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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5-03-20, (금) 12:06 pm 

가입일: 2015-01-01, (목) 10:22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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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과 답변(혜천스님 강론)

문: 윤회에서 인간은 인간으로 윤회되나요? 아니면 다른 것, 동물이나 다른 생물체로도 태어나나요?

답: 불교교리에 보면 당연히 그렇죠. 반드시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보장이 없죠. (그렇다면 아까 불살생하지 않고는 살수가 없다고 그랬는데, 나비는 살생을 하지 않으니 선업을 쌓아 다음 생에 더 나은 내생으로 태어나나요?) 나비로 태어나면요? 그렇겠죠.
우리가 보통 6도 윤회를 한다고 그러니까. 천상, 인간, 아수라, 지옥, 아귀, 축생. 뭐 그것 뿐만이겠어요. 수가 없을 정도지요. 원해서 선택해서 태어날 수 있다면, 뭐 굳이 윤회라고 자시고 할 것도 없겠죠. 윤회라고 하는 것은 자유의지가 박탈된 거니까요.

문: 불살생이 선업이어서 윤회에 영향을 미친다면, 옷을 벗고 다니고, 심지어 불살생을 실천하기 위해 물주전자와 솔을 들고 다니는 자이나교가 불교보다는 불교보다 더 실천적이지 않나요?

답: 기본적으로요. 인도에서는 초기에는 바라문들 같은 경우에는 희생제라 그래서- 많은 동물을 죽여서 신에게 공물을 올렸지만, 어느 시기가 지나며는 바라문들이나 그걸 비난하는 일파들이 생기기 시작하죠. 그러면서 철저하게 불살생의 가치를 내세우는 집단들이 많이 생기죠.
지금도 힌두교 일파 중에는 희생제를 치르기도 하지만, 또 지금도 힌두교도들 중에서도 불살생의 가치를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경우도 있죠.
근데 붓다는 그걸 또 비난하걸랑요. 살생이라는 것은 내가 의지를 가지고 죽이는 것을 전제로 하니까요. 내가 죽인단 말이죠.

문: 스님께서 일전에 불살생을 말하면서, 살생이 업에 작용할려면 살생의 의도가 중요하다 하였는데, 그래서 저는 그 이후론 집안에 개미가 돌아다녀도, 개미가 있으면 바퀴벌레가 없다는 이야기도 있고해서, 그 전 같으면 먹다남은 요플레 통을 화분 옆에 두고 개미를 유인해 죽이곤 했는데, 이제는 개미를 의도해 죽이지 않으려고 화장실에서 물로 쓸어내리는데, 괜찮은 방법입니까?

답: 네, 조금 전의 문혜선우가 한 얘기는 업의 성립이 되느냐, 안되느냐의 얘기예요. 예를 들면 내가 길을 가다가 개미를 밟아 죽였을 경우는 이거는 업이 성립이 안돼요.

문: 그럼 농사 짓기 위해 밭을 일구다 지렁이를 죽이면요?

답: 그거는 삽이나 이런 걸로 팠으니까 의도가 있는 거예요. 왜 그러냐면, 그건 거기 있는 줄 알고 판거걸랑. 우리가 의도가 있느냐 없느냐는 것은 이렇게 보면 돼요. 내가 산을 오르다가 돌이 굴렀잖아요? 내가 밟았는데, 돌이 굴렀어요. 근데 그 돌이 굴러가서 의도가 없었는데, 예를 들면 뛰어가던 다람쥐가 맞아 죽었다. 이건 업이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예요.

문: 그런데 의도하지 않았는데, 교통사고로 상대방을 죽게 했을 때 왜 처벌을 받나요!?

답: 그건 현실에서 법적으로다 죄를 받는게 당연하죠. 그건 현실의 법이죠. 업이라는 것은 현실의 법이 아니에요. 그건 업이 성립 안돼요. 업에서는 성립이 안돼요. 왜 그러냐면, 업은 의도가 있어야 되걸랑요. 내가 저 사람을 차로 받는다는 의도가 있어야 돼요. 아, 그럼요. 그건 현실의 법이죠. 그건 업의 문제가 아니에요. 현실적으로 사회규약이죠. 공동체의 규약. 사실 윤회, 업, 행, 이건 사실 굉장히 복잡한 이론이에요. 굉장히 치밀하고요. 2,500년간 논쟁했는데, 아직 정리를 못했어요.

문: 그렇다면 사자는 살생을 해도 괜찮다는 것인가요?

답 : 아 네, 사자는 없어요. 대신 사자는 정말 분명하죠. 정확히 한번에 물어서 죽이죠. 인간처럼 몇 번 망치로 두드리는 짓은 안해요, 사자는. 단숨에 목줄을 끊죠.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사자의 덕이라 그러죠. 사자에게 덕이 있는데, 그것은 짐승을 사냥할 때는 단숨에 숨을 끊는다는 거예요. 걔네들은 인간처럼 사지를 절단하고, 찢고 하는 그런 잔인한 짓은 안 해요. 바로 목숨을 끊어놓지요.

문: 개개인이 살아가면서 자기가 쌓아놓은 행적이 업이 되고, 그게 다음 생을 결정짓는다는 것을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지 않는 곳에 태어난다면, 이를 윤회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요? 예를 들어 누가 가난하고 불평등한 아프리카에서 태어나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적으로 개인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누구는 그런 곳에 태어나게 되는데, 개인의 업이 작용했다고 볼 수 없는 것 아닌가요?

