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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6-09-25, (일) 5:04 am 

가입일: 2015-05-11, (월) 8:22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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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라 승원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완전한 형태로 존재

▲ 상단부에서 바라 본 탁티 바히 주 승원. 좌우 능선에도 좀 더 작은 규모의 승원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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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玄)은 당시 간다라는 이미 부서지고 황폐해져 잡초만 무성하였지만 1000여 곳의 승가람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당시 수도였던 차르다사나 페샤와르에는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그나마 발굴된 승원터는 모두 페샤와르 북부 마르단의 산악지역에 존재한다. 카니시카 승가람이나 대탑과 같은 도시근교 평원의 승원들은 역사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탁티 바히(Takhti Bahi), 사흐리 바롤(Sahri Bahlol), 자말가리(Jamal garhi), 시크리(Sikri) 등이 마르단 지역의 대표적인 승원 터이다. 이 중에서도 탁티 바히는 간다라의 승원 중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곳으로, 페샤와르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의 대다수도 여기서 발굴된 것이다.

페샤와르 박물관의 전시 유물
대부분이 탁티 바히 승원 발굴
1세기에 조성돼 7세기에 폐사
19세기 초 발견…1907년 첫 발굴
1929년까지 단계적 발굴 복원

도기 파편 전면 ‘사방승가’ 명문
음광부 승가 봉헌된 승원 추정
음광부는 설일체유부의 분파로
카샤파를 조사 삼고 있는 부파

1984년 일본 불교학자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의 ‘불타의 세계’라는 책이 김지견 박사에 의해 번역 출판(김영사)되었는데, 여기에 당시로서는 유례가 없는 호화장정에, 인도의 불교유적지와 유물의 칼라판 사진들이 각 장(章) 첫머리에 실려 있었다. 당시 불교관련 서적을 장식한 불상이나 불전도 사진의 십중팔구는 여기서 카피된 것이다. 필자는 그 책에서 ‘타후티 바이’로 번역된 간다라 승원의 사진을 처음 보았다. 강렬한 인상의 승원이었다.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을 뿐더러 황량한 돌산 정상 안부의 승원은 마치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은 수직의 힘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파키스탄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는데, 탁실라에서 지척인 탁티 바히에 가보지 못한 것이 그렇게 아쉬울 수 없었다. ‘탁티 바히’, 내 기억 저편에 오랫동안 머물고 있던 곳이었다.

▲ 승원에 들어서면서 마주치게 되는 봉헌 탑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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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250_19846_2838.jpg [ 32.8 KiB | 1 번 조회 ]

마르단은 페샤와르에서 60㎞, 어제 갔던 차르사다에서 30㎞ 떨어진 인구 30만 정도의 소도시이다. 어제 차르사다에서 바로 왔다면 그만큼의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겠지만, 여행허가 지역이라 하룻밤 묵기가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페샤와르로 돌아갔었다. 아침 7시 마르단을 경유하는 밍고라 행 대우고속버스에 올랐다. 차르사다와는 반대편인 라왈핀디로 가는 고속도로를 이용하였다. 다시 카불 강을 건너고 한 시간 남짓 만에 마르단에 도착하였다. 아침의 마르단은 한적하였다. 대우버스터미널에서 합승 릭샤 편으로 시내 시장 통으로 들어왔다. 택시를 물색하였다. 이곳의 대표적 불교 승원터인 탁티 바히와 자말가리, 아쇼카 왕의 암각법칙이 있는 샤바즈가리, 수다나태자의 비원이 깃든 차나카 데리와 메카산다, 그리고 마르단 박물관, 오늘 하루 최소한 이 정도는 둘러보아야 할 것 같은데, 각기 방향이 달라 로컬버스로는 무리였기 때문이다.

▲ 난공불락의 요새와도 같은 승원 입구. 수직의 힘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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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티 바히는 마르단 북북서쪽 13㎞, 밍고라 가는 길목에 있었다. 진흙탕의 혼잡한 도심 시장 통 길을 간신히 빠져나와 평원지대를 달리는데 우측으로 불쑥 큰 산이 나타났다. 평야지대였기 때문인지 매우 높게 보였다. 이 지역에 절이 있다면 저런 곳에 있을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택시는 큰 길을 버리고 마을로 들어선다. 탁티 바히란다. 택시는 마을을 지나 산 밑 주차장에 우리를 내려 주었다. 우리가 오늘 첫 번째 입장객인 듯하였다. 매표소에 입장권이 준비되지 않았는지 관리원이 우리를 사무실로 데리고 가 표를 끊어주었다. 200루피, 파키스탄 내의 유적지나 박물관의 외국인 입장료는 대소경중에 관계없이 200루피였다. 이곳 물가를 감안할 때 상당한 액수였다. 페샤와르에서 마르단까지의 고속직행버스비가 160루피였다. 더욱이 바로 이웃에 위치할지라도 유적지만 다르면 다시 표를 사야 하였고, ‘외국인 200루피’라는 스탬프가 찍힌 내국인 표(1루피)를 받을 때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300여 미터 산을 오르자 벽돌크기의 납작한 흑갈색 돌로 쌓아올린, 요새의 성벽과 같은 담벼락이 막아섰다. 그 사이로 난 문을 지나 승원에 들어서니 우측 산 아래쪽으로 사면에 칸칸이 반 평 남짓의 개인 방들이 딸린 승원이, 좌측 산 위쪽으로 여러 구의 작은 탑(봉헌탑)과 그 위로 큰 탑(주탑)의 탑원이 배치되어 있었다. 좀 더 가니 마당이 나타났고 우측으로 강당이 승방에 붙어 있었고, 좌측으로 다른 구역의 승원과 탑원으로 가는 길이 나 있었다.

