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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5-03-18, (수) 11:39 am 

가입일: 2015-01-01, (목) 10:22 am
전체글: 9
15) 공은 무상 무아를 흐른다 비어있다로 표현한 것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야!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 그대로가 공이요, 공 그대로가 색이다. 수상행식도 또한 그렇다.

사리자는 부처님의 제자 중에 가장 우수한 제자였던 사리불 존자를 말합니다. 우리가 대승불교에서 10대 제자를 거명할 적에 지혜제일로 불리는 분이죠. 사리불 존자는 법의 해석에 있어서 가장 뛰어났다는 거예요.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 그대로가 공이며, 공 그대로가 색이다.

색불이공, 공불이색이라 그랬어요. 색은 먼저 설명했지만 물질 또는 우리 몸이죠. 공이라는 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비어 있는 것을 말해요.
'비어 있다'는 말을 잘 이해해야 돼요. 이건 무의 개념은 절대 아니에요. 우린 물이 흐른다고 그러잖아요. 우린 보통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고 그러잖아요.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통상적으로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고 생각하지만, 물이 흐르는 이유는 비어있기 때문이에요. 비어 있는 곳을 채우는 거죠. 우리가 시각적으로 보면 높낮이이지만 그 본질에서 보면 물이라고 하는 것은 빈 곳을 채우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웅덩이를 만나면 채워지고, 채워지면 넘치죠.

여기서 공이라고 하는 것은 '비어있다' 그런 뜻이에요.
그런데 색이 공과 다르지 않다 그랬어요. 그리고 또한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이건 반대 논리죠. 뒤로 넘어가서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 그대로가 공이고, 공 그대로가 색이다.
즉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측면에서 볼 거 같으면, 색 그대로가 공이 되고, 공 그대로가 색이 된다는 얘기예요.
受想行識 亦復如是 수상행식도 또한 그렇다.

지금 이것은 앞에서 오온개공이라고 하는 것, 오온은 공하다고 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오온이 왜 공한지에 대해서 지금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물질도 흐름이에요. 물질도 흐름이고, 마음이라는 것도 흐름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공이예요. 아까 얘기했지요. 공하지 않으면 흐르지 않아요. 비어 있기 때문에 흐르죠. 공하지 않으면 흐르지 못해요. 그러기 때문에 물질도 흐르고 마음도 흘러요. 그러기 때문에 공이죠.

16) 무상은 변하여 진화한다는 뜻
우리가 이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무상과 무아라는 것에 대해서 이해가 제대로 있어야 돼요. 오온이 공하다고 하는 것은 무상과 무아이기 때문에 공하다고 하는 것인데, 무상이라고 하는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요.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은 변화해 움직이며 진화해 간다는 것이에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변화해 움직이며 진화해 간다는 것은 무엇이냐면, 항상 흐른다는 거죠. 정지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변화가 일어나면 움직이고, 움직이게 되면 진화가 일어나는데,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변화와 움직임을 만들죠. 그게 무상의 논리예요.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반드시 불교만 변화를 이야기하진 않습니다. 그리스 철학에서도 변화를 얘기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대표적인 중국의 주역에서도 변화를 얘기하죠. 그래서 우리가 주역을 변화의 서(書)라고 그러걸랑요.

변화의 서. 근데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될 것은, 주역에서 말하는 변화와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변화가 다르다는 거예요.
우리가 그거를 분명히 인식해야 돼요. 주역에서 얘기하는 변화라고 하는 것은 변화되면 지속되걸랑요. 유지돼요.
주역 계사 하 2장에 보면 대표적으로 유명한 구절이 나오죠.
'역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 (易 窮則變 變則通 通卽久)'.
역이라고 하는 것은 궁즉변이다. 여기서 궁은 '한계에 이르면', 이 말이예요. 한계에 이르게 되면 변화하게 되고, 변즉통, 변하면 통하고, 통즉구, 통하면 유지된다. 이것이 주역의 대표적인 구절이죠.
역(易)이라는 말 자체가 변화라는 뜻이걸랑요.

불교에서 말하는 변화란 변화하면서 움직이죠. 움직이면서 진화해요. 그러면서 또 다른 변화를 낳죠. 그게 무상이예요.
그런데 주역에서 말하는 변화라고 하는 것은 변화는 해요. 변화하게 되면, 그 변화된 것이 그냥 지속되고 유지되죠. 같은 변화를 얘기한다고 해서 그것이 같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우리가 보통 이부분에서 많은 오해를 하걸랑요. 아 뭐 변화를 얘기하는 것이 불교만 그러냐?

불교라는 것이 변화를 얘기하는데, 그 변화라는 것은 변화하면서 또 다른 변화로 변화한다는 거죠. 그래서 무상이라고 하는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왜 고정되어 있지 않느냐? 변화의 움직임에서 진화하기 때문에. 그게 무상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무상한 것 가운데 고정되어 있는 자아는 없다. 그것이 무아예요. 변화하는 가운데, 변화하지 않는 자아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죠.

17) 우파니샤드의 아트만(참나)사상 / 그러나 고정불변의 자아(영혼)는 없다
사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려면 인도의 우파니사드 이래의 주류사상인 자아사상, 즉 아트만 사상을 이해를 해야죠. 우파니사드에서 얘기하는 아트만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영구불변이에요. 불변 불멸하는 존재이걸랑요. 본래 아트만이라고 하는 것은 브라흐만이 내재되어 있는 아(我)예요.

브라흐만은 본래 창조의 원리인데, 이 브라흐만이라고 하는 창조의 원리가 나중에 신격화되죠. 그래서 인도에서는 창조주로 받아들여지죠. 우파니샤드에 보면 자아는 브라흐만이라고 얘기해요. 브라흐만이 자아다 이렇게 얘기하죠. 그렇기 때문에 자아라고 하는 것은 창조주인 브라흐만이 내재되어 있는 자아예요. 그러기 때문에 불변하고 불멸해요.

근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뭐냐 하면, 만약에 불변하고 불멸하는 자아가 있다면, 우리의 기억이 영속되어야 된다는 거, 우리의 기억이 영속되어야죠. 그러나 기억은 영속되지 않걸랑요. 우리의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본성의 발현이 아니고, 후성의 작용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여러 생의 기억은 없죠. 여러 생은, 과거 전생의 기억은 우리에게 없다는 말이에요. 만약에 아트만이라고 하는 존재가 불변하고 불멸하는 존재라면, 그 아트만은 영속된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그 아트만이라고 하는 불변불멸하는 존재가 언제나 지속되기 때문에 여러 생의 기억이 항상 우리의 기억 속에 있어야 돼요. 왜 그러냐면, 그것이 불생불멸하기 때문에. 우파니사드에서는 아트만이라는 것은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 집어넣어도 불멸하고 불변하는 존재라 그렇게 나오거든요.

만약 그런 자아라면 기억이 영속되어야 돼요. 과거 생의 기억, 전생의 기억이 지금까지도 기억해야 돼요. 많은 생의 기억이 항상 돼야 하걸랑요. 근데 우리는 전생의 기억이 없어요. 우리의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후성의 기억이죠. 전생 기억이 나시는 분 있어요? 우리의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이후의 기억밖엔 없어요.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부모로부터 받는 것이 본성이라면, 그렇다면 고정되어 있는 자아가 있어야 되걸랑요.

태어나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통해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후성이죠. 그러니 우리의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100% 후성이에요. 본성의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래서 고정되어 있는 자아가 있을 수 없죠. 만약 그렇다면 고정되어 있는 자아가 있어야 되걸랑요.