답: 불평등이라고 하는 문제가, 붓다도 그런 표현을 붓다도 그런 부분을 많이 이야기하는데, 대반열반경이라고하는 경전이 있어요. 그것은 붓다의 마지막 자취를 기록한 경전인데, 거기에 보며는 왕이 갖춰야될 덕으로 4가지를 드는데, 그 마지막이 뭐냐하면, 왕은 백성들에게 공평하게 물질을 나눠야 된다고 이야기해요. 평등하게. 그게 왕이 갖춰야할 덕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인간 세계의 불평등 문제를 현대인들은 시스템이나 제도로서 정비할려고 자꾸 그러죠. 근데 어떤 제도와 시스템도 인간의 불평등은 해결해주지 못해요. 그러면 그 불평등은 누가 해결 할 수 있나요? 오직 인간의 의식이 변해야지만 가능하죠. 인간의 불평등은 실제로 제도나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의식의 문제예요. 나누려고 하는 의식이 있으면, 그런 불평등의 문제는 생기기 않걸랑요.
결국은 우리가 복지국가로서 북구라파, 핀란드나 노르웨이나 스웨덴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사람이 사회적인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제도와 시스템 이전에 그건 사회적으로 합의한 거예요. 이렇게 하자.
어떤 분들은 이렇게 주장하죠. 우리나라 무료의료 가능하다는 거예요. 각자가 의료비를 좀 더 부담할 수 있으면. 각자가 15,000원에서 20,000원 정도만 더 부담하면, 우리나라 무료 의료 시스템으로 갈 수 있다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그럴 용기가 없걸랑요. 사회불평등은 인간의식의 문제예요.
결국은 붓다가 우리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제도와 시스템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바꾸라는 거예요. 실질적으로 내가 일요강론에서도 내가 이야기하는 요지는 그거예요. 다른 거 아니에요. 생각을 바꾸라는 거예요.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우리는 항상 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어요.
내가 뭐 하도 많이 이야기해서 맨날 똑같은 이야기 한다, 이런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는 이야기지만 인간은 자기 생각을 못 벗어나요. 어떤 인간도 자기 생각 못 벗어나요. 왜 못 벗어나느냐? 그게 인간의 한계거든. 결국 그 틀을 벗어나지 않는 한, 의식의 전환, 깨달음이라고 하는 게 뭐예요? 의식의 전환이예요.
모든 사람이 아트만이 있다고 믿을 때, 붓다가 보리수 하에서 보니까 아트만이라고 하는 영원불변하고, 영원불멸하는 아트만이라고 하는 건 없다, 그거 아닌가요? 그러니까 모든 자의식이 해체되게 되고.
우리는 백인이 부자인 것이 부럽죠. 그런데 백인이 그 부를 이루기 위해서 전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여서 그 부를 획득했는가는 생각을 안해요, 우리는. 인간은 굉장히 이율배반적이예요.
동네 건달이 나를 때리면요, 굉장히 화나요. 그리고 비난해요. 그러나 징기스칸이 말을 타고 밟으면, 모든 인간들이 무릎을 꿇죠. 영웅이라 그러죠, 그를. 어떤 역사학자는 말하죠. 인간 역사상 징기스칸보다 많은 인간을 죽인 사람은 없다고. 왜냐면, 징기스칸은 도시를 정복하면 도시 자체를 다 없애버렸으니까요. 근데 우리는 그를 영웅이라고 추앙하잖아요.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광개토왕이라고 하는 것도 그런 사람 아닌가요, 결국은. 6진을 개척했다고 하는 김종서도 여진족을 다 죽이고, 여진족 땅을 뺏은 것 아니예요. 우리는 거기에 환호하는 거예요. 일본이 36년간 짓밟은 것은 그렇게 화를 내면서. 조선조 천민들은 거의 여진족 출신이었어요, 가계가. 이성계가 이용해 먹고 버렸죠. 이성계의 사병이 5만이었는데, 2만 5천은 여진족이었어요. 근데 이성계는 권력을 잡자 그들을 버렸죠. 그들이 다 백정이 되었어요. 원래 백정이란 말은 고려시대 때 일반 백성을 지칭하는 말이었어요. 근데 그들이 다 그 일을 하니까, 백정 자체가 천민이 되어 버렸죠.

문: 시스템과 제도보다 인간의 의식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예를 든 북구라파의 나라 사람들과 우리의 의식이 다를게 뭐 있겠습니까? 결국 제도가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강제하게 되면 의식이 생겨나는 건 아닌가요?

답: 그게(인간의 의식) 먼저 와야 된다는 거지요.

문: 사실 제가 질문하려는 건 그게 아니고요. 제가 알기로는 스리랑카에서는 비구가 아라한이 되는 것에 대한 논쟁에서 몽정을 한자도 아라한이 될 수 있느냐의 문제로 대중부와 상좌부로 분열되었다고 알고 있는데요. (스님께서 인도에서라고 정정) 스님께선 무아라고 하는 것은 자의식의 해체인데, 이 무아가 체현되는 것이 아라한이다. 즉 무아란 나, 나의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윤회의 주체는 자의식이다. 자의식은 나라고 하는 의식이고, 이 자의식의 해체가 무아이다. 그런데 나는 왜 사는가? 즉 인간에게 생존의 욕구는 무엇인가? 생존의 목적은 나를 복제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성욕이 일어나야 2세도 낳고 하는 것인데, 몽정의 논쟁에서처럼 불교는 성욕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는 건 아닌가요? 그리고 상가의 비구들은 결국 이런 성욕의 결과로 일반 사회의 사람들 중에서 충원되는데, 모순 아닌가요? 차라리 브라만교에서처럼 가정을 꾸리고 살다가 늙은 후에 특정한 시기에, 유행기로서 수행자가 되는 것이 더 합당한 논리가 아닐런지요?

