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를 만나다8-싯다르타 출가하자 아내의 반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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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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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를 만나다8-싯다르타 출가하자 아내의 반응은?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2017-09-18, (월) 12:56 am

카필라 성의 동문. 이 문을 통해 싯다르타는 떠났다. 왕자가 야밤을 틈타 출가한 사실을 알고 카필라 성은 발칵 뒤집혔다. 아내는 남편을 잃었다. 숫도다나 왕은 졸지에 후계자인 아들을 잃었다. 핏줄이라고는 생후 10일도 안 된 손자 라훌라뿐이었다.

싯다르타의 아내 아소다라는 충격을 받았다. 아들을 낳자마자 남편이 출가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마부 찬나가 싯다르타의 말을 끌고 궁으로 돌아왔다. 그때도 이 동문을 통과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말의 안장이 텅 비어 있었다. 행여 다시 돌아올까 기대하던 숫도다나 왕과 싯다르타의 아내 아소다라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동문이 있던 자리에 앉았다. 여기 이쯤이었을까. 마부 찬나가 서 있던 곳 말이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두려움에 떨었으리라. 위험천만인 숲에 왕자만 남겨두고 홀로 돌아왔으니 오죽했을까. 동문 앞, 지금은 벽돌로 된 터만 남아 있다. 당시에는 이곳에 높다란 궁성의 건축물이 있었다. 그 건물 위에서 아소다라는 텅 빈 안장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전쟁터로 떠났던 남편은 간데없고, 홀로 돌아온 남편의 말을 보는 심정이 아니었을까.

싯다르타에게는 애마가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출가와 함께 애마를 궁으로 다시 돌려보냈다.

경전에는 그 장면이 이렇게 묘사돼 있다. ‘텅 빈 안장과 함께 말이 성으로 들어서자 싯다르타의 아내는 궁궐을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 말의 목을 부둥켜안고서 하염없이 울었다.’ 얼마나 서러웠을까. 갓 태어난 자식과 몸조리도 마치지 않은 아내를 뒤로 한 채 남편은 집을 떠났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숫도다나 왕의 애간장도 끊어질 듯했다고 기록돼 있다.

싯다르타가 돌려보낸 텅 빈 말의 안정을 보고서 숫도다나 왕과 아소다라는 커다란 상실감을 느꼈다.

왕은 이대로 포기할 수가 없었다. 왕국은 후계자가 필요했다. 며느리에게는 남편이, 손자에게는 아버지가, 자신에게는 하나뿐인 아들이 필요했다. 게다가 당시 인도는 일종의 ‘춘추전국시대’였다. 크고 작은 나라 간에 전쟁과 정복, 그리고 병합이 밥 먹듯이 벌어지던 시대였다. 더구나 카필라 왕국은 크고 강력한 나라들 틈에 끼인 작은 부족국가에 불과했다. 숫도다나 왕에게는 장차 왕국의 운명을 책임질 젊고 총명한 후계자가 필요했다.

고심 끝에 숫도다나 왕은 사람을 뽑았다. 출가한 싯다르타를 설득할 참이었다. 왕의 스승격인 왕사(王師)와 신하의 자제들을 골랐다. 지혜를 갖춘 어른과 왕자의 동년배 친구들을 함께 보낼 셈이었다. 젊은이들은 출가하기 전 싯다르타와 청춘의 고뇌를 함께 한 친구들이었으리라.

인도의 불교유적지를 순례하는 현지 고등학생들. 29세에 출가한 싯다르타는 저들보다 열 살쯤 위였다.

그들은 숲으로 갔다. 수소문 끝에 싯다르타를 찾았다. 그들의 설득은 절박했다. 카필라 왕국의 운명이 달린 일이었다.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알아달라. 부왕께서 눈물을 흘리며 기다리신다. 부디 궁으로 돌아와 달라. 궁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진리를 구하는 마음을 모두 포기하는 게 아니다. 진리를 찾는 일이 어떻게 산이나 숲에서만 가능하겠는가.”

이들의 애타는 간청에 싯다르타는 이렇게 말했다.

