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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6-10-13, (목) 1:22 am 

가입일: 2015-05-11, (월) 8:22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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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부처님 품 찾아든 아이들 덕에 ‘스님 아버지’ 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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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614_20405_3024.jpg [ 166.4 KiB | 136 번째 조회 ]

▲ 13년 동안 대성사에 찾아들었던 아이가 모두 7명. 그중 처음 인연을 맺은 세 명이 지금까지 스님과 함께 지내고 있다. 보각 스님은 “아이들이 시시비비 잘 가리고 당당하게 사회로 나가 평범하게 잘 사는 것, 그이상 바라는 것이 없다”고 미소를 머금었다.

“스님, 혹시 아이를 돌봐줄 만한 곳이 있을까요?”

이혼·편부모 가정 등 다양
아이들 후견인 활동 13년째
4~5년 간은 아이 뒷바라지
신도들도 장학후원회 결성
“당당한 사회 구성원 되길”

신도의 전화였다. 이웃에 사는 할머니가 홀로 손자를 키우는데 도저히 키울 상황이 아니라고 했다. 아이는 8세, 나이가 찼지만 초등학교 입학도 하지 못했다. 갑작스럽게전화를 받은 당진 대성사 주지 보각 스님은 이상하게 마음이 쓰였다.

아이는 부모의 이혼 직후 태어났다고 했다. 양육권을 포기한 부모의 뜻에 따라 세상의 빛을 보자마자 다른 가정에 입양이 됐고 양부모를 친부모로 알고 자랐다. 그렇게 5년 남짓 지나 아이는 다시 파양됐다. 양부모가 이혼하면서 아이를 보육원으로 보냈다. 연락이 닿은 친할머니가 핏줄에 이끌려 데려왔지만 이미 노환이 짙어 잘 돌볼 수도 없었거니와 아이를 보면 치솟는 분노를 주체하기가 힘들었다고 했다. 이 아이가 무슨 죄가 있을까. 사랑 듬뿍 받고 자랄 나이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을까. 보각 스님은 마음이 아렸다.
“그 아이 내가 한번 봅시다.”

▲ 처음에는 무서움이 많고 남의 눈치를 봤던 아이들은 스님의 관심으로 건실하게 성장했다.

2003년 무렵의 일이다. 여기저기 맡겨지며 위축되고 소심해진 작은 아이는 그렇게 자연스레 부처님 품에 들었다. 당시 보각 스님은 지역 내 독거 어르신과 거처 없는 이들을 보살피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차근차근 이를 추진해 나가던 차였다. 의탁할 곳 없는 어르신들을 모시기 위해 넓게 지은 요사채에는 아이를 위한 방이 생겼다. 스님은 교육청에 근무하던 신도들의 도움을 얻어 입학부터 시켰다. 시기가 늦어 제출해야 할 서류도 많았지만 스님은 발로 뛰어 상담을 받고 도움을 청했다. 그 덕에 큰 무리 없이 아이는 학교생활을 시작했고 하루하루 사찰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우연인 듯 맺어진 인연은 또 다른 인연으로 이어졌다. 첫 아이가 들어온 지 9개월이 지나 또 다른 신도가 연락을 해왔다. 이번엔 다른 사찰에서 보호하던 6세 아이였다. 미혼모가 아이를 낳아 사찰에 맡겼지만 적응을 하지 못했다. 사찰 측에서도 더는 감당이 어려워 보육원을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세 번째 찾아든 아이는 유독 손이 많이 갔다. 역시나 이혼가정 아이로 막노동일을 하는 할아버지가 홀로 아이를 키웠다. 새벽녘 자는 아이 머리맡에 밥을 차려놓고 나갔지만 아이는 장돌뱅이처럼 밖으로 돌았다. 할아버지가 차려놓은 밥을 외면한 채 밖으로 나가 길거리를 쏘다니며 과자와 빵을 훔치고 지나는 사람들에게 달라붙었다.

