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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쟁을 저해하는 종교, 화쟁을 북돋아주는 종교
[전문] 기조발제-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종교학과 명예교수
2015년 03월 01일 (일) 23:44:10 오강남

들어가면서 - 몇 가지 비유

화쟁문화 아카데미가 시작하는 이런 귀중한 자리에 초청해주셔서 제가 평소 생각하던 바의 일부를 여러분들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을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최근 한국갤럽이 〈한국인의 종교: 1984 ~2014 (2) 종교의식〉이라는 자료를 발표했다. 그 조사 결과를 보면 2014년 현재 한국에서 인구의 50%가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하고, 나머지 50%는 무종교인이라고 했다. 스스로 무종교인이라고 한 사람들의 수가 지난 10년 사이 전국적으로 47%에서 50%로 증가했다. 서울의 경우 무종교인이라고 한 사람들이 54%에 이른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19세부터 29세의 젊은 층에서 종교가 없다고 한 이들이 69%나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기성 종교를 버리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어느 면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해하기 힘든 일은 이 기간 동안 이웃 종교를 배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수가 상대적으로 늘어났다고 하는 사실이다. 특히 개신교의 경우 이웃종교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가진 이들이 1997년 62%에서 2004년 53%, 2014년 49%로 매년 떨어지고 있다 종교 간의 화해와 소통이 그만큼 약화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사실을 놓고 볼 때, 여기서 시작하는 &lt;화쟁 문화 아카데미&gt;의 활동이나 현재 필자가 관여하고 있는 지식협동조합 경계너머, 아하가 전개하고 있는 일들은 지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종교의 핵심
그런데, 사람들이 왜 이웃 종교와 화해하고 협력하는 대신 자기 종교의 절대성만 강조하고 이웃 종교를 배척하는가? 여러 가지 이유를 열거할 수 있겠지만, 지금 우리가 토의하는 맥락에서 보면, 무엇보다 종교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 이해가 부족한 까닭이 아닌가 여겨진다. 종교란 도대체 무엇인가? 종교가 무엇이기에 죽자 살자 내 종교만 최고라고 여겨야 하는가?
'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무수히 많다. 필자도 여기저기에서 종교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며 이런 저런 정의를 내린 적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공식적인 정의를 옆으로 밀어 놓고 세 가지 비근한 예를 들어 논의의 실마리를 끌어내어 보려고 한다.
1)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 안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실재의 전부인 줄 안다. 어쩌다 우물 밖으로 나와 보면 넓은 하늘, 확 트인 들판 등을 보게 된다. 이제 개구리는 이전의 개구리가 아니다. 변화된 개구리다. 이 개구리가 계속해서 산으로 올라간다고 상상해보자.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더 멀리 있는 것들이 보인다. 저 멀리 있는 아름다운 공원, 저쪽으로 보이는 맑은 호수, 더 멀리 있는 드넓은 바다……. 이처럼 새로운 것을 발견할 때마다 ‘아하!’를 외치지 않을 수 없다. 개구리의 여정은 ‘아하! 경험’의 연속이다.
이런 경험을 한 새로운 개구리는 우물 안에 있을 때의 제약된 시각과 행동에서 벗어나 더욱 자유로운 시각에서 사물을 보고 행동하며, 옹졸한 정신 상태에서 해방되어 더욱 자유로운 정신 상태서 노닐게 된다. 즉 있는 그대로를 더욱 잘 알게 되면서 스스로 변화하고 그만큼 더 자유로워진 셈이다.
2) 옛날 사람들은 바다에 끝이 있는 줄 알았다. 있는 그대로를 바로 알지 못한 것이다. 행여나 바다 끝 낭떠러지에 떨어질까 무서워 누구도 먼 바다까지 가지 못했다. 그만큼 행동의 제약을 받았던 것이다. 이제 바다에 끝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두려움에 근거한 행동의 제약을 벗어던지고 훨씬 자유롭게 항해할 수 있게 되었다. 있음 그대로를 알게 되면서 새로운 자유를 얻은 것이다.
3) 한편 동네 어귀에 큰 구렁이가 있는 한 마을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구렁이가 두려운 나머지 어쩔 수 없이 동네 어귀로 다니지 못하고 먼 길을 빙 돌아 다녔다.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다가 용감한 청년 몇이 손전등과 도끼를 들고 동네 어귀로 나가보았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구렁이가 아니라 동네 어귀에 있던 큰 나무의 뿌리가 땅 바닥 위로 올라와 있었다. 이 사실을 안 동네 사람들은 마음 놓고 동네 어귀를 통해 바깥출입을 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도 실재를 알게 되면서 누릴 수 있는 자유에 대한 예라 할 수 있다.
