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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7-05-28, (일) 3:42 am 

가입일: 2015-05-11, (월) 8:22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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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스님 / 성아그네스 성당 창설 31주년 기념 신앙강연
<2000년 1월 30일>

성아그네스 성당 창설 제31주년을 맞아 천주교계 대희년 맞이 행사의 일환으로 마련한 신앙강연회에 부족한 이 사람을 연사로 초청해 주신 김정웅 담임신부님께 감사를 드리며 특히 본 대회 준비를 위하여 수고하시는 관계자 여러분들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먼저 오늘의 주제가 주는 내용이 “2000년대를 향한 종교인의 자세”로 정해져 있어, 1000년의 광대한 시간을 설계하고 1시간 남짓 요약하여 말씀드리려하니 고충이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의 1초, 10분, 1시간이 앞으로 다가올 천년역사의 가장 기초가 되므로 본 연사는 미력을 다하여 오늘의 한 시간에 충실하려 합니다.

현제 세계에는 11대 종교가 전 인구의 58.4%가 종교인구로 되어있고 종교별 교세의 비율을 살펴볼 때는 이슬람교 22.8%, 천주교 22.5%, 힌두교 18.5%, 개신교 13.2%, 불교 9.9%, 유교 6.6%, 기타 종교 4.0%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살펴볼 때 그 교세나 종교의 문화권은 6대 종교 즉, 이슬람교, 천주교, 히;senry, 개신교, 불교, 유교가 세계 정신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들 6대 종교를 별칭하여 ‘지역종교’의 반대개념인 ‘세계종교’라고 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한국에서 근간에 조사된 종교별 교세비율을 보면, 불교가 37.4% 개신교가 25.6% 천주교는 4.8% 유교가 17.5% 천도교가 3.6% 원불교가 3.2% 기타종교가 6.8% 비종교 인구 22.3%로 되어 있습니다. 자 새 천년을 설계하는 이 시점에서 본인은 오늘의 주제와 연관하여, “더 이상 숫자와 종교의 양적 팽창에 신경 쓰지 말자”는 말로서 본론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새 천년에는 질 높은 종교가 가장 큰 힘을 발휘하리라는 것은 많은 종교학자들이 주장해오고 있고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예측이 가능하겠지요. 그러면 질 높은 종교, 질 높은 불교란 무엇일까요?
먼저, 저희 불교의 허물을 먼저 고백해보겠습니다. 앞의 수치상으로도 한국에서는 10명 중 4명이 불교신자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본인도 한국불교가 충분한 기반이 있다고 생각하여 25년 전에 안심하고 국제포교를 위하여 도미하였는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작년에 조계종 교권분쟁이 발생하여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같이 교세가 높다고 하는 한굮불교는 사상 유래 없는 교권분쟁으로 그 실추가 이루 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세계 여론의 결정적인 타격을 초래하였습니다. 많은 언론들이 ‘물욕에 어두운 스님들의 반란’을 주제로 보도하더군요. 전부가 아니라는 변명은 본인 자신도 할 수 없겠습니다만, 잠깐의 변명의 기회를 주시다면 분규의 당사자인 스님들의 비춰진 물욕 뒤편에는 승가가문의 위상에 대한 명분이 있고 또한 올바른 불교에 대한 애착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군요. 국회의원의 자질이 국민의식의 평가기준이 되듯이 스님들의 재가운동은 우리불자, 크게는 우리 조국의 또 다른 반영이라고 양해하시고, 좋은 기회로 미국과 인연을 맺으신 우리 미주동포 여러분들이 좀더 관심을 가져 주신다면 우리 조상들이 믿어왔던 멋진 불교로 반드시 되돌아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종교의 사명은 인류사회가 건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바르게 인도하는데 있다 하겠습니다. 모든 악을 짓지 않도록 막아주고 많은 선을 행하여 사회가 맑고 향기로운 사회가 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악을 막기는 고사하고 분쟁을 야기 시키고 인간의 심성을 더 타락되게 하는 종교라면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것이 났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20세기는 종교가 인류사회를 위해 덕을 준 것보다는 해를 끼쳐주는 일이 세계 도처에서 많이 일어났습니다.