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를 만나다10-싯다르타, 스승에게 던진 돌직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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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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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를 만나다10-싯다르타, 스승에게 던진 돌직구는?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2017-09-18, (월) 2:34 am

싯다르타가 태어날 때 인도는 16개국으로 쪼개져 있었다. 히말라야 산맥 아래, 인도 북부의 카필라 왕국은 부족국가 수준의 아주 작은 나라였다. 싯다르타가 출가했을 때 16개국 중 작은 나라들은 이미 정복을 당하고 있었다.

대신 큰 나라였던 마가다ㆍ코살라ㆍ아완티ㆍ왐사 등의 4개국이 서로 패권을 다투었다. 붓다가 주로 활동했던 인도 북부는 마가다국과 코살라국이 용호쌍벽을 이루는 지역이었다. 나중에 싯다르타의 조국인 카필라 왕국도 결국 코살라국의 침략으로 멸망한다.

인도의 젖줄 갠지스를 끼고 있는 오래된 도시 바라나시는 한국의 경주에 해당한다. 백성호 기자

마가다국의 수도는 라즈기르였다. 갠지스 강의 남쪽이다. 나는 버스를 타고 갠지스 강을 건너 라즈기르로 갔다. 바이샬리에서도 남쪽으로 내려가야 했다. 버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인도 시골의 오지 풍경은 놀라웠다. 풀을 얹은 초가 지붕은 한국의 초가와 무척 닮았다. 게다가 기와를 얹은 집도 있었다. 한옥보다 기와의 가로폭이 더 좁았다. 어쩌면 경주에 있는 한옥 기와의 연원도 인도에 닿아있을런지.

인도 중부의 아잔타 석굴에는 경주 석굴암의 원형에 해당하는 건축양식이 엿보인다. 백성호 기자

고구려는 중국을 통해 불교가 전래됐다. 백제와 신라는 달랐으리라. 남쪽 바다를 통해 인도에서 곧장 불교가 전래되지 않았을까. 실제 전남 영광 법성포에는 최초의 불교 도래지가 있다.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배를 타고 백제 땅에 와 불교를 전했다고 한다. 나는 인도 중부의 아잔타 석굴에 갔다가 경주 석굴암의 양식과 너무나 비슷해 깜짝 놀라기도 했다. 아잔타 석굴은 더 투박하고, 더 원시적이었지만 인도 불교가 신라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쳤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인도의 유피주와 비하르주는 가난하다. 이 지역에 붓다의 유적과 불교 성지가 유독 많다. 백성호 기자

인도의 시골 오지 사람들은 옛날 방식으로 살고 있었다. 소가 자는 움막과 사람이 자는 움막이 비슷해 보였다. 움막의 벽마다 피자처럼 납작하고 동그랗게 만든 소똥을 붙여서 말리고 있었다. 석유나 가스 대신 불을 땔 때 사용하는 일종의 천연 연료였다. 인도인 가이드는 “인도 북부의 비하르주와 유피주에는 오지가 많다. 사람들도 가난하고, 카스트제도의 낮은 계급에 속하는 이들이 많이 산다. 2600년 전 부처님이 살았던 당시의 생활방식과 지금 이곳 사람들의 생활방식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붓다가 주로 활동했던 곳도 이들 지역이었다.

인도의 들판에서 일하는 아낙네들. 오지의 시골은 지금도 옛날 방식으로 생활하고 있다. 백성호 기자

나는 한국의 크리스천들로부터 가끔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미국이나 유럽이 왜 잘 사는 지 아나? 전쟁으로 폐허가 됐던 한국이 그 짧은 시간에 이토록 발전한 이유가 뭔지 아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선진국들을 봐라. 거의 대부분 그리스도교 국가다. 그런데 불교 국가들을 봐라. 인도가 얼마나 가난한가? 부탄이 얼마나 가난한가? 또 동남아의 불교 국가들이 얼마나 가난한가? 그러니 하나님을 믿어야 나라도 은혜를 받는다. 그래야 경제도 발전한다.” 실제 한국의 교회에서 공공연히 이렇게 말하는 목회자들이 꽤 있다. 그런 생각을 공유하는 신자들도 적지 않다.