그래서 수상행식(受想行識)도 또한 그렇다고 그랬어요.
불교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이라고 하는 연기의 토대 위에, 무상과 무아라는 골조가 서는 거예요. 연기라고 하는 토대가 있고, 그 토대 위에 무상과 무아의 두 골조가 서는 거예요. 그래서 불교라고 하는 것은 이 두 가지를 이해하지 않으면, 사실 우리가 불교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지난주에도 이야기했지만, 사념처관이라고 하는 것, 흔히 우리가 말하는 위빠사나라고 하는 것은 무상과 무아를 관(觀)하는 거를 말해요. 무상과 무아를 체험하는 거예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에요.

18) 색즉시공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心不異空-心空 / 空不異心-空心 / 心卽是空-心空 / 空卽是心-空心
色不異空-色空 / 空不異色-空色 / 色卽是空-色空 / 空卽是色-空色

위의 것을 보면 심불이공 공불이심 심즉시공 공즉시심(心不異空 空不異心 心卽是空 空卽是心)이라고 되어 있잖아요. 이거는 수상행식 역부여시를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내가 구성한 거예요.
수상행식이라는 것이 뭐예요? 마음이잖아요. 앞에 수상행식의 뜻은 설명했었죠. 수상행식은 하나로 압축하면 마음이지요.
앞에서는 몸이 공과 다르지 않다 그랬단 말이에요. 근데 여기서는 수상행식, 즉 마음이 공과 다르지 않은 거예요. 역부여시라는 것은 또한 그렇다 그말이에요. 즉 앞에서 말하는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그 논리와 같다는 얘기예요. 그 이치와 같다. 그러니 마음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마음과 다르지 않으며, 마음 그대로가 공이요, 공 그대로가 마음이다.

우리가 공이라고 하는 것의 뜻이 그렇게 쉽게 다가오지 않죠. 일본에서는 일본어로 하늘이 소라 [ 空 ( そら ) ] 예요. 우리가 먹는 고동 소라 말고. 하늘을 소라라고 그런다고요. 한문으로 표기할 때는 공(空)이라고 표기해요. 일본에서 하늘은 공이예요. 하늘 천(天)자라는 것을 안 써요. 우주가 존재하는 거는 비어있기 때문에, 공하기 때문이에요. 하늘이라고 하는 것은 공한 거예요. 비어 있는 거. 비어 있는 하늘 가운데 점이 있죠. 그게 행성이죠. 지구가 되고, 태양이 되고.

色心-空 / 空-色心 / 色心-空 / 空-色心
내가 왜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옆에다가 색공 공색 색공 공색(色空 空色 色空 空色) 또 심불이공 공불이심 심즉시공 공즉시심(心不異空 空不異心 心卽是空 空卽是心) 옆에 심공 공심 심공 공심(心空 空心 心空 空心)이라 했고, 색심 공, 공 색심, 색심 공, 공 색심(色心 空/空 色心/色心 空/空 色心)이라 했잖아요.
우리가 이걸 끄집어내서 봐야 이해가 가요.

왜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고 하는 논리, 또 심불이공 공불이심 심즉시공 공즉시심(心不異空 空不異心 心卽是空 空卽是心)이라고 하는 논리가 우리가 사실, 쉽게 와닿는 논리가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가 이거를 매트릭스로 병렬시키면 하나의 흐름만 있게 되죠.
(아래의 글은 이해되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시길...)
이것은 상기시켜서 연상을 해야 돼요.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이걸 짜 가지고, 매트릭스처럼 가동시키며는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아! 매트릭스 원리 혹시 모르시는 분이 있으신가요? 매트릭스 원리는 수학적 원리에 바탕을 두는 건데... 혹시 매트릭스 영화 보셨어요. 매트릭스라는 영화를 보면 수없는 숫자가 흐르는 게 보이잖아요. 그게 매트릭스에요. 매트릭스라고 하는 말은 병렬한다는 말이걸랑요. 병렬. 그래서 이렇게 놓은 것을 매트릭스처럼 짜 가지고, 컴퓨터에다가 입력해놓고, 매트릭스처럼 변환시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어요? 거긴 오직 하나의 흐름 밖에 없어요. 색이라고 하든가, 공이라고 하든가, 마음이라고 하는 이 자체가 분리되느냐 분리되지 않느냐 그런 차원을 넘어서게 돼요. 전체가 하나의 흐름으로만 존재하게 돼요. 이거는 연상을 하셔야 돼요.
좀 더 쉽게 설명을 할까요? 사칙연산이 병렬 교차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사칙연산, 즉 더하고 빼고 나누고 곱하는 것이, 무한정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상호교차하면서 움직인다고 보세요. 그렇게 되면 거기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게 될까요? 매트릭스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죠. 여기서 질문을 받고 넘어 가겠습니다. 이해가 안 되면 질문하세요.(이해가 안되니 질문할 수가 없죠. 일동 웃음)

19) 색과 심은 하나의 흐름(무상)
내가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물질도 흐름이고, 마음도 흐름이다. 그러기 때문에 공이다. 공하지 않으면 흐르지 못한다고 내가 얘기 했잖아요. 이거를 병렬시키면, 이 현상이 시각적으로 나타난다 이 말이예요, 내 말은. 우리가 매트릭스로 병렬시키면 하나의 흐름만 있게 되는데, 그 가운데에서 색과 심이 흐름임을 보게 되요. 공하기 때문에 흐른다고 내가 아까 얘기 했잖아요. 공하지 않으면 흐르지 못하잖아요. 결국 색과 심이라는 것도 하나의 흐름이에요. 아까 무상을 얘기했지만, 사실은 무상도 흐름이에요, 무상이라는 것도 흐름이에요. 변화해서 움직이는 게 뭐예요. 흐름이지요. 흐름이 또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 내잖아요.
물이 흐르다 보면 어떻게 돼요? 수직 절벽을 만나면 폭포가 되잖아요. 경사지를 만나면 여울이 되고, 평지를 만나면 소리도 없이 흐르죠. 그러다 바다에 이르고. 우리가 시각적으로 보면, 바닷물은 흐르지 않걸랑요. 그렇지만 바닷물도 흐르죠. 우리가 시각적으로 봤을 때, 바다가 흐르지 않는 것이지 바다도 흐르잖아요. 우리 지구도 흐르잖아요. 우리는 태양이 떠오른다고 그러잖아요. 태양이 언제 뜬 적이 있던가요? 우리가 태양이 뜨고 진다는 것은 우리의 시각적인 착각이죠. 태양은 단 한번도 뜬 적도 없고, 진적도 없어요. 왜 그러냐면 태양은 천체를 따라 돌며 지구가 바라보는 그 자리에 있걸랑요. 지구가 태양을 따라 돌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시각적으로 보이는 거죠. 결국 지구도 태양과 함께 흐르는 거예요. 지구가 돌며 흐르기 때문에, 돌고 있는 지구 한쪽에서만 쳐다보면 태양이 뜨고 지는 것처럼 시각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거고, 태양이 뜨고 진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여기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心不異空 空不異心 心卽是空 空卽是心 하는 것은 결국은, 色과 心은 하나의 흐름(무상)이라는 말이에요. 근데 우리가 그것을 흐름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다고 보는 거죠. 고정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에 마음을 절대화시키고 그러는 거죠. 부처님이 무아라고 하니까, 무언가 붙들고 싶어서 마음을 절대화시키는 거죠. 사실 우리가 마음을 절대화시키고 있지요. 한국 불교에서는 마음을 아주 절대화시키고 있어요, 지금. 무아라고 하니까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절대화시켜 버린 거죠.