▲ 탁티 바히 승원에서 발굴된 불타 고행상. 2-3세기. 페샤와르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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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티 바히의 승원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 주능선 상단부로 올라가 보았다. 마을로 향한 좌우 능선의 안부에도 승원이 있었고, 바로 좌측 건너편 능선 위에도 승원이 보였다. 아마도 이 산 전 지역에 승원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 모두를 대충이라도 살펴보려면 하루로는 모자랄 것 같았다.

탁티 바히 불교승원은 기원후 1세기에 조성되어 7세기에 폐사되었다고 한다. 현장의 ‘대당서역기’에는 이곳이 언급되지 않는다. 그는 왜 간다라 최대의 승원에 들르지 않은 것일까? 그 때 ‘최대’가 아니었는지도, 이미 폐사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곳은 19세기 초에 발견되었지만, 1907년 카니시카 스투파를 발굴하기도 하였던 당시 페샤와르 박물관 학예관이던 스푸너에 의해 발굴이 시작된 이래 1929년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발굴 복원되었다고 한다.

그 때 발견된 흑색 도기 파편(곡물 보존용 항아리 일부) 뒷면에 “곤도파레스 대왕26년(AD. 19년) 보호자 발라사미(Balasami)가 아들딸과 함께 부모의 공양을 위해 보시하였다”는 내용의 카로스티 문자가 새겨져 있고, 전면에는 “사방승가(四方僧伽)로서의 Ka…(saṃghe cadudiśe Ka…)”가 새겨져 있었다는데, 비문학자들은 여기서의 Ka를 카샤피야(Kāśyapīya) 즉 음광부(飮光部)로 읽는다. 이곳과는 지척인, 탁티 바히 바자르에서 마르단 쪽으로 2∼3㎞ 떨어진 사흐리 바롤 승원터에서도 “사방승가로서의 음광부의 여러 스승들에게 수납된(saṃghe cadudiśe acaryana Kaśaviyana parigrahe)”이라는 말이 적힌 도기 파편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방승가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현전(現前)승가와는 달리 시간적 공간적으로 제한되지 않는 승가, 말하자면 미래의 승가를 말한다. 탁티 바히의 승원은 언제 어디서라도 존재할 가능성으로서의 음광부 승가에 봉헌된 승원이었던가?

▲ 자말가리 불교 승원 터 상단부에 위치한 스투파 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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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광부는 ‘이부종륜론’에서도 ‘디파밤사’에서도 설일체유부의 분파로 카샤파(가엽 迦葉: 음광 飮光의 뜻)를 조사로 삼는 부파이다. 그들의 주요교리는 유부가 일체법의 삼세 실유를 주장한데 반해 “이미 끊어졌거나 변지(遍知)된 법은 존재하지 않지만 아직 끊어지지 않았거나 변지되지 않은 법은 존재한다”거나 “미래세와, 이숙과를 낳은 과거 업은 존재하지 않지만, 현재세와 이숙과를 낳지 않은 과거 업은 존재한다”는 분별설부의 입장을 취한다. ‘무아’설이 그러하였듯이 ‘무상’설의 경우에도 참으로 다양한 교리적 해석을 모색해야만 하였다. 업도 무상하여 짓자마자 사라진다면 그 과보는 어떻게 가능한가? 최근 각 일간지에 달라이라마의 기사가 실렸다. 거기서 달라이라마는 “불교의 가르침은 맹신이 아닌 비판적 분석”이라며 “단순히 경전을 외우기보다 이치를 따지며 불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 긴 생명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동아일보, 2016. 9. 2) 비판적 분석, 이는 이른바 ‘간택(簡擇)’으로 정의되는 지혜의 의미이다. 불교가 지혜의 종교라지만, 오늘 우리의 불교는 지혜가 무엇인지, 지혜가 어떻게 발동되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 같다.

