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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2015-05-11, (월) 8:22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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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미주 전파 <2003년 LA관음사 주지 김도안>
그리고 동포사회와 미 주류사회에 끼친 영향
한국 미주이민 10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불교의 미주전파 발자취를 돌아보기로 한다.


머리글
미주에 한국불교가 전파된 초기(1930년~1964년)에 선각자 몇 분의 개인적이며 산발적인 활동이 있었다가 한국사원이 미주에 창건되어 본격적인 포교가 시작된 이래로 약 38년간의 세월이 흘렀다.
일찍이 불교포교를 시작한 중국불교, 일본불교 등에 비하여 한국불교의 출발은 늦었지만 짧은 시일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미주에 한국불교의 뿌리를 착실하게 내리면서 사원의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미주에서 한국불교가 연합해서 간행하고 있는 [미주현대불교]-(2002년 1월 발행)의 통계에 의하면 100개의 한국불교 사원이 창건되어 활발하게 불교포교에 활약하고 있다. 그리고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포교방법과 그 영역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법회양식을 토대로 도서출판, 신문, Radio, TV, Internet, Email, Zen Center, 복지시설, 의료시설 등을 통해서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또한 미주에서의 한국불교의 젊은 승려와 일반불자들이 영어불교를 연구하는 인원이 증가함에 따라 미주의 주요대학에서 불교관련 강좌의 신설이 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미국의 수준 높은 계층 인사들의 한국불교의 선사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가고 있음에 따라 근래에는 적극적으로 출가 승려가 되어 한국의 선원에서 한국선을 수행하고 있는 수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볼 때에 이제까지의 미주내 한국교포를 주 대상으로 한 포교에서 향후 21세기 초부터는 미국인, 한국승려들 그리고 각 사찰의 불교전문 대학에서 젊은 1.5세 혹은 2세들이 불교교리를 영어로 공부하는 수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에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유수한 대학에서 동양학의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등 미 주류사회에 있어서도 한국의 선불교의 관심도가 크게 증대될 것으로 보인다. 이제 한국 이민 100주년을 기념하는 일환으로 한국불교의 미주전파에 그 역사적인 발자취를 간추려 돌아보기로 한다.

1. 초기 이민시기에 미주에 왔던 한국불교 선각자들
(1) 개화파 봉은사 승려 월봉스님
한일합방(1910년)이 성사되면서 개화파로 활약하다가 일본을 거쳐 미국에 온 승려는 월봉이라는 봉은사 스님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는데 하와이로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그에 대한 행적은 아직까지 파악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시카고 선연사 주지 삼우스님 전함-전화통화773-528-8685)

(2) 범태평양 불교대회 참석차 온 도진호스님
1930년대 말 하와이에서 범태평양 불교대회가 열렸을 때 원래는 최남선 선생이 참석하기로 하였으나 개인사정으로 참석을 못한 대신, 일본에서 불교대학을 마친 도진호스님을 파견, 최남선 선생이 완성한 논문을 대독하였다고 하며 거기에서 ‘인도불교 교리는 서론적 불교요, 중국불교는 각론적 불교이며 한국의 불교는 결론적 종합불교’라고 했다고 전한다.
그는 그 후 귀국하지 않고 초기이민자들을 위한 교육사업에 매진하고 구국운동 모체인 대한인 국민회 중심 멤버로 활동하였고 1943년에 호룰루에서 개최된 ‘해외한민족대회’에서 재미통합 한국위원회를 결성하고 중심 멤버로 활동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1947년 8월에 하와이 기록영화 무궁화동산을 직접 제작하여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고 교민봉사와 문화사업에 매진하게 된다. 그는 하와이에 와서 결혼을 하였으며 부인과 슬하에 자녀가 있었다고 전하나 몇 명의 자녀가 있었는지 알 수 없고 그가 죽은 후 가족은 본토로 이주했다는 이야기만 전해지고 있다. 확실한 그의 생애 전반에 대한 기록을 찾지 못해 아쉬움이 크다.(그에 관한 사진자료는 ‘Their Footsteps'이라는 하와이 한인이민 90주년 기념사업 위원회에서 발간한 한인들의 발자취 사진첩p.77, p.194에 수록됨: 하와이 대원사 전 주지 기대원스님 전함)