답: 아니, 아니 그게 가장 좋죠. 결국 그런 부분들은 부처님 이전부터 출가 수행자들의 윤리 도덕이었어요. 그 부분은. 사실 불교에서 말하는 계라는 것도, 부처님이 처음에 계를 정하지 않은 이유는 그 당시에는 불교수행자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출가 수행자들은 그 당시에 다 지켜야할 윤리도덕이예요. 그러니깐, 내 문혜선우가 얘기하는 것의 요지를 이해를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2,500년전의 그 당시의 이야기예요. 그러니 현실은 현실이고, 또 다른 문제겠죠.
그 당시에는-, 사회적으로. 루소가 사회계약설을 얘기했잖아요. 그 당시에 보면 암묵적인 것이 사회계약이예요. 어떤 사회계약이냐면, 가정 생활하는 사람들은 물질을 출가수행자들에게 공급해주는 거예요. 그게 내 가족일 수도 있고. 미얀마에서 출가하려면, 반드시 후원자가 있어야 돼요. 후원자가 없으면, 계를 받을 수가 없어요. 결국은 그 후원자가 누구예요? 가족이에요. 그 비구가 일생에 쓸 것을 후원해야 되는데, 그 후원자가 없으면 계 안 줘요. 한국 스님들은 가도 후원자가 없어요. 한국의 비구였기 때문에 굳이 후원자를 거론 안해요. 그러나 서양사람들이 비구의 계를 받을려면 사찰에서 반드시 후원자를 정해 줘요. 후원자가 없으면 안돼요, 법적으로.
그러면 출가수행자들은 사회생활 하는 사람들이 물질적인 공급을 해주기 때문에 그들에게 뭔가 정신적으로 충족해 줘야 돼요. 그럴려면 그게 뭐예요? 이 세상에요, 내가 강론에서도 가끔 얘기했지만, 증여는 공짜가 없어요. 증여는 붓다의 증여만 공짜예요. 그 나머진 다 있어요. 출가수행자는 사회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을 지켜야 돼요. 그것이 뭐냐며는 사회 사람은 하지마는 출가자에 대해선, 사회사람들이 하는 걸 다하면 안돼요. 술 먹어도 안되고, 결혼해도 안되고. 아까 얘기 했잖아요. 비구는 과일 나무 아래 과일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주지 않으면 먹으면 안 돼요. 누군가가 나에게 먹으라고 갔다 줬다? 요거 유효 기간이 언제인 줄 아세요? 밤 자정이 넘어가면, 이거 유효기간이 없어요. 그거 먹으면 안 돼요. 내가 받아 왔어도, 24시간 자정이 지나면 그건 무효야. 누군가가 다시 주워 주지 않으면 못 먹어, 먹어서는 안돼.
그러니깐, 사실 현대 한국 불교를 봐서 그러는데, 부처님 당시에 다른 수행자들은요, 엄청난 어떤 지켜야 될 것이 많았어요. 지붕 밑에 들어가서 자면 안 돼요. 나무 밑이나 동굴 속에나 바위 밑에서. 그래서 부처님이 죽림정사라고 하는 절을 빔비사라왕한테 기증받고, 그 죽림원에 원두막 같은 것을 지어서 비구들이 거주를 했을 때, 붓다 이외의 외도 수행자들이 뭐라고 불렀는지 아세요? 저 사깃꾼들. 왜 사기꾼인 줄 아세요? 수행자가 원두막이라고 하는 지붕밑에 들어가 있으니까 수행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저 사기꾼들. 자이나교에서도 격렬하게 비난했어요. 근데 나중에 자이나교는 그걸 받아들여서 정주하죠.
가장 재미있는 것은 지붕 밑에 들어간 집단만 현재까지 살아 남았다는 거예요. 그걸 비난했던 아지비카교 등은 다 없어 졌어요. 문혜선우가 지적하는 부분들은, 그거는 현실적인 이야기죠. 문혜선우가 지적한 것은 바로 중국의 선비들이 지적한 거예요. 조선의 선비들이 지적하고. 영원히 그 문제에 대해서는 종교는 답을 주지 못해요. 왜 그러냐면 종교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회에 기생하걸랑요. 사회의 지원이 없으면 존재하지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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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 아하! 우리 헌수님이 의근이라고 하는 말에 자꾸 그거해서 그러는데, 의근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 따로 분리해 놓고 있지마는 안근과 의근은 함께 움직여요.... 이 부분 같은 경우는 심법에 속하기 때문에 색법에 속하는 것처럼 명확하게 파악되는게 아니죠. 실제적으로 수행의 도상에서 대상을 느끼면서 안구의 움직임을 보고, 느낀다 말이이예요. 느끼면서 동시에 마음의 작용을 봐야만 이건 알 수 있어요. 뭐, 그거는 정말 말로써는 설명이 어렵죠. 이것이 계분별관인 이유가 그래서 그런 거예요. 다른 분은?

답 : 18계는 오온이 확장된 거라고 보면 맞아요.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면 맞아요.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은 색에 속하는 거예요, 색이고. 의근과 육식은 심에 속해요. 우리가 수상행식이라고 하다 보니까 그런데, 12연기에서는 이거를 명색이라고 그래 버리죠. 몸과 마음, 딱 짤라 간단하게 해버리죠.

답 : 심의식이 동의어라고 하는 것은 부파불교 시대의 주장인데, 우리가 심이라고 할 때와, 마노라고 할 때와, 윈냐나라고 할 때는 약간의 차이는 있죠, 사실. 우리가 심이라고 할 때는 전체를 포괄한다고 보면 맞고, 마노라고 할 때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의식이라고 할 때는 전체를 포괄하지만, 그냥 식이라고 할 때는 전체를 포괄하지는 않죠. 근데 또 어떤 문제가 있냐하면 대승불교의 유식학파에서는 식을 마음의 의미라고 써요. 오직 마음뿐이다.

답 : 그 부분은 사실 12연기에서 나와야할 부분인데, 불교의 교리변천사라고 하는 거는 유아라는 말을 쓰지 않고, 어떻게 자아를 인정하느냐 하는 쪽으로 갔다고 보면 맞아요. 이거는 굉장히 복잡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결국은 유식에 이어서 아뢰야식(阿賴耶識) 식이라 하는 것도, 아뢰아식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장식이라고 하는 뜻이니까, 그래서 여래장의 장도, 다 저장한다고 하는 의미거든요, 저장한다. 함장식(含藏識), 즉 종자라고 하는 뜻이죠. 거기까지 가면 이야기가 굉장히 복잡해지죠. 12연기에서 그 부분은 다시 한번 이야기 하지요.

답 : 부처님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모든 것은 나와 대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거예요. 나와 대상. 18계라는 건 나와 대상, 단순화시키면 나와 대상이라는 얘기걸랑요. 나와 대상은 연기의 관계라는 거.
연기라고 하는 말, 빠띠띠야 사무빠따라고 하는 말은 무엇으로 인해서 무엇이 일어나고, 무엇이 생하고, 무엇이 소멸하고, 무엇이 있게 되고, 무엇이 없게 되고 그런 의미거든요.
그러니까 나와 대상은 어떤 관계예요? 서로가 상호관계 속에 있는 거지요. 대상이 없는 나라고 하는 건 어떤 의미에요? 존재할 수가 없어요. 대상이 있어야 내가 존재해요. 대상이라고 하는 거는 나 이외의 모든 우주 만법은 다 대상이예요. 이 우주도, 지구도 다 대상이예요, 불교에서 보면. 그러니까 대상이 없으면 나는 존재할 수가 없죠. 대상과 나는 유기적 관계예요. 우리는 엄격히 말하며는 지구에 기생하고 있잖아요. 우린 철저히 의존하는 관계예요. 외부에서 에너지가 공급되지 않으며는 살 수도 없고. 안 먹고 사는 사람 있어요? 없잖아요.

