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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2015-01-01, (목) 10:13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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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립자론 전공 물리학자 정윤선 박사 특별인터뷰 “힉스입자 발견이 空을 과학적으로 입증했다니…”
12-07-11 미디어붓다/이학종기자

“현대 과학에 대한 지나친 해석-적용 삼가야”

최근 이른바 ‘신의 입자’ 힉스(Higgs)가 발견되었다는 외신보도와 관련, 불교의 공(空)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는 식의 해석이 불교 일각에서 나왔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불교와 과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곤 한다. 물론 이런 관심은 그동안 간헐적으로 불교학자들과 불자과학자들에 의해서 ‘불교와 과학의 관계’를 주제로 한 많은 논문들이 발표되어 온 기존의 학문적 성과들과도 무관하지 않다.

불교경전과 사상이 워낙 방대한 데다 다양한 과학주제가 있다 보니 아직 체계적으로 정립된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아직 있어보지 않은 접근시도라는 점에서 현대물리학의 발전은 불교의 과학성을 확인시켜주는 경우가 많아 무척 반가운 일이다. 이들 연구의 기저에는 많은 경우 공통적으로 “불교는 과학과 양립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 내지는 “불교는 과학적”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증명이 되거나 적어도 설명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단순히 전제될 것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정윤선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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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박사는 현대물리학의 진전을 너무 쉽게 불교진리의 과학적 입증으로 단정하는 경향은 위험하며, 지양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와 관련, 독일에서 현대물리학을 공부한 정윤선 박사는 ‘불교와 과학’을 둘러싼 지나친 해석과 그 적용의 위험성을 줄기차게 지적해왔다. 정 박사는 그동안 <참여불교>, <불교평론> 등에 이와 관련된 유사한 글을 발표해왔다. 이번의 힉스 발견과 관련해서도 불교가 그렇게 흥분할 이유는 없다고 정 박사는 단정한다.

현대물리학의 진전이 발표될 때마다 불교의 심오한 진리가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는 반응이 반복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과학적 근거가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그런 내용을 설법이나 강의에 적용하는 데 대한 위험성과 경솔성, 나아가 불교에 대한 폄훼의 우려가 정 박사가 갖는 답답함이다.

정 박사는 <불교평론> 제40호 기고의 글에서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불교와 과학, 다시말해 불교의 과학성을 설명을 하는 경우에도 많은 경우 제시되는 것이 아인슈타인과 토인비의 인용이다. 아인슈타인이 “현대 과학의 요구에 부합하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곧 불교가 될 것”이라고 했고 토인비는 “불교와 서양의 만남은 20세기의 가장 큰 사건이다”라고 했다는 것인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이들이 이미 수십 년 전에, 그것도 과학적 근거를 제시함이 없이 ‘감’으로 말했다는 점이다.

그런 논리라면, 타문명에 대한 호감을 가진 예로는 조선시대의 정약용선생도 있다. 그가 천주교에 호감을 갖고 있었다고 해서 그가 동양적인 것을 부정하고 천주교가 전부라고 말하지 않은 것처럼 그들의 발언도 상대적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15세기에 이태리의 죠르다노 브루노가 (아마도) 불교의 영향을 받아 수립한 단자론이 수백년 후의 물리학 장이론에 영향을 주었다 하여 갑자기 불교가 모든 것을 다 설명해 낸 것은 아닌 것이다. 그들은 유대-기독교 문화권에서 성장했고 또 유대-기독교 문화권을 풍부하게 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힉스입자로 여겨지는 입자의 존재 발견과 관련한 뉴스가 전해진 며칠 후, 재가연대 사무총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시간을 쪼개 쓰고 있는 정윤선 박사를 장충동 우리함께빌딩 재가연대 사무실에서 만났다. 불교와 과학, 불교와 현대물리학의 연관관계, 그리고 현대물리학의 연구결과에 대한 상식수준의 이해를 설법과 강의에 적용하는 데 대한 위험성 등을 묻기 위해서였다.

다음은 정윤선 박사와의 일문일답이다.

“양자역학의 상보성 원리 이해 못한 채 무리한 적용 많아”

-불교 교리나 불교 교학적인 우월성, 우수성을 설명할 때, 흔히 현대물리학을 인용하는 부분에 대한 정 박사님의 의견을 밝혀 달라?