(3) 미국유학차 도미한 마곡사 승려 홍씨(법명 미상)
<월북학자 홍명희 선생의 집안이라고 알려짐>
1942년~1943년경 동경에서 불교대학을 마치고 하와이를 거쳐 보스톤의 하버드대학 박사과정을 하다가 2년 후 병으로 요절했다고 전해짐.
(동국대 홍정식 교수의 강의시간에 알려줌 / 현재 동국대학과 일본 고마자와 대학에서 학위를 마치고 미국에 온 김학순 박사가 전하는 자료-전화 818-780-1192)

(4) Temple대학 박사학위 취득을 위해 건너온 서경보스님
서경보스님은 1914년 10월 10일생으로 제주도 남부 중문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1944년에 일본 경도 임제대학을 졸업한 후 동국대학에서 학위과정을 이수했으며 지방대학인 원광대학과 해인대학, 전북대학 그리고 부산대학 강사를 두루 거치다가 1964년도에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연구교수로 있다가 학위논문을 제출한 미국 Philadelphia 주립대학인 Temple대학에서 [조당집]에 관한 논문으로 1969년도에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함으로써 미국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한 한국의 최초의 스님이 되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선원에서 미국불교 승단장 유진 와그너 교수를 교화하여 조계종에 귀의토록 하였으며 그밖에 여성 백인 예술인들과 정신과 의사들을 조계종 신자로 귀의케 하였다. 그 후 한국 동국대학에 다시 귀임하여 불교대학장과 선학연구소장, 미국 세계중앙선원장, 동국대학 선원장, 조계종 원로위원, 불국사 주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영남대학교 대학원 교수, 국제예술인 한국대사, 그 외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경력과 80여개가 넘는 박사학위에다 저서는 무려 150여권을 저술하였다. 그는 불교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사회활동 면에서도 많은 족적을 남기기도 했으며 말년에는 국제 불교단체로부터 명예 승왕(법왕)을 추대 받았다. 그 후 본인이 창종한 일붕선종회 총재로 취임하고 나중에는 교단을 독립시켜 종정에 추대된 바 있다. 불교 현대화의 선구자요, 사회운동의 선구자이며, 민족과 애국운동에도 많은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불교 국제기구인 WFB 한국본부장으로 1990년 세계불교대회를 한국에 유치하여 대회장을 맡기도 하였으며 정부로부터 국민훈장을 추서 받은 바 있다.
(그의 저서 [선창] 1978년 4월 20일 일붕삼장원 간행에서 발췌함)

(5) 워싱톤 DC(16815 Gemantown Rd., Gemantown, MD 20874)에 한국사를 최초로 세운 고성스님
고성스님은 1936년생으로 1956년도에 출가 득도하여 1965년도에 서울 조계종 중앙 총무원 교무과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본인의 스승 서경보스님을 모시고 미국으로 이주하여 1966년도에 워싱톤DC에 한국사를 건립하였다. 콜럼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동부 주립대학에서 동양철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그의 미국인 제자만도 150여명이 있다. 현재는 선종대학을 설립, 그 곳에서 미국인들이 한국불교를 체계 있게 공부하고 있다.
(‘한국불교현대사’ 동국대학 석림동문회간 1997년 11월 판)