답 : 쌍카라가 행이니까. 부파불교 시대 때는 이거를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라고 그래요. 무명과 행을 과거로 보고, 식에서 생까지를 현재로 보고, 여기 노사라는 말이 나오지마는 노는 여기 사실 있을 필요가 없어요. 사는 내세란 말이예요. 그래 삼세양중인과인데, 무명에서 행이 형성되고, 행에서 식이 형성된다고 여기서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여기에 의문을 갖는 것도 그거예요. 식과 명이 어떤 차이를 갖느냐는 거예요.
식도 마음의 작용이고, 명도 마음의 작용이에요. 우리가 마음, 마음하여 마음을 절대화시키니까 마음이라는 것이 마치 어떤 형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하지만. 부처님이 마음을 심유주라고 그랬거든. 마음은 흐르는 것이다. 흐른다고 하는 것이 뭐예요? 고체가 아니라는 이야기죠. 우리는 마음이라는 걸 고체로 파악하걸랑요. 대체적으로 나는 그렇게 인식한다고 봐요. 선종의 명심견성설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기 때문에 명심견성설이라고 하는 것이 나온다고 보는데, 사실 12연기는 아까도 얘기했지만 무아 윤회를 설명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나는 봐요. 경에서 주장하듯이 부처님이 만드셨는지, 내가 주장하듯이 후세에 만들어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난 적어도 부처님이 만들었다고는 안 봐요. 부처님이 만들었는거 치고는 너무 허술하죠.
무아라고 하는 말 자체가 현재의 나를 부정하는 말은 아니걸랑요. 영원히 존재하는 나가 아니다라고 하는 말이지. 여기서 ‘아니다’ 라고 하는 말은 어떤 자아의 실체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죠. 사실 불교의 무아 이론은 굉장히 논리적으로 어렵습니다, 이게. 대체적으로 보면 서양에서도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도 영혼을 이야기하고, 인도의 주류사상도 다 그렇고. 대체적으로 영혼이나 자아나 푸드갈라(개아)나 지와(영혼)나 뭐, 온갖 것을 다 이야기하는데, 불교만 그 실체성을 인정을 안 해요. 아까도 이야기 했듯이 인도불교 대승불교라고 하는 거는 그 실체성을 인정하는 쪽으로 가는 거예요. 무아라고 하는 말을 피해서. 왜냐면 무아라는 말을 전면적으로 하게 되면 대승불교가 아니게 되니까. 불교라는 깃발을 세울 수 없으니까, 불교라는 깃발을 세우면서도 어떻게 이 부분을 인정할 것이냐? 그 쪽으로 가는 거죠.
사실 무아라고 하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체험을 말해요. 이건 체험돼어지는 거예요. 우리가 무아라고 하는 것이 체험돼어져야 모든 자의식이 해체되고, 열반에 이를 수 있어요. 현대 과학이 이렇게 발달했어도, 구체적으로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해서 아직 몰라요. 이제 마음에 대해서 알아가는 초입에 들었죠. 우리가 무아설이라는 것도 2,500년간 이야기 돼어졌지마는 아직도 구체적으로 설명을 못해요. 구체적으로 설명을 못하는 이유는 사실 무아라는 개념 자체가 굉장히 난해한 개념이에요. 개념 자체가 난해한 개념이에요. 업설과 윤회설 자체도 추상적인 용어인데, 이게 이론적으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죠.
부파불교 시대 설일체유부의 논장 구사론이라는 것이 옛날식으로 딱 100권인데, 대부분이 무아인데, 무엇이 윤회하는가를 설명해요, 70%가. 100권에서 70권은 그걸 설명한다고 보면 맞아요. 근데 문제는 거기에 대한 답을 못 내놓는다는 거예요. 그저 믿어라, 믿으면 복 받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결론을 낸다고 하는 것이 가장 쉽죠.
조금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행에서 식이 성립된다고 12연기에서는 이야기 하는데, 하아~, 참 이것이 자아와 무엇이 다른 건가? 라는 의문이 들죠. 만약에 그렇다면 식이라고 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식이라고 하는 것이 자아이론의 아트만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왜 그러냐하면 명색보다 먼저 와 있걸랑요. 여기 몸이 없걸랑, 아직. 아직 몸이 없잖아요. 몸이 없고 의식만 있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러면 의식만 따로 존재한다면 아트만하고 무엇이 다른가? 우리가 근본적인 질문을 안 할 수가 없죠.
아까도 말씀드렸지마는 기본적으로 붓다는 윤회하는가 안하는가에 대해서는 나는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봐요. 그럼 붓다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무엇이냐면, 해탈이에요. 동요되지 않는 열반을 얻는 거예요. 말룬카가 붓다에게 14가지를 물을 때, 세상이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이런 여러가지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했을 때, 독화살의 비유를 든 이유도 거기에 있죠. 형이상학적인, 추상적인 이론이라고 하는 것은 죽은 뒤에 영혼이 있는가, 없는가를 알고 싶으면 죽어보면 알아. 그게 가장 효과적인 거예요. 천국과 극락이 좋은지 안 좋은지는 죽어서 가보면 알고, 지옥이 고통스런 곳인지 아닌지는 죽어서 가보면 알아.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지옥이 못살 것 같으면, 도망 나오는 놈이라도 있을 텐데, 없다는 거예요.

답 : 붓다가 이야기하고자하는 것은... 나는 그렇게 봐요. 윤회나 업에 관심이 있는게 아니라 무명, 낡은 의식을 거두는 거예요. 낡은 의식을 제거하는 거예요. 붓다가 관심 있었던 것은 두카로부터 벗어나는 거예요. 수타니파타나 이런 경전에는 전생이야기가 많이 나오죠. 그리고 두카로부터 해방이라고 하는 것도, 윤회설이라는 것이 없으면, 그 고리를 끊는다고 하는 것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근데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뭐냐면, 붓다는 윤회의 주체가 무엇인가? 무엇이 윤회하는가? 그런 거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다음 생에 윤회할 것인가, 안할 것인가? 그런 것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봐요. 아니 근데 이건 제 개인적으로 말하는 거예요. 붓다가 중요하게 여겼던 거는 지금 이 순간에 낡은 의식을 걷는 거예요.

답 : 우리가 불교를 이해를 할려면,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인도의 고대 베다나 우파니사트나 특히 쌍키아 학파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돼요. 불교가 이해되기 어려운 거는 불교 이전에 인도에 어떤 주장과 설이 있었는가에 대해서 잘 몰라요. 이건 불교대학에서도 안 가르켜요. 오직 이것만 가르치죠, 이런 것만. 무아라는 것은 유아가 전제되지 않으며는 이야기가 안 나와요. 그렇지 않은가요? 자아사상이 있기 때문에, 자아가 있기 때문에, 영혼이라는 것이 전제되기 때문에 무아라고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는 거예요.
헤겔식으로 말하며는 이게 정반합이예요. 무엇이 있을려며는 무엇이 있기 때문에 나오는 거예요. 이것이 연기의 법칙이기도 해요. 여기에 이것이 있기 위해서는, 여기에 무엇이 있는 거예요. 해가 솟아야 해가 지죠. 해가 아예 안뜨면 질 일이 없죠.

