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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방한은 한국불교에 어떤 영향을 줄까?

올린 게시글COLON 2015-05-12, (화) 5:08 am
글쓴이: paraMitakim
교황 방한은 한국불교에 어떤 영향을 줄까?
김관태 | 경영컨설팅 살림山林 대표 2014.08.13

내일(14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맞아 우리 사회는 축제의 분위기에 들떠있다. 마치 이 나라가 카톨릭 국가가 된 듯하다. 벌써부터 교황이 지나가는 길가에는 태극기들이 줄지어 있고 광화문 광장은 시복식 준비로 분주하다. 교황은 방한 당일 청와대를 방문하고 15일 오전에는 대전 월드컵 경기장에서 세월호 참사 유가족 및 생존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모승천대축일 미사를 진행한 후, 대전 가톨릭대학교에서 아시아청년들과 비공개 오찬을 하고 오후에 김대건 신부의 탄생지인 당진 솔뫼성지에서 '아시아 청년들과의 만남'을 가진다. 16일 오전에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순교자 124위에 대한 시복 미사를 개최한 후 음성 꽃동네를 방문한다. 그리고 17일 오전에는 서산 해미에서 비공개로 아시아 주교들과의 만남을 가진 후 오후에 서산 해미읍성에서 아시아청년대회 폐막미사를 집전한다. 마지막인 18일에는 종교지도자들과 만난 후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갖는 것을 끝으로 우리나라를 떠난다. 실로 대단한 강행군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행보를 보는 우리 불교계의 속내는 매우 떨떠름해 보인다. 교황의 방한을 반기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나 광화문이라는 시민의 공간을 온전히 시복식에 내어준다는 것이 못내 불만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남의 잔치’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그냥 떨떠름해 하게 생각하고 넘어가기에는 교황의 방한이 우리에게 미칠 영향이 녹록치 않다. 그리고 그것은 장기적으로 한국불교의 미래에 큰 영향을 주게 될 것이기에 이번 교황의 방한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검소한 교황- 2013년 3월 13일 로마 카톨릭은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 추기경을 베네딕토 16세의 뒤를 이을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이번 교황 선출은 시리아 출신이었던 그레고리오 3세(731년) 이후 1282년 만에 처음으로 비유럽권에서 교황이 선출되었다는 것과 카톨릭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미주 대륙에서 교황이 탄생했다는 점이 특징이며, 여기에 한 가지 더하여 ‘예수회(Jesuit)’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교황이 선출되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회 출신에 주목하는 이유는 뒤에 다시 서술하겠다.
새 교황은 교황 즉위명으로 ‘프란치스코’를 선택했는데 '프란치스코'는 13세기 이탈리아 중부의 마을 아시시에서 태어나 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끝없는 사랑을 실천한 성인으로 자애로운 인품과 여러 가지의 기적으로 지금까지도 카톨릭 신자들이 존경을 받고 있으며, 특히 모든 생명을 아껴 동물과 대화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부유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향락을 쫓고 방탕하게 살다가 20세에 마음을 돌이킨 후 모든 사유 재산을 버리고 청빈하게 살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1209년 제자 11명을 거느리고 청빈을 목표로 한 '작은 형제들의 모임(현재의 작은 형제회)'이라는 최초의 수도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보면 지금 교황과 프란치스코 성인은 서로 다른 수도회 소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이름을 즉위명으로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가야할 길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표했다고 할 수 있다. 가난한 교회, 억울하고 핍박받는 이들을 위한 교회를 만들겠다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이후 교황의 행보는 분명히 ‘낮은 곳으로 임하는’ 모습에 틀림없다. 자신의 생일에 노숙자를 초청하여 같이 식사를 하는가 하면, 어렵고 가난한 이들에게 세족식을 해주고 그 발에 입맞춤을 하면서 더욱 더 낮은 모습을 취한다. 교황의 저택이 아닌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며, 운전기사가 딸린 큰 차 대신 작은 차를 손수 운전하고 다닌다. 버스나 지하철과 같은 대중교통을 애용하는 것으로도 유명하고 음식이나 옷의 수선도 직접 한다. 실로 청빈하고 소박한 삶의 모습, 사랑과 박애의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다가서고 있다.
이런 교황이 우리나라에 와서는 어떤 메시지를 줄까. 84년과 닮은 꼴일까? 아닐까? 교황의 방한은 지난 1984과 89년에 이어 25년만의 일이다. 그런데 이번 방한은 30년 전 교황 요한바오로2세의 방한과 많은 점에서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84년은 군사쿠데타와 광주민주화 운동을 총칼로 유린한 후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의 무자비한 공안통치가 계속되던 시점이었다. 이와 같은 반민주적인 행태로 인해 전두환 정권은 내외부로부터 그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 요한바오로 2세가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한국천주교 주교단의 공동초청으로 1984년 5월 3일부터 7일까지 5일간 우리나라를 공식 방문하였다.