(6) 북미에서 선불교 운동을 펴고 있는 시카코 선연사 삼우스님
1710 W. Comlia, Chicago, IL60657 전화(773)528-8685
삼우스님은 1941년생으로 1959년도에 부산 동래 범어사에서 하동산스님을 스승으로 하여 출가득도 하였다. 일찍이 조계종 중앙총무원에 발탁되어 고광덕스님 휘하에서 교무부 종무 일을 보다가 1966년경 일본으로 들어가 1년간 불교대학에 있었고 1968년도에 뉴욕에 선연사를 개원했다가 다시 미시간주 에너버에 자리를 옮겨 선원을 개설 포교를 하였다. 그 후 1972년 카나다 토론토에 와서 선연사를 창건하고 국제 금강반야 자비회를 결성한 바 있다. 다시 1981년도에 시카코로 이주하여 선연사를 창건하고 북미 선불교 운동에 매진하였다. 그리고 한국, 일본, 미국, 스리랑카, 대만 등에 지부를 두고 있다. 또한 멕시코에 2개의 선련사를 개원하여 한국불교를 전파하고 있다. 삼우스님은 미국 안에 크고 작은 선불교 단체를 통합하여 미국 선불교 협회를 창설함과 동시에 미국 안에 활동하고 있는 외국인 불자들과 학자들을 중심으로 선불교 운동에 앞장서 왔다. 외국인 수계 제자만도 20여명이 되며 주류 미국인들의 신자가 수천명에 이르고 있다. 또한 불교 미륵대학을 설립, 선불교 강의를 주기적으로 하고 있다. 봄가을로 수련대회를 갖고 있으며 가끔 중부 도시 여러 대학에서 초청강의를 맡고 있으며 캐나다와 멕시코에 지부를 두고 자주 순회 법회를 주관하고 있다.
(‘한국불교현대사’ 동국대학 석림동문회 기획편찬: 1997년 11월 25일 발간 참조)

(7) 북가주 카멜 비치에 삼보사를 세운 덕산 이한상(작고) 거사
(대한전척, 풍전산업, 삼보토건, 세운상가, 풍전상가 설립 회장)
28110 Robinson Canyon Rd., Camel, CA 93923 전화(831)624-3686
삼보사는 북가주 카멜시에 자리 잡고 있으며 뒤로는 아늑한 명산이 감싸 둘렀고 앞쪽으로는 시원하게 트인 초원 끝에 질펀한 냇물이 휘돌아 흐르는 산수 명미한 산중턱에 자리 잡은 최고의 휴양지이다. 대지는 총 6.5에이커에 한미 절충식으로 세워진 법당이 건평 3백평 규모와 주변 강당 요사가 500평이나 된다. 바로 이곳이 한국불교의 이민역사상 서부불교사원이 최초로 건립된 가람이다. 이 사찰은 한국에서 대 기업인으로 크게 활동하였던 덕산 이한상 거사의 단독 시주로 이뤄 놓은 것이다.
덕산 이한상 거사는 제 3공화국 시절 가장 활발한 토건회사와 건설회사로 정부공사의 1/3을 도맡아 완성한 재벌 총수였다. 그는 대한전척, 풍전산업, 삼보건설, 풍전상가, 세운상가 등 굴지의 회사들을 직접 건설, 경영한 사람이다. 정부공사로는 광화문 정부종합청사의 신축과 명동 산업은행 본점 신축, 학교 공사로는 동국대학 교사 신축과 광동학교 신축, 건설분야에는 일부 고속도로 건설과 철도공사, 소양강 땜 공사와 한강 간척공사 등이 있고 그 후 중동건설에 투자하였다가 제3공화국 말년에 동생의 죽음으로 재산을 정리하여 미국행을 하신 분이다.
덕산 이한상 거사는 불교 재가불자로 돈독한 신앙심을 가졌을 뿐 아니라 불교 근대사에 빼놓을 수 없는 한국불교 현대화와 대중불교 운동을 몸소 실천하였다. 불교신문사 창설, 대중 포교의 산실 삼보회관 개원, 종립학교 불교교재 편찬, 불교성전 편찬, 동국역경원 재원 조달, 기타 삼보장학회 운영 등 크고 작은 불교문화사업을 직접 지원, 운영하신 분이시기도 하다.
그가 기업에서 손을 떼고 미국행을 결심한 동기는 한국기업이 정경유착으로 온갖 비리가 난무하는 속에서 기업인으로서의 한계를 겪고, 결심 끝에 조용히 미국에 와서 한국불교 미주진출에 생애를 마치겠다고 평소 소신을 밝힌 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미국 속에 한국 선불교 전파를 위해 여러 스님과 불교 관계자를 초빙하였는바, 한국의 고승으로 있던 이운허 역경원장 큰스님을 위시하여 순천 송광사 방장 소구산 큰스님,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셨던 강석주 큰스님, 정정달 스님(LA관음사 초대주지, 미주포교사협회 회장역임, 현재 오렌지카운티 법보선원 원장을 맡고 있음)등이 모두 덕산 이한상 거사님의 초청을 받아 미국을 방문한 고승 및 중진들이다. 그는 삼보사에 전법도량을 세워 한국 선불교 운동을 펴기 위하여 큰스님들께서 미국에 오래 머물러 주기를 간청하였으나 그가 생각하는 대로 스님들께서는 오래 머물지 못하고 귀국하였고 일부 스님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사찰을 개원하여 포교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한국불교의 미주 전법 역사에 첫 페이지를 장식을 했고 그가 초청한 승려들의 미국 진출로 인하여 미국포교에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고 본다. 현재 삼보사는 그가 작고한 후 조계종 원로이신 강청화 대선사의 문도들이 주석하고 선수행도량으로서 보존 전수되고 있다.
(1972년 12월 28일자 미주한국일보 기사 “한국최초사찰 삼보사 낙성식하다” 참조)