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저지른 모든 끔찍한 대규모 죄악상은 99.9%가 종교라는 명분아래 자행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란과 이라크, 이스라엘, 아랍, 코소보, 보스니아, 씨에라 레옹, 라이베리아, 인도, 파키스탄, 도쿄의 지하철 독극물 살인 이러한 종교적 분쟁으로 살상과 전쟁이 끊어지지 않고 종파적 패권 투쟁으로 20세기를 종교분쟁으로 막을 내렸다고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1세기를 맞이하는 우리 종교인들이 하여야 할 덕목은 종교적인 화해 협력을 통한 세계평화를 정착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새 천년을 향한 종교인의 신앙자세는 세계가 안고 있는 현실의 고통을 어떻게 극복하고 타개할 것인가를 고민하여야 합니다. 앞으로 다가올 새 천년의 전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급진적인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고 보겠습니다. 최첨단의 정보와 전자 산업은 이 지상에 생태계뿐만 아니라 우주 공간 외계에까지 파급을 주어 엄청난 변화와 발전이 예상되며 유전공학과 생명공학의 발달은 종교계에도 엄청난 도전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 실험의 첫 단계에서 나타난 복제 인간은 그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갖는 시간의 개념도 20세기가 느끼는 그러한 시간적 가치표준이 아니라 21세기에 가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급진적 변화가 시간을 초월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세기를 맞는 우리 종교인의 사명은 종교간의 화해와 협력을 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다 하겠습니다. 이제 모든 종교가 지역종교를 뛰어넘고 있으며 종교의 파급은 정치체제나 국책으로도 막을 수 없는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열려있는 시대가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종교의 전파도 대중을 찾아서 또는 집회를 통해서 전파하는 시대가 아니라 컴퓨터의 인터넷을 통하여 자신이 들어가 선택할 수 있는 시대가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인류가 안고 있는 현실의 고통을 모르는 채 내생의 왕생극락을 바라는 불교적 구원관이나 믿음을 통한 내생의 천당을 가기 위한 신앙의 운동은 엄청난 도전과 시련이 있을 것으로 파악됩니다. 그러므로 종교인이 전개하여야 신앙운동은 현세의 고통을 어떻게 하면 근절시키고 평화와 행복이 보장이 될 수 있도록 인성의 바른 지도가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되는 구석기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살기 위한 투쟁으로 일관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인간은 삶을 위해 도전과 투쟁이 계속된다고 보여 집니다. 그렇다면 생명이 있는 자는 자연과 더불어 상의 상존 관계에서 먹이사슬을 서로 주고받고 살고 있습니다. 인간만이 그 먹이사슬을 독식하려는 욕심 때문에 지구촌 한구석에는 기아자가 생기고 그로 인한 질병과 환경오염이 지구촌을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우리 인간들입니다. 인구밀도가 가장 심한 지역은 그 생존경쟁이 치열하기 마련이며 곡물생산이 잘 되지 않은 산야나 사막에 위치한 나라들은 좋은 식량을 생산할 수 없습니다. 지하자원과 원유가 생산되지 못한 열악한 나라는 산업을 발전시킬 수 없을 뿐 아니라 국가경제가 살아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좋은 환경을 선취하고 있는 강대국들은 오히려 그 부를 누리려고 오히려 약소민족을 탄압하고 자국에 경제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현실적인 고통을 어떻게 해결해 주느냐 하는 것이 21세기를 맞이하는 종교인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인도의 고질적인 카스트제도를 타파하는데 일생을 바치셨습니다. 카스트제도란 인간의 성분을 4성 계급으로 나누어 우열 성분으로 분류하고 신분에 따라 사회적 예우가 달라지므로 천민들은 일생동안 노예의 신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비참한 사회 계급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일체중생은 다 불성을 가진 동등한 생명이며 인간에 본성은 다 평등하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러나 인간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차별이 나타나니 그 차별의 세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서 모든 악을 짓지 않고 착한 행을 받들어 행하게 되면 깨달음 세계, 지혜와 자비가 충만한 부처의 세계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래부터 신분이 생겨난 것이 아니고 본인의 인성개발과 함께 행위의 결과에 따라 우리의 현재의 삶과 미래가 주어진다는 이론입니다.

