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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2015-05-11, (월) 8:22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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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얻은 깨달음’ 선재동자 구도기와 유사

“어떤 이는 가는 데마다 부처님께서 온 세계에 가득함을 뵈옵지만 어떤 이는 그 마음 깨끗하지 않아 무량겁에 부처님을 보지 못한다. 어떤 이는 가는 데마다 부처님음성 그 소리 아름다워 기쁘게 하나 어떤 이는 백천만겁을 지내도 마음이 부정해 듣지 못한다.”

《화엄경》 <입법계품>의 한 구절이다. 《화엄경》 <입법계품>은 선재동자가 53 선지식을 차례로 찾아가 그때마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구도기(求道記)이다.

무엇보다도 <입법계품>은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 귀하고 천하고를 떠나서 누구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입법계품>에 등장하는 53선지식의 직업을 살펴보면 실로 다채롭다. 도량신, 주야신, 천(天) 등 신의 지위에 놓인 이들이 있는가 하면, 바라문, 선인 비구, 비구니 등 수행자들도 있고, 왕, 부자, 현자 등 사회 지도층들도 있다. 심지어 선지식에는 뱃사공, 매춘부 등 사회 밑바닥들도 포함돼 있다. 이는 진리를 탐구하고 구현하는 구도의 길에서는 사회적인 신분이나 지위를 물을 것 없이, 자신이 업으로 하고 있는 그 길에 통달한 사람이면 누구나 스승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의 주인공도 선재동자와 마찬가지로 지위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길에서 만난 모든 사람을 선지식으로 여기고 깨달음을 구한다. 이는 뱃사공이 된 싯다르타와 불제자(佛弟子)가 된 고빈다가 늙어서 만나 주고받는 대화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다음날 아침 짜인 일정에 따라 순례의 길을 떠날 때가 되자 고빈다는 몇 번이나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싯다르타, 나의 길을 떠나기 전에 자네한테 한 가지 묻는 것을 허락해주게. 자네는 어떤 교리를 갖고 있지? 자네가 추종하는 어떤 믿음이나 지식이 있나? 자네가 살아가는 데, 올바로 행동하는 데 도움을 주고 믿음이나 지식을 갖고 있느냐 말이야.”

싯다르타가 말하였다.

“이보게 친구, 그 옛날 젊은 시절 우리가 숲속의 고행자들과 함께 생활하였을 때 이미 내가 그 가르침들과 스승들을 불신하게 되어 그 가르침들과 스승들한테 등을 돌렸다는 것은 자네도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그 후에도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어. 그렇지만 나는 그 이후로 많은 사람들을 스승을 삼게 되었지. 한 아리따운 기생이 오랫동안 나의 스승이었으며, 한 부유한 상인이 나의 스승이었으며, 몇몇 주사위 노름꾼들도 나의 스승이었네. 언젠가 한 번은 떠돌아다니는 불제자 한 사람이 나의 스승이 된 적도 있었지. 그는 내가 숲속에서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는 순례하던 도중에 발걸음을 멈추고 내 곁에 앉아 나를 지켜봐 주었네. 그한테도 나는 배웠으며, 또한 그에게 고마운 마음을 느끼고 있네. 하지만 나는 여기 이 강으로부터, 그리고 내가 뱃사공을 일을 하기 전에 이 일을 맡아 하고 있었던 나의 전임자 바주데바한테서 가장 많이 배웠다네. 바주데바라는 이름을 가진 그 사람은 매우 소박한 사람이었지. 그는 사상가는 아니었지만, 고타마에 못지않게 필연의 이치를 깨닫고 있었네. 그는 완성된 자이자 성자였네.”

싯다르타가 말한 “떠돌아다니는 불제자 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 순간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는 오랜 벗인 고빈다이다. 《싯다르타》는 붓다 재세 당시 바라문의 아들로 태어난 싯다르타가 친구인 고빈다와 함께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고빈다는 고타마의 제자가 되지만, 싯다르타는 고타마가 다른 수행자들과 달리 깨달음의 완성자인 것을 알면서도 깨달음은 홀로 이룰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생각에 길 위를 떠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싯다르타는 “자기를 빙 둘러싼 주위의 세계가 녹아 없어져 자신으로부터 떠나가 버리고,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홀로 외롭게 서 있던 이 순간으로부터, 냉기와 절망의 이 순간으로부터 벗어나, 예전보다 자아를 응집시킨 채 ‘이것이야말로 깨달음의 마지막 전율, 탄생의 마지막 경련이었다’고 느낀다.”

깨달음을 얻은 이후 싯다르타는 사색할 줄 알고, 기다릴 줄 알고, 단식할 줄 아는 재주만으로 도시에서 제일가는 아름다운 기생인 카말라와 사랑을 하게 되고, 도시에서 손꼽히는 재력가인 카마스와미 아래서 돈을 벌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오욕락(五欲樂)에 찌든 나머지 사색할 줄도, 기다릴 줄도, 단식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래서 싯다르타는 다시 길 위를 떠돌 수밖에 없다.