(8) 한국불교 조계종 재미홍법원을 세우신 숭산 행원 대선사
(1972년 9월 미주 동부 이민 최초 사찰 조계종 재미홍법원)
99 Pound Rd, Cumberland, RL 02864 전화(401)658-1464
숭산 행원스님은 1927년 8월 1일생으로 평안남도 순천군 순천읍 창리에서 태어났다. 해방 후 남하하여 1946년도에 동국대학 국문과에 입학한 후 1년 후인 1947년에 수덕사에 입산하여 박고봉 스님을 은사로 득도를 하게 된다. 그는 다시 동국대학에 불교학과로 편입하여 1949년도 불교학과를 졸업하였다. 그 후 다시 수덕사로 귀사한 후 3월에 비구계를 수지하고 박고봉 선사의 휘하에서 11안거를 성취하게 된다. 그 후 그는 공주 마곡사로 옮겨 불교 대교과를 수료한다. 1952년도에 육군 장교로 입대, 6.25 한국전쟁에 참가하였으며 1957년 육군중위로 예편하고 다시 불교종단에 들어와 서울 화계사 주지와 조계종 총무부장, 대한불교신문 설립 초대 사장, 1962년도 비상종회 의장 피선, 그 후 재가 거사운동을 전개하여 달마회를 창설 지도층 신자운동에 앞장섰다.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조병일씨와 법조계 박기석씨 그리고 각 기업체 경영인들을 운집시켜 재가 신도화 운동에 힘썼다. 그 후 한국 조계종 종단에 종비생 제도를 확립시켜 그가 주지로 있는 화계사 부지 안에 백상원 기숙사를 짓는데 큰 역할을 다하였다. 조계종 종단 3대 사업인 도제양성과 역경사업, 포교사업을 중점적으로 전개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그는 1966년도 일본 동경에 최초로 재일 홍법원을 개설하여 원장에 취임하였고 그 후 한국 종단으로부터 파송된 한국 유학생들의 뒷바라지와 후원사업을 아끼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국 전통문화를 일본 속에 알리는 역할도 쉬지 않고 전개하였다. 1969년도에는 홍콩주재 홍법원을 개설하고 한국불교의 동남아 진출에도 큰 역할을 다하였다. 1972년 재미 홍법원을 프라비댄스에 설립하고 원장에 취임한 후 1974년에 토론토 선원 개설, 1978년에는 폴란드 월샤와에 홍법원 개설, 1980년도에 영국 런던 선원 개설, 1981년도에 스페인 팔마 선원 개설, 1983년 브라질 쌍파울 선원 개설, 1985년도 프랑스 파리 선원 개설 등 세계 19개국에 41개의 선원을 개설한 바 있다. 현재 미국 25개 주에 선원 개설과 미국 내 2천여명의 미국 주류인 백인 제자들이 참선과 수행 그리고 포교사업에 열중하고 있다. 그가 펴고 있는 유럽 포교는 약 1만명이 넘는 숫자가 숭산 행원 대선사로부터 교화 받은 제자들로 되어 있다.
숭산 행원 선사는 국내외적으로 한국불교 대선사로 알려 있을 뿐 아니라 그의 미국 및 외국 제자들 중 수십명이 박사학위를 받은 엘리트 제자가 있고 한국불교의 위상을 세계 속에 알린 가장 큰 선각자이기도 하다.
(숭산행원선사법어집: “천강에 비친 달” 1987년 재미홍법원 간행 참조)