20) 무상 무아를 말하지만 체득하기 어려워 / 무상을 공(허망한 것)으로, 무아를 공(비어있는 것)으로 대체하다
나는 무아의 운명이 무소유의 운명하고 같다고 보죠. 우리가 무소유를 이야기하지만, 무소유한 인간은 없잖아요. 무소유한 인간 봤어요? 나는 어떠한 인간도 무소유한 인간은 못 봤어요. 왜 그러냐면, 존재한다는 것은 소유한다고 하는 것을 뜻해요. 그러기 때문에 무소유한 인간은 존재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무소유를 이야기하지만, 그거는 가상의 세계에서만 존재하죠, 무소유는. 현실의 세계에서는 무소유가 존재할 수가 없어요. 왜 그러냐면, 우리는 소유하지 않으면 우리는 존재할 수 없걸랑요.

고로 붓다는 말하죠. 살아 있는 자는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다. 먹는다고 하는 거는 소유한다는 거를 말해요. 소유하지 않고 어떻게 살 수가 있나요? 먹지 않고 어떻게 사는가요? 그저 이슬만 먹고 산다는 것은, 정말 그거는 가상의 세계 속에서나 있는 얘기고. 현실의 세계에서는 그런 건 없어요. 우리가 입으로는 무아 그러지만, 마음으로는 유아 그러거든요.

맨날 무아를 얘기하는 스님들도 무아를 믿는 사람 없어요. 입으로만 무아를 이야기하는 거죠. 왜 그러냐하면 무아를 체현하게 되면 삶 자체가 그렇게 살 수 없거든요.
아! 우리가 있는 것도 믿기 어려운데, 없다는 걸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요? 없는 거를 믿으려 그럴 적엔,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얘기하죠. 신앙심이 없기 때문에 믿지 못한다고 하죠.

마음을 절대화시키면 안돼요. 마음은 몸과 같이 흐름일 뿐이에요. 마음은 뇌라고 하는 기계가 작동시키는 거예요. 뇌라고 하는 기계가 없으면, 마음은 작동하지 않아요. 몸을 떠난 마음이라고 하는 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이에요. 인간이라고 하는 거는 무언가를 잡고 싶어 하걸랑요.

그러기 때문에, 반야심경에서 오온은 공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오온은 공이다. 부처님이 오온은 무아라고 한 것을 오온은 공이다라고 반야심경에서는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오온은 공이다고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논리를 전개하는 거예요. 오온이 공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메트릭스로 병렬시켜서 시각화하면 우리가 이해가 딱 가죠. 아! 전체가 흐름이구나! 흐름 이외에는 없구나. 여기에 대해서 정말 질문이 없는가요? 질문이 없으시면 넘어 가겠습니다.

不生不滅-生滅 / 不垢不淨-垢淨 / 不增不減-增減 / 滅生 / 淨垢 / 減增
21) 불생불멸 / 나고 죽는 것은 흐름일 뿐. 나고 죽는 것이 아닌 상태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사리자야! 이 모든 존재의 공한 특성은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더러워지지도 않으며 깨끗한 것도 아니다.(더러움도 아니고 깨끗함도 아니다.)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나니

사리자야! 모든 존재의 공한 특성은, 여기서의 제법(諸法)은 모든 존재라고 하는 뜻이에요. 그리고 여기 모양 상(相)자는 모양을 뜻하는 게 아니라 어떤 특성, 특징을 뜻하는 거예요.

모든 존재라고 하는 것은... 존재는 딱 두개만 있어요. 유정과 무정. 유정, 무정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 보셨잖아요. 유정이라고 하는 것은 움직이는 생명체예요. 유정은 움직이는 생명체고, 무정은 움직이지 못하는 생명체예요.

모든 존재의 공한 특성이라고 하는 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 )이다. 생(生)하는 것도 아니고 멸(滅)하는 것도 아니다. 생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결합이에요. 멸이라고 하는 것은 해체죠. 무엇이 결합하는 가요? 분자가 결합하잖아요. 분자가 결합하면 생이에요. 그 분자가 해체하면 멸이죠. 그래서 생멸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바꾸면, 생과 사예요, 생사. 모든 존재의 공한 특성이라고 하는 것은 결합하지도 않고, 해체되지도 않는다 이 말이에요. 왜 그러냐면 공의 특성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이에요. 왜? 공하기 때문에. 분자의 결합과 분자의 해체라고 하는 것은 흐름일 뿐이니까요. 대승불교에서 이것을 생멸의 법칙이라고 그러죠. 분자가 결합되고, 분자가 해체되는 것, 이것이 법칙이라는 거예요. 이것을 불변의 법칙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우리가 보통 연기라고 불교식으로 표현하고. 그러기 때문에 물질도 마음도 결합되고 해체되는 것뿐이에요.

22) 모든 존재는 깨끗하거나 청정한 것이 아니다 / 부정관은 몸의 분자가 분해되는 흐름을 시각과 마음으로 보는 것
不垢不淨. 염오(染汚)도 아니고 청정(淸淨)도 아니다.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위 글(표)에서 우리가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는 것을 이해하려면, 구(垢)와 정(淨)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되겠죠. 불생불멸(不生不滅)을 이해하려면, 생(生)과 멸(滅)을 이해해야 되구요.

구라고 하는 것은 염오심이죠. 그래서 이 염오심라는 것은 부정관(不淨觀)하고 연결이 되죠. 정이라고 하는 것은 청정심이예요. 에 이거는 자비관(慈悲觀), 인연관(因緣觀), 수식관(數息觀), 계분별관(界分別觀)하고, 이거는 연결이 되는데.

부정관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몸의 분자가 분해되는 흐름을 시각과 마음으로 보는 것이 부정관이예요. 대념처경에도 부정관이 앞에서 나오죠. 우리 몸의 분자가 분해되는 흐름을 시각과, 눈으로 마음으로 보는 거예요.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어요? 우리 몸이 분해되잖아요, 분자가. 그걸 시각적으로 보는 거예요. 마음으로 보는 것이기도 하구요. 그 과정에서 오온이 무아인 것을 보죠. 그리고 무상을 보고요.

그래서 이 부정관이라고 하는 것을... 아! 언젠가 어떤 스님께서 부정관을 이야기하면서, 그 스님 굉장히 유명한 스님인데, 거의 뭐 스타처럼 불교 TV에도 강의하러 나오고 그러는데, 자기 몸을 혐오하지 않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을 하는데, 부정관을 이야기하면서. 아이, 나도 그 분처럼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부정관이라는 것은 자기 몸을 혐오한다 그런 의미로다가 이해하면 안돼요. 조금 전에도 얘기했듯이 부정관이라는 것은 몸의 분자가 분해되는 흐름을 시각과 마음으로 보는 거예요. 그 가운데서 오온이 무아하고 오온이 무상한 것을 보죠. 그게 부정관이예요. 이것은 뭐, 더럽고 깨끗하다, 혐오한다 이런 의미가 아니에요.

垢-淨 / 染汚心-淸淨心 / (神秀)-(慧能) 慈悲觀 不淨觀 因緣觀 數息觀 不垢不淨
23) 자비희사 / 평화롭고 행복한 나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이 구(垢)라고 하는 것, 즉 염오심에서 보면, 여기에서 신수의 게가 나오죠. 그건 이따가 설명을 하고. 불구부정에서 정은 청정심이에요. 염오심은 마음이 물들어 있는 걸 말하죠. 염오란 물들어 있는 거, 번뇌에 물들어 있는 것. 정이라고 하는 것은 청정심. 깨끗한 거죠. 그래서 여기에는 오정심관(五渟心觀) 중에서 수식관(數息觀) 부정관(不淨觀) 자비관(慈悲觀) 인연관(因緣觀) 계분별관(界分別觀)이 여기에 해당돼요.