4) 한 가지만 덧붙인다. 어느 사람이 깜깜한 밤길을 가다가 발을 잘못 디뎌 벼랑에 떨어지게 되었다. 도중에 용케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았다. 가지를 잡고 몇 시간을 버티어 보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죽었구나 하며 손을 놓았다. 그런데 떨어지고 보니 땅에서부터 겨우 6인치 정도밖에 안 되는 곳에 매달려 있었다. 미국의 종교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위의 이야기 통해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무엇일까 유추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세계 중요 종교들을 열심히 섭렵하고 거기에서 필자 나름대로 발견한 바를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결국 ‘진리 혹은 실재를 깨달음으로 얻을 수 있는 변화, 그리고 그에 따르는 자유’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키워드 네 가지는 진리, 깨달음, 변화, 자유다.
대표적으로 예수님도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고 하고, 부처님도 사성제(四聖諦), 곧 네 가지 진리를 체득하면 괴로움에서 자유로워진다고 가르쳤다. 두 분 다 진리를 깨쳤을 때 우리가 변화될 수밖에 없고, 이 변화의 결과는 결국 자유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네 가지 키워드를 하나하나 짚어 보자.
첫째는 ‘진리’다. 진리는 무엇인가? 진리란 교리나 어떤 진술 같은 ‘말’의 문제가 아니다. ‘있음 그대로’라 할 수 있다. 일상적인 말로 실재(實在) 혹은 실상(實相)이라 할 수 있고, 영어로는 '리얼리티(reality)'라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두고 '정말로 그러함,' 한문으로 ‘진여(眞如)’, 산스크리트어로 ‘타타타(tathata)’ 등이다.
둘째는 ‘깨달음’이다. ‘있는 그대로’가 나와 무관한 무엇으로 남아 있지 않고 나와 의미 있는 관계를 맺으려면 내가 ‘있음 그대로’를 아는 것, 깨닫는 것이 중요하기 그지없다. 능동적인 입장에서든 피동적 입장에서든 있는 그대로와 나를 맺어 주는 인식의 고리가 있어야 한다. 이는 있는 그대로를 그대로 볼 수 있는 ‘특수인식 능력의 활성화’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깨달음’이라는 것은 일생일대의 확철대오 같은 경천동지할 무엇이기보다 하루하루 작은 깨달음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셋째는 ‘변화’다. 있는 그대로의 더 깊은 차원에 대한 깨침의 깊이가 깊을수록, 우리는 그만큼 변할 수밖에 없다. 이전의 나와 질적으로 다른 나로 변한다. 㰡장자㰡• 첫 편 「소요유(逍遙遊)」에서 작은 물고기가 큰 물고기로 변하고 그것이 날개가 하늘을 덮을 정도로 큰 붕새로 변하는 것과 같다.
넷째는 ‘자유’다. 말할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고 변화한 사람은 그만큼 자유로워진다. 붕새가 하늘을 날아 ‘남쪽 깊은 바다(南冥) 하늘 못(天池)’으로 비행하는 것과 같다. 지금까지 우리 눈을 가리고 있던 무지나 선입견, 거기에서 오는 제약과 속박,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 이것이 바로 자유요, 이 자유가 종교의 최종 결과다. 이 자유를 전통적인 용어로 바꾸면 해탈, 목샤(moksha), 구원 등이라 할 수 있다.
다시 요약해 보자. 종교의 핵심은 ‘진리를 깨침으로 변화를 얻고, 거기에 따라 누릴 수 있는 자유’라고. 좀 더 평범한 말로 하면, ‘될 수 있는 대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어 자유를 누리는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종교의 심층과 표층
물론 종교는 산을 올라가면서 더 많은 것을 보는 것, 바다에 끝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 동네 어귀의 나무뿌리가 구렁이가 아니었다는 것, 땅바닥이 바로 발밑에 있었다는 것을 아는 정도의 실재를 문제 삼지 않는다. 종교는 이른바 ‘궁극 실재(ultimate reality)’를 문제 삼고 있다. 구체적으로 브라흐만, 공(空), 도(道) 혹은 무(無), 이(理), 절대 신이라고 하는 궁극 실재를 좀 더 잘 알고, 그에 따라 변화를 얻고, 자유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 종교적 노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종교들이 이런 종교 본연의 자세를 취하는가 하는 점이다. 유감스럽게도 대답은 부정적이다. 오늘날의 종교들이 현실적으로 진리니 깨침이니 변화니 자유니 하는 고매하고 심오한 종교적 측면과는 무관하게 오로지 현실적 이익과 기복에 전념하고 있다고 하면 이는 잘못된 관찰일까? 현재 한국 종교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비리와 교세확장주의, 물질제일주의, 집단적•개인적 이기주의, 독선적 배타주의 등을 보고 있노라면 안타깝게도 이런 관찰이 잘못되었다고만은 할 수 없다.