요즈음 종교간에도 우열을 논하고 자기 종교만이 제일이라고 하는 그러한 태도는 옳지 않다고 봅니다.
인간은 무수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살면서 자기 스스로 정신적인 면을 담는 밥그릇들을 마련하니다. 이떠한 사람은 일생동안 쌀밥만 먹고 그 배를 채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떠한 사람은 일생동안 보리밥만 먹고사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떠한 사람이 너는 왜 보리밥만 먹느냐 또한 어떤 사람은 왜 쌀밥만 먹느냐고 시비한다면 그 시비를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마도 시비를 받지 않고 싸우려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종교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메뉴입니다. 그 메뉴에 오랫동안 체질화된 사람은 다른 음식을 선호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소화시킬 수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음식을 처음부터 골고루 혼합하여 먹고사는 사람은 한 가지 음식만을 편식하는 것 보다는 여러 음식에서 오는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함으로 건강을 오래 지속할 수도 있습니다.
종교도 자기 틀 속에 가둬버리고 다른 종교를 무시하고 자기 종교만을 제일이라고 하는 시대는 이제 지났다고 보아집니다. 내 종교가 중요하듯이 남의 종교도 중요하다고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거기에 좋은 점은 따르고 나쁜 점은 버려도 됩니다. 근본을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고 항상 더불어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이 지구촌에는 무수한 종교가 같이 존재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 인류사회에서 희망과 용기를 주는 종교 지혜와 자비를 실천하는 종교정신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을 맑고 향기롭게 하는 종교는 살아남을 수가 있을 것이며 인류사회에서 해를 끼치는 종교집단은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 선택은 인류 한 사람 한 사람 자신이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종교는 이제 배타적 전도주의를 하루속히 포기하여야만 합니다. 나의 믿음의 방식만이 오직 인류를 구원한다는 좁은 편견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종교의 공존, 그렇다면 모든 종교는 사이비 종교이든 신흥 종교이든 저등 종교이든 간에 다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눈을 떠야 합니다. 그러한 눈을 뜨게 하는 일은 올바른 종교 지도자를 만나는 일입니다. 이것 역시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종교지도자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령 가깝게 있다하더라도 그 분이 지도자라고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하니 어떻게 우열을 가릴 수가 있겠습니까?!

21세기를 맞이하는 종교의 형태는 물적 팽창이 아니라 질적인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질적인 성장이란 교회수가 몇 개냐가 아니고 목사, 신부, 스님이 몇 명이냐도 아니며 오직 사회병리 현상이 어떻게 퇴치되고 인간의 심성이 얼마나 맑아져서 사회가 안정되었냐가 바로 종교의 질적인 성장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21세기에 들어서서는 지식의 범람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 지식의 경쟁 지식의 투쟁 시대가 도래된다고 보여 집니다.
인간의 지식은 삶의 질을 높이고 환경을 보다 밝게 하여 인간의 복리 진작을 위한 지식이 필요하지만 그 반대로 삶의 질을 높인다고 하여 인성을 마비시키고 말초적인 신경만 들뜨게하는 기계문화나 전자문화에 종속되는 그러한 삶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인간의 하는 일이란 먹고 배설하고 잠자는 일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일이 전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조화를 깨서는 안 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식사란 자기 위장에 맞춰서 적당히 섭취하여야 합니다. 음식의 영양분도 골고루 먹어 신체적 발육과 신진대사가 잘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편식을 한다든가 과식을 한다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배설하여야 할 배설이 되지 않는다든가 소화를 시키지 못하고 섭취한 영양과 단백질이 도로 다 배설되어 버린다면 건강이 유지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휴식이 필요한데 제 시간 휴식을 취하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조화가 깨지고 맙니다.
