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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5-12-16, (수) 3:50 am 

가입일: 2015-01-01, (목) 10:13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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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the buddha taught]에 대한 비판

1. 머리말

불교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개론서는 많지만 누구나 공감하는 명확한 개론서는 많지 않다. 그 중에서 1959년에 스님 왈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스님에 의해 쓰여진 [what the buddha thought]는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고 있는 개론서이다. 빠알리니까야에서 다양하게 경전을 인용하여 현대인들의 기호에 맞게 써진 이 책은 90년대까지 11번이나 재판되었고 세계 각국으로 번역되어 지금 까지도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여러 차례 번역이 되었다.1) 그런데 이렇게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이 책을 비판하고자 하는 이유는 이 책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한 곳이 발견 되었고 이러한 자의 적인 해석을 우리나라 학자들이 추종하고 있음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책이 가지는 권위로 인해 사람들에게 막강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을 우려하여 이 책을 비판하는 글을 쓰게 되었다. 라훌라스님이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곳은 크게 둑카와 열반에 관한 것이다. 비판하는 근거는 빠알리 경전이다. 언제든지 나의 비판에 의문점이나 잘못된 점이 있다면 문제제기를 환영한다.

2.라훌라스님의 고에 대한 이해

이 글은 라훌라 스님의 고에 대한 이해 중에서 비판받아야 할 견해를 다음의 4가지로 정리하였다.
1. dukkha에는 불안전, 무상, 공, 비실체성의 의미가 있다.
(but in addition it also includes deeper ideas such as imperfection, impermanence, emptiness, insubstantiality)
2. 오온은 그 자체가 고다.
(the five aggregates themselves are dukkha.)
3. 둑카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고통이 아니라 무상한 것이면 무엇이건 괴롭다는 의미에서의 괴로움이다.(not because there is ‘suffering’ in the ordinary sence of the word. but because whatever is impermanent is dukkha.)
4. 괴로움은 그 자체 내에 발생과 소멸의 원인과 근원을 가지고 있다.
(the cause, the germ, of the rising of dukkha is within dukkha itself, and not out side.)

이상 4가지 문제를 더 요약 하면 하나의 문제로 압축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고를 느낌의 문제가 아닌 존재의 속성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정확히 비판해야 할 부분을 알아보기 위하여 라훌라 스님의 견해를 인용하고 비판 해 나가겠다.

먼저 라훌라스님은 고성제에서 일반적으로 고에 대한 오해가 있음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인 사성제의 고성제를 거의 모든 학자들은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라고 번역하고 불교에 따르면 삶은 고통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해석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번역과 해석은 모두 만족스럽지 못하며 오해할 소지를 안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염세주의로 잘못 이해하는 것은 이러한 정확하지 못한 안이한 번역과 수박 겉핱기식의 해석 때문이다.”2)

그는 이러한 피상적인 해석을 극복하기 위하여 빠알리어의 dukkha에 대한 언어분석적인 해석을 내어 놓는다.

‘빠알리어의 dukkha는 일반적으로 행복, 평안, 안락의 뜻인 sukkha의 반대어이며 그 일상적인 용법이 고통, 아픔, 슬픔, 비극의 의미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4성제에서의 dukkha라는 용어는 인생과 세상에 대한 붓다의 견해로서 깊은 철학적 의미와 크고 넓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4성제에서의 dukkha는 일반적으로 고통이란 말을 의미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에 덧붙여 불안전, 무상, 공, 비실체의 깊은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3)

그는 이렇게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둑카(dukkha)라는 단어를 고통이라고 번역하여 오해를 만들기 보다는 차라리 번역하지 말고 둑카(dukkha)라는 말 그대로 사용 할 것을 권한다.