필자는 비교종교학자로서 그동안 세계 여러 종교를 비교하고 분류하는 방법에 대해 고심했다. 가장 보편적인 분류 방법은 그리스도교, 불교, 유교, 힌두교, 이슬람 등 여러 종교를 종교 전통에 따라 나누고 연구하는 것이다. 세계의 종교는 모두 나름대로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비교한다거나 불교와 유교를 비교해 각 종교 전통 속에서 발견되는 특이한 모습들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검토하고 열거하는 것이 일반적인 접근법이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세계 종교를 이처럼 종교 전통별로 분류하는 방법보다 여러 종교 전통들을 관통하는 ‘표층’과 ‘심층’으로 크게 구분해 나누는 것이 어느 면에서 더욱 적절하고 의미 있는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접근법이 다양한 종교 현상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그 의미를 찾는 데 도움이 되리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세계 종교를 보면, 그리스도교에도 표층 그리스도교와 심층 그리스도교가 있고, 불교 역시 표층 불교와 심층 불교로 나눌 수 있으며, 유교에도 표층 유교와 심층 유교가 있다. 이렇게 분류하면 표층 그리스도교, 표층 불교, 표층 유교 등 각 종교의 표층들 간에는 상당한 유사점과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고, 심층 그리스도교, 심층 불교, 심층 유교 등 각 종교의 심층들 사이에도 서로 ‘통하는’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한 전통 내에서 발견되는 표층과 심층의 차이가 두 가지 다른 전통의 표층들 사이나, 두 가지 다른 전통의 심층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차이보다 더 클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표층 그리스도교와 심층 그리스도 사이의 차이가 심층 불교와 심층 그리스도교의 차이보다 크다는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일본을 방문한 어느 미국 신학자가 호텔 지하에서 일본 선사(禪師)들을 만나 대화를 나눴는데 미국 신학자와 일본 선사들은 놀라울 정도로 서로 이해가 잘되고 통하는 의기투합의 느낌을 경험했다. 그 신학자가 다시 호텔 위층에 있는 자기 방으로 돌아와 텔레비전을 켰는데, 미국에서 온 전도자가 일본 사람들을 상대로 큰 소리로 복음을 전하는 장면을 보았다. 놀랍게도 그 신학자는 전도자가 자기와 같은 그리스도교에 속해 있었지만 방금 만나고 온 선사들보다 더 큰 괴리감을 느꼈다.

표층과 심층 종교는 무엇이 다른가
그렇다면 거의 모든 세계 종교를 관통해 발견되는 표층과 심층의 차이는 무엇인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스무 가지 이상을 열거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가장 핵심이라고 생각되는 것 몇 가지만을 소개한다.
첫째, 표층 종교가 변화하지 않은 지금의 나(現我), 이기적인 나, 그리스도교 용어로 죄인인 나, 불교 용어로 탐진치(貪瞋癡)에 찌든 나, 종교가 다석(多夕) 류영모의 용어로 ‘몸나(육신의 나)’, ‘제나(自我)’로서의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종교라고 한다면, 심층 종교는 이런 나를 극복하고 비우고 넘어설 때 찾을 수 있는 새로운 나, 옹글한 나(全我), ‘참나(眞我)’, ‘큰나(大我)’, ‘얼나(靈我)’를 찾으려는 종교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참나를 찾았을 때, 옛 자신은 죽고 새로운 자기로 다시 태어났을 때, 사람들은 해방과 자유를 향유하는 늠름하고 당당한 인격체로 우뚝 설 수 있다. 그리스도교 용어로 하면 부활이요, 불교 용어로 하면 해탈이요, 다석 류영모의 용어로 하면 ‘솟남’이다.