불교가 과학적이라는 주장을 설명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불교와 과학을 비교할 때 많이 등장하는 것이 인드라망이다. 이는 모든 입자는 ‘열린’ 또는 ‘닫힌 끈’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끈이론’과 ‘초대칭이론’이 결합한 초끈이론과 비교되곤 하는데 인드라망의 실체와는 범주가 다르다.

초끈이론에 따라서 단순화한 입자들의 반응. 입자들은 끈의 모양을 하므로 시간이 흐르며 파이프와 같은 모양으로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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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라망은 자연법칙의 인과관계와 비교되고, 인터넷상의 싸이버스페이스와 비교되는가 하면 심지어는 초끈이론의 멤브레인 개념과도 비교가 된다. 하나도 틀린 것은 없다. 그러나 맞는 것도 없다. 왜냐하면 인드라망과 비교되는 실체들은 범주가 달라 비교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영화 <매트릭스>가 완전히 불교적인 얘기”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너무 폄훼하는 발언이다.

-적지 않은 스님들이 현대물리학, 현대과학을 끌어다가 비유, 인용하곤 하는데, 부처님의 비유와 스님들의 비유는 어떤 식으로 다른가?

현대과학을 비유한 실례로, 고우스님이 한 강연에서 “‘과학은 과학픽션보다 훨씬 더 재미있다’라고 말한 ‘리처드 파인만’은 부처님의 공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얘기했다. 또 “공은 물의 파도와 같다.”고 얘기했는데 비유로써는 괜찮은 비유다. 70% 정도는 맞는 얘기다.

하지만 시골 사찰을 들러 그곳의 스님들과 말씀을 나누다보면 내가 물리학자라는 것을 알고는 “물리학의 일정 부분은 부처님 가르침과 완전히 같다”라고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는 틀린 말이다. 스님들만이 아니다. 일부 과학자들이 말하는 양자역학과 불교에의 접근에도 위험한 부분이 있다.

양자역학의 ‘상보성 원리’는 물질에 입자성과 파동성이 동시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우주 속의 가시적 모든 물체는 파동성과 물질성(입자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 파동성만을 이해하면서 불교의 공의 개념을 갖다 붙여서 얘기한다. 맞지 않는 얘기다.

불교 가르침 중 물리와 가장 많이 관여되는 것이 인연법, 인과성 등인 것 같다. 입자성과 파동성, 이 이중성 때문에 공의 개념이 많이 이야기된다.

또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주변 물체와 상관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인드라망의 복잡한 얽힘과 비교가 되는데, 그들은 상보성원리가 뭔지 잘 모르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흔히 연기법을 설명할 때, 앞서 언급한 상보성의 원리를 모르면서, ‘그냥 홀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얽혀 있는 인드라망’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어떤 문제가 있는가?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사람들이 사이버공간에 살고 있다. 환상의 공간에 살면서 인간의 실체가 부정되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그 인간들이 자신의 실체를 찾고자 노력하는 과정 즉 반체제운동을 하는 것을 보여준다.

<매트릭스>를 거론하며 이야기 하는 분들처럼 사이버공간 자체를 불교 가르침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인간의 실체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한 인간의 실체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의 철학을 인드라망과 비교한다고 해도 거기서는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그 이중적인 문제에 대한 철저한 숙고 없이 인드라망이라는 개념을 평면적인 관계도로만 해석하고 실제 인간사회에 적용했을 때는 전 우주적인 실체에 대한 파악이 불가능해진다.

<매트릭스>와 같이 사이버 공간과 인터넷을 통해서만 인드라망 개념을 설명하려고 한다면 인간의 업에 의한, 전 우주적인 관계를 너무나 단순화, 평면화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형상에 불과한, 우리가 지양해야하는 인간관계를 우상화시킬 수 있는 우를 범하게 된다. 인드라망, 즉 내가 하는 모든 행위에 대한 나의 책임, 우주적인 연관성을 기계적인 메커니즘으로만 환원시켜버리는 것이다.

“힉스입자의 발견을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건 아전인수”

-힉스입자가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있은 후 불교계 일각에서는 공의 개념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있었다. 과학적으로 맞는 것인가?