▲ 스님은 천진불들과 부자지간처럼 부대끼며 13년을 함께 살아왔다.

“정이 그리웠던 게지요. 홀로 깨어 혼자 밥을 먹고 하루종일 할아버지를 기다리던 그 어린아이가 사람의 정을 갈구해 거리로 나온 거예요. 새카맣게 탄 얼굴에 피부병으로 얼룩덜룩한 그 작은 아이를 도저히 외면하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렇게 대성사 법당을 들썩이는 천진불이 셋으로 늘었다. 아이는 대성사에 온 뒤로도 과거의 습을 버리지 못했다. 낯선 동네에서도 밖으로 돌며 배회하기 일쑤였다. 아이의 안전을 고심하던 스님은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냉장고는 물론이고 법당과 요사채 등 손이 닿는 모든 곳에 과자와 과일 등 비롯한 먹을거리를 풍성하게 쌓아둔 것이다.

아이 한명 한명의 성품을 고려한 스님의 이런 노력으로 아이들은 서서히 변해갔다. 낯을 가리고 숨던 아이들은 신도들에게도 마음을 열고 대웅전 앞마당을 신나게 뛰어다녔고 먹을 것에 집착하던 아이는 더는 과자를 앞에 두고도 욕심내지 않았다.

부모 곁으로 돌아갔지만 다리를 절어 스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아이도 있었다. 아동시설에 있을 때 다친 후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무릎에 고름이 차고 뼈가 상했다. 수술 후엔 스님이 직접 아이를 태우고 병원에 다녔고, 상시적인 물리치료를 위해 병원 연계가 가능한 학원을 보내기도 했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사립유치원을 다녔지만 부모의 이혼으로 대성사에 왔던 여자아이도 기억에 남는다. 똑 부러진 성격에 1년 남짓 사찰에 머물면서 다른 아이들에게 온갖 동요를 알려줬었다.

이런저런 사연으로 대성사에 찾아들었던 아이가 모두 7명, 이 가운데 처음 인연 맺은 3명이 지금까지 스님의 보호 아래 자라고 있다. 부자지간처럼 부대끼며 함께 살아온 세월이 벌써 13년째다.

보각 스님은 “아이들 밥과 간식도 손수 챙기느라 처음 4~5년은 아무것도 못 했다”며 “첫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면서야 ‘도시락 싸기 난관’에 봉착해 공양주를 들였다”고 호탕하게 웃었다. 그야말로 산문을 닫아걸고(?) 양육에 전념한 셈이다.

“내가 밥을 하고 도시락을 싸다 보니 아무리 식단을 고민해도 계란이나 햄, 김치, 김에서 벗어나질 못해요. 아이들이 자랄 때 영양이 중요하잖아요. 공양주가 오고 얼마 후 도시락이 급식으로 바뀌긴 했지만 골고루 먹이고 싶어 지금까지 공양주가 있어요. 덕분에 저도 밥 잘 먹고 삽니다.”

어린 시절, 스님이 신도의 부탁으로 장례식장 시다림을 가면 항상 아이들이 따라붙었다. 어른 없는 사찰에 아이들만 두기도 안쓰러워 데리고 가면, 장례식장이 무섭다며 영정사진에 등을 돌린 채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하나같이 무서움이 많고 남의 눈치를 봤다.

스님은 이에 대한 처방으로 담력훈련에 나섰다. 깊은 밤 인근 공동묘지에 가서 처음엔 스님과 함께, 그다음엔 아이들만 한 바퀴 돌고 오도록 했다. 덜덜 떨면서 손을 붙잡고 나선 아이들이 돌아올 땐 의기양양이었다. 스님의 차를 타고 다시 대성사로 돌아오던 길,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무용담을 뽐내며 밝게 빛나던 웃음들이 생생하다.

▲ 신도들의 부탁으로 가는 장례식장 시다림에도 항상 아이들이 함께 했다.

