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를 만나다7-싯다르타가 맛 본 욕망의 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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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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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COLON 2015-05-11, (월) 8:22 am

붓다를 만나다7-싯다르타가 맛 본 욕망의 바닥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2017-09-18, (월) 12:14 am

출가하기 직전, 싯다르타 왕자는 ‘욕망의 민낯’을 보았다. 숫도다나 왕은 노심초사했다. 왕자가 출가라도 할까 봐 떨었다. 그래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궁을 옮겨 다니게 했다. 온갖 좋은 것들만 보게 했다. 왕은 왕자가 세상에 집착하길 바랐다. 궁에는 여인들이 넘쳤다. 왕자는 밤마다 궁녀들과 연회를 즐겼다. 그렇게 ‘감각적 즐거움’을 누렸다.

어쩌면 싯다르타는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욕망을 파고들며 '출가의 꿈'을 잊고자 한 게 아니었을까.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궁에서 화려한 파티가 열렸다. 29세의 싯다르타와 젊은 궁녀들은 밤늦도록 욕망을 좇았다. 그러다 곯아떨어졌다. 새벽녘쯤 되었을까. 싯다르타는 눈을 떴다. 그의 눈에는 난장판이 들어왔다. 궁녀는 모두 잠에 떨어져 있었다. 왕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추한 풍경’이었다.

술에 취한 채 침을 흘리며 자는 궁녀도 있었다. 옷이 벗겨진 채 맨살을 드러낸 궁녀들, 아무렇게나 다리를 올리고 엉켜있는 궁녀들도 있었다. 그건 화장기를 벗겨낸 욕망의 민낯이었다. 왕자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꽃은 늘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런 아름다움은 지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게 아니었다. 술에 취한 채 너부러져 있는 여인들은 오히려 추해 보였다. 그가 믿던 꽃은 이미 시들어 있었다.

모든 것은 변한다. 영원한 것은 없다. 꽃도 그렇고, 아름다움도 그렇고, 인간의 삶도 그렇다.

초기 불교 경전 『붓다 차리 타』에는 당시 싯다르타의 심정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여인의 참모습이 이처럼 추하고 불완전한데, 다만 그들의 옷치장과 장식한 모습에 속아서 남자들은 여인과 즐기기 위하여 욕망에 떨어진다.’

요즘 여성들은 반박할 터이다. “아니, 자고 나면 눈곱이 끼는 건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다. 그건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런데 결혼 후에 그런 모습을 보고 실망하는 남자도 있다. 싯다르타 왕자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아름다운 궁녀도 술에 취하면 곯아떨어지게 마련이다. 어떻게 24시간 화장한 얼굴을 유지할 수 있나? 세상에 그런 여자는 없다.” 그렇게 따질 수도 있다.

싯다르타는 '지지 않는 꽃'을 믿었다. 그래서 단장하지 않은 여인의 적나라한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싯다르타가 말한 ‘여인의 참 모습’이란 무엇일까. 왕자는 어떤 의미로 그런 말을 했을까. 왕자가 가리킨 ‘여인의 참 모습’은 ‘욕망의 참 모습’을 뜻했다. 왕자는 ‘지지 않는 꽃’이라 믿었던 아름다운 욕망의 민낯이 그토록 추함을 그날 밤 시리도록 목격했다.

이날 밤의 사건은 결국 ‘방아쇠’가 됐다. 싯다르타는 그 길로 출가했다. 바로 그날 밤에 말이다. 오랜 세월 품어왔던 출가의 꿈. 속으로, 속으로만 삼키며 묻어 두었던 도화선에 이 사건이 불을 당겼다. 싯다르타는 곧장 마부 찬나를 불렀다. 자신의 말 칸타카를 데려오라고 했다. 그 말을 타고 싯다르타는 성의 동문을 빠져나갔다. 그게 싯다르타의 출가였다.