당시 교황의 방한은 결과적으로 독재정권에 면죄부를 주는 것과 같다는 점을 들어 많은 이들이 방한에 반대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방한은 진행되었고, 이에 실망한 사람들이 많았다. 당시 요한바오로 2세의 방한 명분은 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행사와 한국천주교 역사상 처음으로 성인 품위에 오르는 103위 시성식 그리고 남북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있는 한반도에 사랑과 평화를 심는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일부에서 당시 이 땅의 반민주적인 상황에 대해 정권에 일침을 가해주길 바랬던 기대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이와 같은 점은 쌍둥이처럼 닮아있다. 박근혜 정부는 출발부터 부정선거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오죽하면 박창신 신부를 비롯한 사제단 신부들이 시국미사를 통해 ‘2012년 대선은 국정원이 개입한 부정선거였기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은 퇴진하라’고 요구했을까. 그 출발점에서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거나 의심받는다는 점은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세월호 참사와 그 수습과정에서 보여준 무능과 부패로 인해 정권의 존립이 위태로운 상황이라는 것은 30년 전 전두환 정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전두환 정권이 ‘교황 모시기’에 나섰던 것과 박근혜 정부가 이번 교황을 모시기 위해 ‘5고초려’했다는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더욱 자명해진다.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박근혜 정권이 이 교황이 선출되자마자 공식적으로는 다섯 차례, 비공식적으로는 얼마나 될지 모를 정도로 교황의 방한에 ‘목을 매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대통령의 종교적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대통령의 종교편향을 확인시켜주는 것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며, 그것이 아니라면 이렇듯 집요하게 교황의 방한을 학수고대하는 데는 다른 의도가 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과연 교황이 이 정권이 바라는 그 ‘떡’을 줄 것인가 두고 볼 일이다.
방한한 교황이 광장에서 시복식을 연다는 것 또한 닮아 있다. 요한바오로 2세 때에는 103위, 이번에는 124위의 순교자들에게 시복식을 연다. 당시에는 여의도광장이었지만 이번에는 광화문광장이라는 점이 달라진 점이다. 천주교도를 박해한 조선왕조의 심장부 앞에서 순교한 이들의 시복을 행한다는 것은 이들이 가진 한풀이의 마당을 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땅을 순교의 땅, 성인을 배출한 땅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광화문광장까지 내어준 박근혜 정부에게 과연 프란치스코 교황은 어떤 선물을 줄까?
-예수회(Jesuit) 소속의 교황과 이미지 메이킹-
필자는 앞에서 이번 교황이 ‘예수회(Jesuit)’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교황이 선출되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사실 천주교의 여러 수도회에 대해서 신자가 아닌 사람들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이 예수회가 갖는 상징성으로 인해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사전적 정의를 보자. 브리태니커 사전에서는 예수회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예수회 성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세운 로마 가톨릭 수도회. 예수회는 교육•선교•박애 활동으로 유명하며, 한때는 반(反)종교개혁을 수행하는 주도적인 단체로, 후에는 교회를 현대화시키는 주도적인 세력으로 간주되었다. 예수회는 언제나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단체였다. 그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예수회가 공포와 정죄의 대상으로 보이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존경할 만한 대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 수도회는 이그나티우스의 활동에서 생겨났다. (중략)

1539년 이그나티우스는 수도회 조직에 대한 최초의 윤곽을 잡아서 제출했고, 교황 파울루스 3세는 1540년 9월 27일 이를 승인했다. 예수회는 종교생활형식에 몇 가지 혁신을 도입했다. 그 가운데에는 기동성과 적응성을 높이기 위해 중세의 관행 중 많은 것, 즉 모든 사람들이 의무적으로 정기적인 고해성사나 금식을 하는 것, 똑같은 제복을 입는 것, 전례의식 때 함께 낭송하는 것을 폐지했다. (중략)
예수회는 교황에 대한 특별한 복종을 비롯해 복종의 미덕을 특히 강조한다. 기동성도 예수회가 강조하는 점이다. 이로 인해 예수회는 세계 곳곳에서 매우 다양한 사역에 참여하게 되었다. 예수회는 빠르게 성장하여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고 부흥시키는 반 종교개혁의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교육과 장학사업은 거의 초기부터 예수회의 주요사역이었다. 이들은 유럽의 왕족들과 통치자들에게 고해신부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초청받는 경우도 많았다. 이 임무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설립된 지 몇 개월이 안 되어 이그나티우스는 자기의 동료 중 가장 재능 있는 사람이었던 프란시스코 하비에르와 그외 3명을 동양으로 보냄으로써 예수회의 해외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예수회 수사들은 교육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활동보다도 선교 사역에 점점 더 많이 참여했다. 1556년 이그나티우스가 죽었을 때는 약 1000명의 예수회 수사들이 이미 유럽•아시아•아프리카•신대륙 전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626년경 예수회 수사들의 수는 1만 5544명이었고, 1749년에는 전체 회원이 2만 2589명에 달했다.