라즈기르에서 15km떨어진 나란다 대학 유적. 어마어마한 규모였던 세계 최초의 대학이었다. 백성호 기자

나란다 대학은 5세기초 굽타 왕조 때 지어졌다. 세계 각국에서 승려들이 유학을 와 불교를 공부했다. 이곳은 붓다의 제자인 사리불의 고향이기도 하다. 당시 인도는 손꼽는 문명국이었다. 백성호 기자

라즈기르에서 만난 인도인에게 나는 이 물음을 던졌다. 이런 식의 사고에 대해 인도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답이 놀라웠다. “아주 옛날에는 인도가 엄청나게 부유했다. 3000년 전에 이미 벽돌로 만든 대규모 계획도시를 건설할 정도였다. 지금은 인도가 못 산다. 가난하다. 그런데 또 500년, 1000년 뒤에는 인도가 잘 살게 될 거다. 그런 건 돌고 돈다. 옛날에 부유했다고 지금 부유한 것도 아니고, 지금 부유하다고 영원히 부유한 것도 아니다. 참 우스운 질문이다. 그런 건 물으나마나 한 물음이다.” 그의 대답에서 시선의 깊이가 느껴졌다. 인도는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다. 그래서일까. 인도인들이 사고하는 폭과 깊이는 어딘가 남달랐다.

인도의 태양은 강렬하다. 3월부터 작렬한다. 여름으로 갈수록 섭씨 40~50도는 넘나든다. 백성호 기자

라즈기르는 싯다르타의 자취가 서린 땅이었다. 싯다르타는 알라라 칼라마의 곁을 떠났다. 눈을 감을 때만 피어나는 고요, 눈을 뜨면 곧 사라지는 고요는 그에게 의미가 없었다. 싯다르타는 바이샬리를 떠나 이곳 라즈기르로 왔다. 그 옛날, 수행자들은 걸어서 다녔다. 3월 초만 돼도 인도의 햇볕은 작렬한다. 봄과 여름에는 섭씨 40~50도를 넘나든다. 열기가 살갗을 후벼파는 느낌이다. 싯다르타가 라즈기르로 이동할 때는 무슨 계절이었을까. 만약 겨울이 아니었다면 싯다르타는 새벽에 걷고, 낮에는 쉬고, 저녁 무렵에 다시 걸었을 지도 모른다. 불타는 태양을 피해서 말이다.

당시 라즈기르에는 웃다카 라마푸타라는 이름난 수행자가 있었다. 싯다르타는 그를 찾아갔다. 웃다카 라마푸타가 이끄는 수행그룹의 규모는 알라라 칼라마보다 더 컸다. 따르는 제자만 무려 700명이었다. 알라라 칼라마의 제자가 300명이었으니, 2배가 넘는 규모였다.

싯다르타가 찾아갔던 인도의 스승들도 삶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그 방법은 각자가 달랐다.

싯다르타 당시 수행자들의 궁극적 지향은 ‘해탈(解脫)’이었다. 해탈이 뭔가. 이치를 풀어서(解) 고통에서 벗어나는(脫) 일이다. 그것이 바로 ‘해탈’이다. 가령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한 채로 한 방에서 평생을 산다면 어찌 될까. 죽을 때까지 두려움과 걱정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자다가도 수시로 눈을 뜨지 않을까. 행여 뱀이 이쪽으로 올까봐, 행여 나를 물까봐 말이다. 그런데 뱀의 정체가 단순한 지푸라기임을 알면 어찌 될까. 그 즉시 두려움과 고통에서 해방된다. 그것이 바로 ‘해탈’이다. 뱀의 정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뱀으로 착각하던 새끼줄을 새끼줄로 바로 보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럴 때 우리의 눈도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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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두려워하는 뱀도 마찬가지다. 늙음과 병듦과 죽음. 이 모두를 사람들은 뱀으로 본다. 맹독을 품은 채 우리를 노려보는 독사로 본다. 싯다르타도 그랬다. 그는 독사로만 보이는 생로병사의 정체를 뚫고자 했다. 생로병사가 뭔가. 인간의 삶이다. 그러니 싯다르타는 인간의 삶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래서 웃다카 라마푸타를 찾아갔다.

사람들은 웃다카 라마푸타가 “해탈의 경지에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싯다르타는 큰 기대를 걸지 않았을까. 나는 궁금했다. 웃다카 라마푸타가 말하는 경지란 대체 어떤 걸까. 불교 경전에는 ‘생각도 아니고, 생각 아닌 것도 아닌 경지(비상비비상처ㆍ非想非非想處)’라고 표현돼 있다. 웃다카 라마푸타는 그것을 ‘해탈’이라고 불렀다.