답 : 내가 지난 번에 불교라는 것은 개념과 직관과 경험을 통합한다고 말씀드렸던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사실 불교교학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런 면에서. 왜 그러냐면 어떤 하나를 설정해 놓고, 세우고 달려드면 쉬워요. 저기에 고지가 있다, 자, 뛰자! 그러면 그 고지에 가면 다 끝나요. 그런데 불교 자체는 그 고지에 목표점을 설정을 안한다 이 말이예요. 자, 저기를 향해 간다라고는 외치는데, 거기에 어떤 고지에 목표점 깃발을 꼽질 않아요. 그래서 스님들이 이야기를 하다가 끝맺음 낼때 하는 말이 이 말이예요. 니가 알겠냐, 내가 알겠냐?
불멸 후 2,500년간 윤회의 주체가 뭐냐? 2,500년간 논쟁했는데 안끝났어요, 아직. 아까 얘기했듯이 구사론 100권인데, 70% 가량 그걸 설명하고 있는데, 들을 때에는 그럴 듯한데, 듣고 나면 구체적으로 무얼 들었는지 기억이 안 나요. 아까 내가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라고 한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답 : 우리가 그건 차전이라고 하는 말을 쓰는데, 차전과 표전은 표리의 관계인데, 부정과 긍정은. 그러기 때문에 체험을 강조하는 이유가 그거예요. 무아는 체험되어지기 때문에. 무상은 시각적으로 경험되어지는 거예요. 왜 그러냐면, 무상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적이고 심적인 것의 변화를 말하거든요. 근데 무아라고 하는 것은 첫째 체험되어지는 거예요. 무아라는 것은 내 의식세계에서 보는 거 걸랑요. 그리고 마음, 마음하지만, 실제적으로 마음의 움직임을 과연 얼마나 봅니까? 이거는 각자가 깊~이 생각하셔야 돼요. 다른 분은?

답 : 부처님이 그렇게 이야기한 적이 없어요. 어떤 스님은 마음이 윤회한다고 그래. 부처님의 설은 근본적으로 연기설인데, 12 연기는 무아 윤회를 설명하기 위해서 구성했다고 보는게 맞다는 거죠. 왜 그러냐면, 이것은 과거, 현재, 미래를 이야기하는 거 걸랑요. 부파불교시대에는 삼세양중인과라고 전문적인 용어를 쓰고. 불교라는 것은 연기설을 빼면 불교는 존재하지 않아요. 부처님이 당시에는 깨달음이 연기라고 이야기하고, 자설경에 '일구월심, 사유하던 붓다에게 모든 존재가 밝혀지던 그날 그의 의혹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연기의 도리를 알았으므로'라고 했으니까. 다만 보리수 하에서 이것을 순관과 역관으로 관했다는 것은 후대에 삽입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구차제정에서 나오는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그건 붓다가 궁극의 단계가 아니라고 주장한 건데, 왜 그게 구차제정으로 하느냐 말이에요. 마지막 멸진정(滅盡定)이라고 하는 것은 쌍키아 학파가 최고의 경지로 치는 건데, 왜 거기에 들어갈까? 뭐, 그거는 다음 주에 이야기하겠지마는.

답 : 우리가 부처님의 경전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누군가가 편집한 거죠. 그러기 때문에 다른 것이 많이 섞여 들어갈 가능성이 많아요. 그리고 또 인도의 모든 학파와 불교가 쟁론을 했기 때문에.
인도에서 가장 저급한 종교가 뭔 줄 아세요? 불교예요. 인도에서는 그렇게 봐요, 주류에선.
왜냐? 불교가 자아를 부정하기 때문에. 인도의 주류사상은 자아사상이에요. 그런데 유일하게 그 자아사상을 부인한 건 불교밖에 없어요.
자이나교에서도 그걸 인정해요. 지와라고 그래서. 자이나교에선 지와와 아지와의 다툼으로 보니까, 모든 것을. 지와는 영원이라고 하는 뜻이예요. 아트만하고 같은 개념이죠.
그래서 후기의 인도 철학에서 불교는 공적이예요. 시간이 많이 갔으니까, 다음 주에 이 부분은 좀 더 생각하시고, 오셔가지고 질문하시죠. 나도 아직 죽어서 입멸을 안해 봐 가지고 잘 모를 일이지요.

답 : 혜능게는 신수게가 없으면 존재하지 않아요. 신수게가 있어야만이 혜능게가 성립돼요. 정확히 말하면, 신수게는 혼자서도 살수 있지만, 혜능게는 신수게가 없으면 죽어요. 아, 그거는 다음 주에 말씀드릴께요. 여기 신수게에서 이야기하고 하고자 하는 것은 마음에 방점이 있다는 거예요. 마음은 거울과 같기 때문에 항상 닦아줘야 된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며는 거울이라는 기능이 제대로 기능할려면. 왜 이 이야기가 나오냐며는 요새 거울과 옛날 거울 다르잖아요. 옛날 거울은 청동거울이잖아요. 청동거울은요, 거울 역할 할라며는 정말 부지런해야 돼요. 청동거울은 매일 닦다시피 해야 돼요. 안 그러면 청동이라고 하는 거는 산화되기 때문에 며칠만 안 닦으면, 볼 수가 없죠. 그래서 여기에서는 청동거울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는 거예요. 청동거울의 이미지를 빌려와 가지고, 마음이라는 것은 일정의 단계에 올라가지 않으면, 염오된다는 거죠. 신수게에서는 그걸 이야기하고자함 이거든요(...) 뭐 어떻게 이해하든지 그거는 관계가 없겠죠.

답 : 어느 분이 수행의 주체가 누구냐 물었는데, 수행의 주체는 나죠. 자기 자신이 수행의 주체예요. 나중에 나오는데, 우리가 그걸 알아야 돼요. 우리가 신수심법 4념처에서 신을 보고, 수를 보고, 심을 보고, 법을 본다고 순차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거는 설명할 때 그렇게 하는 거고, 수행의 도상에서는 그것이 동시적인 작용이지요. 몸을 볼 때 마음 작용 하잖아요. 그리고 마음이 작용하지 않으며는 몸의 느낌을 어떻게 보겠어요? 그러니 마음의 움직임을 보지 못하는 것이지, 마음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몸을 본다고 그래서 마음이 작용하지 않은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느낌 수라고 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도 있지만, 정신적인 것도 있죠, 동시에.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이 있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이 있고.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짝 갈라서 설명할 수 없지마는. 이거는 뭐 수행에서의 체험이니까.
우리가 반야심경의 논리로 이야기하면,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흐름으로서 움직이는 거예요. 하나의 흐름이예요. 우리가 이것 저것으로 세분화시켜서 이야기하지마는, 부정관이라고 하는 것은 몸의 분자가 분해되는 흐름을 시각이라고 하는 이 안구와 마음으로 보는 거예요. 거기서 오온이 무아하고 무상한 거를 보죠. 실제적으로 시신을 놓고 하는 경우가 있고, 자기의 몸을 관념적으로 보는 경우가 있고... 부정관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뭐, 그런 것은 아니예요. 자기 몸을 혐오한다는 뭐 그런 걸로 이해를 하면 곤란하죠. 그렇게 되면 별 수 있겠어요. 새끼줄 세발 들고 뒷산에 올라가는 수밖에. 뭐 수식관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들숨과 날숨의 흐름 속에서 무상을 보는 거예요. 무상 속에서 무아를 보는 거고.