수도회 가운데서 예수회가 차지한 탁월한 위치와 교황에 대한 옹호로 인해 그들은 많은 반대를 받았다. 18세기 중엽에는 평신도와 성직자를 막론하고 여러 반대자들이 예수회를 없애려고 시도했다. 이렇게 반대를 받은 이유로 몇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가장 주된 것은 그 시대의 반(反)성직자, 반교황 정신일 것이다. 1773년 교황 클레멘스 14세는 특히 프랑스•스페인•포르투갈 정부의 압박에 못이겨 예수회를 폐지하는 법령을 공포했다. 예수회 단체는 러시아에만 남게 되었는데, 러시아의 정치적 조건들, 그중에서도 특히 예카테리나 2세의 반대로 인해 예수회 활동을 금지시키려는 교회법이 시행되지 못했다.
예수회가 특히 교육과 선교 영역에서 수행하던 일을 다시 맡아야 한다는 요구가 끈질기게 계속되자 1814년 교황 피우스 7세는 예수회를 재건했다. 재건된 뒤 예수회는 가장 큰 남자 수도회로 성장했다. 수사들은 다른 어떤 활동보다도 교육활동의 전 영역에 더 많이 참여했다. 또한 선교지에서 활동하는 수사들, 특히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활동하는 수사들의 수는 다른 수도회를 능가했다. 이들은 폭넓고 복잡한 여러 가지 활동에도 참여했다. 예를 들면 커뮤니케이션 분야, 사회사업, 에큐메니컬 운동단체, 심지어 정치에도 참여했다.
사전의 이와 같은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회는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 즉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반대하는 반(反)종교개혁 단체이다. 사전의 언급에서도 보이듯이 이들이 때로 ‘공포와 정죄’의 대상으로 보이고 평신도는 물론 성직자들까지 이들을 없애려고 시도했다는 것은 이들이 갖는 전투적, 때론 폭력적 문제 해결방식에서 기인한다.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는 “교회가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도미니크파 수도사들이 행하였듯이 종교재판소를 통하여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함으로써 교황과 교회의 세속권에 의한 교회법과 교리에 의하여 다스리는 것뿐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만 된다면 프로테스탄트는 자연히 소멸될 것이며 교황권만이 득세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프로테스탄트와의 일전을 마다하지 않았고, 교회를 지키기 위한 비밀결사를 운영했다고 전해진다. 이와 같은 비밀결사들은 교회 옹위를 위해 개인적 단죄나 테러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에서 이 예수회에 대한 논란이 시작된다. 특히 개신교도들의 예수회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전 설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수회는 매우 공격적인 선교를 한다. 기동성, 적응성을 중시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새로운 선교지를 향해 기동력 있게 움직이고, 전략적으로 선교를 진행한다. 16세기에 벌써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각지에 이들이 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이와 같은 기동성이 이들의 특징이다. 그들은 병원, 학교, 대학 등을 개설하고 이를 은밀한 선교의 수단으로 삼았다. 개신교의 전투적 선교와 닮아 있는 것이다.