그런데 기계문화와 전자문화는 인간의 신경을 최대한 자극시키고 폭넓은 시야를 통한 정보유입으로 인간 인간과의 정보경쟁이 삶의 질을 파괴하는 결과가 초래될 뿐만 아니라 신체건강과 정신건강에도 막대한 해를 끼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에도 종교는 기계문화의 발전과 전자문화의 발전을 그렇게 좋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욕망을 잠재우고 우리 육체적 기능과 감각을 통한 그 순수 자체를 지켜가는 것이 또한 종교인들이 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 인간은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생각과 의식의 활동을 기계에 의존하고 또한 전자매체에 의존하고 산다면 인간의 사고와 감각적 의식은 점진적으로 퇴화가 될 뿐 아니라 육체적 기능저하로 막대한 손상을 입힐 수도 있습니다. 또한 기계와 전자매체의 고장이나 사고는 누가 책임져야 하겠습니까? 이점을 감안할 때 만능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건전한 사고는 건전한 생활에서 출발합니다. 또한 심성을 맑혀주는 자기 수양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모든 생각과 의식 활동도 기계문화에 의존하면 인간 자신은 무엇을 하여야 한다는 말입니까? 앞으로 언어에 있어서도 언젠가는 새로운 변화가 예상됩니다. 인간자신의 말보다는 기계가 말하고 전자매체를 통한 영상매체가 대신해 주는 시대가 도래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 역시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특혜라고 한다면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 기계문화나 전자문화가 대신해 주는 것이 어찌 좋다고만 하겠습니까? 모든 신체적 조직기능도 쓰지 않으며 퇴화가 됩니다. 심각한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에 일들이 발생할 때, 우리 종교인들은 무엇을 말하여야 하겠습니까? 그것 역시 대비하여야 할 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건전한 생각(의식)이 건전한 행동을 할 수 있다 했습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전도된 사고의식으로 온갖 사회병리 현상이 도처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금전 만능주의 물량주의 요행과 권위주의는 인간 심성을 마비시키고 잘못된 판단이 갖는 병리 현상이 행동으로 이어져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21세기를 맞이하는 우리 모두의 도전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또 하나는 인간과 자연 환경과의 화해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연 환경의 파괴는 이 지구를 병들게 할뿐 아니라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지구의 온난화 현상이라든가 바다의 해일 그리고 폭풍, 지진과 화산폭발 또한 폭우로 인한 대홍수 이러한 천재지변의 재앙도 이것 역시 인간이 자연 환경을 파괴하는데 있습니다. 얼마나 큰 재앙입니까? 이것 역시 인간의 편의주의나 또한 과대한 욕망이 스스로 자초하여 만든 인위적 재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21세기를 맞아 천년을 대비한 종교인들이 전개하여야할 인간과 자연환경과의 화해운동을 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인생이야말로 가장 지구촌을 천국으로 만드는 값진 귀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믿음이라는 정의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란 계율과 보시, 버리기, 비우기 지혜를 믿는 것이니 이것이 믿음이요 이름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정의하셨습니다. 이 지구가 존재하고 우리 인간이 존재하는 순간까지 우리 종교인들이 갖추어야 할 신앙인의 자세는 이름을 믿는 사람이 되지 말고 끝까지 베풀어 나눔을 통한 공존의 덕을 길러야 하겠습니다. 보시란 재물보시, 법보시, 무외시를 말합니다. 재물이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기 마련입니다. 갖지 못한 이웃을 위해 나누는 것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생활고에 고통 받는 이웃 기아에 먹지 못하여 죽어 가는 생명들은 이 지구촌 어느 곳에 살던지 구제하여야 할 대상입니다. 법보시란 인생이 걸어가야 할 바른 가르침을 이야기합니다. 부처님께서 45년간 중생의 고달픔을 쉬게 하고 인생이 걸어가야 할 바른 지침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 깨달음의 세계, 그 해탈의 세계란 인생의 생로병사와 우비고뇌를 뛰어넘어 지혜와 자비가 충만한 해탈의 경지를 말합니다. 또한 무외시란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자유를 갖게 하고 그 불행의 늪에서 헤쳐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입니다. 이것 역시 행복을 주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종교인이 베풀어야 할 덕목입니다.