똑같이 교회나 절에 다니고 똑같이 헌금이나 시주나 기도를 하더라도, 표층 종교에 속한 사람은 이 모든 것이 이 세상에서 자기가 복을 받고 잘 살기 위한 수단으로, 혹은 내세에서도 영생복락을 누리며 살기 위한 준비로 생각하기가 십상이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심층 종교에 속한 사람은 이런 종교적 행동이 욕심으로 가득한 지금의 나, 이기적인 나를 죽이고 새로운 나로 거듭나기 위한 내면적 훈련이라 생각한다. 성경 구절 중에 이 표층•심층의 구분에 해당하는 내용은 무엇일까? 마태복음을 살펴보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4~26절)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간다고 하는 것은 둘 다 지금의 이기적인 나를 극복하는 것, 현세적인 이익이나 기복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형태에 함몰된 나에게서 벗어난다는 뜻이라 할 수 있다.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중략) 제 목숨을 잃으면 찾을 것”이라는 구절도 지금의 내 목숨, 지금의 나에 집착하면 참된 목숨, 참나에 대해 관심을 쏟을 길이 있을 수 없고, 그렇게 되면 결국 참 목숨, 참나를 잃고 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또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는 표현도 표층 종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지금의 내 목숨, 지금의 나에 집착하며 종교 생활을 해 천하를 얻는다 한들 참 목숨, 참나를 잃으면 무엇이 유익한지 자문하라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지금의 나를 떠받들고 사는 삶이 참된 삶이 아니라는 것은 불교에서 더욱 강조된다. 불교는 우리가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나’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라고 역설한다. 이것이 부처가 성불 후 설파한 이른바 ‘무아(無我, anātman)’의 가르침이다. 형이상학적인 상세 부분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윤리적 방향에서 본다면 유교에서 ‘나’ 중심적인 ‘사(私)’를 죽이라는 ‘무사(無私)’의 가르침도 지금의 이기적인 나를 벗으라는 가르침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표층이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것에 비해 심층은 ‘이해’나 ‘깨달음’을 강조한다. 표층 종교는 자기 종교에서 가르치는 교리나 율법 조항을 무조건 그대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지만, 심층 종교는 열린 마음으로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으로 찌든 지금의 내가 죽고 새롭게 태어날 때 필연적으로 얻어지는 새로운 눈 뜸, 더 깊은 깨달음을 중요시한다. 모든 종교적 가르침이나 의례나 행사도 결국은 이런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준비 작업이라 여긴다.
이러한 눈 뜸이나 깨달음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결국 '의식의 전환(transformation of consciousness)'이라 할 수 있다. 더 거창한 말로 바꾸면,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의 일상적인 이분법적 의식에서 벗어나 실재의 더 깊은 차원을 볼 수 있도록 하는 '특수 인식 능력의 활성화'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와 관련해 예수는 어떻게 가르쳤을까?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며 처음으로 외친 말은 “회개하라.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웠다.”이다. 이 때 '회개'라는 말의 원문은 ‘메타노이아’다. ‘메타’와 ‘노이아’의 합성어인 이 말의 더욱 직접적인 뜻은 ‘의식의 변화’다. ‘회개하라’는 외침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결심을 하는 것과 같은 윤리적 차원에서의 새로움의 요구라기보다는, 우리의 의식 깊은 곳부터 완전히 바꾸어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고 살 것을 요구한 것이라 보아야 한다. 심층 종교는 이처럼 우리의 의식이 근본적으로 바뀔 때 새로운 삶, 해방과 자유의 삶을 살 수 있다고 가르친다.
불교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붓다’ 혹은 ‘불(佛)’이란 ‘깨우친 이’라는 뜻이다. ‘불교’는 ‘깨침을 위한 종교’, ‘깨친 이의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다. ‘성불하십시오.’라는 말은 깨침을 이루라는 말이다. 부처도 무엇이든 전통이나 권위에 의해 무조건 받아들이지 말고 스스로 관찰해 이해될 때 그것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했다.