(9) 뉴욕대학에서 박사학위 취득하고 원각사를 세운 오법안스님
301 A Clove Rd., Salisbury Mills, NY 12577 전화(845)496-3126
오법안스님은 1932년생으로 전북대학을 졸업하고 1955년도 출가득도하여 동국대학 석사과정을 이수하였고 조계종 총무원에서 부장을 역임하고 동국학원 재단 사무총장, 동국학원 상무이사 그리고 행정관리 부총장을 역임하였다. 1972년도 하바드대학 신학부 세계종교학 연구소 연구교수로 1년간 있다가 1973년 뉴욕대학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1990년도에 원효화쟁사상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학위 취득 후 뉴욕 뉴스쿨대학에서 10년간 한국 선불교 강의를 하였으며 1991년경 혈압으로 쓰러져 장기치료를 받고 있다. 그의 제자로는 뉴욕에 유명한 정신과 의사인 짐고든 박사가 있으며 많은 백인 제자도 두고 있다. 현재는 뉴욕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Salisbury Mills, 산록 아름다운 산간 휴양도시에 사찰이 위치해 있으며 약 50에이커의 큰 수도원을 가지고 많은 승려와 수도자들이 기거하고 있다.
(‘한국불교현대사’ 동국대학 석림동문회 1997년 11월 25일 간행 참조)

(10) 하와이에 한민족 사찰 대원사를 건립한 기대원스님
2959 Waiomao Rd., Hono, HI 96816 전화(808)735-7858
기대원스님은 1940년 7월 2일생으로 1962년도에 강원도 설악산 신흥사 윤고암 대종사님을 은사로 출가 득도한 후, 당시 조계종 종정이신 고암 대종사 사서실장을 역임하였으며 1970년 설악산 신흥사 재무국장과 교무국장을 역임하였다. 그 후 1973년 서울 백련사 주지를 봉직한 바 있다. 하와이와 인연을 갖게 된 것은 하와이 주립대학 정치학 교수인 글랜 D. 페이지 박사가 아주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 페이지 교수와 한국과의 인연은 멀리 6.25전쟁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때 페이지 교수는 프린스톤 대학을 졸업하고 하바드 대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는 대학원 재학 중 포병장교로 한국전에 참가하였고 압록강까지 올라갔다. 그는 6.25전쟁의 참상을 목격하고 전쟁이야말로 인류의 죄악이라 여기게 되었으며 그는 평화주의자로 미주화와 인권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그는 다시 미국의 하바드에 돌아와 한국전 정책결정 과정을 그의 박사논문 주제로 설정하고 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그는 모교인 프린스톤 대학에 정치학교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인 1960년 초 그는 한국과 직접적인 인연을 맺기 시작한다. 그는 미국정부 후원을 받아 서울대학교에 행정대학원을 설립하여 외국인 고문으로 추대된다. 그런 와중에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고 자유와 인권이 탄압받고 있는 한국정세에서 반정부 운동에 가담하게 되어 군사정권으로부터 박해를 받기도 하였다. 그 후 1964년경 설악산 신흥사에서 동국대학 총장이신 김동익 박사로부터 기대원스님을 소개받게 되었다. 그는 약 2개월간 설악산 신흥사에서 기거하며 교분을 가짐으로 두터운 우정을 갖게 되었다. 그 당시 하와이에 한국사찰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대원스님에게 하와이에 꼭 오셔서 한국사찰을 창건해 줄 것을 제안하게 된다. 그 후 1975년 6월 페이지박사 주선으로 하와이에 도착한 대원스님은 7월에 한국 총영사관 관저에서 첫 불교신도회를 결성하고 창립법회를 갖기에 이른다. 페이지는 그 후 하와이 한인사찰 대원사의 개원을 위해 음으로 양으로 후원하여 한인이민 최초로 한국사찰 대원사를 하와이에 개원하게 된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 전통 사찰을 미국 하와이에 건설함으로써 한국의 민족문화의 진면목을 세우겠다는 각오로 1978년부터 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한국과 미국에서 모금운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그 후 1982년도에 대웅전이 완공되고 그리고 대중요사를 중심으로 소법당이 건립이 되었다. 하와이 대원사 민족사찰 건립이 모두 준공이 된다면 미국 속에 한국불교의 전통미를 자랑하는 큰 가람으로 발돋움이 될 것이다.
현재 평화 대탑 안에 모셔질 세계 정치지도자의 평화의 메시지가 보관되어 있으며 앞으로 탑 안에 보존할 것이라고 한다.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 세미나도 하와이 대학 그리고 서울과 몽골, 일본에서 수차례 개최한 바 있다.
(‘한국불교현대사’ 동국대학 석림동문회 기획편찬: 1997년 11월 25일 발행본 / 1975년 7월 24일자 한국일보 미주판 / 미주현대불교 2002년 1월호 각각 참조)