이 예수회가 세운 학교가 바로 지금의 서강대학교이고 박근혜 대통령의 모교인 것이다. 이런 예수회 출신의 교황이 예수회가 아닌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설립자 아시시의 성인 프란치스코를 교황명으로 지은 것은 예수회가 가진 이런 이미지에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미지를 덧씌우려고 한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교황 방한의 가장 큰 목적이 예수회가 지향하는 ‘선교’와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교황 방한 이후 급성장한 천주교
교황이 방한하여 누구의 눈물을 닦아줄 것인가는 자못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그런 점을 관전하는 것 보다 더 시급한 일이 우리 불교계에 주어져 있다. 그것은 교황의 방한이 이 땅의 종교지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1984년 요한바오로 2세가 방한할 당시만 해도 한국 천주교의 교세는 지금 같은 폭발적 성장세를 보이지 않았다. 물론 당시만 해도 지금과 같은 인구센서스 방식의 종교인구조사가 실시되지 않고 있었다. 종교인구에 대한 통계는 당시 문화공보부가 매년 발간하는 ‘한국의 종교’라는 책자에서 각 종교의 인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이 자료는 각 종교가 제출한 자료에 근거한 것이었기 때문에 정확도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때로는 특정 지역의 종교인구가 그 지역의 인구보다 많은 아이러니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런 문제점이 제기되면서 종교인구는 매 5년마다 하는 센서스에 매 10년마다 한번씩 종교인구 조사를 실시하여 발표하고 있다. 이 조사는 1985년 시작한 이래, 1995년과 2005년 등 모두 3번의 조사가 진행되었고 이제 내년(2015)년 조사를 앞두고 있다. 따라서 1985년 이전의 종교 인구는 통계적 신뢰도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조사에서도 천주교의 인구는 가장 현실과 가깝다고 인정되었다. 왜냐하면 당시에도 천주교는 교적부에 근거한 신도수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인구 센서스 이후 종교 인구 변화
1973년 종교인구 대비 4.6% 뿐이었던 천주교 인구는 2005년 종교인구 대비 20.6%라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비교 대상의 신빙성에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교황이 방한하는 84년 이전과 이후의 비교에서 교황 방한이 가지는 효과를 분명히 알 수 있다. 84년 문공부의 발표에서 천주교 인구는 159만 여 명을 기록한다. 그런데 84년 교황이 방한한 직후인 85년 인구센서스에서 나타난 천주교 인구는 무려 28만 명이 늘어난 186만 5천명에 달하게 된다. 69년에서 84년까지 매년 천주교 인구가 증가하기는 하였지만 1년 사이에 이렇게 많은 인구가 증가한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73년에서 75년 사이에 22만, 80년에서 83년 사이에 40만이라는 인구가 증가하지만 모두 2년, 또는 3년의 기간을 두고 증가한 수치이므로 단기간의 수치로는 84년 발표와 85년 조사 기간의 증가수가 가장 많다고 할 수 있다. 이후 85년 ~ 95년까지 10년간 58.2% 95년 ~ 2005년까지는 무려 74.4%라는 비약적인 발전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추세를 감안하고 얼마 전에 고산문화재단이 진행한 국민여론조사의 수치를 감안할 때 내년 인구센서스의 예상 종교인구는 개신교인구 1천여만 명, 불교인구 800여만 명, 천주교인구 700여만 명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산문화재단의 조사에서 개신교 22.5%, 불교 18.1%, 천주교 14.2%라는 조사 결과가 나타나 있다)
불교인구가 개신교인구에 추월당하고 천주교 인구와 크게 격차가 나지 않을 공산이 큰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교황의 방한 효과가 더해질 때 불교인구가 천주교인구에 추월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불교인구가 2등, 혹은 3등으로 내려앉을 가능성이 매우 농후한 것이다.

교황의 방한 목적과 우리의 대응
그리고 주목할 것은 이번 교황의 방한 행사의 전략적 지향이 무엇인가를 잘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교황 방한의 가장 큰 행사는 124위에 대한 시복식이다. 그렇지만 천주교 측에서는 이번 방한의 주목적이 AYD 아시아 청년대회에 있다고 말한다. 아시아 청년대회를 대전 교구로 유치한 대전 교구장 유흥식 주교가 이 대회에 교황이 참석할 것을 요청하면서 방한이 성사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방한 일정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교황은 한국은 물론 아시아 청년들과 만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아시아 주교들과의 비공개 회의 일정도 주목해야 한다. 이런 일정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이번 교황 방한의 목적이 작게는 아시아의 교두보인 한국에 대한 선교에서 크게는 아시아 선교에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주된 공략 대상이 청년층이라는 것도 범상치 않다. 즉, 청년층이 향후 한국과 아시아의 천주교 성장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교황이 전략적, 전투적 선교를 지향하는 예수회 출신이라는 것까지 감안하면 이번 교황의 방한 목적은 한국 사회에 대한 관심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온전히 선교 전략의 일환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즉, 카톨릭의 선교 전략과 영세명이 율리아나인 박근혜 대통령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 성사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교황이 방한하는 동안 그의 행보를 보면서 확인될 것이다. 상대가 이렇게 전략적 지향을 드러내면서 적극적 활동과 이미지메이킹을 하는데, 우리 불교는 그저 아무 대응 방안도 없어 보인다. 교황의 방한과 어렵고 힘없는 이들을 향해 낮은 곳으로 임하는 그의 일정은 궁극적 목적인 선교를 내세우지 않고도 우리 국민들에게 엄청난 이미지 제고 효과를 가져 올 것이다. 그리고 청년과 아시아라는 전략적 선교 대상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포교 전략을 갖고 있으며, 어떤 이미지메이킹을 하고 있는가? 지금도 조계사 주변에서는 이미지메이킹이 아니라 자해(自害) 수준의 행동을 서슴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된다. \n우리가 제대로 전략을 세우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려운 이들과 사회에 기여하고 모범이 되지 않는다면, 계행과 위의를 바로 세우지 않는다면 2025년 인구 센서스에서 불교의 몰락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불교포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