다음은 우리 종교인은 연꽃과 같이 살아가고 등불과 같이 살아가야 합니다. 먼저 연꽃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처세간여허공 여련화불착수라는 경전 구절이 있습니다. 한국식으로 지은 질의 기둥에는 으레 나무판에 글을 써서 붙여놓은 것이 있는데 주로 한문 글귀라서 여러분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만 대부분 경전가운데서 짤막하면서도 뜻이 깊은 구절만을 골라 써놓은 것으로 주련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주련의 글귀에서도 주로 많이 쓰이는 글이 앞에든 ‘처세간 여허공 여련화 불착수’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세상에서 살되 마치 허공처럼 연꽃이 물에 젖지 않는 것처럼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뜻도 있고 우리 마음에 본성은 허공과 같이 크고 연꽃처럼 깨끗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허공과 같은 마음은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요 또한 큰마음 입니다. 하늘에는 온갖 새들이 날아다니지만 새가 날아간 자국이 없고 천둥번개가 치든 하늘이라도 비가 개인 후의 하늘은 오히려 더욱 맑아 보이지 않습니까? 이처럼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마음 무엇에든 집착하지 않는 큰마음을 허공과 같은 마음이라고 합니다. 만일 하늘에 새가 날아간 자국이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다거나 비행기가 날아간 흔적이 있다고 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다른 새가 날아가거나 다른 비행기가 운항하는데 지장이 있겠지요. 그러나 아무런 흔적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새들도 거침없이 날아다닐 수가 있고 비행기도 같은 항로를 되풀이해서 운항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련화 불착수’라는 글귀는 비록 좋지 못한 환경 속에서 살더라도 마치 연꽃이 흙탕물에 오염되지 않는 것처럼 온갖 나쁜 생각을 하더라도 우리 마음에 본성 자체는 결코 더럽혀지지 않는다는 뜻이요, 한편으로는 연꽃과 같이 물들지 않는 이 본마음을 찾아서 바르게 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고자 하는 새 천년은 그 삶의 질의 면에서 크나큰 변화가 있고 의식의 변화가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심성에서 파생된 선악의 가치표준은 크게 달라진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의식의 다변화, 문화적인 다원화, 빈부의 차별화에서 오는 환경적 불안과 갈등의 소지는 20세기에서 경험 못한 더 복잡한 사안들이 발생할 수 있다 하겠습니다.
요즈음 세상이 하도 험악해서 아무리 착하고 선하고 바르게 살려고 해도 주변 환경 때문에 잘되지 않는다고 불평들을 합니다. 왜냐하면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풀지 못해 술로 밤을 지새운 사람, 인간 사행심에 들떠 도박에 빠져있는 사람, 모든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될 대로 되어라 하며 방황하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다 보니 함께 어울리고 또한 한번의 잘못한 선택이 깊은 수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여 악의 구렁으로 치닫고 있는 것도 현실적인 고민입니다. 그러나 사실, 환경 탓만 하는 것은 비겁한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환경이 아무리 나쁘더라도 스스로 그러한 환경에 빠져들지 않으면 되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치는 그렇지만 그 일이 꼭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사회의 병리 현상이 도처에 잠복되어 있고 인간의 욕망ㅇ에 의한 경쟁사회가 우리환경을 그렇게 만들고 있기에 이만 저만 힘이 들지 않습니다. 이것은 함께 해결해야할 문제도 있고 또한 우리 스스로 억제하고 통제하여야 할 우리 자신의 결단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책임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환경을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특히 우리 한국타운은 가장 소수민족이 밀집되어 있고 소외계층과 마약사범, 알코올 중독자들이 범람하는 지역에 살고 있어서 항상 범죄다발지역으로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들다고들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종교인들은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또한 그들의 생활의식을 일깨워 주면서 환경자체를 개선함으로써 깨끗한 환경이 주어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란 연습게임이 없습니다.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주변 환경이 아무리 혼탁하다 할지라도 여러분이 정신을 차려서 이에 물들지 않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연꽃은 불교를 상징하는 꽃으로 불자들에게 사랑을 받아온 불교의 꽃입니다. 연꽃은 부처님의 탄생과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태어나시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시니 그 발자국마다 연꽃이 돋아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 앉아 계시는 좌대에도 한결같이 연꽃이 등장하고 또한 “묘법연화경”은 연꽃을 경의 이름으로 삼고 있을 뿐 아니라 절 이름 가운데서도 연화사라는 이름이 많습니다. 이처럼 연꽃은 불교의 꽃이 되었는데 여기에는 연꽃이 상징하는 의미가 아주 깊기 때문입니다. 연꽃이 상징하는 큰 의미는 앞에 인용한 경구에서 이미 설명을 드린바 있지만 이를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겠습니다.