1920년대 양자역학에 이어 원자물리학,1940~50년대의 핵물리학 발달에 이어 등장한 것이 소립자론이다. 소립자론은 아무리 연구해도 폭탄이 나오는 학문이 아니라서 사양길에 접어들게 되었지만 지금도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최근 각광받는 힉스는 소립자론에서 거론되는 물질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물리학에서 가치가 같다는 말은 양이 같다는 말이다. 물리학의 가치에서는 주관적인 가치가 있을 수 없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다 같다는 전제하에, 주관이 배제된다.

질량이 에너지로 바뀌는 과정에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된다. 핵분열 폭탄, 핵융합 폭탄 등도 질량 감소에 따른 에너지 방출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1960~70년대 물리학에서 안 풀리는 문제들이 있었다. 양자역학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이론적 결함이다. 입자의 질량과 크기가 모두 없다고, ‘0’이라 놓고 풀면 쉽게 풀리지만, 특수케이스에서는 수학적으로 불가능한 해가 나오기도 한 것이다.

또 하나 문제는 엄청나게 많은 입자들이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실험을 하다보면 입자가 굉장히 많이 나오는데, 그 입자들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많은 이론들이 나온다. 그러나 대부분 신통치 않다. 왜 전자는 가볍고, 왜 쿼크(입자)는 전자의 삼백배정도 질량을 가지고 있는지와 같은 문제가 설명 되지 않는 것이다.

이 같은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모델이 나오는데, 가장 적합한 모델을 스탠다드모델(표준 모델)이라 칭한다. 표준 모델에서는 쿼크와 다른 입자, 전자, 전 세계에 존재하는 네 가지 힘(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이 있는데, 이 네 가지를 통합하려는 것이 물리학자들의 꿈이다.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서 힉스 입자라는 가설을 세웠다. 가설을 세우면 정확하게 숫자가 나오지는 않지만, 힉스 입자가 있음으로 전자나 쿼크나 다른 입자들의 질량이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당시 과학자들은 힉스 입자가 다른 것에 비해 큰 것은 알았지만 얼마나 큰지는 몰랐다. 이런 것들을 알기 위해 총 둘레 27Km, 반경 4Km, 직경 8Km, 땅 밑으로 100M, 내부 직경 3M인 터널 등 엄청나게 큰 실험 단지를 조성했다. 당시 설비 약 10조원을 들여 실험을 해서 찾은 것이 아마도 이번에 힉스입자로 추정되는 입자라고 볼 수 있다. 다른 입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니 수개월에서 몇 년 동안 철저한 조사가 더 있어야 한다.

시엠에스(CMS) 실험에서 양성자-양성자 충돌로 고에너지의 광자 2개를 만들어 내는 모습의 가상도 (사진 출처=CE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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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 입자’, 즉 힉스를 발견했다는 것에 대해 불교계가 올바른 반응을 한 것인가?

이번의 발표를 긍정적으로 보자면 정확도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후에 세부적 검증 후 그 입자가 힉스 입자로 확인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만유인력법칙도 초기에는 정확하지 않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아주 세부적인 검증을 받게 된 것처럼.

반면 힉스 입자라 하더라도 ‘신의 입자’라고 하는 것은 과장된 위험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론을 설명해주는 가설을 완성시켜주는 것만으로도 과학자 입장에서는 즐거운 일이었을 것이고, 서구 입장(유일신)에서 ‘신이 준 입자’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반은 장난처럼, 반은 소망을 담고 있는 과학자의 욕구인 것이다.

더욱이 힉스 입자는 어떤 종교를 가지고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불교도 기독교도, 우리 하나님 말씀이 맞아서 이런 입자가 있다던가, 불교의 공사상에 입각해서 예언을 할 수 있다던가하는 식의 아전인수 격의 해석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물리학이 서구에서 발달한 학문이란 걸 잊으면 안 된다.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할 여지가 없다.