“재가(在家)의 삶은 답답하고 번잡하다. 맑지 않은 일들이 어디에나 먼지처럼 쌓여 있다. 그러나 출가(出家)는 드넓은 공간에 사는 일이다.”

인도의 시골 농가에서 일하고 있는 아이들. 싯다르타는 재가의 삶에는 늘 먼지가 끼어 있다고 했다.

팔리어 경전에 기록돼 있는 왕자의 대답이다. 거기에는 수행자 싯다르타가 보는 재가(在家)의 삶과 출가(出家)의 삶이 녹아 있다. 나는 카필라 성터를 거닐며 생각했다. ‘왜 재가의 삶에는 먼지가 많을까. 왜 출가의 삶에는 먼지가 없을까. 재가와 출가란 과연 무엇일까. 싯다르타가 나가고자 한 집(家)이란 궁극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걸까.’

단순히 머리를 깎고 수행자가 됐다고 출가의 삶을 사는 건 아니다. 우리 주위에는 머리를 깎은 출가자의 신분으로, 성직자의 신분으로, 목회자의 신분으로 ‘재가의 삶’을 사는 이들도 많다. 한마디로 ‘무늬만 출가’인 셈이다. 반면 머리를 기른 채 지지고 볶는 세속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출가의 여운’을 풍기는 이들도 있다. 그러니 재가와 출가의 문제는 집 안에 있느냐, 집 밖에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머리를 깎느냐, 깎지 않느냐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인도의 산치에 있는 불교 유적. 가부좌를 틀고 좌선한 붓다의 자세도 인도의 요가에서 비롯됐다.

그렇다면 싯다르타는 왜 굳이 머리를 깎았을까. 아내와 자식까지 버리고 집을 떠났을까. 그는 왜 카필라 성으로 돌아가기를 강력하게 거부했을까. 나는 거기서 ‘싯다르타의 절박함’을 읽는다. 당시 싯다르타는 베다(힌두교의 경전)를 달달 외울 정도로 힌두교에 정통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인도에서 수천 년간 내려오는 철학적ㆍ우주론적ㆍ존재론적 물음을 그 역시 깊이 품고 있었다. 마치 닭이 알을 품듯이 말이다.

싯다르타 왕자는 힌두교에 조예가 깊었다. 수천년간 내려오는 철학적 물음들을 그는 깊이 품고 있었다.

그런 물음들을 푸는 게 싯다르타에게는 ‘삶의 첫단추’였다. 그러나 혼자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방향을 일러줄 스승과 집중할 수 있는 수행처를 그는 원했다. 궁에서는 둘 중 하나도 갖출 수가 없었다.

절박함은 왕사와 대신의 자제들도 못지 않았다. 그들은 빈 손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들의 설득은 치밀하고 끈질겼다. 그들과 왕자 사이에는 그야말로 ‘대(大)썰전’이 벌어졌다. 출가인가, 아니면 귀가인가.

“수행자들마다 진리에 대한 견해는 제각각이다. 사실 그들도 의심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이것이다!’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삶과 죽음의 연결고리는 그처럼 알기가 어렵다. 하물며 거기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길을 찾는가?”

싯다르타 당시에는 인도에는 여러 수행법과 수행의 스승들이 있었다. 저마다 장단점을 안고 있었다.

싯다르타를 찾아간 이들은 잘 알고 있었다. 해탈의 길이 쉽지 않음을 말이다. 당시 인도에는 숱한 수행자와 숱한 수행처가 있었지만, “바로 이것!”이라고 딱 꼽을만한 곳이 없음을 그들도 알고 있었다. 길을 아는 이가 없는데 어떻게 길을 찾을 것인가. 그들은 그렇게 싯다르타의 옆구리를 찔렀다.

왕자는 이렇게 반박했다.

“이미 번뇌로 가득 찬 집에서 나왔다. 어찌 다시 번뇌의 집으로 돌아가겠는가. 해가 땅에 떨어지고, 히말라야 산이 무너져도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왕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히말라야 산. 싯다르타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출가의 길을 포기하고 돌아갈 수는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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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bme09.jpg (44.17 KiB) 1119 번째 조회
싯다르타는 답을 찾고자 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궁금증이 생긴다. 어쩌면 싯다르타가 품었던 물음을 그들도 품고 있지 않았을까. 생로병사는 그들도 절망하던 삶의 문턱이 아니었을까. 왕사는 결국 포기했다. 그리고 홀로 궁으로 돌아갔다. 대신 함께 왔던 다섯 명의 젊은이는 남았다. 그들은 자신의 머리를 깎고서 수행자가 되었다.

