 겪어야 합니다.
요컨대, 현생이나 내생의 행복을 추구하는 모든 노력은 다 유신견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한 업의 노력이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k?m?-up?d?na)에서 비롯되는 업의 노력과 다른 점은, 후자의 원동력이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인 반면에 전자의 주요 동기는 개인적 실재에 대한 집착이라는 점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신견에 강하게 집착하고 있는 사람의 이기주의는 감각적 욕망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습니다.
유신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성자들은 선행을 할 때 오로지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k?m?-up?d?na)으로부터만 동기부여를 받습니다. 그래서 아나따삔디까, 위사카, 마하나마192의 보시, 지계, 수행은 인간계와 천상계의 보다 나은 삶이나 더 높은 단계의 도를 얻기 위한 욕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92. 마하나마(Mah?-n?ma)는 석가족 왕의 한 사람이었으며 아누룻다(Anuruddha)존자의 형이고 세존의 사촌이 된다. 세존께서는 『증지부』(A1:14)에서 뛰어난 보시를 하는 자 가운데 으뜸이라고 그를 칭찬하실 정도로 정성을 다하여 세존을 모시고 승가를 후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