이 글에서 첫 번째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dukkha에 불안전(imperfection), 무상(impermanence), 공(emptiness), 비실체성(insubstantiality)의 의미가 있다는 그의 견해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둑카라는 어원을 분석하여 내놓은 결과로서 이미 동서양의 많은 학자들이 추종하고 있는 견해이기도 하다. 둑카를 이러한 의미로 해석하게 되면 고는 느낌이 아니라 존재의 속성이 되는 것이다. 둑카가 존재의 속성이 되면 고를 소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책에서는 고를 존재와 동일시하는 그의 발언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삼고를 설명할 때 행고의 설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saṅkhāradukkhatā(行苦)-‘비구들이여, 둑카란 무엇인가? 존재에 대한 취착이 둑카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온과 둑카는 다른 두 개의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한다. 오온 그 자체가 둑카이다.4)

그는 行苦의 설명에서 오온 그 자체가 둑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예를 드는 경전은 오취온이 둑카라는 경전을 인용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오온과 오취온을 같은 것으로 보고 있으며 오온이든 오취온이든 그 자체를 둑카라고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설명대로라면 불교의 수행목적인 둑카의 소멸은 오온의 소멸이 되므로 현실에서의 열반은 불가능 하게 된다는 데에 있다. 또한 둑카에 불안전(imperfection,), 무상(impermanence), 공(emptiness), 비실체성(insubstantiality) 같은 뜻이 포함되어 있다면 이것 역시 수행을 통해서 소멸시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무상이나 무아 공이라는 법의 속성은 발견하는 것이지 소멸시켜야 하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둑카가 일반적인 괴로움이 아니란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마지마 니까야에서는 이러한 선정 상태에서 오는 정신적 상태를 찬양한 뒤 그러나 그것들도 역시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한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둑카라는 말이 분명히 사용된 것에 유의 해야 한다. 불교에서 괴로움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고통이 아니라 무상한 것이면 무엇이건 괴롭다(but because whatever is impermanent is dukkha.)는 의미에서의 괴로움이다.”5)

세 번째로 비판하고자 하는 내용은 무상한 것이면 무엇이건 괴롭다는 말에 대해서이다. 무상한 것이면 무엇이건 괴롭다(but because whatever is impermanent is dukkha.)는 의미에서의 괴로움은 어떤 괴로움 이길래 일반적인 괴로움이 아니라고 하는 걸까?
과연 무상한 것이면 무엇이건 괴로운 걸까?

그가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둑카는 불안전(imperfection), 무상(impermanence), 공(emptiness), 비실체성(insubstantiality)을 지니고 있다는 말과 오온은 그 자체가 고다라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러니까 이러한 그의 표현은 표현상의 실수가 아니라 일관되게 흐르는 그의 견해라고 할 수 있다. 4선의 선정상태를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화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경전을 인용하며 그는 선정상태를 둑카라고 표현 하는 것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다. 선정상태를 무상하고 둑카라고 표현 할 때, 이때의 둑카라는 용어는 일반적인 괴로움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반적인 괴로움이 아닌 괴로움은 어떤 의미인가? 그의 설명대로 라면 이때의 둑카는 불안전(imperfection), 무상(impermanence), 공(emptiness), 비실체성(insubstantiality)의 뜻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무상한 것이면 무엇이건 괴롭다는 말을 다시 풀이하면 무상한 것이면 무엇이건 불안전(imperfection), 무상(impermanence), 공(emptiness), 비실체성(insubstantiality)이다 라는 말이 된다. 무상한 것이면 무엇이건 불안전하다. 무상한 것이면 무엇이건 무상하다. 무상한 것이면 무엇이건 공이다. 일반적이지 않는 둑카라는 것을 알아보니 결국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둑카를 일반적인 뜻인 느낌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이러한 동어반복이 되어 버린다.
그가 인용한 마지마 니까야의 경전에서 어째서 선정이 둑카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찾아보자.

비구들이여, 무엇이 느낌의 유혹인가?......
비구들이여, 그때 비구는 행복을 버리고 고통을 버려서 이전의 쾌락과 불쾌를 없애고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 네 번째 선정에 들어 머문다.
그때 그는 자신에 대한 악의도 없고 타인에 대한 악의도 없고 자타에 대한 악의도 없다. 그때 그는 악의 없음의 느낌을 경험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느낌 중에서 그 악의 없는 느낌을 유혹(assādaṃ)이라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느낌의 위험인가?
비구들이여,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을 나는 느낌의 위험(ādīnavo)이라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느낌으로부터 출리인가? 무엇이든지 느낌에서 욕망과 탐욕을 없애고 욕망과 탐욕을 버리면 이것을 나는 출리(nissaraṇaṃ)라고 말한다.6)