싯다르타는 마부와 함께 카필라 성을 떠났다. 세상을 향한, 우주를 향한, 내면을 향한 그의 출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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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자리로 갔다. 카필라 성의 동문이 있던 자리. 주위에는 잡초가 자라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 우두커니 섰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아, 이 길로 나갔구나. 힌두교의 철학과 베다사상을 파고들며, 인간의 삶과 우주의 이치에 대해 품었을 싯다르타의 물음들. 그 거대하고 본질적인 물음을 해결하기 위해 싯다르타는 이 문을 통해 떠났구나. 따가닥, 따가닥, 따가닥. 그렇게 말발굽 소리가 울리며 그는 멀어졌으리라. 갓 태어난 아들과 부인에게서, 자신을 키워준 이모와 아버지로부터 점점 더 멀어졌으리라. 그렇게 낯설고도 험한 세상 속으로 사라져 갔으리라.’

쉽지 않다. 왕궁을 떠나 바깥에서 사는 일 말이다. 게다가 2600년 전이었다. 지금과 비교하면 야만의 시대였다. 인도의 숲에는 호랑이도 있었다. 온갖 맹수들이 우글거렸다. 길에는 강도들도 있었다. 출가한 수행자는 주로 숲에서 살거나, 길을 떠돌아야 했다. 그런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삶이었다.

인도의 델리박물관에서 본 조각상. 말을 타고 출가하는 싯다르타와 뒤에는 칼로 자신의 머리를 자르는 싯다르타가 보인다. 오른쪽은 깨달음을 얻고서 좌선하고 있는 붓다의 모습이다.

왕자는 밤새 말을 달렸다. 왕자가 출가한 이유는 명확했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야만 하는 삶. 그건 너무 유한하고, 너무 허무했다. 왕자는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래서 출가했다. 당시 싯다르타의 심정이 경전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내가 만약 생로병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내가 만약 깨달음을 얻어 전하지 못한다면, 나를 키워주신 마하파자파티(이모)와 아소다라(아내)를 다시는 만나지 않으리라.’ 왕자는 그렇게 배수진을 쳤다.

동틀 무렵 왕자는 말에서 내렸다. 마부 찬나에게 “카필라 성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찬나는 “무서운 짐승이 우글거리고 길도 험하다. 왕자님을 혼자 내버려두고 왕궁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했다. 싯다르타는 이렇게 대답했다. “찬나야, 인생이란 홀로 태어나 홀로 죽는 것이다. 어찌 동반자가 있겠느냐?”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한역된 경전에는 ‘홀로 태어나 홀로 죽는다’는 대목이 ‘독생독사(獨生獨死)’라고 표현돼 있다.

싯다르타는 태어날 때부터 고독을 맛봤다. 출생 7일만에 엄마가 죽었기 때문이다. 마야 부인의 죽음은 어린 싯다르타에게 '삶과 죽음'이란 거대한 인생의 물음으로 다가왔을 터이다.

나는 그 구절을 몇 번이나 곱씹었다. ‘독생독사(獨生獨死)’. 이 말에서 당시 왕자가 절망했던 ‘삶의 고독’이 뚝뚝 묻어난다. 인간은 누구나 홀로 태어나 홀로 죽는다. 왕자는 출생부터 그랬다. 자신이 태어날 때 엄마가 죽었다. 왕자는 홀로 태어났고, 마야부인은 홀로 죽었다. 그러니 거기에 동반자가 있을까.

궁으로 돌아가자며 매달리는 마부에게 싯다르타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지 7일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태어날 때부터 내게는 이별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별 없는 삶이 과연 있겠는가.”

엄마의 죽음은 싯다르타에게 ‘이별의 이치’를 가르쳐 주었다. 7일만에 엄마를 잃었던 싯타르타는 자기 자신도 아들을 낳은지 7일만에 출가를 했다. 29세의 싯다르타가 바라보는 삶이란 그랬다. 외로운 삶, 이별이 따르는 삶이었다. 마부 찬나는 혼자서 궁으로 돌아갔다.

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있는 싯다르타의 왕자의 모습이다. 주위에는 천신들의 모습이 보인다.

