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4월 29일 451 S. Serrano Ave.독립가옥 구입 확장이전

운영자들COLON Noeulkim, Sewolmusang, paraMitakim, lomerica, paraMita, admin

BUTTON_POST_REPLY
lomerica
전체글COLON 143
가입일COLON 2015-05-11, (월) 8:22 am

1976년 4월 29일 451 S. Serrano Ave.독립가옥 구입 확장이전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2015-10-13, (화) 6:54 am

<사진: 새가옥 2층 내부법당, 새가옥 외부모습, 3사(달마, 관음, 삼보)합동법회, 사리친견법회>
<사진: 새가옥 2층 내부법당, 새가옥 외부모습, 3사(달마, 관음, 삼보)합동법회, 사리친견법회>
77-k2.jpg (173.81 KiB) 1219 번째 조회
이제부터 나는 이글을 연재하면서 생각하건데, 이 연재물은 오직 나(김안수)의 주관적 판단이라고 평가할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주변의 객관적 의견들은 나로선 일일이 수집이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글을 보면서 도안스님의 회고에 대한 첨가하고픈 것들이 있다면 자료가 입수되는 대로 추가의 페이지를 연속해 마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스님이 남긴 관음사 20년사 총감과 30년사 총감을 자료로 하여 간간이 내가 도안스님에게 직접 관여했던 기억들을 수록하게 됨을 이해하였으면 한다.

1975년 11월 16일(일요일) 11시 30분 1715 S. Ardmore Ave. 최초의 관음사 법당에서 내외귀빈과 전 신도가 모인 가운데 제 2대주지 취임식을 갖게 된 “도안스님께서 미국에 오시게 된, LA관음사와 최초의 관계를 살펴본다.”에서 미국 입국 전 한국에 계실 때의 그 당시 입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1974년 가을 정달법사님이 고국을 방문하고자 탓던 항공기에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나의 죽마고우, 녹야원 청년회 불자였던 신동기가 같은 비행기로 전국체전 미주지역 참가자로 들어오게 되어, 공교롭게 서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나를 만난 신동기는 도안스님이 미국 들어올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그 뒤에 마침 정달법사님은 총무원(당시, 동국대 사회교육관 2층)에 들려 LA관음사 후임주지를 천거 받고자 이곳저곳을 살핀 듯 했다. 나는 정달법사님이 미국 들어가기 전 71년까지는 조계사 총무원 교무국장스님으로 계셨던 때로 매우 친분이 가까웠던 사이였기에, 그 때 고국을 방문한 정달법사님을 총무원 복도에서 만나게 되자, 도안스님을 미국으로 모시고 가라고 친구 신동기의 말을 빌려 추천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75년 6월말 경 일시 체한중인 부이사장 김정법화 보살을 도안스님과 함께 내가 만나서 LA관음사에 대한 정황을 듣게 되었고, 그 후 도안스님은 9월 10월 양차에 걸쳐 미국 입국초청장을 받게 되었으며, 여권수속은 모두 내가 맡아서 진행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미국으로 떠나려던 도안스님에겐 탑승할 항공권을 구입할 돈이 없었다. 출국 일정이 지연됨에 따라 2, 3차에 걸쳐 출국연기를 알리고, 이후 나의 큰누님께서 항공권 구입에 필요한 대금을 간신히 마련해 오신 것이어서, 그래서 1975년 11월 12일 새 주지스님으로 김도안스님이 LA관음사로 오시게 된 경위다.

미국으로의 이민 길이란 너나없이 어려운 고비를 감내해야 한다. 도안스님 역시 어려운 고비를 감내해야 함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그래서 그간에 겪은 일들이 순탄한 길만은 아니었기에 그 고난의 역정을 간간히 언급하는 것이리라. 다만 30년간 불굴의 의지 하나로 오늘의 관음사를 이루어 놓았기에 자랑스럽다 할 것이다.