답 : 오온개공의 체험에 대해서 지민님이 물으셨으니까, 문건으로다 물으셨네. 오온의 세계는 한계성에 있어요. 왜 그러냐면 우리가 몸을 가지고 있는한, 우리는 3차원의 세계에 머물르게 돼요. 어떤 인간도 3차원을 벗어나지 못해요. 인간은 3차원이예요. 동물들은 2차원의 세계에 있고요. 무상과 무아의 세계는 가능성의 세계예요. 다르마의 세계는 무한성이고. 무상과 무아를 체현해야 가능성이 열리게 되고, 다르마에 이르게 돼요. 지난 주에도 얘기했지만, 무아라는 걸 체현할 때, 자의식이 해체되죠. 사실 우리가 한계성에 갇히는 것은 자의식 때문이예요.

답 : 에~, 질문은 가급적이면 그 날 강론에서 이야기하는 거를 하셔야 돼요. 그래야만이 연동성을 가져갈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 이야기한 것은 크게 보면, 두 가지예요. 하나는 색, 심, 공을 메트릭스처럼 병렬시켜서 봐야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의미를 우리가 파악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며는 색과 심이 오직 하나의 흐름이라는 것을 우리가 파악할 수가 있죠. 이거는(도표) 내가 쉽게 이해하시라고 고안한 거예요. 다음에 이 문건을 묶을 때는 도표를 실으세요, 요거. 실으셔야 이해가 돼요. 오늘 뭐 더 이상 없으면 여기까지 하죠. 다음 주에 혜능게 하고, 부증불감 이어가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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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사무색정이라고 하는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비상비비상처정 (非想非非想處定)이 실제 당시 인도에서 행해지던 수행법입니까?

답: 공무변, 식무변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식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인데, 이 사무색정은 소위 불교의 세계관에서 말하는 색계, 욕계, 무색계라고 하는 삼계 세계로 나눌 때, 사실 이것이 들어가요. 그래서 우리가 공무변처정이니, 식무변처정이니, 무소유처정이니, 비상비비상처정이니, 이 사무색정이라고 하는 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냐? 사실 이거는 불가능해요. 부처님께서도 어떤 사람이 와서 열반, 열반하는데 열반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했을 때, 부처님이 탐진치 삼독의 불꽃의 소멸이라고 이야기도 했지만, 야차에게 무어라 이야기했는가면 나의 가르침을 따라서 수행하지 않는한 이해할 수 없다 딱 짤라 그랬어요. 그 의의를,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랬어요. 우리가 사무색정이나 이런 것들은 부파불교 시대 때 이런 것들은 다 조직되었다고 봐야 돼요.

문: 18계의 근경식은 부파불교 시대의 개념인가요?

답: 저 먼저께 헌수님이 의근과 의식에 대해 이해가 잘 안가신다고 그랬는데, 근이라고 하는 것은 부파불교시대 때 붙인 거예요. 원래 부처님 경전에는 근이라고 하는 말도 잘 안 나와요. 그냥, 눈귀코혀몸마음 이렇게 이야기하지, 무슨 뭐 안근이 어떻고, 의근 어떻고, 이런 이야기 안해요. 그거는 부파불교 시대 때 붙인 거예요. 계니 근이니, 경이니 이런 것들 다 부파불교 시대 때 붙인 거예요. 왜 그러냐면 좀더 이해하기 쉽게 조직화시킨 건데, 그래서 더 어려워 졌어요.
(18계는요?) 18계란 말은 안 썼죠. 6경, 6근, 6식 이런 거는 다 부파불교 시대 때, 숫자를 붙인거죠. 왜냐하면 경전 자체는 그런 얘기가 없으니까요. 눈이 어떻고, 그 대상이 어떻고, 그 볼 때 마음의 작용이 어떻고 하고 있지, 뭐 안근이 어떻고, 색경이 어떻고 이런 이야기는 안하죠.

문: 도교에서도 도에 이르는 경지를 말하고 있는데, 이런 것과 구차제정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요?

