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를 만나다5-45년째 머리를 기르는 수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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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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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COLON 2015-05-11, (월) 8:22 am

붓다를 만나다5-45년째 머리를 기르는 수행자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2017-09-17, (일) 10:45 pm

룸비니 동산에 머물 때였다. 머리를 둘둘 말아서, 몇 겹씩 칭칭 감아 올린 나그네가 있었다. 머리카락이 너무 길어서 언뜻 보면 기다란 뱀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듯했다. 아니면 바가지만한 소라껍데기를 머리에 이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인도 사람들은 그들을 ‘사두(Sadhu)’라고 불렀다. 인도를 순례하다 보면 곳곳에서 ‘사두’를 만난다. 옷은 주로 아랫도리만 가린 채 지팡이를 짚고서 세상을 떠도는 수행자다.

그에게 다가갔다. 나는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그 역시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현재 인도에는 약 500만 명의 사두가 있다고 한다. 그들은 가족을 뒤로 한 채 집을 떠나와 바람처럼, 구름처럼 유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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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bme02.jpg (21.28 KiB) 1152 번째 조회
아주 옛날부터 인도에는 이러한 ‘출가의 전통’이 있었다. 결혼하고, 자식들을 키우고, 나이 들어 자신의 일에서 은퇴하고, 경제적 기반을 후손들에게 물려준 뒤에는 집을 떠난다. 그리고 세상을 떠돌며 수행자의 삶을 살아간다. 그게 ‘사두’다.

스마트폰도 없고, TV도 없고, 신문도 없던 시절에는 사두들이 ‘세상 소식’을 전하는 이들이었다.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사두들은 마을 밖 세상 소식을 전했다. 뿐만 아니다. 종교적 메시지를 담은 이야기나 법문도 사람들에게 풀어놓았다.

사두가 찾아올 때면 동네 사람들은 늘 새로운 소식과 새로운 이야기를 고대하며 모여들었다. 그 대가로 동네 사람들은 사두에게 음식을 보시했다. 사두는 일을 하지 않는다. 일종의 탁발로 먹고 산다. 인도인 가이드는 “요즘은 게으르고 일하기 싫은 사람들이 사두 행세를 하며 구걸로 먹고 살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룸비니에서 만난 사두에게 물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머리카락을 길렀나?” 그는 “45년간 길렀다. 단 한 번도 깎지 않았다”고 답했다. 나는 궁금했다. ‘45년간 깎지 않았다면 도대체 얼마나 긴 걸까?’ 조심스럽게 요청을 했다. “감아 올린 머리를 한 번 풀어봐 줄 수 있나?”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두는 칭칭 감아 올린 머리를 풀기 시작했다. 마치 머리에서 굵다란 나무 넝쿨이 뻗어나오는 듯했다. 오른팔로 중간쯤 거머쥔 머리칼을 어깨 위로 올렸는데도, 나머지 머리칼은 땅바닥에 닿았다.

뿐만 아니었다. 턱수염도 뭔가 특이했다. 머리칼처럼 똘똘 말려 있었다. 자꾸만 쳐다봤더니 사두는 왼손을 턱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말아놓은 턱수염을 풀었다. ‘또르르’ 내려오더니, 배꼽 아래까지 내려왔다. 그건 그가 세상을 떠돈 ‘세월’이기도 했다.

사두들은 주로 힌두교의 시바신을 섬긴다. 시바는 파괴의 신이다. 동시에 우주의 근원을 상징하는 신이기도 하다. 3억이 넘는 힌두교의 다른 모든 신들이 생겨나기 전에 시바신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시바는 ‘본래부터 있는 신’이다.

인도 중부 엘로라의 힌두교 사원에 있는 시바의 조각상. 시바는 파괴의 신이다. 카스트 제도로 인해 하층 계급으로 분류된 사람들이 특히 시바신을 좋아한다.

오랜 옛날부터 인도에는 집을 뛰쳐나와 자신의 남은 삶을 수행에 던지는 전통이 있었다. 붓다도 그런 전통을 따랐다. 다만 출가의 시점이 남들보다 한참 빨랐을 뿐이다. 왕위를 이을 아들을 낳자마자 집을 떠났으니 말이다.