첫 번째는 자비관이 여기에 해당되죠. 자비관은 무량심(無量心)을 말해요. 무량심, 가없는 마음. 내가 강론할 제 말했던 아파마나. 아마 이 자비보다, 처음에 부처님이 강조했던 것은 무량심이었을 거예요. 왜 그러냐면 자비라는 개념보다는 무량심이라고 하는 개념이 무상과 무아라는 본질의 측면에서 본다면, 훨씬 부처님의 깨달음에 가깝죠. 무량심이라고 하는 거, 아파마나가요. 그래서 자비보다는 무량심이 강조되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해요.
그런데 무량심은 불교의 핵심이지만, 명확히 이해되지 않는 단점이 있어요. 명확히 잘 이해가 안돼요. 그래서 무량심을 세분화시켜서 자비희사(慈悲喜捨) 4가지로 나눴을 거예요. 무량심이라고 하는 것은 4가지 측면이 있다고 세분화 시킨 거죠. 첫째는 자(慈)고, 사랑하는 마음이고, 두번째는 아파하는 마음 비(悲)지요. 사랑하는 마음만 가지고는 세상을 살수가 없어요. 아파하는 마음이 있어야 돼요. 타인의 불행을 아파할 줄 알아야죠. 사랑하는 마음과 아파하는 마음은 달라요. 그리고 희는 기뻐하는 마음이고.

24) 사람의 마음, 심보는
제가 제일 처음에 반야심경 제목을 이야기하면서 가장 큰 것은 마음이라고 했고, 가장 작은 것도 마음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남 잘 되는 거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나는 그런 적 없는데..., 우리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가 그렇게 남이 잘되는 것에 대해서 배 아파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은근히 질투가 나요. 잘 나가는 거 보면 배가 아파.

이무기가 용이 되면, 이무기가 오랫동안 도를 닦으면 용이 되잖아요. 용이 되면, 용이 된 이무기를 가장 시기하고 질투하고 험담하는 것이 본래 용들이겠어요, 아니면 이무기들이겠어요? 본래 용들은 이무기가 용이 되었을 때, 별 상관하지 않아요. 왜 상관하지 않는 줄 아세요? 본래 종자가 용이 아니기 때문에 아예 대거리할 생각이 없어. 그런데 같은 이무기들은 용이 된 이무기를 용납을 못 해요. 우리가 그걸 알아야 돼요. 용이 된 이무기를 해치려고 달려드는 것은 다 이무기라는 거예요. 용들은 안 그래요. 왜 그러냐면 격이 다르기 때문에 용이 된 이무기하고 놀 생각이 애초에 없어요. 그러나 이무기들은 배가 아파. 그래서 이무기는, 용이 된 이무기는 절대 여의주를 자주 물면 안돼요. 입에 여의주를 물면 비룡이 되거든요. 올라간단 말이에요. 그러면 시기와 질투를 받죠. 처음부터 용은 모두가 인정을 해요. 왜? 본래 용이기 때문에. 그래서 맨 날 물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어. 맨 날 올라가도 괜찮아. 근데 용이 된 이무기가 맨 날 여의주를 물고 올라가면, 이무기들의 질투심에 불을 붙이는 거예요. 그걸 명심해야 돼요. 용이 된 이무기는 반드시 와룡이 되어야 돼요. 가끔 한 번씩만 올라가요, 여의주를 물고. 이무기가 처음 용이 되었을 때는 박수를 쳐주지만, 그 이무기가 여의주를 물고 올라 가는거를 보면 눈에 불이 붙어요.

그래서 우리는 남을 잘 용납하지 못해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이 사람 눈동자에요. 모든 것을 담죠. 우주도 담잖아요. 그러나 가장 작은 것도 눈동자에요. 내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은 용납을 할 수가 없어요. 설사 부처님이 다시 돌아오신다 할지라도 용납하기 어려워요, 내 맘에 안 들면. 나한테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해줘야 부처죠. 그래서 기뻐하는 마음이 여기에 들어가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에요.

사(捨)는 차별 없는 마음이에요. 우리가 직역하면, 평정된 마음이지만, 차별 없는 거를 말하죠. 그래서 자비라고 하는 것은 결국 무량심이예요, 아파마나. 아까도 얘기했지만, 무량심은 부처님의 핵심적인 가르침이지만, 명확히 이해되지 않아요. 왜 그러냐면 가없는 마음이란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사실 우리가 잘 알 수가 없걸랑요. 그래서 이것을 구체화시킨 것이 자비희사 4가지예요. 그래서 나중에 이 자비를 강조하게 되는 거고.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자비관이라고 그래요. 아파마나, 즉 무량심을 키우는 거예요.

그 다음에는 인연관. 인연관은 보통 연기관이라고도 하는데, 보통 12연을 관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이야기 하죠. 요 부분은 뒤에 가서 자세히 이야기 하겠습니다.

그리고 수식관....... 수식이라고 하는 말은 들숨, 날숨을 센다고 하는 뜻인데, 수식관은 들숨, 날숨의 흐름 속에서 무상을 보고, 무상 속에서 무아를 체현하는 것을 말해요. 그게 수식관의 본래 목적이에요. 들숨 날숨의 흐름 속에서 무상을 본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 무상 속에서 무아를 보는 것이 수식관이예요.

그리고 그 다음에 계분별관이라고 있는데, 18계를 관하는 것이지요. 그건 뒤에 나오니까 그 때 다시 설명을 하도록 하죠.

이 다섯가지를 오정심관(五渟心觀)이라고 그래요. 다섯 가지, 정심이라고 하는 것은 정지시키는, 안돈시키는, 즉 평정시키는, 그런 뜻이에요. 사실 우리가 불교수행에 대해서 곡해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그것이 불교를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하죠. 아쉽게도, 아까도 얘기했지만, 뭐 자기 몸을 혐오하지 않으면 도를 얻을 수 없다는 그런 엉뚱한 소리가 나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죠.

25) 불교는 마음을 닦는 것인가? / 마음 깨쳐 성불하자는 것은 불교가 아니다
그래서 구에서는 염오심, 염오심이라 그랬잖아요. 여기에서 신수(神秀)의 게(偈)가 나와요.
육조단경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신수와 혜능(慧能)이 게를 주고받게 되는데, 물론 그것은 역사적 사실은 아니에요, 창작된 거지.
우리가 중국 선종의 혜능을 6조라고 칭하는데, 신수게(神秀偈)에서는 신수를 육조라 칭했는데, 신수와 혜능은 상면한 적이 없어요. 얼굴도 몰라요. 나이 차이도 거의 뭐 30년 가까이 나고. 그리고 혜능이 5조 홍인의 문하에 갔을 때는 신수는 이미 없었어요.

神秀 偈 / 慧能 偈
身是菩提樹 / 菩提本無樹
心如明鏡臺 / 明鏡亦無臺
時時勤拂拭 / 佛性常淸淨
莫使有塵矣 / 何處有塵矣
그러나 신수게라고 하는 것, 그리고 혜능게(慧能偈)라고 하는 것, 이건 단경을 창작한 사람이 만든 것이지만, 이건 우리가 한 번 중요하게 다뤄볼 만 해요. 위에 보면 신수게라고 밑에 있죠. 신수가 지었다고 하는 게인데,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건 역사적 사실은 아니예요, 단경에서 주장을 하는 것이지.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莫使有塵矣.
신시보리수, 몸은 보리의 나무요. 심여명경대, 마음은 밝은 거울 같나니, 시시근불식, 항상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시시는 때때로니까 항상이에요. 막사유진애, 먼지가 묻지 않게 하라.
이게 신수의 게예요.
신수게의 방점은 사실 마음에 있어요. 심여명경대.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다는 거죠. 조견에서도 얘기했지만, 사실 거울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에서 수행을 설명할 때, 비유해할 때 많이 쓰는 사물이기도 하죠. 중국 묵자에서도 거울에 대해서 나오기도 하고. 그래서 거울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지난번에도 이야기했지마는, 거울은 자신을 보는 거예요. 그래서 거울 곧 마음과 같은 뜻이에요. 마음은 밝은 거울 같다는 거죠. 그러기 때문에 항상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가 묻지 않게 해야 된다. 왜냐하면 거울이라고 하는 것은 먼지가 묻으면 거울이 아니걸랑요.
사실 신수게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불교의 전통적인 입장에 서 있어요.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쭐라판타카에게 항상 ‘라조하나랑’ 하라고 시켰는데, 라조하나랑....... 그러면서 항상 깨끗한 걸로 닦고 다녀라! 라조하나랑 이란 말은 우리가 쉽게 이해하자면, 털고 닦자 뭐 그런 뜻이에요.
더 쉽게 얘기하자면 깨끗이 닦자 이런 뜻이에요. 이런 면에서 신수게는 사실 전통적인 불교의 입장이었어요.