갠지스 강가에서 힌두교 수행자인 요기가 피워놓고 있던 향. 그들의 지향도 '해탈'이다. 백성호 기자

그럼 왜 ‘생각이냐, 생각이 아니냐, 혹은 생각 아닌 것도 아니냐’하는 게 중요할까. 그건 단순한 말장난일까, 아니면 뭔가 깊은 뜻이 있는 걸까. 인간은 ‘나(에고)’가 있어서 고통을 받는다.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어떡해야 할까. ‘나’가 없어져야 한다. 그런데 ‘나’가 없으면 생각도 없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이 몸뚱아리를 가지고 사는 동안 생각은 자꾸만 올라온다. 물론 아주 잠깐 동안 ‘아무 생각 없는 상태’를 체험할 수는 있다. 그래봤자 잠시다. 생각은 다시 또 올라온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1596~1650)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가 있으면 생각이 있고, 생각이 있으면 나가 있다. 그러니 ‘해탈=무아(無我)’라고 여기던 인도인들에게 ‘생각’이란 놈은 굉장한 골칫덩어리였다. 고대 인도인들은 생각이 있는 한 ‘나’가 있다고 여겼다.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무아’가 돼야 하는데 자꾸만 생각이 올라오니 난감해 했다. 웃다카 라마푸다가 “생각도 아니고, 생각 아닌 것도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한 나름의 해법이었다.

인도 델리 박물관에서 만난 조각상. 깨달음을 이룬 붓다가 세상의 이치를 설하고 있다. 백성호 기자

어쨌든 싯다르타는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그리고 수행에 몰두했다. 얼마나 세월이 흘렀을까. 싯다르타는 결국 스승의 경지까지 도달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그 자리가 ‘해탈의 경지’는 아니었다. 싯다르타는 짚어보고, 짚어보고, 또 짚어봤을 터이다. 아무리 봐도 해탈의 상태는 아니었다. 큼직큼직한 고뇌의 덩어리들은 사그라들었지만, 생활 속에서 부딪히는 자잘한 번뇌의 싹은 계속 올라왔다. 마치 화단의 풀을 뽑았는데 또 올라오고, 뽑았는데 또 올라오듯이 말이다. 싯다르타는 아직 ‘번뇌의 정체’ ‘생각의 정체’ ‘나의 정체’를 꿰뚫지 못했다.

인도의 아잔타 석굴. 불상과 둘레, 그리고 바깥의 건축양식이 경주 석굴암과 무척 닮았다. 다만 경주 석굴암의 조각이 더 세련되고 정교하다. 인도의 석굴이 더 투박하고 원시적이다. 백성호 기자

싯다르타는 스승에게 가차없이 물었다.

“생각도 아니고, 생각 아닌 것도 아닌 자리에서는 ‘나’가 있습니까, 아니면 없습니까? 스승께서는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해탈이 아닙니다. 스승님은 번뇌를 다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싯다르타의 지적은 단호했다. 웃다카 라마푸타는 아무런 대답도 못했다. 결국 싯다르타는 그를 떠났다. 세 번째 스승이자 마지막 스승이었다. 떠나는 싯다르타에게 웃다카 라마푸타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자네가 먼저 해탈을 이루게 된다면, 부디 여기로 와서 우리를 해탈케 해달라.” 알라라 칼라마나 웃다카 라마푸타는 당대에 내로라하는 수행자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깨달음은 불완전했다.

라즈기르에는 훗날 깨달음을 얻은 싯다르타가 꽃을 든 채 제자 가섭과 미소를 주고 받았다는 영축산이 있다. 영축산을 오르는 순례객들이 돌멩이를 하나씩 쌓아서 만든 조그만 돌탑. 백성호 기자

나는 궁금했다. 떠나는 싯다르타의 뒷모습은 어땠을까. 세 명의 스승을 만났지만, 그가 찾던 ‘열쇠’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 간의 수행이 무의미하진 않았으리라. 더 깊어지고, 더 단단해졌을 싯다르타는 이제 더 이상 스승을 찾지 않기로 했다. ‘나 홀로 승부’를 걸 참이었다. 외로운 길, 싯다르타는 다시 떠났다.

라즈기르(인도)=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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