아이들과의 에피소드를 전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애정이 뚝뚝 묻어났다. 스님은 이 아이들이 상처를 스스로 극복하고 당당한 사회구성원이 되길 바랐다. 공부를 못해도 야단치지 않았지만 이유 없이 기가 죽거나 눈물을 흘리면 불호령을 내렸다. 늘 “사람이 한번 태어났으면 남의 시선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여느 아이들처럼 가족·친지가 없는 것에 마음 쓰여, 때때마다 은사스님과 본사스님들을 찾아가 귀여움 듬뿍 받을 수 있는 자리도 마련했다. 아이들이 크는 모습을 애정으로 지켜보는 스님들이 곧 가족·친지임을 알길 바랐다. 그중에서도 아이들이 최고로 ‘믿는 구석’은 당연히 보각 스님이었다. 아이들은 쑥쑥 자라 어느새 고등학생이 되고 성인이 됐지만 여전히 스님은 그들에게 큰 산이다. 스님은 “일부러라도 아이들 앞에서는 당당한 모습만 보여줬다”고 회상했다.

그런데도 경제적인 문제는 매 순간 고민이었다. 이왕 인연을 맺었으니 성인이 되어 대학을 가고 장가를 갈 때까지 책임지고자 했다. 이후에도 아이를 부탁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지만 단호히 거절했다. 후견인을 넘어서 아버지와 같이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선이 여기까지였다. 일찍부터 대학 등록금을 염두에 두고 아이들의 이름으로 적금을 부은 이유도 이와 같다. 사연을 아는 몇몇 신도들도 ‘장학 후원회’를 결성해 십시일반 마음을 보탰다.

첫째가 대학에 입학하던 날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첫째는 지금 군대에 입대해 복무 중이다. 입대 후 부모에게 보내는 첫 편지는 당연한 듯 대성사로 왔다. 스님은 편지를 읽고 여느 부모처럼 눈물을 훔쳤다. 아이는 편지에서 처음으로 스님을 ‘아버지’라고 칭했다. “남 부럽지 않게 잘 키워주셔서 감사하다”며 “앞으로 말 잘 듣고 효도하겠다”고도 했다. 스님은 군부대 커뮤니티에 가입해 사진도 보고 댓글도 달며 ‘아버지’로 활동 중이다.

인연이 남다른 만큼 대성사 신도들은 스님과 세 아이를 일컬어 “자식보다 더 자식같이 키운다”고 말한다. 스님과 인연이 깊다는 한 거사는 “내가 내 자식을 스님 같은 마음으로 키웠다면 부자지간에 얼마나 돈독했을까 싶다”며 “아이들에게 하는 것을 보면 정성도 그런 정성이 없다”고 혀를 내둘렀다.

“출가시킬 것이 아니라면 왜 아무 대가 없이 돈 들여 아이들을 키우냐”는 질문도 간혹 듣는다. 답은 간단하다.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한 것이며 스스로도 행복하기 때문”이다.

보각 스님은 “가끔은 ‘그냥 수행하고 살 것을 괜히 일을 벌였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아이들이 주는 행복은 정말 컸다”며 “시시비비 잘 가리고 당당하게 사회로 나가 평범하게 잘 사는 것, 그 이상 바라는 것은 없다”고 미소를 머금었다.

“의지할 곳 없는 어르신들을 모시려고 한 곳인데 인연이 참 지중하지요. 스님인 내가 아이를 키우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모든 것이 서툴러 쉽지 않았던 세월이 이렇게 흘렀네요. 한번 맺은 인연 끝까지 책임져야죠. 성인이 되어서도 의지할 곳이 필요한 세상이잖아요.”

수행자이자 세 아이의 아버지로 살아가는 삶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쉽지 않은 인연은 아이들의 삶을 변화시켰고 외려 스님을 스님답게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아이들과 함께한 이야기를 풀어내며 소탈한 웃음을 터트리는 스님의 모습이 더없이 맑고 청아하다.

당진=송지희 기자 jh35@beopbo.com
[1362호 / 2016년 10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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