참된 의미의 종교는 이성(理性)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다. 라틴어로 ‘contra ratio’가 아니라 ‘supra ratio’라고 한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이사야 1:18)고 초청하고 있다. 여기서 ‘변론하자’고 한 것을 영어로는 “Let us reason”이라고 번역했다. 이성을 가지고 따져보자는 뜻이다. 이성을 무시한 믿음, 이성에도 미치지 못한 믿음은 경신(輕信), 맹신, 광신, 미신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
유교는 어떤가? 유교 경전 대학(大學)에 보면 인간이 큰 배움을 위해 밟아야 할 여덟 가지 단계가 열거되어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이다. 여기서 처음 두 단계, ‘격물’과 ‘치지’는 이성을 최대한 활용하라는 말이다. 사물을 깊게 연구하고 우리의 앎이 극에 이르도록 하라는 뜻이다. 이런 것이 가능해야만 뜻이 정성스럽고 마음이 올바르게 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무조건 믿는 믿음은 참된 의미의 믿음에 방해가 될 뿐이다.
셋째, 표층 종교가 대체적으로 영원히 분리된 두 가지 개체로 신과 나를 보는 반면, 심층 종교는 내가 신 속에 있고 신이 내 속에 있다고 하며 신과 내가 ‘하나’임을 강조한다. 심지어 내 속에 있는 신적인 요소야말로 바로 나의 참나라고 믿는다. 동학에서 주장하는 시천주(侍天主, 내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나 인내천(人乃天, 내가 한울님이다)이라는 가르침이 이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인 만유재신론(panentheism)의 입장인 셈이다.
이에 대해 예수는 어떻게 말했을까? 요한복음에 이런 가르침을 암시하는 말이 자주 나온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라는 구절이다. 그 외에도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 10:38),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14:11),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와 같은 구절이다.
사실 이 생각은 신과 인간뿐 아니라 세상 만물이 동체(同體)임을 강조한다고 더 확대해 볼 수 있다. 이 세상에 궁극적으로 독립적인 개체는 있을 수 없고, 모든 것이 모든 것에 의존하고,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신유학(新儒學)에서 주장하는 이른바 만유일체(萬有一體), 혼연동체(渾然同體) 사상이다.
불교의 경우 연기(緣起) 사상, 특히 화엄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은 만물이 서로 연관되어 있고 상호 의존하고 있음을 어느 사상체계보다 더욱 힘 있게, 일관되게 강조한다. 이른바 인드라망 세계에서 모두가 상즉상입(相卽相入), 상호침투, 상호일치라는 것이다. 이사무애(理事無礙)뿐 아니라 사사무애(事事無礙)의 경지, 본질과 현상, 현상과 현상 사이에 아무 걸림이 없는 경지다.
이런 심층 차원의 신앙을 가질 때 이웃에 대한 참된 사랑이 저절로 나온다. 이웃과 내가 하나이므로 이웃이 아플 때 그것이 곧 나의 아픔으로 다가온다. 뿐만 아니라 내가 하느님을 모시는 것처럼 내 이웃도 하느님을 모시고 있기에 이웃 대하기를 하느님 섬기듯 할 수밖에 없다. 이른바 동학에서 말하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이다. 사람과 하늘이 하나이기 때문에 사람 섬기기를 하늘 섬기듯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사람뿐 아니라 동물, 식물, 광물마저도 다 하나라 보고 아끼고 경외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자연히 동학에서 전하는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의 삼경(三敬) 사상이 나올 수밖에 없다.
넷째, 표층 종교가 종교 경전의 표층적, 문자적 뜻에 매달리는 데 반해, 심층 종교는 문자주의를 배격하고 문자 속에 들어 있는 ‘속내’를 찾아본다. 심층 종교가 이처럼 문자주의에 사로잡히지 않는 이유는 깊은 종교적 깨달음의 경지, 내 속의 참나를 찾는 일, 우리 모두가, 더 나아가 전 우주가 하나라는 사실 등의 발견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기에 우리가 쓰는 보통의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경지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말의 표피적 뜻에 집착하지 않고 그 너머를 본다는 뜻이다. 심층 종교는 경전에 나오는 말을 상징적으로, 은유적으로, 유비적으로 이해하고 그것들이 가리키는 종교적 실재를 체험하려고 한다. 불교적 용어로 하면 불립문자(不立文字)다. 문자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역할을 할 때 제 기능을 다하는 것이라 보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을 가장 힘 있게 가르친 이는 사도 바울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고후 3:6, 새 번역)고 했다. ‘영’이라고 번역된 것은 ‘정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그 문자 뒤에 있는 영, 정신, 속내는 사람을 살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다섯째, 표층 종교가 대체로 자기 종교만 진리라고 주장하는 배타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심층 종교는 종교의 다양성(plurality)을 인정하고 자기 종교가 진리를 독점한다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 종교의 심층에 접한 사람은 인간 지성을 통한 표현이 얼마나 한정된 것인가를 잘 알기 때문에 종교 경험에 대한 한 가지 표현, 비록 그것이 자기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표현이더라도, 그것만을 절대화할 수 없다. 