답: 도교라고 하는 것은... 도교를 논할려면, 최소한 운급칠첨(雲급七籤)은 봐야죠. 운급칠첨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 북송 진종 때 황제의 칙령에 의해서, 도교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논한 것이 운급칠첨이에요. 우리나라에서는 노자, 장자보고 선교가 어떻고, 도교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하는 거 보며는, 참 불쌍하죠. 최하 노장(老莊)은 다 못봐도, 운급칠첨 정도는 봐야 그래도 도교에 대해서 좀 이야기할 수 있고, 정확히 도교의 수행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전진교에 대해서 모르면, 그 언급하면 안돼요.
왜 그러냐면 중국 도교라고 하는 거는 전진교 이전을 구도교라고 그래요. 진진교 이후로 신도교라고 그러고. 중국 도교수행이라고 하는 것이 본격적으로 얘기된 것은 왕중양(王重陽) 선생에 의해서예요.
그래서 중국 도교의 그런 것들이 불교와 유사하게 보이는 이유는, 불교 영향 아래서 만들어 졌기 때문이예요. 왕중양 선생은 전진교의 세가지 경전을 소의 경전(所依經典)으로 삼았어요.
유교의 효경, 그리고 노자,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반야심경.
왕중양 선생의 글을 보면, 이게 불교 이야기인지 뭔 이야기인지, 정말 중국의 기본적인 도교나 그 쪽에 대한 이해가 없으며는 아, 스님이 썼다고 봐도 문제 없죠. 도리어 왕중양 이후에는 중국 불교의 수행이 왕중양의 영향을 받으니까요.
일본 임제종의 중흥조라고 하는 하꾸잉에가꾸(白隱慧鶴백은혜학(1685∼1768)같은 경우도, 야선한화(夜船閑話)라고 하는 것을 남겼는데, 야선한화에 보면 중국 도교의 수행에 대해서 나와요. 하꾸잉에가꾸가 병에 걸렸을 때, 했다는 걸 보면 도교의 전진교의 도교 수행이 나와요. 뭐 이거는 쪼끔 나간 얘기지마는 아쉽게도 우리는 폭이 너무 좁아요. 그저 겨우 칠서보고 유교를 논하고, 노자, 장자를 보고 선교를 논하고. 내가 어른인데도 공부가 부족했다고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거예요. 그 분 같은 경우에는 유불도 3교에 달통했다 그러지마는 그 쪽 계통은 노자, 장자밖에 본 게 없어요.
한국 불교 근래 최고의 인물은 성철 스님이에요. 성철 스님이 훨씬 학문적으로 그 분보다 뛰어나요.
근데 성철스님보다 뛰어난 분을 내가 요새 봤는데, 바로 우리 석두 선우가 가져왔던 ‘사벽의 대화’에 나오는 석우 스님이에요. 그 분은 뭐, 그 후에 세상에 나오지 않은 것 보면, 돌아가신 모양인데, 적어도 한국 불교 수백년이래 최고의 인물은 사벽의 대화의 주인공인 석우예요.
유, 불, 선 3교에 통달했다고 하는 그 분은 미안하지만, 석우스님의 사벽의 대화를 단편적으로 보고, 논한 걸 보면, 거기에 미치지 못해요.
우리의 전통적인 수행법이라고 주장하는 많은 분들이 있는데, 이거 바깥에 나가면 이거 일거에 깨집니다. 왜 그러냐면, 중국 도교에 그런 이야기가 다 있기 때문에. 적어도 우리가 도교 수행을 이야기할려면 운급칠첨은 봐야 돼요. 안 그러며는 그저 가만 있어야 돼요. 왜 그러냐면 그것이 중국 도교의 총론이자, 개론서이자, 가장 깊이 있게 다룬 책이예요. 황제의 칙령에 의해서 최고의 인물들이 그것을 짓고, 집성했기 때문에. 그게 아마 100권인가 돼요.
그래서 공무변처, 식무변처 이런 이야기들은, 사실 초선, 이선, 삼선, 사선도 부파불교에서는 무슨 단계, 무슨 단계 이야기하지마는 알고보면 초선, 이선, 삼선, 사선이 겹치는 게 많걸랑. 그래서 여기서 나온 말이 그거죠. 니가 경험해 보면 알어. 나도 공무변처, 식무변처 설명한 걸 읽어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런 설명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설명도 안되는 이야기인데.

문: 구차제정은 단계인가요? 그것이 단계라면, 7단계와 8단계는 붓다가 깨달음을 얻기 이전인 고타마 싯타르타이던 때 스승으로 모셨던 이들의 수행단계입니다. 7단계 무소유처정은 알라라 깔라마가 하던 수행법, 8단계 비상비비상처정은 웃타카 라마푸타가 하던 수행법이라고 했는데, 붓다는 이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고행의 단계를 거쳐 보리수하에서 1선에서 4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이 사선이 어떻게 7, 8단계 앞에 올 수 있나요?

답: 반니원경에 보면 단계로 나와요. 그러니까 모순이 많다는 거예요. 다른 것이 모순이 많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게 모순이라는 이야기예요.
반니원경에 구차제정이 나오는데, 이건 이제 부파불교에서도 기술하고, 유심히 반니원경을 보면 이것은 후대에 여기 저기서 모아서 편집했다고 하는 표시가 딱 나요. 이거 뭐 말이 필요없다고.
근데 이제 내가 의문을 갖는 거는 다른 분들이 몰라서 침묵하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침묵하는지, 나는 후자인 쪽이 가깝다고 보는 거예요.
n물론 뭘 몰라서 너무나 믿음이 깊어 가지고, 옛날 어떤 스님 말씀대로 부처님이 아니고야 어떻게 이런 말을 하냐? 화엄경을 가지고 그렇게 늘 주장을 하셨는데, 조정래 보고 쓰라고 그러면 더 잘 쓰지. 솔직히 그래요. 화엄경, 법화경, 요새 소설가보고 쓰라고 그러면 더 잘 써. 그렇게 어리벙벙하게 쓰겠어?
우리가 후대에 편집을 거치면서 많이 섞여 들어갔어요. 그리고 제대로 편집회의나 편찬회의 거쳐서 만든 것도 아니고. 아니 그저 몇 사람 둘러 앉아 가지고, 우리 판소리 가르치듯이 가르치고, 외우고 그랬을 거지. 뭐 아함경 양이 많은 것 자랑하는 분이 있던데, 그 쪽 부분 얼마 안돼요. 아이구 뭐, 6근, 6식, 6경에 대한 것 몇 권 나오는데, 아, 뭐 6근, 6식, 6경 그거 몇 권 뽑으며는 한 세권 던져버리고, 18계 하나면 되는데 뭐.
내가 얘기하고자하는 것은 뭐냐면, 경을 대할 때는 믿음으로 대해야 되지만, 동시에 경을 보고 그거를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게 없으면, 매일 봐도 소용이 없어요. 그러면 우리가 왜 그걸 못보냐? 유심히 깊이있게 보질 않기 때문에. 그냥 눈만 왔다갔다 하거든.
내가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의문과 질문과 실증이라고 봐요. 의문을 가지고, 그 의문에 질문하고, 그 의문에 실증하는 것, 즉 답을 구하는 거예요. 이거 벗어나지 않아요. 다른 분은?

문: 부처님 당시 설법을 문자로 기록했다~ 라면, 이런 오해가 없었을 것을 왜 문자로 기록하지 않아서 혼란을 부추기는 것 같습니다.

답: 아, 문자는 있었습니다. 문자가 있었는데, 문자로 적지를 않았죠. 적지 않은 이유는 성스러운 말을 문자화한다고 하는 것은 불경이었어요. 왜 그러냐면 문자화되면 어떻게 돼요? 기록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오는가요? 소도 밟고 다니고, 돼지도 밟고 댕기고, 소도 뜯어먹고... 그래서 가장 신성하고, 안전한 곳, 인간의 마음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최고의 성전이라고 하는 힌두교의 베다도 기원 후 1세기경에 문자화 되었어요. 불경보다 더 늦어요. 불경 같은 경우는 불멸 후 약 400년 경, 기원전 1세기 경에 기록된 거로 보는데, 훨씬 빨라요.
빨랐던 이유는 스리랑카에서 전란이 일어났는데, 많은 스님들이 죽었어요. 죽었는데, 어떤 경전 같은 경우는 그걸 외우던 스님이 죽어서 더 이상 없어지는 거예요. 근데 어떤 경전 같은 경우는 그 스님이 죽기 직전에 구해 지기도 하죠. 그래서 문자화할 필요성을 그때 느끼기 시작해서, 문자화하기 시작했어요. 왜 그러냐면, 만약에 어떤 문제가 생기며는 그걸 외우는 사람이 죽으면 끝이잖아요.