물리학자 입장에서 힉스 입자를 예언하게 된 배경은 ‘진공’과 ‘대칭성의 임의적 깨짐’이다. ‘대칭성의 임의석 깨짐’은 중세 신부의 ‘염소의 옆에 똑같은 양의 풀이 똑같을 거리에 놓여있는데, 염소가 왼쪽 것을 먹기로 결정할 때 그 대칭성이 깨진다’는 생각에서 발생했다. 역사는, 우주는 대칭성으로 이루어졌는데, 양전자보다 전자가 더 많다는 대칭의 깨짐에 의해서 돌아간다. 진공 역시 그리스 시대에 원자론자(있다)와 아리스토텔레스(없다)학파의 첨예한 대립이 있었다.

그리고 진공이라는 개념은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공의 개념과는 굉장히 다르다. 만약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우주 진리 이상의 모든 것이 지금 단계의 물리적인 단계, 개념이라면, 지금 수준의 물리학을 부처님 깨달음의 단계와 대응시키는 것은 부처님에 대한 모욕이다. 우리가 고작 그것을 알겠다고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남들이 해놓은 것 노력 없이 말로만 끌어들여서 되겠나”

-불자인 몇몇 과학자들은 불교와 과학의 관계를 다룬 책을 출간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불교=과학’이라는 막연한 등식을 교계 안에서 만들었을 수도 있다고 본다. 이 점에 대한 물리학자로서 박사님의 견해는 어떤 것인가?

물론 종교에서 과학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받을 수는 있을 것이다. 1960년대 겔만이라는 사람이 ‘표준모델 중에서 그룹론(SU(2))’을 불교 팔정도의 숫자 8에서 착안했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그런 ‘착안’은 성경, 불경, 인류문화유산 어느 것을 보고도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는 집적된 지성의 사회에 살기 때문이다.

어떤 물리학자가 부처님 가르침 중에서 과학적 아이디어 따올 수 없을까 생각해 개인적인 욕심을 채울 수는 있지만 그것이 구도의 자세는 아닌 것이다.

또한 곧 새로운 과학 이론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올 것인데, 그때 가서는 뭐라고 말할 것인가? 물리학적으로 발견되는 현상마다 부처님 말씀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일관되게, 부처님이 2500년 전에 말씀하신 것으로 2000년간의 물리학의 발달을 모두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은가. 그럴 수 없다면 현대과학이 부처님 말씀 안에 다 있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중국의 태극 이론이 양자역학의 상보성 원리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중국이 상보성 원리를 2000년 전에 이미 발견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현대의 물리를 부처님이 이미 다 깨쳤다고 하는 것은 아전인수 격이다. 인간과 인류, 그리고 동서양간의 문화․과학적 교류의 역사를 무시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가르쳐주셨다고 말하고 싶은 자랑스러운 것들이(현대 물리학) 서구 기독교 문화에서 발달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배워야하는 점이고 부처님의 인드라망의 개념이다.

현대 물리에서 나오는 부수적인 몇 가지 현상을 인드라망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부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물론 부처님이 오온의 개념을 쉽게 설명한 것처럼 공의 개념을 파도로 비유해서 설명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파도로 설명할 때는 양자역학이니 하는 개념이 필요 없다. 그냥 바다에 물결이 치는 것이다. 바다는 바다고 물결은 물결이니까 설명하는 것이지 현대 물리와는 상관이 없다.

-현대물리학에서 말하는 진공과 불교에서 말하는 공의 개념에 대한 혼선이 있는 것 같다. 이에 대한 차이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양자역학의 진공 개념은 서양 그리스 철학의 전통으로 지금까지 양립, 토론하며 이어져오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원자론자들의 토론과 파스칼의 진공 실험 등도 실은 공간이, 신의 영성으로 충만한 공간이라는 기독교 개념에서 시작된 것이다. 도그마에 빠진 성경 이론의 빈약함을 설명하다보니 오히려 물리학이 발달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폭넓은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서 편안하게 살았기 때문에 물리학이 서양처럼 발달하지 않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근대 이후 서구에서 일어난 과학자와 기독교와 갈등은 ‘신을 전제하지 않으려는 과학자’와 ‘신을 전제하고 싶은 종교’가 부딪친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전제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부처님 말씀 중 가장 과학적인 말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방편을 통해 오온을 설명할 때, 당시로써는 상당히 과학적인 말이었지만 그 말로써 현대의 과학을 설명한 것은 아니다.