26) 중국 성명사상과 잘 부합된 대승의 불성사상
아까도 얘기했듯이 신수게는 마음에 방점이 있다고 그랬어요. 마음에 방점이 찍혀 있는 거예요. 중국 선종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뭐예요? 마음을 깨쳐 성불하자는 거잖아요. 중국 선종에서는 마음을 깨치는 것이 성불이라고 주장을 해요, 깨달음이다. 사실 이것이 명심견성설(明心見性說)이라고 하는 것인데, 명심견성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밝혀서 불성을 본다는 얘기걸랑요.
사실 마음을 밝혀서 불성을 본다고 해서, 그것이 깨달음이 아니에요.
나는 이 명심견성설은 중국 전통의 성명(性命)사상하고 대승불교의 불성(佛性)사상이 결합된 것이라고 봐요. 사실 명심견성설이라고 하는 것은 명심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견성에 방점이 찍혀 있는 거예요. 불성을 본다는 거죠.

중국 사람들이 불성이라고 하는 것에 굉장히 매력을 느끼고 있어요. 왜 중국 사람들이 불성에 매력을 느끼게 되냐면, 중국의 전통적인 성명설하고 이것이 딱 부합되걸랑요. 새로운 문화가 들어왔을 때, 전통적인 문화와 부합되는 것이 없으면, 살아남기가 어려워요. 그런데 마침 새로운 것과 전통적인 것이 일치되는 관점이 있다면, 그거보다 더 좋을 수가 없죠. 이 중국 선종에서 얘기하는 명심견성설은 중국의 성명사상과 불성사상이 결합된 거예요.
성이라고 하는 것은 본성이예요. 이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서 왔냐하면 천명(天命)으로부터 오는 거예요, 천명. 이것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거예요.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 인도의 바라문들이 자아라고 하는 걸 브라만이 내재되어 있는 아라고 주장하는 거와 같죠.

내가 아까 주역을 언급했었는데, 주역이라는 것은 바로 이 천의 명을 해석하는 것이에요. 천의 명을 해석한단 말이에요. 천은 언어로써 말하지 않아요. 상징으로만 나타나거든요. 상징이 하늘의 언어예요. 효(爻)라고 하는 건 하늘의 언어걸랑. 그러기 때문에 그게 명이라. 그거를 해석한 것이 역이죠. 주역의 십익은 그걸 해석한 거예요.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은, 그러니까 천의 명을, 천의 명은 상징으로 나타나걸랑, 즉 효란 말이에요. 상징의 언어가 효예요. 하늘의 언어는 효란 말이에요. 즉 상징이거든. 그거를 해석한 것이 바로 주역이에요. 그런데 성명이라고 하는 것도,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 바로 성이걸랑요. 그래서 우리가 이걸 본성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게 명심견성설이에요.
우리나라에 근래에 한국 불교의 유력한 지도자였던 한 분도 이 명심견성설을 이렇게 이야기 했죠. 팔만대장경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명심견성설이다, 그렇게 주장하셨어요. 왜 그러냐면 이것이 전통적인 선종의 주장이기 때문에.

그렇지만 마음을 보았다고 그래서 깨달음이 아니에요. 마음을 봤다고 하는 것은 가능성을 열었다고 하는 것이지, 무한성에 이르렀다고 하는 뜻이 아니에요.

27) 선종의 논리로 선종을 괴멸시킨 주자(朱子)
결국은 중국 선종이 명심견성설을 내세우는데, 이 명심견성설을 칼로 찔러서 중국 불교를 반신불수로 만든 사람이 주자(朱子)예요. 주희(朱熹)가 바로 이 명심견성설 논리를 이용해서 중국의 선종을 그 창으로다 찔러서 반신불수로 만들었죠.
주희 이후에 중국 불교가 급격히 쇠퇴하는 이유는 중국의 선종의 논리로써 주희가 선종을 찔렀기 때문이에요.

내가 저 먼저께 강론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상대방을 찔러 죽이려면 반드시 상대방의 창으로 찔러야 해요. 그의 논리로다가 그를 찔러야만 그를 제거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나의 논리로다가 그를 제거하려고 달려들걸랑요. 그래서 안 되는 거예요. 반드시 그를 제거하려면, 그의 논리로 제거해야 돼요. 주희처럼요.
주희가 본래 불교를 배운 사람이거든요. 주희가 이 명심견성설을 맹자의 4단론과 중용의 성명론으로다가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명심견성설을 이용해서 말이예요. 왜 그러냐면, 중용에서 얘기하는 성명론이 바로 이 명심견성설이 불성하고 결합된 거를 간파한 거예요.
그래서 미안한 얘기지만, 명심견성설은 이미 주희에 의해서 깨졌어요. 그런데도 아직도 반신불수가 되어 가지고, 숨은 남아 있다고, 숨이 붙어 있으니까 아직도 명심견성설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미 반신불수가 되어 있으니까 병신이죠.

28) 신수나 혜능의 성명론은 불교와 무관
오늘은 혜능게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신수게가 없으면 혜능게는 성립이 안돼요. 보리본무수 명경역무대 불성상청정 하처유진애(菩提本無樹 明鏡亦無臺 佛性常淸淨 何處有塵矣),

신시보리수.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신수게에서는 뭐라 그랬죠?. 몸은 보리의 나무라 그랬잖아요, 근데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다고, 여기 혜능게에서 얘기해요. 명경역무대, 밝은 거울 또한 틀이 없다. 앞에서는 마음은 밝은 거울 같다고 했단 말이예요. 근데 여기서는 밝은 거울 또한 틀이 없다고 그랬어요. 불성상청정, 불성은 언제나 깨끗하나니, 앞에서는 항상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불성이라는 것은 언제나 청정하다고 했죠. 하처유진애, 어느 곳에 먼지가 묻으랴. 앞에서 신수게에서는 먼지가 묻지 않게 하라고 했단 말이예요. 그러니까 신수게하고 혜능게는 전혀 반대 입장에 있어요. 신수게가 동쪽에 서 있다면, 혜능게는 서 쪽에 서 있죠. 서로 등지고 있는 거예요. 혜능게를 보면, 굉장히 시원스럽죠. 그래서 이 중국사람들이 굉장히 매료되었던 것이기도 한데...

혜능게의 방점은 어디에 있는가 하면, 불성상청정에 방점이 있어요. 앞의 신수게의 방점은 심여명경대에 있걸랑요. 마음은 밝은 거울이다, 이것이 신수게의 주장이예요. 근데 혜능게의 주장은 불성상청정이예요. 사실 여기에 방점이 있어요. 우리가 신수게하고 혜능게를 많이 비교하여 논하기도 하는데, 엄격히 이야기 하면, 신수게에서 이야기하는 논점과 혜능게에서 이야기하는 논점은 다르다는 거예요. 사실 신수계와 혜능게는 전혀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어요, 논점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보통 그렇게 보지 않는데, 실제로 신수게와 혜능게는 별개의 입장을 나타내고 있는 거예요.