이 경전은 “무엇이 느낌의 유혹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초선에서 부터 4선의 마음상태를 설명하면서 각각의 선정 상태의 느낌을 유혹(assādaṃ), 위험(ādīnavo), 출리(nissaraṇaṃ)로 나누어 설명하는 경전이다.
4선의 편안하고 악의 없는 느낌은 그 느낌에 집착하게 되므로 유혹(assādaṃ)이라고 표현 했고 그 평안한 느낌도 무상하고 변하는 것이기에 그 느낌에 집착하는 것은 괴로움이라는 것을 느낌의 위험(ādīnavo)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평안한 느낌에서 욕망과 탐욕을 버리는 것이 느낌에서의 출리(nissaraṇaṃ)라고 말하고 있다. 선정의 느낌을 무상하고 둑카고 변화하는 법이라고 표현한다고 해서 이것을 일반적인 과로움이 아니라고 말하거나 무상한 것은 무엇이건 둑카라고 할 근거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무상한 것은 무엇이건 괴로움이다(yadaniccaṃ taṃ dukkhaṃ)”라고 번역한 빠알리 문장에 대한 해석은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 이 문장을 잘못 번역하여 많은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경전에서 발견된다.

비구이여, 물질은 무상하고 무상한 것은 괴롭고 괴로운 것은 실체가 없고 실체가 없는 것은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이와 같이 올바른 지혜로서 여실하게 보아야 한다. 7)

이 경전의 yadaniccaṃ taṃ dukkhaṃ을 무상한 것이면 무엇이건 괴롭다는 방식으로 이해하게 되면 위 경전의 해석은 물질=무상(rūpaṃ bhikkhave, aniccaṃ), 무상=괴로움(yadaniccaṃ taṃ dukkhaṃ). 괴로움=무아(yaṃ dukkhaṃ tadanantā)이라는 말이 되어 물질= 무상= 괴로움= 무아 라는 등식이 성립 할 것이다. 괴로움= 물질, 괴로움= 무상, 괴로움= 무아 라는 등식이 과연 불교인가? 무상과 괴로움이라는 관계는 보다 세심한 해석을 필요로 한다. 무조건 이 단어들을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 해서는 큰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왜냐하면 괴로움이라는 것은 무상과 무아처럼 존재의 속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상하기에 괴로운 것이란 말을 이해 하기 위해서는 삼특상 법문에서 제행무상과 일체개고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한다. 일체개고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이러한 해석 탓에 일체=괴로움이라는 이상한 해석으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무상한 것은 둑카라는 말은 아래와 같은 경전에서 많이 나타난다. 삼특상의 원형이 되는 다음과 같은 경전에서 붓다는 항상 이렇게 묻고 있다.

Bandhasuttaṃ
라훌라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육체는 영원한가 무상한가?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 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8)

이 경전에서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라는 붓다의 물음에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라고 라훌라가 대답할 때
이 괴로움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움”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사람들은 반대로 무상하기 때문에 행복이라고 말한다. 무상하기에 발전이 있고 기쁨이 생겨난다고 말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움이라는 것은 한편으로 치우친 생각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붓다는 무엇을 대상으로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움이라고 하는가 하는 것이다.
붓다가 묻는 대상은 언제나 오온, 6입처, 18계, 6계로 한정 된다. 이러한 대상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나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다. 이것들을 나와 나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들의 무상은 언제나 나에게 괴로움이다. 언제나 무상하다고 말해지는 대상은 질문을 받는 자신, 나라고 혹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해 온 것들을 가리킨다. 나와 나의 것과 아무 상관 없는 것을 가지고 이야기 하고 있다면 라훌라도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고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왜 무상하기에 괴롭다 라고 말하는 것인지 다음 경전을 보자.

비구들이여, 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거룩한 이를 보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 참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물질이 나이고 나의 것이 물질이고 나 가운데 물질이 있고 물질 가운데 내가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 물질은 부수어지고 만다. 그 때문에 그는 불행과 비참함에 떨어진다.9)

이렇게 오온을 나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에게 무상은 나와 나의 것이 파괴되고 소멸됨을 의미한다. 그것은 당연히 나에게 괴로움이 된다. 그 무상함은 인간의 기본적인 기대와 바램과는 어긋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라훌라는 ‘무상한 것은 고통’이라고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그러나 무상함=괴로움이라거나 물질=괴로움이라고 해석 되어서는 아니 된다. 다만 나와 나의 것이 라고 생각해온 물질이 파괴될 때 나에게 괴로움이 생겨 난다는 말이다. 제행개고에서 제행(오온)은 집착의 대상이 되어 괴로움을 생기게 한다는 의미이지 제행=괴로움이란 말이 아니다.
그런데 라훌라스님은 제행개고를 일체=괴로움 이라는 등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는 법구경에서 등장하는 제행무상과 일체개고를 각각