(11) LA에 한국사원을 처음 세운 달마사 한계정(작고)스님
3005 W. Olympic Bl., LA., CA 90019 전화(323)735-1911
계정스님은 1953년에 출가 득도한 후 동국대학에서 1960년 초 행정대학을 졸업하였다. 숭산 행원 대선사의 제자로 서울 화계사 총무로 일하였고 마곡사와 수덕사에서 수행하였다. 그는 1972년도에 그의 스승 숭산행원선사를 모시고 미국에 첫발을 밟았는데 그 기착지가 LA가 된 것이다. 그는 스승이신 숭산 행원선사의 부촉을 받아 LA에 한국불교 최초 사찰인 달마사를 개원하게 된다.
당시 첫 개원한 장소는 1016 4th Ave.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전세용 공간을 빌려 썼으나 3차에 걸쳐 새로 이전한 공간이 바로 오늘의 달마사이다. 부지가 약 3만 평방피트이며 한국 전통식 법당 그리고 약 3천 평방피트의 요사로 꾸며져 있다. 그리고 차량 약 40대를 세울 수 있는 파킹랏을 구비하고 있어 명실공히 LA대표사찰로서 면모를 갖추었다. 한 때에 그의 스승 숭산 대선사 미국인 제자로 구성된 달마 젠센터가 부설로 현 위치에 함께 공존해 있었으나 미국인 제자들의 요청으로 그 건물은 팔고 1025 S. Cloverdale Ave., LA로 독립 이전하였다. 그 후 한계정 스님은 Crenshaw와 Wilshire가 남쪽에 1976년도에 수도사를 창설하고 생활불교의 기치를 들고 그가 공부한 의료사업체인 동양건재한의원을 Western 3가와 4가 사이에 개설하여 한의원 원장으로서, 포교하는 승려로서 바쁜 생활을 해오다가 1990년에 작고하였다.
달마사는 그 후 여러 명의 후임 주지가 이어 오다가 숭산 행원선사의 제자로 있는 군승 출신 담오(성채) 스님이 운영하고 있다. 현재 재적신도 1,200세대가 있으며 일요집회 그리고 청소년 프로그램도 열심히 펴고 있다.
(1973년 2월 4일자 ‘미주한국일보’ 기사 참조)

* 이상으로 1. 초기 이민시기에 미주에 왔던 한국불교 선각자들 편을 마무리 함. 다음 편은 2. 미국 속에 한국불교를 소개하는 학자들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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