29) 불교의 해탈은 무엇인가?
신수게는 마음은 밝은 거울이기 때문에 항상 그 거울이 밝게 빛나도록 닦아줘야 된다는 것이에요.
근데 여기서(혜능게)는 거울을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 같지마는 방점은 불성상청정에 있어요.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불성상청정이고, 신수게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마음은 거울이다라는 거예요.

우리가 이것을 이해를 하려면 먼저 알아야 될 것이 부처님이 3가지 해탈을 이야기해요. 첫째는 신해탈(信解脫), 믿을 신자 신해탈이 있고, 또 하나는 혜해탈(慧解脫), 지혜혜자 혜해탈, 그리고 또 하나가 심해탈(心解脫), 마음 심자 심해탈.
대념처경에서는 혜해탈과 심해탈을 말하는데, 신해탈, 혜해탈, 심해탈, 대체적으로 이 3해탈을 부처님이 이야기해요.

신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으로서 해탈하는 거예요. 무엇을 믿느냐? 붓다를 믿는 거죠. 붓다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다르마를 믿는다 이 말이에요. 붓다라고 하는 것은 인격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다르마를 이야기해요. 그래서 부처님이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다르마를 보는 자가 나를 본다고 하거든요. 그리고 나를 보는 자, 다르마를 본다라고 하죠.
그래서 후기 대승경전에서도 붓다를 인격으로 보는 것을 엄히 금지하죠.

처음에 붓다가 오비구를 만났을 때, 오비구에 뭐라 그러던가요? 나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그러거든요. 고타마 싯타르타라고 하는 나의 이름을 부르지 마라. 나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하는 것은 인간인 고타마 싯타르타를 배제하는 거예요. 우리가 붓다를 얘기하는 것은 인격의 붓다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마 붓다를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르마로서의 붓다. 그래서 붓다는 곧 다르마죠. 그러기 때문에 믿는다는 것은 붓다를 믿는 걸 말하는데, 뭘 믿느냐? 다르마 붓다를 믿는 거예요. 다르마 붓다를 믿는다게 뭐예요? '붓다를 믿는 것은 해탈의 유일한 길이다'라는 걸 믿는 거예요. 해탈하는 유일한 길이다. 붓다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해탈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거예요. 그걸 믿는 것이 신해탈이에요.

30) 기도의 의미 /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신하고 헌신하며 찬탄하는 것
기도한다고 하는 것도 신해탈이예요. 기도의 구조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고. 첫째는 믿는 것, 두번째는 예배, 세번째 찬탄이걸랑요.
첫번째 붓다를 믿고, 두번째 붓다에게 예배하고, 세번째 붓다를 찬탄하고....... 믿는다는 것이 뭐예요? 믿는다는 것은 확신한다는 걸 뜻해요. 확신, 확신이 믿음이에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확신이 없으면 안 나와요.
그래서 신(信)이라고 하는 것은 확신이에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확신한다는 뜻이에요.
예배한다고 하면, 절하는 걸 우리가 예배라고 그러잖아요. 예배라는 것은 물론 문자로 보면, 절하는 거예요. 그렇지만, 예배한다고 하는 것은 헌신한다는 것을 뜻해요. 부처님의 가르침에 헌신한다 이 말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예불문에도 뭐라고 이야기해요? 몸과 마음 다 바쳐 헌신한다고 나오걸랑요. 그래, 예배한다고 하는 것은 헌신한다고 하는 뜻이에요. 뭐 3,000배 한다고 굴신운동 하는 게 아니고. 예배한다는 것은 헌신하는 것, 즉 부처님의 가르침에 헌신하는 것이 예배예요.
찬탄한다는 게 뭐예요? 찬탄한다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의 위대함을 내가 말로써 표현하는 것이 찬탄이에요. 우리가 흔히 염불(念佛)한다는 것도 사실 그거 찬탄이걸랑요. 구성(口聲), 입으로 말하는 것. 믿음을 바탕으로 해서, 예배와 찬탄을 통해 해탈하는 것, 이게 신해탈이에요. 바로 기도는 이거예요. 사실 우리가 하는 기도의 방식은 신해탈에서 사실 많이 벗어나 있죠.
이게 신해탈이에요.

또 하나는 혜해탈이예요, 지혜로 해탈하는 것. 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속박으로부터의 해탈, 즉 열반을 말해요. 다른 표현으로 하면, 깨달음이고.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표현하는 것이 수십 개예요. 깨달음, 열반, 해탈, 불사, 안온 등 여러 가지를 썼죠. 그래서 지혜로써 해탈한다 이거예요. 지혜로써 어떻게? 지혜로써 무명을 제거하고. 어떻게 지혜로써 무명을 제거하냐 하면, 직관으로 하는 거예요. 직관으로 무명을 제거하고 바로 열반을 증득하는 거지요. 이것은 뭐, 신해탈보다는 좀더, 아주 간명하죠. 그리고 직접적이고.

31) 심해탈, 바깥 환경으로부터 오염된 마음을 해탈시키는 것
그리고 세 번 째가 심해탈이예요. 마음의 해탈. 마음의 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염오되어 있걸랑요. 우리 마음이 왜 염오되어 있냐면, 우리 마음은 염오될 수밖에 없게 되어 있어요. 정자와 난자가 만나면 어떻게 돼요? 수정란이 되죠. 수정란이 세포 분열 하잖아요. 그렇게 되면 배아가 되죠. 그 배아가 성장하게 되면 그게 태아지요, 태아가 되고. 태아가 더 성장하게 되면 자궁 밖으로 나오잖아요. 우리 인간이 어머니 자궁 속에서 나왔다 그래서, 우리의 성장이 다 이루어지지 않죠, 뇌가. 우리 뇌는 어머니 뱃속에서, 자궁에서 다 성장하게 되면, 자궁을 못 나와요. 나올 수가 없어요. 골반을 못나오게 돼요. 머리가 크기 때문에. 뇌가 다 성장을 하지 않기 때문에 골반을 나올 수가 있어요. 머리가 굳지 않걸랑, 부드럽죠. 그럼, 태어나 가지고, 자궁 밖에 나와 가지고 0세에서 4세까지 뇌가 성장하죠. 사실 이 시기가 가장 중요한 시기예요.

난자와 정자가 만나 수정이 되었을 때, 그 때가 선성(先性)이라면, 태어났을 때부터는 후성(後性)이예요. 우리가 이 때를 후성 유전자라고 이야기하죠. 후성 유전자. 우리 인간은 선성 유전자가 있죠. 우리가 흔히 말하는 DNA가 있고, 엄마 뱃속에서 나오게 되면 후성적으로 영향을 받는 거를 후성 유전자라고 이야기해요. 그래서 지금은 선성 유전자보다 후성 유전자를 더 중요시 여기죠. 왜 그러냐면, 우리 뇌가 1세부터 4세까지 5가지 감각을 통해서 뇌가 성장해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5가지 자극을 받아서 뇌가 성장하게 되걸랑요. 성장을 하면서 뇌 회로가 연결되고, 완성돼요.
4세가 되면. 머리가 좋냐, 안 좋냐 하는 것은 머리의 뇌 회로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거예요. 뇌의 회로를 따라서 전기가 흐른다 말이에요. 우리가 이걸 뇌의 전자신호라고 그러죠. 뇌의 전자신호가 어떻게 보내지느냐? 그게 우리의 지능이에요. 알고 보면 우리가 기쁘고, 슬프고, 우울하고, 화나고, 이게 다 뇌의 전자신호이니 별거 없어요. 다 뇌의 전자신호일 뿐이야. 근데 이 뇌가 성장하면서, 5가지 감각을 통해서 성장하기 때문에 어떻게 돼요? 외부 환경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죠. 내가 자궁 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마치 백지 상태와 같아요. 흰 천이죠. 색깔로 말하면, 흰 색이예요. 붓다를 상징하는 색이 흰색이에요. 왜 그러냐면, 흰색이라고 하는 것은 청정무렴(淸淨無染)이기 때문에. 청정해서 어떤 물도 들지 않은 것. 우리가 태어났을 때는 청정무렴이지요.