나는 네팔 영토에 있는 카필라 성터를 찾아갔다. 그곳은 미발굴지였다. 단체 순례객들이 주로 찾는 ‘붓다 8대 성지’에서는 다소 떨어진 곳이었다. 그래서 인도를 순례하는 사람들도 이곳을 찾는 경우는 드물다. 카필라 성터는 상당히 넓었다. 나는 서쪽 문이 있던 자리를 통해 성터로 들어갔다. 카필라 성에는 동서남북, 그렇게 네 개의 성문이 있었다고 한다.

카필라바스투 성으로 들어가는 서문이 있던 곳이다.

서문 근처에는 불가촉천민이 사는 조그만 마을이 있었다. 거의 다 허물어져 가는 초가집이었다. 2600년 전 붓다 당시와 비교해도 그들의 삶은 크게 달라보이지 않았다. 마을 뒤로 강이 흘렀다. 인도의 화장터는 대부분 강가에 있다. 힌두교인들은 자신의 주검을 갠지스 강가에서 화장해 뿌리기를 바란다. 갠지스강이 하늘나라로 흐른다고 믿기 때문이다.

카필라성의 서문 바깥에는 지금도 화장터가 있었다. 현지에서 만난 인도인 청년은 “부처님 당시에도 이쪽에 화장터가 있었다. 그래서 부처님이 카필라성에서 서문 밖으로 나왔을 때 사람의 시신을 보게 됐다. 그게 ‘인간의 죽음’을 깊이 사유하는 큰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불가촉천민들은 지금도 화장터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네팔 영토에 있는 카필라바스투 성의 유적지. 붉은 벽돌 사이에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카필라성 안으로 들어섰다. 인도땅에서 봤던 카필라성과 달랐다. 네팔의 카필라성은 우거진 풀과 나무에 둘러싸여 있었다. 옛 왕궁은 이미 무너져 있었다. 서기 399~412년에 인도를 찾았던 중국의 구법승 법현도 카필라 성을 찾아왔다. 그때 벌써 성터는 폐허가 돼 있었다. 법현은 『고승법현전』에서 이렇게 적었다.
‘성 안에는 왕과 백성이 없었다. 매우 황폐했다. 단지 승려와 민가 수십 호가 있을 뿐이다.’

당시 법현의 심정이 어땠을까. 그는 붓다 입멸 후 약 1000년이 지나서 카필라 성을 찾았다. 중국에서 인도로 올 때는 죽을 고비도 숱하게 넘겼을 터이다. 10명이 가면 2명만 살아서 돌아왔다고 하니 말이다. 그 역시 풀과 나무로 뒤덮인 카필라 성터를 걸으며 ‘붓다’를 그리워 했으리라.

나도 야트막하게 남아 있는 붉은 벽돌 위에 앉았다. 유적지에는 제대로 된 관리인도 없었다. 근처 마을에서 온 꼬마들의 놀이터이기도 했다. 나는 2600년 전 이곳에 피어났던 ‘붓다의 젊은 시절’을 떠올렸다.

당시 인도에서는 봄마다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씨를 뿌리기 전에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였다. 숫도다나 왕이 제사를 주관했다. 싯다르타 왕자도 아버지를 따라 성 밖으로 나가 제사에 참석했다. 왕자의 눈 앞에 들녘의 풍경이 들어왔다. 왕궁에서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누렸던 왕자의 눈에는 무척 색달랐다.

비쩍 마른 농부들은 거의 벌거벗은 상태였다. 밭을 갈던 농부는 소의 고삐를 수시로 내려쳤다. 소는 고통스러워 했다. 쟁기가 흙을 뒤집고 지나가자 땅 속의 벌레가 나왔다. 어디선가 날아온 새가 순식간에 벌레를 쪼아 먹었다.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아야 했다. 자연의 삶은 비정했다. 이 모든 풍경이 싯다르타 왕자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네팔 영토에 있는 카필라 성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다.