자기 종교만 진리라고 주장하는 대신 군맹무상(群盲撫象)의 이야기처럼 각자 자기가 만진 코끼리 경험을 토대로 함께 앉아 서로 대화하면서 함께 코끼리의 실상에 가까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원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화쟁을 북돋으려면 종교가 표층에 머물지 않고 심층으로 심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종교의 심화
우리의 종교 생활은 대부분 표층에서 시작된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인류 역사 전체를 보아도 그렇다. 따라서 표층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현실적으로 지금의 나를 중심으로 종교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표층에서 시작했더라도 거기에 안주해서는 곤란하다. 산타가 굴뚝을 타고 내려와 선물을 주고 간다는 생각은 어릴 때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마흔이 넘었는데도 크리스마스 때만 되면 지붕에 올라가 산타를 위해 굴뚝을 쑤시고 있다면 한심하지 않을까? 종교의 깊이에 접한다거나 믿음이 자란다는 것은 이런 표층 신앙에서 심층 신앙으로 넘어가는 심화 과정을 밟는다는 뜻이다. 이런 심화 과정을 등한시하거나 거부하면 이른바 신앙의 발달 장애를 겪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경우 몇 가지 예를 든 것 같이 예수나 사도들, 믿음의 선구자들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표층에서 심층으로 옮겨 가는 심화 과정을 밟을 수 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그리스도교에도 깨침과 ‘하느님 나라’의 내재성을 강조하는 㰡도마복음서㰡 같은 복음서가 있다. 4세기 콘스탄티누스가 로마 황제가 된 후 폐기처분 명령을 받고 사라졌다가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이 복음서를 비롯해 불교, 도가 사상, 신유학 사상 같은 이웃 종교나 사상체계를 보면서 이런 심화 과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왜 그런 과정이 필요한지 더욱 뚜렷하게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의 경우도 오늘날 기복 일변도의 종교적 태도에서 깨침을 얻어 자유에 이르라는 부처의 정법(正法)으로 돌아가야 한다. 유교도 형식주의적이고 복고적인 태도를 벗어버리고 소인배의 마음가짐에서 군자의 대의를 품으라는 공자의 뜻이 무엇인지, 맹자나 신유학에서 보는 것처럼 의식의 변화를 통해 이를 수 있는 성인(聖人)의 경지가 무엇인지 분명히 하고 이를 추구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물론 불교인이나 유교인도 그리스도교나 기타 이웃 종교를 연구하고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자기들의 영적 위치가 어디인지를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종교학의 창시자 막스 뮐러(Friedrich Max Müller)의 말처럼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가면서
신학자들이나 종교학자들의 진단에 따르면, 한국 종교인 절대다수가 표층 신앙에 머물러 있다. 신앙생활이나 ‘나 중심’ 혹은 ‘우리 중심’으로 맴돌고 있다. 이런 개인이나 집단 이기적인 표층 신앙 때문에 현재 종교계에 종교적 배타주의를 비롯해 여러 가지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 속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 가톨릭 신학의 거장 칼 라너(Karl Rahner) 같은 독일 신학자들이나 기타 종교학자, 종교문화 비평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21세기에는 이런 표층 종교의 자기중심적 관행이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서 오래 가르친 독일 신학자 도르테 죌레(Dorthee Soelle)는 이제 심층 종교가 많은 사람에게 퍼져나갈 것이라는 심층 종교의 ‘민주화’를 주장하고 있다. 아무튼 이런 표층 신앙에 함몰되어 생기는 여러 가지 부작용이 줄어들고, 더욱 많은 사람이 심층 종교가 줄 수 있는 생명력과 시원함을 누리게 되기를, 그리하여 한국 사회가 한층 밝고 아름다워지기를 기원해 본다. 이런 중차대한 일을 위해 [화쟁 문화 아카데미]의 활동에 큰 기대를 걸고 싶다.
이 글은 2015 화쟁문화아카데미 1회 종교포럼에서 오강남 캐나다 리자니어대학 명예교수가 기조발제한 것이다. 오 교수는 이 글이 오강남, 성소은 엮음, 『종교너머, 아하 – 기성 종교이 패러다임을 바꾸다』(판미동, 2013)라는 책에 필자가 기고한 글을 수정 보완한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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