도안스님이 본격적으로 관음사 불사에 몰입하게 된 곳은 451 S. Serrano Ave.의 독립가옥을 구입하고서 부터다. 집값을 6만8천불에 2만5천불 다운으로 에스크로 진행합의를 한 것이다. 그리고서 76년 4월 17일 나성 3개 일간지 신문에 나성 관음사 확장 이전에 대한 안내광고를 내고 4월 29일 새 가옥으로 이전을 완료한 것이었다. 그리고 76년 5월 2일~5월 9일까지 부처님오신날 주간으로 설정하고, 5월 9일 3개 사찰 공동주최 한국일보 나성지사 후원 봉축대법회를 한국일보사 소극장에서 성대히 개최하였고, 76년 5월 14일 에스크로를 통해 집명의를 ‘대한불교조계종 나성관음사’로 하고 합동싸인을 김도안, 이용호, 강위봉 3인이 하고, 다운페이 문제를 가옥주와 재조정으로 이한기, 김도안, 이용호 3인 합의 후 2만불로 결정을 보게 된 것이었다. 그때 다운페이 준비금 내역을 보면 신도시주금 1만 1천 2백 65불, 외환은행 융자금 7천불, 4월 8일 행사 및 적립금 2천 6백불로, 도합 2만 8백 65불 중 2만 7백 92불 08전을 지불하고, 매입에 대한 제반 수속을 완료 했던 것.(20년사 총연감에서 분석정리함)

도안스님은 76년 9월 24일에는 서도창 인간문화재 김정연여사를 초청하여 한국일보사 소극장에서 발표회를 가졌다. 김정연여사는 나와 도안스님과 함께 한국에서 청소년교화연합회 창설 멤버로써 그 때부터 긴밀하게 인연을 맺어온 사이였다.

76년도 예산 및 결산 내역
1. 일반회계 예산액 : $ 17,615.64 결산액 : $ 17,589.64
2. 특별회계 예산액 : $ 28,359.32 결산액 : $ 28,330.41
3. 합산회계 예산액 : $ 45,974.96 결산액 : $ 45,920.05
4. 전년대비 예산액 : $ 8,745.11 결산액 : $ 8,358.16
*. 증액현황 합계액 : $ 37,229.85 합계액 : $ 37,561.89
&lt;사진: 삼보사 행사후, 김정연여사 초청발표회, 관음사 앞뜰 부처님오신날, 카멜 호수가에서&gt;
<사진: 삼보사 행사후, 김정연여사 초청발표회, 관음사 앞뜰 부처님오신날, 카멜 호수가에서>
76-k1.jpg (167.05 KiB) 1219 번째 조회
위와 같이 불사에만 몰두하시던 스님께서 77년 3월 5일 신도집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길에 프리웨이 고속도로 선상에서 기름탱크 추렐라에 받치어 크게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다. 내가 한국에서 이 소식을 접한 것은 77년 6월 경 일시 귀국한 이연실(녹야원 학생회출신)보살로부터 듣게 되었고, 스님께선 걱정할 테니 알리지 말라 하셨단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듣고 국제전화를 올렸더니 지금은 그런대로 지낼 만하다 하셨다. 06년 입적하실 때까지 늘 이 후유증으로 무릎을 두드리시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기만 하다.

그리고 도안스님은 77년 9월 5일부터 11월 10일까지 2개월에 걸쳐서 미국을 벗어난 해외여행길에 들어선다. 처음으로 고국방문 길에 올랐고, 겸하여 일본을 돌아보시고, 다시 인도성지 순례까지 마치고 미국에 귀사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은 정달법사님과 이용호 회장님에 의해 일요법회를 주관하였고 임직자들이 사원살림을 맡아 하셨다.

그리고 77년 들어서서 관음사 신도 특별불사 시주자로 탱화, 탁자, 향로촛대, 법당범종 등 신도 특별불사금이 합계 $4,200에 이른다.<상세 내역은 20년사 총연감>

77년도 예산 및 결산 내역
1. 일반회계 예산액 : $ 20,944.37 결산액 : $ 20,453.42
2. 특별회계 예산액 : $ 9,879.65 결산액 : $ 9,550.52
3. 합산회계 예산액 : $ 30,824.02 결산액 : $ 30,003.94
4. 전년대비 예산액 : $ 45,974.96 결산액 : $ 45,920.05
*. 증액현황 합계액 : $-15,150.94 합계액 : $-15,916.11


2015년 10월 12일
제월 김안수 법사
BUTTON_POST_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