모든 조건 지어진 것은 무상하다. 모든 조건 지어진 것은 둑카이다
(all conditioned things are dukkha.).10)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이해 방식은 조건 지어진 것=괴로움, 오온=둑카, 삼라만물=둑카 라고 해석하게 만든다. 이러한 해석은 괴로움의 소멸은 영영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끝으로 지적해야 할 것은 라훌라스님의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이나 근원은 괴로움 자체 내에 있다는 다음과 같은 말이다.

“여기서 붓다의 가르침 중에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이 있다.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이나 근원은 괴로움 자체 내에 있지 다른 곳에 있지 않다는 사실과 또한 괴로움의 소멸을 가져오는 원인이나 근원도 괴로움 자체 내에 있지 다른 곳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깊이 새기고 명심해야 한다. 이것은 빠알리 경전에서 자주 보이는 어떠한 것이든 생겨난 것은 소멸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라는 구절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11)

이 문장이 나오는 앞뒤 문맥을 살펴 보면 그가 이런 설명을 하는 것은 괴로움을 일으키는 것이 스스로 때문이지 밖의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힘이나 신(GOD)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일어난 괴로움도 역시 발생한 법이기 때문에 무상한 생멸하는 법칙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한 것이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이나 근원은 괴로움 자체 내에 있다(the cause, the germ, of the rising of dukkh is within dukkha itself, and not out side.)” “괴로움의 소멸을 가져오는 원인이나 근원도 괴로움 자체 내에 있다(the cause, the germ, of the cessation of dukkh, of the destruction of dukkh, is also within dukkha itself, and not out side)”라는 표현은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을 표현하는 것으로는 매우 위험한 표현 방식이다. 이러한 표현은 因中有果를 주장하는 외도의 논리를 생각나게 한다.
常見으로 말해지는 因中有果와 短見으로도 말해지는 因中無果를 동시에 배격하고 나온 것이 불교의 연기론이다.
어떻게 괴로움이 발생하는 원인이 괴로움 자체에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괴로움이 소멸하는 원인이 괴로움 자체에 있을 수 있는가?
괴로움이 발생하는 원인이 괴로움 자체에 있다면 그 괴로움은 영원히 변화될 수 없는 괴로움이 될 것이며 괴로움이 소멸하는 원인이 괴로움 자체에 있다면 그 괴로움은 이미 괴로움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 괴로움이 소멸되는 원인이 괴로움 자체 내에 있다는 말은 문장 자체에서 모순을 일으키고 있다.
4성제에서 괴로움의 원인은 갈애로 말해지고 그 괴로움은 8정도를 닦아서 소멸시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이 괴로움 자체내에 있다” 말은 괴로움은 스스로 갈애를 일으키고 “괴로움을 소멸하는 원인이 괴로움 자체내에 있다”는 말은 괴로움은 스스로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갈애가 고의 발생의 원인이고 지혜가 고의 소멸의 원인이라고 말해질 수는 있어도 괴로움 자체내에 갈애와 지혜가 있다는 말은 황당한 이야기이다.
또한 그는 이런 주장을 정당화 하기위해 “어떠한 것이든 생겨난 것은 소멸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yaṃ kiñci samudayadhammaṃ, sabbantaṃ nirodhadhamma")”는 빠알리 문장을 인용하였다.
그러나 이 문장은 일반적으로 예류과를 얻어 법안이 열리고 지혜를 얻은 사람이 법의 속성을 표현한 것으로 경전에 나타난다. 이렇게 법의 속성을 표현하는 문장을 이용하여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이나 근원은 괴로움 자체내에 있다”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삼는 것은 비유의 오류이다.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이 괴로움 자체내에 있다”는 말과 “괴로움을 소멸하는 원인이 괴로움 자체내에 있다”는 말은 법의 속성이 아니다. 괴로움은 이유가 있어서 일어나고 이유가 있어서 소멸한다. 분명 그는 이 책의 다른 곳에서 “괴로움은 탐욕 때문에 일어나고 지혜 때문에 소멸한다.”12)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이나 근원은 괴로움 자체내에 있다” 고 표현하는 것은 이해 할 수 없다. 괴로움은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다음과 같은 경전에서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koṭṭhitasuttaṃ
‘벗이여 꼿티까여, 시각이 형상에 묶인 것도 형상이 시각에 묶인 것도 아닙니다. 그 양자를 조건으로 생겨난 욕망과 탐욕이 있는데 그것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벗이여, 예를 들어 검은 소와 흰 소가 하나의 밧줄이나 멍에 줄에 묶여 있다고 합시다. 누군가 검은 소가 흰 소에 묶여 있다던가 흰 소가 검은 소에 묶여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옳게 말하는 것입니까? 벗이여, 그렇지 않습니다. 벗이여, 검은 소가 흰 소에 묶여 있지 않고 흰 소가 검은 소에 묶여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의 밧줄이나 멍에 줄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거기에 묶여있습니다.’ 13)