32) 마음이라는 것은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경험과 결합되어 일어나는 작용
그런데, 우리가 5가지 감각을 통해서 뇌의 회로가 형성되면서, 바깥에서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주입받게 되었죠. 그게 긍정적인 정보이기도 하고, 부정적인 정보이기도 하죠. 우리는 성인이 되어도 어렸을 때 기억의 50%의 지배를 받아요. 실질적으로 유년기의 기억이 그 사람의 일생을 지배하는 거예요. 그 유년기의 기억이 성인이 되어서 무엇을 결정하고, 판단하는데, 50%의 영향을 주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유년기에 어떤 환경에서 자랐느냐가 사실 그 사람의 일생을 결정짓는 거예요.

우리가 마음이라고 이야기하지마는, 마음이라고 하는 게 뭐예요? 마음이라고 하는 건 과거의 기억이에요.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경험이 결합되는 것이 마음이에요.

우리가 수행을 하면서, 마음을 본다고 그러잖아요. 수행을 해서 마음을 보는 것, 다 과거의 기억이에요. 현재의 기억은 존재하지 않아요. 왜 그러냐면 기억은 다 과거의 기억이에요.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경험과 결합되는 거죠. 그것이 마음이에요.
우리가 뭐, 수행을 하면서 로바와 도다를 본다고, 탐욕심과 분노심을 본다고 그러는데, 내가 분노심 보는 거, 과거의 분노예요. 지금 내가 가만히 앉아 있는데 왜 분노가 일어나요? 누가 내 뺌때기 때려주기 전에는 안 일어난다고요, 그래서 그것은 과거의 기억이라 이 말입니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경험과 결합되는 거, 그것이 마음의 작용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유년기의, 0세부터 4세까지 바깥으로부터 입력되는 그 정보에 의해서 어떻게 되어요? 지배받죠.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본래부터, 발칸반도의 학살자, 도살자 밀로셰비치가 있는게 아니에요. 어렸을 때, 그 사람의 환경하고 관계가 있는 거예요. 설사 그런 인자가 있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어떤 환경에 놓이냐에 따라서 그 인자가 발아되기도 하고, 발아가 되지 않기도 해요. 우리가 밀로셰비치 같은 사람을 마키아벨리적 싸이코패스라 그러는데, 우리나라에도 마키아벨리적 싸이코패스가 높은 자리에 많이 올라가 있죠, 지금. 그런 현상이 왜 오냐? 환경에서 오걸랑요. 그걸 부처님이 염오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이걸 전문 용어로 객진(客塵)이라는 말도 쓰고, 래객(來客)이라는 말도 써요. 객진, 객이라고 하는 것은 바깥에서 온 번뇌라고 하는 뜻이에요. 바깥에서. 진애라고하는 것은 티끌, 번뇌걸랑요. 바깥에서 온거. 바깥에서 오염되었다 이 말이에요. 객진이라는 말도 쓰고, 래객이라는 말도 써요. 바깥에서 오신 손님. 아, 이거는 아주 너무 점찮지, 표현이. 래객? 바깥에서 오신 손님이야. 본래 우리 집에 있던 게 아니고, 바깥에서 온 손님이 주인 행세를 한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주인과 손님이 바뀐 거지요. 내가 주인 노릇을 해야 되는데, 바깥에서 온 손님이 지금 주인노릇하고, 나는 손님 노릇하는 거죠. 그거를 부처님은 염오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래객 또는 객진. 그 래객과 객진에 의해서 염오된 것을 회복시키는 것이 심해탈이에요. 청정심. 즉 외부의 객진과 래객으로부터 벗어나는 거. 그게 마음으로부터의 해탈. 그러면 청정심이 되죠. 청정심이라고 하는 게 뭐예요? 더 이상 바깥에서 온 손님이 나를 지배하지 않는 거예요. 우리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걸랑요. 환경의 지배. 환경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면 다 바깥에서 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심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객진인 래객의 지배를, 그 지배권을 내가 박탈시키고 제거해버리는 거예요. 제거해 버리면, 어떻게 되어요? 순수한 내 본래의 그 마음, 그 본성, 그 청정심이 회복된단 말이에요.

청정심이 회복되지 않으면, 열반을 증득할 수 없어요, 솔직히.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이 이 부분을 굉장히 많이 강조하죠. 그래서 심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쉽게 이야기하면 뭐냐면, 새로운 마음의 길을 여는 거예요. 새로운 마음의 길을 열어서. 새로운 마음의 길을 열면 어떻게 돼요? 새로운 마음이 형성되겠죠. 새로운 마음의 길을 연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냐면, 우리는 과거의 기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걸랑요. 인간은 절대 벗어나지 못하는 게 있어요. 그건 뭐냐면 자기의 마음, 즉 과거의 기억이에요. 이거 못 벗어나요. 수행에서 마음을 보라고 하는 것은 과거의 기억을 보는 거예요. 보면, 사라진다. 과거 유년기의 그런 것들. 나를 지금 억압하고 지배하고 있는 것들. 집에 가서 누워서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내가 하고 있는 행동, 내 부모님하고 얼마만큼 많이 다른가?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은 심해탈을 강조하는 거예요. 이걸 간단히 설명하자면, 부처님은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이라 그러죠. 탐진치 삼독. 탐심, 진심, 치심. 이게 염오심이걸랑요,
그러면 청정심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무탐, 무진, 무치죠. 탐심이 없고, 진심이 없고, 치심이 없는 거, 그게 청정심이예요.

염오심은 탐심, 진심, 치심이고. 부처님이 그래서 이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하셨어요, 제자들한테. 상두산이라고 하는 산에 올라가 가지고, 부처님이 설법을 하시죠.
“비구들아,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 네 눈이 불타고 있다. 네 귀가 불타고 있다. 네 마음이 불타고 있다. 대상에 의해서 불타고 있다. 탐욕에 의해서, 분노의 불꽃에 의해서, 어리석음의 불꽃에 의해서 타고 있다.”
이게 뭐냐면, 대상을 향해서 탄다는 거예요. 대상이라는 게 뭐예요? 객진과 래객이예요. 내가 그 전에, 대념처경을 강의하면서도 이야기했었는데, 이 세상에 딱 두 개밖에 존재 안해요. 나와 대상. 그 외에는 존재하는 게 없어요. 나! 나 이외에는 모두가 다 대상이에요. 내 자식, 내 부인, 내 남편, 다 대상이에요. 나 외에는 다 대상이에요. 나 외에는 다 대상만 존재하잖아요. 이것을, 부처님이 염오심으로부터 벗어난 심해탈이라고 하는 거예요.
좀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면, 상응부경전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이 마음은 오랫동안 탐진치에 오염되어 있다는 거예요. 마음이 오염됨으로써 모든 중생은 오염되고, 마음이 청정해짐에 따라 모든 중생이 청정해진다는 거예요. 이게 이 심해탈에 대한 이야기예요. 탐진치에 의해서 오염되어 있다 이 말이에요. 그 오염된 마음이, 마음이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중생이 오염되고, 마음이 청정해짐에 따라서 모든 중생이 다 청정해진다. 나중에 대승경전인 원각경에서 마음이 청정해지면, 세계가 청정해진다는 말도, 바로 이 바탕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냥 나오는게 아니구. 그래서 우리가 이거를 심해탈이라고 해요. 마음의 해탈.