문: 성철 스님은 그럼 구차제정 중 어느 단계에 이르렀을까요? 어떤 단계에 이르렀다면 본인은 알 수 있나요?

답: 그거야 성철 스님한테 물어 봐야죠. 내가 성철 스님이 아닌데, 알 수 있나요?
부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우리가 정말 의미있게 새겨 들어야 할 이야기인데, 붓다가 아니고는 누구의 경지가 어디인가를 얘기해 줄 수가 없다고 그랬어요.
미얀마의 아신 코알라 사야도에게, 가장 미안마에서 존경받던 스님으로 입멸하셨는데... 그 분께 한국 스님이 와서 물었죠. 제가 아무개 사찰에서 아무개 스님으로부터 수다원과를 얻었다고 하는 인증을 받았습니다. 근데 제가 그 경지에 오른 것이 맞습니까? 하고 물었죠.
그러니 아신 코알라 사야도가 뭐라고 답했겠어요?
네가 수다원과를 얻었다고 하는 인증을 받았다고? 그러면 니 스스로 알 수 있을 것인데, 왜 나한테 물을까?
우리나라 스님들처럼, 우리나라 불자님들처럼 도장받는데 목을 매는 거는 이 쪽 문화밖에 없어요.
율장에 의하며는 누가 어떤 경지인지에 대해서는 논할 수 없게 되어 있어요.
그 이야기는 뭐냐하면, 부처님이 아니고야, 정확히 말하며는 내가 그 경지의 눈높이가 아니고는 그 경지를 알 수가 없어요.
차~암, 미얀마에서 보면, 내가 보기는 가장 안목이 높은 것이 우리 나라 분들인데, 앉아서 등급을 다 메겨. 누구는, 어떤 미얀마 사야도는, 아신 코알라 사야도 아라한은 최소한 그리 될 거라고 이야기하고, 그 밑에 인터뷰 사야도인 떼자냐는 아나한까지도 어렵고, 사다함 정도 되지 않겠어? 뭐 이런 식이라. 뭐 누구는 수다원, 누구는 사다함. 참, 내가 그걸 보면서, 야! 하 미얀마 와가지구 인가 안 내준다고 행패부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며... 햐~. 우리가 그렇죠. 남을 속일 수는 있지만 스스로는 어떻게 속이겠어?
그래서 중국 선사들이 그런 말을 하죠. 남에게 속으면 구제할 길이 있으나, 스스로에게 속으면 구제할 수가 없다.
실질적으로 그런 일이 많이 벌어지죠. 중국에 법안 문익(法眼文益)선사라고 하는 분 밑에 현칙(玄則)이라고 하는 스님이 있었는데, 몇 년이 되도록 참문(參門: 스승에게 나아가 道를 묻는 것)을 안 해. 참문은 와서 법을 물어야 되는데, 안 물어? 하루는 법안 스님이 현칙이라고 하는 스님을 부르죠. 불러서 뭐래죠. “왜 현칙 측감원은 참문을 하지 않느냐?” “저는 이미 청봉(靑峰) 스님 문하에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허, 그래 이야기 한 번 해 보게.” 그래서 현칙스님이라는 분이 이야기를 하죠. 자기가 청봉스님이라고 하는 분에게 물었다는 거예요. “무엇이 제 자신입니까?”하고 물었다는 거죠. 그랬더니 청봉스님이 뭐라고 대답했냐면 “병정동자 래구화(丙丁童子來求火)니라.” 자기가 거기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거죠. 그러니까 법안 스님이 묻죠. “그게 무슨 뜻인가? 자네가 한번 이야기 해보게.” “병정(丙丁)이라고 하는 것은 방위로 말하면 남쪽입니다. 그래서 불(火)이죠. 방위로 말하면 남쪽이고, 오행으로 따지면 불이예요. 그러니깐 병정동자니까 불이죠, 동자라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까. 병정이니까 불이란 말이예요. 래구화(來求火)는 불을 찾는다는 뜻이에요. 그러니 불이 불을 찾는다는 뜻이죠.” 그러니까 법안선사가 그러죠. “그럼 그게 무슨 뜻이냐?” “제가 부처인데. 제가 부천데, 제가 부처를 찾는 거와 같다.” 그러니까 법안 문익선사가 그렇게 이야기하죠. “역시, 네가 잘못 알았구나!” 그러니까 현칙이라는 스님이 화를 내면서 가죠, 자기를 무시했다고. 그러니까 법안선사가 이렇게 이야기하죠. “돌아오면 구제할 길이 있으나, 돌아오지 않으면 구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근데 현칙이라는 스님이 자기는 이미 일을 마친 사람인데, 법안 선사가 부인하니까 화가 나서 가다가 강가에 다다라서 문득 생각이 이렇게 나죠. 법안 선사는 500명의 제자를 지금 지도하고 있는데, 설마 일부러 나에게 모멸감을 줄려고 멸시했겠는가? 그래서 다시 돌아가죠. 돌아가서 정식으로 참문해요. 수행은 반드시 참문을 해야 돼요, 정식으로. 그러지 않으면 어떤 스님도 정식으로 답을 주지 않아요. 반드시 수행은 참문 해야 돼. 수행과 강의나 강론과의 차이는 바로 그거예요. 수행은 참문해야 됩니다. 반드시. 반드시 절을 하고 물어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며는 깊이 있는 이야기를 안해요. 그러니깐 비로소 현칙이라고 하는 스님이 정식으로 법안 문익선사에 참문 하죠. 똑같은 걸 물어요. “무엇이 저 자신입니까?” 그 때 법안선사가 이렇게 대답하죠. “병정동자 래구화(丙丁童子來求火)니라.” 현칙스님이 그 때 외치죠. “제가 비로소 진리의 문에 들었습니다.” 법안선사가 인정하죠. 청봉선사에게 물었을 때와 그 답이나 법안선사에게 물었던 거나 답이나 똑 같애요. 똑같아. 그런데 왜 똑같은 대답을 했는데, 법안선사의 질문에 답할 때 현칙이란 스님이 진리의 문에 들었을까요? 이 미묘한 차이는 말로 설명이 안 돼요. 다만 중요한 거는 현칙이라고 하는 스님이 청봉스님 문하에서는 그것을 잘못 이해했던거라는 거예요. 근데 법안 스님 밑에서는 그거를 제대로 이해했던 거의 차이죠. 그래서 남에게 속으면 구할 길이 있으나, 스스로에게 속으면 구하지 못한다. 법안선사의 말이걸랑요. 돌아오면 구할 길이 있으나, 강을 건너면 그를 아무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혜천스님 – 초기불교전공 / 흥천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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