헤르만 헤세는 깨달음은 고행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지만, 쾌락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싯다르타》가 구도소설로서 한 전범이 될 수 있는 까닭도 싯다르타라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보편적인 인생사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담아내면서도 그 내용 안에 욕망이 얼마나 덧없는가를 잘 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싯다르타는 카말라에게서 애욕이 얼마나 덧없는지 깨닫고, 카마스와미에게서 물욕이 얼마나 덧없는지 깨닫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싯다르타는 자신의 어린 아들을 만나면서 자식에 대한 헌신도 실은 한낱 소유욕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싯다르타가 이러한 오욕락을 이기고 선정의 경지에 들 수 있었던 것은 뱃사공인 바주데바로부터 강의 말을 듣는 법을 배웠기에 가능하였다. 도식화하면 싯다르타에게는 두 추상적인 개념의 선지식이 있는데, 하나는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욕망을 비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두 추상적인 개념의 선지식을 상징하는 인물이 카말라와 바주데바인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화엄경》 <입법계품> 에서도 53선지식 중 뱃사공과 몸 파는 여자가 제법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바시라 뱃사공과 바수밀다 여인은 남을 위해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게 보살도(菩薩道)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바수밀다 여인은 선재동자가 찾아왔을 때 “어떤 중생이 애욕에 얽매어 내게 오면, 나는 그에게 법을 말해 탐욕이 사라지고 보살의 집착 없는 경계의 삼매를 얻게 한다. 어떤 중생이고 잠깐만 나를 보아도 탐욕이 사라지고 보살의 환희삼매를 얻는다. 어떤 중생이고 잠깐만 나와 이야기해도 탐욕이 사라지고 보살의 걸림 없는 음성삼매를 얻는다. 어떤 중생이고 잠깐만 내 손목을 잡아도 탐욕이 사라지고 보살의 모든 부처 세계에 두루 가는 삼매를 얻는다.”고 설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누구에게나 분별없이 대하는 바수밀다 여인이기에 중생에게 삼매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바수밀다 여인의 해탈 법문은 중생세계에 들어가지 않고는 중생을 교화할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바수밀다 여인은 중생의 욕망에 따라 몸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는 관세음보살이 온갖 중생의 요청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청정한 마음을 지닌 바수밀다 여인이기에 오탁악세(五濁惡世)의 법으로써도 능히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선재동자가 찾아왔을 때 바시라 뱃사공은 “나는 소용돌이치는 곳과 물이 얕고 깊은 곳, 파도가 멀고 가까운 것, 물빛이 좋고 나쁜 것을 잘 안다. 해와 달과 별이 운행하는 도수와 밤과 낮과 새벽 그 시각에 따라 조수가 늦고 빠름을 잘 안다. 배의 강하고 연함과 기관의 빡빡하고 연함, 물의 많고 적음, 바람의 순행과 역행에 대해 잘 안다. 이와 같이 안전하고 위태로운 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갈 만하면 가고 가기 어려우면 가지 않는다. 나는 이와 같은 지혜를 성취해 이롭게 한다.”고 말한다.

선재동자의 구도에서 바수밀다 여인이 자비의 화현(化現)이라면, 바시라 뱃사공은 지혜의 화현이라고 할 수 있다. 비유컨대 지혜와 자비는 법륜(法輪)이라는 이름의 자전거를 이끄는 앞뒤 바퀴라고 할 수 있다.

《싯다르타》에서도 몸 파는 여자인 카말라와 뱃사공인 바주데바는 주인공에게 유사한 역할을 한다.

헤르만 헤세의 문학세계에 비춰보면, 《싯다르타》는 《데미안》이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연장선상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발표 시간대로 보면《싯다르타》는《데미안》과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중간에 있다. 《데미안》에서 싱클레어가 데미안에게 세계란 선과 악이 함께 할 때 비로 하나가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듯이, 《싯다르타》에서 싯다르타는 고빈다에게 단일성과 다양성의 세계는 결국 하나임을 일깨워주고 있고,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금욕주의자인 나르치스와 쾌락주의자인 골드문트가 대비를 이루듯이 《싯다르타》에서 고타마의 가르침에 귀의해 수행하는 고빈다와 홀로 깨달음을 이루는 싯다르타가 대비를 이루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싯다르타》는 그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서양 문학작품으로서는 드물게도 붓다의 일생과 가르침을 작품 속에 용해하고자 노력했고, 관조적 삶(수행)과 실제적 삶(일상)이 다르지 않음을 역설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문학으로서 탁월한 문학적 성과를 남겼다고 볼 수 있다.

《싯다르타》의 말미에 고빈다는 싯다르타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 싯다르타의 얼굴이 보이지 않고 대신 “수 백 개의 얼굴들이, 수 천 개의 얼굴들이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왔다가는 다시 흘러가 버린다. 그렇지만 그 모든 얼굴들이 동시에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얼굴들은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어 새로운 모습의 얼굴로 변하였다. 그렇지만 그 얼굴들은 모두가 싯다르타의 얼굴이었다.”고 느낀다.

여기서 수많은 얼굴이란 비단 사람의 얼굴만 국한된 게 아니다. 물고기, 산돼지, 악어, 코끼리, 황소, 새 등 온갖 짐승과 크리슈나, 아그니 등 신들의 모습도 스쳐가는 것이었다.

《싯다르타》가 이상과 현실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가 아니라 현실 안에 이상이 투영돼 있는 일원론적 세계를 지향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급진적 구성주의에 따르면, 인간의 인식이란 세계 자체에 대한 인식이 아니다. 스스로에게 유리하도록 파악한 세계에 대한 인식일 뿐이다. 이를 일컬어 서구철학에서는 ‘인지적 순환’이라고 한다. 그리고 서구철학에서 말하는 인지적 순환은 “그때 여래가 걸림이 없는 청정한 지혜의 눈으로 온 법계의 모든 사람들을 두루 살피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신기하고 신기하여라. 이 모든 사람들이 여래의 지혜를 다 갖추고 있구나. 그런데 어리석고 미혹하여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구나.’”라는 《화엄경》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의 구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유응오 | 소설가, 전 주간불교 편집장, arche44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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