아무튼 현장은 인도에서 귀국할 때 상좌부·대중부·삼미저부(정량부)·미사색부(화지부)·법밀부·설일체유부의 삼장과 함께 가섭비부(음광부) 삼장 22부도 갖고 왔다고 한다. 반드시 일치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자은전’에 의하면 현장은 귀로에 탁실라에서 인더스 강을 건너다 50권의 경을 잃어버려 우다칸다(Uḍakahanda, 오늘날 훈드)에 머물면서 사람을 우드야나(오장나, 오늘날 망게라)로 보내 가샤피야(迦葉臂耶) 즉 음광부의 삼장을 베껴오도록 하였다. 우다칸다에서 이곳 마르단의 탁티 바히까지는 지척인데 어찌 우드야나까지 가서 음광부 삼장을 베껴오게 하였을까? 그 때 이곳은 이미 폐사되었기 때문인가?

음광부는 이렇듯 그들의 승원과 삼장의 흔적을 곳곳에 남기고 있다. 미술사학자는 그들의 승원을 이곳 탁티 바히에서 발굴하였는데, 불교학자는 어디서 그들의 삼장을 발굴할 것인가? 이미 오래전 중국의 초기 불교도들은 ‘해탈계경’이 음광부의 계본(戒本)임을 확인하고 그렇게 기록(‘出迦葉毘部’)해 두었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미지의 불설이다.


▲ 자말가리 승원 터에서 바라본 원경. 구름에 덮인 저 산의 ‘시크리’라는 곳에서 라호르 박물관 소장의 불타 고행상이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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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다음 방문지는 자말가리 승원터이다. 여기서는 “성문 포타카(śrāvaka Potaka)에 의해 법과 상응하는 피난처(dharmayuktaḥokaḥ)가 건립되었다”는 명문이 발견되었고, M. H. 뤼더스는 ‘법과 상응하는’을 ‘법장부에 속한(Dharmagupteyānām)’으로 읽을 것을 제안하였다고 한다. 필자로서는 그 이해의 타당성을 논할 능력이 없지만, ‘이부종륜론’에 의하는 한 음광부의 교의는 앞서 언급한 분별설을 제외한다면 대부분 법장부와 동일하다. 요컨대 자말가리의 승원이 법장부라면, 탁티 바히 승원과 일말의 연결점은 있다는 말이다.

자말가리는 마르단 북동쪽 15㎞ 지점으로 탁티 바히와는 반대편이었다. 로컬버스를 이용하였다면 탁티 바히에서 마르단을 거쳐 자말가리로 가야 하였겠지만, 택시 운전사는 이리저리로 시골길을 돌아 20여 분만에 자말가리 마을에 들어섰고, 곧장 좁은 산길을 한참이나 돌고 돌아 정상 초입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탁티 바히와는 달리 이곳은 탐방객이 많지 않았다. 매표소(나무 밑 평상)에 앉아있던 동네 사람들과 아이들과 청년들을 앞뒤로 세우고 조금 오르니 승방과 소형 스투파 군이 나타났고, 그 사이를 지나 산 정상에 이르니 우리의 봉화대처럼 감실로 둘러쳐진 큰 원형 스투파의 기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일망무제, 저 멀리 10리 밖까지 조망되었다. 저 아래 십리 밖에서도 당연히 이 산꼭대기의 스투파가 보였을 것이다. 왜 승가람을 이같이 높은 산꼭대기에다 지었을까? 탁실라의 자울리안 승원도, 스와트의 니모그람 승원도 정상 안부지점에 있었다. 우리는 산중불교를 비판하면서 조선시대 도시에서 산중으로 쫓겨 간 것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이는 무엇보다 불교의 우주관에 기인한다.

이에 따르면 9산 8해로 둘러싸인 세계의 중앙에는 네 층(제4층이 4대왕중천)으로 이루어진 수미산이 있고, 그 꼭대기에는 삼십삼천(trayatriṃśa, 혹은 도리천)이 있으며, 이곳 선견(善見)이라 이름 하는 궁성 남쪽에 선법당(善法堂, sudharmā-sabhā)이 있다. 불단(佛壇)을 수미단(須彌壇)이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거기에 이르기 위해서는 아홉 산을 넘고 여덟 바다를 지나 수미산 중턱 증상(增上)·광목(廣目)·지국(持國)·비사문(毘沙門)의 사천왕중천을 거쳐야 한다. 삼십삼천은 땅에서 올라가는 하늘(地居天) 중 가장 높은 하늘이다.

스투파 저 멀리 우뚝 솟은 영험한 산이 보인다. 저 산 어디쯤엔가 시크리 불교승원 터가 있다. 거기서 그 유명한 불타의 고행상이 발굴되었다. 고행상은 당시 불상양식의 한 조류였고 탁티 바히에서도 발굴되었지만,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번 답사여행에서는 그것이 전시된 라호르 박물관도, 발굴된 시크리 승원 터도 가보지 못하였다. 다음을 다시 기약할 수 있을까? 애당초 옛날 카슈미르와 간다라의 논사들도 보았을 이곳의 산야와 하늘을 보는 것만으로도 족하다는 마음으로 오지 않았든가?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ohmin@.gnu.kr
2016.09.12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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