새가 살기 위해서는 벌레가 죽어야 했다. 왕자는 마음이 아팠다. 세상은 정글이다. 자신이 살려면 무언가 죽여야 했다. 싯다르타는 농부에게 가서 물었다. “왜 이리 힘들게 일을 하는가?” 농부가 답했다. “곡식을 거두어 왕께 세금을 내야 합니다.” 싯다르타는 또다시 충격을 받았다. 동물의 삶과 인간의 삶이 다르지 않았다. 둘 다 ‘약육강식’의 세계였다.

싯다르타는 시끌벅적한 제사장소를 빠져나왔다. 홀로 잠부나무로 갔다. 그 아래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깊이 사색에 잠겼다. 젊은 싯다르타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것은 ‘수레바퀴’에 관한 명상이 아니었을까. 끝없이 돌고, 또 돌아야 하는 ‘삶의 수레바퀴’말이다. 누구도 그 바퀴를 멈출 수 없고, 멈추려 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돌고 또 돌며, 먹고 또 먹히며 흘러간다. 그게 싯다르타가 목격했던 삶이다.

잠부나무 아래의 그늘에서 싯다르타 왕자가 명상에 잠겨 있다.

붓다는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 수레바퀴 안에서는 누구도 진정 행복할 수 없다. 설령 카필라 왕국의 왕이라 해도, 언젠가 더 큰 이웃나라에 정복당할 수도 있다. 패배한 왕족은 한 순간에 멸족을 당하기도 한다. 그게 부족 국가간 전쟁과 통일이 한창이던 당시 인도땅의 잔혹한 현실이었다.

왕자가 보이지 않자 사람들이 찾아 나섰다. 숫도다나 왕이 몸소 찾아왔다. 싯다르타는 잠부나무 그늘 아래서 고요히 명상에 잠겨 있었다. 경전에는 ‘해가 움직이자 다른 나무의 그늘은 따라서 움직였다. 유독 왕자가 앉은 잠부나무의 그늘만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잠부나무 아래에서 명상을 하고 있는 싯다르타 왕자. 사이먼 노튼 미술관 소장.

나는 눈을 감았다. ‘정말 잠부나무의 그늘이 움직이지 않았을까. 그럴 리는 없었을 터이다. 해가 움직이면 그늘도 따라서 움직이는 게 우주의 이치다. 그렇다면 이 구절에는 더 깊은 은유가 담겨 있지 않을까.’

해가 움직이면 그림자도 움직인다. 해와 그늘은 시간의 흐름을 따른다. 그러나 싯다르타가 눈을 감고 들어간 ‘사색의 세계’는 다르다. 가령 시간은 강물이다. 공간도 강물이다. 우리가 사는 시ㆍ공간은 강물처럼 흘러간다. 이 세상 모두가 시시각각 그렇게 흘러간다. 그러나 ‘명상의 자리’ ‘깨달음의 자리’는 다르다. 그건 강물의 바탕이다. 강물이 쉼없이 흘러도 바탕은 늘 제자리다. 그렇게 시ㆍ공간에서 뚝 떨어져 있는 자리다. 잠부나무의 고정된 그늘은 붓다가 몰입한 명상의 세계에 대한 문학적 은유였으리라.

실제 ‘잠부나무 명상’은 훗날 출가한 왕자가 깨달음을 성취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목숨이 떨어질 정도로 고행을 거듭해도 깨달음의 눈이 열리지 않자 싯다르타는 절망한다. 그때 떠오른 기억이 ‘잠부나무 아래의 명상’이었다. 젊은 날, 자연스럽게 명상에 잠길 때의 그 편안함. 싯다르타는 잠부나무 명상을 기억하며 보리수 아래 앉는다. 그리고 이 우주의 바닥을 뚫는다.

그러니 ‘자연스럽다’는 게 얼마나 큰 힘인가. 자연스러운 삶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 이치와 함께 흐르는 삶이 얼마나 큰 지혜인가. 싯다르타의 잠부나무 명상이 우리에게 말한다.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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