왕자는 허리춤에 찬 칼을 빼 자신의 기다란 머리카락을 잘랐다. 땅바닥 위로 ‘후두둑, 후두둑’ 머리칼이 떨어졌다. 왕자의 가슴 한 켠에 남아 있던 ‘라훌라의 울음 소리’와 ‘아소다라의 원망에 찬 눈빛’도 덩달아 떨어졌을까. 마침 지나가던 사냥꾼이 있었다. 왕자는 옷을 바꿔 입었다. 싯다르타는 이제 낡고 허름한 옷차림의 수행자에 불과했다. 아무도 그가 카필라 왕국의 왕자인 줄은 몰랐다.

인도에는 수천 년에 걸쳐 내려오는 요가와 수행의 전통이 있다. 싯다르타 당시에도 그랬다. 곳곳에 각자의 방식으로 수행을 하는 그룹들이 있었다. 궁에서만 살다가 출가한 싯다르타에게 세상은 망망대해가 아니었을까. 그에게는 생로병사의 굴레에서 벗어날 길과 나침반이 필요했다. 그걸 일러줄 스승이 필요했다.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기 전 여러 수행그룹을 찾아갔다. 그것은 그가 품고 있던 생로병사에 대한 물음의 절박함을 보여준다. 출가 직후 그는 스승을 필요로 했다.

싯다르타는 밧가와라는 이름의 수행자를 찾아갔다. 그를 따르는 수행 그룹도 있었다. 그들은 숲에서 살고 있었다. 자연의 정령을 숭배하고 있었다. 수행의 방식은 고행(苦行)이었다. 한쪽 다리로 선 채 종일 버티는 이도 있고, 송곳이 박힌 나무판 위에서 고통을 자처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이 고행을 감수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안락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 안락은 하늘나라에 있었다. 지금 이 삶에서 고통을 감수한 대가로 천상에 태어나 안락을 누릴 것이라 믿고 있었다.

싯다르타는 밧가와 수행집단에 머물렀다. 그들의 삶과 수행을 지켜보았다. 며칠이 흘렀다. 그러다 고개를 저었다. 목적지가 달랐다. 생(生)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사(死)가 있다. 싯다르타는 그걸 벗어나고자 했다. 밧가와 수행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단지 더 나은 생(生)을 갈망했다. 땅 위의 삶보다 더 나은 하늘의 삶을 말이다.

인도인의 삶은 지금도 고달파 보인다. 카스트 제도로 인해 사회적 계급도 나뉘어 있다. 법적으로는 없어졌지만, 관습적으로는 지금도 카스트가 남아 있다.

260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땅 위의 삶보다 더 나은 하늘나라의 삶. 인간은 그걸 갈망한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그런 갈망에는 뿌리가 숨어 있다. 그 뿌리의 정체는 다름 아닌 ‘나의 욕망’이다.

이 땅에서 내가 품은 욕망이 하늘나라에서는 더 크고, 더 강하게 충족되길 바란다. 그런데 궁금하다. 욕망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 우리가 천상에 태어날 수 있을까. 그렇게 태어나는 천상이 진정한 하늘나라일까.

예수는 하늘나라에 가고자 한다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했다. 그게 예수가 설한 천국의 열쇠였다.

예수도 정확하게 이 문제를 지적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못박았다. 오히려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다. 십자가가 뭔가. 욕망을 못박는 도구다. 그래서 하늘에 이르는 통로다. 그게 ‘자기 십자가’다.

그러니 예수가 설한 천국도 밧가와가 좇는 천국과는 달랐다. 싯다르타는 그걸 꿰뚫어봤다. 그래서 떠났다. 고행을 통해 욕망을 좇는 그릇된 나침반을 떠났다. 왜 그랬을까. 방향이 어긋나면 종착지도 어긋나기 때문이다. 싯다르타, 그의 앞에 또다른 구도의 하루가 밝았다.

2600년 전 인도의 자연은 거칠고 험악했다. 숲에는 호랑이를 비롯한 맹수들도 많았다. 싯다르타는 그 속으로 들어가 수행자의 삶을 살고자 했다.

글··사진=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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