‘눈이 형상에 묶인 것도 형상이 시각에 묶인 것도 아니고 그 양자를 조건으로 생겨난 욕망과 탐욕이 있는데 그것에 묶여 있다.’ 그러므로 괴로움은 주관과 대상에서 생겨나는 욕망과 탐욕에서 생겨난다. 눈이나 형상은 무상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그것들이 곧 괴로움은 아니다.
그러므로 라훌라스님이 이해한 것처럼 dukkha에 불안전, 무상, 공, 비실체의 의미를 삽입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것은 “일체는 괴로움이다”라는 명제를 증명하려고 dukkha에 대한 어원 분석을 시도한 결과이다. 일체개고라는 말이 일체= 괴로움이라는 뜻이 아닌데도 일체= 둑카라고 이해하고 그것을 증명하려는 이러한 노력은 불교를 배우려는 순진한 사람들에게 혼란을 가중시켜 왔다. 이러한 명제를 증명하려하기 보다는 경전의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또한 그는 오온과 오취온을 구분하지 않고 오온=오취온이라 말하고 오온=둑카라고 표현 함으로서 많은 혼란을 생겨나게 했다.
경전에서는 5온과 5취온을 분명히 다르게 구분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나는 오온과 오취온에 관해 설하겠다. 잘 들어라.
수행승들이여, 오온이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물질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무엇이든지 이와 같은 것을 물질의 다발이라고 부른다..... 의식의 다발이라고 부른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것들을 오온이라고 부른다.
비구들이여, 오취온이란 어떠한 것인가?
비구들이여, 어떠한 물질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번뇌를 가지고 있고 집착된 것이면 (sāsavaṃ upādāniyaṃ,) 무엇이든지 집착된 물질의 다발이라고 부른다............번뇌를 가지고 있고 집착된 것이면 무엇이든지 집착된 의식의 다발이라고 부른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것을 오취온이라고 부른다.14)

이렇게 분명하게 오온과 오취온을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오온과 오취온을 같은 뜻으로 사용할 때도 있지만 괴로움을 오온과 비교할 때는 구별해서 사용해야 오해가 없게 된다. 범부에게 오온과 오취온은 같은 의미라고 말하며 오온=둑카라고 말하는 것은 옳치 않다. 그렇게 되면 오온 그 자체가 괴로움이 되어 둑카의 소멸은 오온의 소멸(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무상한 것이 그 자체가 괴로움이라면 괴로움의 소멸은 있을 수 없다. 이상으로 라훌라 스님의 고에 대한 이해를 비판 해보았다.

* 이글에 대해 비판할 것이 있다면 언제라도 누구라도 반박을 환영한다.
후박나무 /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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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글 제목: what the buddha taught
전체글올린 게시글: 2016-04-25, (월) 5:11 am 

가입일: 2016-04-10, (일) 12:13 am
전체글: 1
WHAT HISTORY IS BEING TAUGHT TO THE YOUTH?

NONE THAT IS TRUE

BECAUSE THEY RE-WRITE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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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글 제목: what the buddha taught
전체글올린 게시글: 2016-05-05, (목) 12:23 am 

가입일: 2016-04-28, (목) 12:31 am
전체글: 1
Whatever you think you are is a phantasy the conditioned mind adds to perception.

Rather then attempting to affirm what you are, can you tell me on what the question dep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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