11세기, ‘이븐 알 할런’이라는 아랍 사람은 “진리를 찾는 것은 그 자체로서만 의미가 있다. 진리를 찾는 사람은 그 외에 어떤 것에도 귀를 기울이면 안 된다. 진리의 길은 험난하다.”라고 말했다. 이는 가히 부처님 말씀이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확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불자의 자세도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대 과학에 불자들이 직접적으로 참여할 때 과학과 불교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지, 남이 해놓은 것을 노력 없이 말로만 끌어들이는 것은 아무리 유명하신 분들이라도 허용될 수 없다고 본다.

인연이 만들어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인드라망이 아니라, 과학의 발전 속에 우리가 끼어들어 주체적으로 만들어갈 때 이 우주 속에 우리의 존재를 찾아갈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인드라망이지 않겠는가.

“신학자들의 부단한 노력이 20세기 과학 낳았다는 것 상기해야”

-불교가 현대과학, 특히 우주의 생성 원리를 규명하고자 하는 분야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나.

불경에 나오는 십사무기(十四無記)를 기억해 보자. 부처님께서는 문제의 본질을 파악 못하고 형이상학적 문제에 매달려 있는 만동자를 꾸짖으신다. 그러나 그가 나름대로 이해하려고 하나씩 문제를 풀어갔다면, 그러면서 부처님께 도움을 청했다면, 그래도 부처님께서 꾸짖기만 하셨을까? 새로운 시대의 과학을 열기 위해서는 만동자식의 질문으로 결국은 ‘무기(無記)’로 끝날 것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것을 찾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불교에는 ‘6000년 지구역사’ 같은 ‘경솔’한 주장은 없다. 그런 면에서 부처님의 판정승이다. 그러나 그런 사실에 안주하기보다는, 중세와 르네상스시대에 ‘틀린’ 창조론을 ‘맞게’ 설명해 보려는 신학자들의 부단한 노력에서 20세기 과학이 나올 수 있었음을, 사실 종교와는 상관이 없었음을, 그리고 그 것이 인드라망임을 상기해야 한다.

늘 열린 자세로 진리를 찾아 가며, 종교적 사회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과학자들의 진지한 자세는 부처님도 칭찬할 것이다. 그런데 현재까지 과학자들이 발견해 낸 물질과 우주에 관한 지식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할까? 인간이 과학자로서 자연을 연구하는 데 있어 명확한 한계가 있다. 눈에 보이는 부분만 연구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가시광선 부분만을 볼 수 있는 ‘좁은 범위의 눈’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미시세계의 관찰을 위해서는 나노현미경을, 거시적인 세계의 관측을 위해서는 허블망원경을 제작하여 이용하는 ‘넓은 범위의 눈’을 말하고 있다. 그래도 인간의 관측이 갖는 한계는 빛이 전달해 주는 정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 안에도 빛의 전달이 어려워 우리가 영원히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으니 하물며 이 우주의 바깥은 또는 새로이 생성될지 모르는 다른 우주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주의 생성’을, 또 물질의 미시구조를 얘기하는 과학자들이 부처님이 보기에 대견하기도 하고 자아의 껍질을 깨지 못 하는, 그럼으로써 그 한계 이상은 보지 못 하는 중생이 자못 안타깝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정진하는 과학자들의 연구 자세는 깨달음을 향해 가는 ‘뗏목’임을 말하며 용기를 줄 것 같다. 과학자들의 과학적 자세는 어떤 종교나 가르침에서도 독립되어야 한다고도 가르칠 것이다.

-불교와 과학을 비교한다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종교와 과학을 비교하는 것은, 그리고 거기서 특정한 명제를 도출하는 것은 자칫 독선과 기만으로 빠질 수 있다는 위험부담을 안고 있다. 기독교 구약성서에 나오는 창조관과 과학을 연결시키려 하는 창조과학이나 지적설계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불자과학자들도 자신들이 얻은 과학지식과 불교의 가르침을 연결해 보고자 조심스럽게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이들이 불교의 가르침을 전제로 하여 과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창조과학류의 주장과는 처음부터 구별된다.