첫째, 연꽃은 부처님을 상징합니다.
아함경에 부처님이 세상에 계심은 연꽃이 진흙 속에서 나되 진흙에 물들지 않음과 같으니 온갖 번뇌를 깨고 마지막 깨달음에 도달하사 생사에 한계를 떠나셨으므로 부처님이라 한다 하였습니다.
이는 연꽃이 진흙이라는 깨끗하지 못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잎과 꽃이 깨끗한 점이 마치 부처님께서 사바세계에 계시면서도 번뇌에 물들지 않고 깨달음을 얻어 성불하신 것과 비유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진흙은 번뇌, 부처님은 연꽃에 비유한 것입니다.
또한 연꽃이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흙탕물 속에서 살지만 물들지 않음과 부처님이 중생이라는 진흙 속에 태어나 사바세계라는 공간에 계시면서도 온갖 탐욕에 물들지 않고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시어 중생을 제도하심을 연꽃에 비유한 것입니다.

둘째, 연꽃은 마음의 본성을 상징합니다.
우리 마음에 본성은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어서 본래 깨끗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은 후에도 우리 중생들의 마음을 천안통으로 살펴보시니까 모든 사람들의 본래 마음은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이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깨끗하다는 것은 더럽다고 하는 말의 반대말이 아니고, 그 무엇에도 오염되지 않는 본래의 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청정심은 달리 말하면 바른 마음이요, 가짜가 아닌 참 마음이요, 착한 마음인데, 이런 마음은 바로 부처님의 마음 즉 불심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의 본성은 지혜와 자비가 충만한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한데 어찌하여 성내고 욕심내고 시기 질투하는 온갖 나쁜 생각을 도맡아 하느냐 하면 사람들이 보고 듣고 맛보는 데에 따라서 욕심이 생기고, 이 탐욕심이 오염되었기 때문에 부처님과 똑같은 마음의 본성을 가지고도 중생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마음의 본성마저 더럽히거나 파괴된다면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여도 부처님처럼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마치 상하기 시작한 사과를 아무리 정성을 다한다 하여도, 사과나무에서 갓 따낸 싱싱한 사과로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마음의 본성마저 더럽혀져 버렸다면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다행히도 그럴 염려가 없습니다. 마치 연꽃이 진흙 속에서 태어나 자라나지만 오염되지 않은 눈부신 연꽃을 피어내듯이 마음의 본성도 결코 더럽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에 이르시기를 마음의 본성은 청정하여 더러움에 물드는 일이 없다. 마치, 하늘의 연기나 먼지 구름들이 뒤덮여 밝고 깨끗하지 못한 경우에도 허공의 본성이 더럽혀지는 일이 없는 것과 같다.
온갖 중생도 바르지 않은 생각 탓으로 여러 번뇌를 일으키고 있으나 그 마음의 자성은 청정하여 더럽혀지지 않는다. 이같이 더럽힘이 없으므로 그 마음의 자성은 청정하여서 해탈을 얻게 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번뇌와 망상은 흙탕물에 해당하고 마음의 본성은 연꽃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연꽃은 마음의 본성, 즉 불성을 상징하는데 마음의 본성이니 불성이니 하는 것은 부처님이나 여러분이나 저나 다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빨리 나의 본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밖에도 연꽃이 상징하는 의미가 다양합니다.
깨끗함과 아름다움이 여러 꽃 가운데 으뜸이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모든 사상 가운데서 가장 훌륭하다는 뜻도 있고, 꽃과 열매를 동시에 간직하고 있어 원인과 결과를 상징하는 등 다양한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등불과 같이 살자는 것입니다. 등불은 왜 켜는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등불은 어느 때 필요합니까? 어둠을 밝게 하기 위해서 필요하지 않습니까? 캄캄한 방안이라도 전등을 켜면 밝아지고 밤이라도 대형 전광판에 불을 켜면 대낮처럼 밝아져서 운동경기나 신바람나는 쇼 프로그램도 진행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부처님오신날 등불을 켠다거나 또 법당에 등불을 밝히는 것은 어두운 방안에 불을 켠 것이나 전광판에 불을 밝히고 가로등에 불을 켜는 것과는 그 목적이 전적으로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다를까요?