왜 그랬을까. 단지 왕자의 신변을 지키기 위해서였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그들과 함께 수행하던 싯다르타는 훗날 고행을 멈춘다. 곡기를 끊다시피 했던 싯다르타는 다시 우유죽을 마신다. 수행의 방식을 바꾼 것이다. 그때 다섯 젊은이는 극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왕자의 곁을 떠난다. 그러니 그들의 목표는 단순히 ‘왕자의 신변 보호’가 아니었다. 그들도 진리에 대한 목마름을 갖고 있었다. 그들도 구도의 길을 가고자 했다. 더 훗날,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법을 설한 이들. 이 다섯 명의 젊은이가 바로 그 ‘오(五)비구’다.

붓다의 시대와 공자의 시대,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시대는 비슷했다. 모두 기원전 5세기 경이다. 부족국가와 도시국가들이 몰락하고 더 큰 나라가 형성되던 시기였다. 한 마디로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잡아먹었다. 그 와중에 숱한 살육이 자행됐다. 설사 왕족이라 해도 나라가 망하면 죽임을 당하기 일쑤였다. 전쟁에서 패한 나라의 백성은 노예가 됐다. 인도에서는 카스트 제도에도 끼지 못하는 최하층민으로 전락했다. 그게 싯다르타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이었다.

카필라바스투에서 인도 북동쪽의 바이샬리까지는 상당히 먼 길이다. 싯다르타는 걸어서 그 길을 갔다.

왕사를 돌려보낸 싯다르타는 바이샬리로 떠났다. 나도 버스를 타고 바이샬리로 갔다. 인도의 북동쪽, 갠지스 강변에 위치한 바이샬리는 일찍이 상업이 발달한 도시였다. 강의 수로가 교역로였다.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 많았다. 놀랍게도 그 옛날에 왕정이 아닌 공화정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북인도에서는 최초였다. 훗날 붓다의 수제자들도 상대하기 버거워했던 재가불자 유마 거사도 이곳에 살았다. 2600년 전에 바이샬리는 이미 언론과 사상의 자유가 넘치는 곳이었다.

인도의 힌두교 수행자. 바이샬리에는 싯다르타 당시에도 많은 수행자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알라라 칼라마는 고요 속에서 사는 이로 명성이 높았다.

당시 바이샬리에는 알라라 칼라마라는 요기(Yogi)가 살고 있었다. 무려 300명의 제자들이 그를 따랐다. 사람들은 알라라 칼라마가 요가 수행을 통해 ‘고요와 평화에 머무는 사람’이라고 했다. 싯다르타도 그의 명성을 익히 들었다. 그래서 카필라바스투에서 바이샬리까지, 그 먼길을 걸어서 갔다. 다른 수행자들처럼 싯다르타도 맨발이었으리라. 왕궁에서 곱게만 자란 그의 발은 수도 없이 까지고 부르텄을 터이다. 동시에 그는 인도의 거친 땅을 익히고, 몸에는 서서히 굳은살이 박이기 시작했으리라.

바이샬리에 있는 불교 유적지. 탑 뒤로 높이 솟아 있는 아소카 석주가 보인다. 붓다 당시 바이샬리는 자유로운 사상과 철학을 향유할 수 있는 도시였다.

싯다르타는 출가 후 처음 찾아간 수행자 밧가와에게 크게 실망한 바 있다. 밧가와는 ‘천국에 다시 태어나 복(福)을 누리기’만 구하고 있었다. 싯다르타는 이번에 알라라 칼라마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는 과연 열쇠를 가지고 있을까. 생로병사의 문제를 이미 해결했을까. 그를 통해 나의 문제도 풀 수 있을까.’ 싯다르타의 가슴은 뛰었다.

바이샬리(인도)=글ㆍ사진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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