이들 중에도 과학자로 출발하여 불교와의 접목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자연과학의 어떤 구체적인 발견이 불교철학의 어떤 특정한 부분을 입증하는 것으로 성급하게 결론짓는 것은 삼가해야 한다”라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는 반면(박광서 2004), 철학에서 출발하는 사람들의 경우 “불교는 과학의 발전에 의해 발견될 수 있는 미래의 과학을 종교적 진리 속에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확증할 수 있다”라고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경우도 있음을 관찰할 수가 있다(소흥렬 2004). 아무리 주의를 한다 해도 불자 과학자들이 하는 주장에는 아전인수격의 해석이 들어갈 수 있는 소지는 분명히 있다. 나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나 과학과 종교의 역할을 구분하려는 노력은 하고 있다.

“과학이론의 검증성과 임시성에서 종교와 과학의 차이 드러나”

-종교와 과학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기독교의 가르침은 근세 이후 과학과의 충돌을 거듭해 왔다. 16세기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캐톨릭의 갈등부터 시작하여 진화론과의 갈등, 최근에 지구역사 6000년을 주장하는 창조과학과 40억년의 지구나이를 관찰한 지질학의 관계가 그렇다. 이에 반해 불교의 가르침은 과학의 이론 중 많은 부분을 포용하고 있음이 20세기 이후 현대물리학이 발전하면서 확인되고 있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 발전하며 기존의 물질과 우주에 대한 인식들이 변화하면서 많이 비교되고 있다. 몇 가지 예를 정리해 보자.

▲과학의 인과원칙(causality)과 불교의 연기론적 세계관 ▲양자역학에서 물질이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동시에 가지며 측정방식에 따라 변화한다는 상보성원리와 무아(無我)의 가르침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에서 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의 절대성 부정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한정된 공간과 한정된 시간을 갖고 있으나 더 많은 우주가 생성될 수 있다는 이론과 불교의 ‘많은 세계’ 이론 ▲나비 한 마리의 날개짓이 수천만 리 떨어진 다른 곳에 폭풍우를 몰고 올 수 있다는 소위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나 부분이 전체를 닮는 자기 유사성(self-similarity)이나 소수(小數)차원을 특징으로 갖는 형상을 얘기하는 프랙탈이론과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을 얘기하는 화엄사상의 유사성 등 하나하나 거론하기도 어려울 만큼 얼마든지 예를 들 수 있다.

과학자들에게 과학적 이론이란 모순 없는 일관성. 최소화된 설명을 전제로 하는 경제성, 유용성, 경험적 검증성, 새로운 발견에 대한 유동성, 이전의 이론과 모순이 없는 새로운 이론의 진보성, 개선될 가능성을 늘 갖고 있어야 한다는 임시성 등을 가진 것이다. 가설이나 억측이라도 위의 조건들을 어느 정도 갖추었으면 과학이론이 될 수 있다.

종교와 과학의 차이는 과학이론의 검증성과 임시성에서 제일 잘 나타난다. 어떠한 우수한 과학이론이라도 새로운 사실이 관측에 의해 발견될 때 가차 없이 수정될 수 있다는 것은 종교 가르침과의 차이이다. 특수한 종교적 체험이 실험에 의해 재현될 수 없다는 것도 종교의 영역이 과학의 영역과는 구별됨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타 종교에 비해 불교에서는 전통이나 교리의 가르침, 또는 주어진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과학자들의 연구 자세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가 과학적이다”라는 주장은 상대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불교와 과학을 비교할 때 많이 등장하는 예로 인드라망의 개념이 있다.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인드라망은 자연법칙의 인과관계와 비교되고, 인터넷상의 싸이버스페이스와 비교되는가 하면 심지어는 ‘초끈이론’의 멤브레인 개념과도 비교가 된다. 그러나 인드라망과 비교되는 실체들은 범주가 달라 비교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인드라망의 전모를 밝히기에는 불충분하다. 오히려 과학의 역사적, 지역적 발전상을 인드라망과 비교하여 이슬람교나 기독교가 근대과학발전의 사회적 기반을 마련했던 것에 비해 불교는 그렇지 못 했음을 반성하는 것이 현실적 도움을 주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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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선 박사는?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석사·박사학위(소립자론과 천체물리학 전공)를 취득했다. 프랑크푸르트와 베를린에서 사회학과 철학을 수학했으며 하이델베르크대학과 베를린 막스플랑크연구소에서 물리학과 과학사(물리학개념사)에 관해 연구․강의했다. 현재는 참여불교재가연대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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