앞서 예를 든 연꽃의 경우처럼, 첫째 등불은 부처님을 상징하고 둘째로는 지혜를 상징하기 때문에 부처님오신날 우리가 등불공양을 올리는 것은 어느 때 전등을 켜는 것과는 의미가 다른 것입니다. 전광판의 불이나 밤무대의 불 가로등의 불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등불이고 초파일이나 법당에 켜는 불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등불입니다.

왜 등불이 부처님을 상징하느냐?
첫째 부처님은 진리의 등불과 같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시기 이전의 세상은 마치 캄캄한 밤과도 같았습니다. 진리에 어두워서 이 세상을 절대적으로 주재하는 신이 있어 창조하고 창조한 신은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것들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창조하고 주재하는 신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자신이 설정하고 그 존재를 의식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우주의 생성문제와 인생의 생로병사 문제도 바로 인간 자신이 바른 깨달음을 통하여 해결된다고 보았습니다. 그에 밝게 보는 눈은 어두웠던 인간 세상에 횃불이 되었고 밝은 등불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진리를 깨달아 그런 무지를 깨우쳐 주셨기 때문에 부처님은 곧 진리의 등불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진리란 말을 어렵게 생각하는데 진리란 참된 것, 또 쉽게 얘기하면 진짜를 진리라 하는 것입니다.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해야 진리입니다.

둘째, 왜 등불이 지혜를 상징하느냐?
앞에서 우리도 부처님과 똑같은 마음의 본성, 불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부처님처럼 되지 못하는 까닭을 욕심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그러면 왜 쓸데없는 욕심을 냅니까?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듯이 마음을 무엇이 덮고 있어서 진실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마음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어두운 것을 불교용어로는 무명이라고 합니다. 밝음이 없다는 뜻인데 밝은 빛이 없으면 곧 어두운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마음의 어두움을 제거하는 빛이 있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마음을 밝게 하는 빛은 형광등이나 백열등으로 가능합니까? 만일 가능하다면 전등이 필요 없는 낮에는 사람들이 마음이 밝고 밤이 되어야만 마음이 어두워져야 할 텐데 여러분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물론 없지요. 그렇다면 어떤 등불이어야 마음속의 어둠을 몰아내고 부처님과 똑같은 본 마음을 되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바로 지혜라는 등불입니다. 지혜는 어리석음을 마음속에서 몰아내는 등불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등불은 지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한 말을 요약 정리하면, 연꽃은 부처님과 우리 마음의 본성을 말하는 것이고 등불은 부처님과 지혜를 상징한다는 것으로 요약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간단히 말하면 될 것을 이처럼 길게 이야기한 까닭은 연꽃이나 등불이 무엇을 상징하느냐가 아니라, 연꽃과 등불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종교인은 새로 태어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권위주의나 교파주의 또 다수의 패권주의에 대한 자기중심의 종교가 있는 한, 이 지구촌은 종교로 인하여 세계평화는 보장될 수가 없으며 종교적 화해는 찾을 수 없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한 세상이 변하고 또한 인간의 지식이 고도로 발달하여 인간의 능력을 기계와 전자통신으로 대신한다 하여도 인간 심성을 맑혀주지 못한다면 미래의 새 천년이야말로 지나간 20세기보다 더 큰 재앙이 닥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 종교계는 ‘신앙불신현상’의 기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인데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외 받고 굶주리고 범죄가 우글거리는 그 생활현장에 서서 진흙 속에서 고고함을 잃지 않고 바른 품성을 발하는 연꽃이 되어주는 종교인이 많아질 때 이 사회는 밝아질 것이며,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어두운 사바의 현장을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어두운 그늘을 밝게 비추어주는 등불의 역할을 하는 종교인이 많이 나올 때만이 희망의 새 천년을 기약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끝까지 부족한 강연을 경청해 주신 것을 감사드리며 본 강연의 내용이 카톨릭 종교계에 누를 끼친 결과는 없었는지 생각하면서 본당 김정웅 신부님과 천주교 여러 신자님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종교를 초월하여 참 종교인으로 언제든지 다시 만나 뵙길 기원 드리며 강연을 끝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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