33) 사람은 대상과 함께 존재하는 것 / 상청정할 수 없다
내가 왜 신해탈, 혜해탈, 심해탈을 이야기 하냐면, 우리가 이것을 이해를 해야 불성상청정(佛性常淸淨)이라고 하는 이 구절을 우리가 논할 수 있어요. 상청정이라고 그랬잖아요. 불성은 언제나 깨끗하나니. 불성을 먼저 해석하고 상청정을 해석해야 되는데, 상청정부터 해석을 하겠습니다.

상청정, 이게 굉장히 중요한 용어걸랑요. 상(常)이라고 하는 말은 '늘상', 즉 '언제나'라고 하는 말이에요. 언제나 청정해. 근데 우리가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가 없죠. 의문을 제기하고, 질문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언제나 청정하다고? 언제나 청정하다는 얘기는 뭐예요? 객진과 래객의 지배를 받지 않는 거 걸랑요. 근데, 자궁 밖의 세계는 이런 세계가 없어요.
가상의 세계에서는 언제나 청정할 수가 있는데, 현실의 세계에서는 언제나 청정한 건 없어요. 사실 현실세계는 이런 세계가 없어요. 내가 아까 심해탈을 이야기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어요.

혜능게는 굉장히 시원스럽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어요. 뭔 문제가 있냐면, 상청정이라는 것, 언제나 청정하다는 것. 근데 언제나 청정하다고 하는 것은 인간 세계에서는 없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나 청정한 인간이 있을 수 있나요? 인간세계에? 실질적으로 그런 인간은 존재할 수가 없어요.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언제나 청정한 세계가 있으면.

우리는 대상과 함께 존재하죠. 대상과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하는 이야기는, 우리가 대상에서 벗어나지 않는한, 우리는 대상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있으나, 대상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는 거죠. 왜? 인간세계를 벗어나기 전에는. 우리가 그걸 알아야 돼요.

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대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아니라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운 거예요. 자유로운 걸 벗어난다고 이야기해도 되겠죠. 그렇지마는, 대상과 분리되어서 떠나간다, 그런 뜻은 아니예요. 우리가 대상과 분리되어 떠나가려면 딱 한 가지 방법밖에 없어요. 그렇게 되면, 그 때 상여소리가 나오죠. 이제 가면, 언제 오냐고. 이제 가면 언제 오냐는 상여소리가 나지 않는 한 우리는 대상과 분리될 수 없다는 거예요.

상청정이라고 하는 말은 사실 명심견성설과 모순되는 이야기예요. 마음을 밝혀서 불성을 본다고 하는 선종의 기본적인 그 기치와 모순되는 이야기예요.
왜 그러냐면, 상청정하다면 명심견성할 필요가 없거든요. 왜? 알고 보면, 상청정이라고 하는 개념은 본래 부처라고 하는 논거에 근거가 되는 거예요.

요새 본래 부처라고 하는 분들이 많걸랑요. 나하고 아주 가까운, 조계종의 아주 그냥, 굉장히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스님들이 부처를 항상 이야기하죠. 저 먼저께 춘천에 오셔가지고 이 이야기를 나에게 하시던데....... 나야 뭐 그저 듣고 있었는데. 그 분의 주장은 그래요.
부처의 행을 하기 때문에 부처지, 즉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의 행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처의 행을 하기 때문에 부처라는 거예요.
말은 그럴 듯 하죠. 그러나 미안한 이야기지만, 부처가 아니면, 부처의 행이 나올 수 없죠. 이거는 주어가 바뀐 거예요.

헤겔의 변증법 논리에 의하면, 이거는 기본적인 개념이 성립되지 않는 이야기죠.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의 행을 하는 것이지, 부처가 아닌데 어떻게 부처의 행을 하나? 부처의 행을 한다는 것은 부처인 것을 전제하는 거예요. 부처의 행을 하기 때문에 부처라고 하는 것은 가상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있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어요. 엄격하게 얘기하면 우리가 상상하는 세계와 우리가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세계는 다르다는 거예요.
명심견성설이나 본래부처론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모순이죠. 상청정이라고 하는 것도 명심견성설과 모순이고, 본래 부처라고 하는 것도 명심 견성과는 모순이에요.

선종의 핵심적인 논거가 명심견성설인데, 여기에 모순되는 이야기이죠. 원전에 청정한 세계는 인간세계에는 없다는 거예요. 적어도 자궁 밖 세계에서는.
자궁 안에서는 언제나 청정하다는 거, 나 동의해요. 우리 인간이 가장 행복할 때는 어머니 자궁 속에 있을 때니까. 그 때 인간이 가장 행복해요. 가장 안전하고, 보호되고. 자궁 밖에 나오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지죠.

34) 불성은 자아, 여래장과 같은 말 / 비불교 사상이 아니라 반불교 사상이다
불성(佛性)이라고 하는 말을 해석하겠습니다. 불성이라고 하는 말은 중국 불교의 핵심적인 논거인데, 이 불성이라고 하는 말은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하는 말과 같은 뜻이에요.
여래장. 우리가 여래장이나 불성, 이런 말을 주로 대승불교에서 쓰고, 선종의 논거가 되는 것인데, 불성이라는 용어는 특히 대승경전인 열반경에서 강조되는 거예요.

엄격히 얘기해서 불성은 비불교 사상이에요. 불교 사상 아니에요. 이건 반불교 사상이에요. 불성이라고 하는 거는 자아와 동일한 개념이에요. 자아, 아트만....... 아트만 하고 동일한 개념이예요.
불성사상의 논거가 되는 열반경에서는 무어라고 이야기하냐면, '불성은 자아다'라고 천명하고 있어요. 불성이라고 하는 것은 곧 자아다. 아트만이다. 그래서 불성은 아트만이에요. 이거는 불교 사상 아니에요.

한국 불교의 많은 모순점은 여기에서 나오죠. 한국불교를 지배하는 사상은 불성사상인데, 불성사상 자체가 불교 사상 아니라는 거예요. 반불교적인 사상이라는 거예요.
엄격히 말하면, 한국불교는 불교인가? 라고 질문을 던지면, 확답하지 못하죠. 왜 그러냐면, 한국불교를 지배하고 있는 근본적인 개념은 불성이에요. 명심견성도 이 불성이라는데서 나오고, ‘본래 부처’라는 것도 여기서 나오고, 성불이라고 하는 개념도 다 여기서 나오는데, 불성이라고 하는 용어 자체가 비불교사상이라는 거예요. 이건 아트만 사상이에요. 불교의 기본적인 사상인 무아 사상과 양립하지 못해요.

불교 역사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자아를 인정하는 쪽으로 가죠. 내가 인간은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이유는 그거예요. 물론 인도라고 해서 고대 아트만 사상이 인도 전체를 지배했던 건 아니에요. 그러나 우파니샤드 이래 현대까지 아트만 사상이 인도의 주류 사상인 것은 확실하죠. 그건 부정 못해요. 그 아트만 사상을 부정한 사람도 있었지마는 수천 년간 오직 인도를 지배하는 주류 사상은 아트만 사상이에요. 모든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아트만 사상을 교육받고 크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트만 사상을 부정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면, 우리는 과거의 기억이 지배하거든요.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경험이 결합되는 거란 말이에요.

우리 마음에는 미래라고 하는 건 존재하지 않아요. 왜 존재하지 않는 줄 알아요? 미래는 기억도 아니고, 경험도 아니걸랑요. 그냥 상상하는 거죠. 추론이죠.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지. 과거와 현재는 경험돼어지는 거예요. 우리가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미래를 예측하고, 현재를 판단하죠.

나는 인도에서 부처님 이후에, 많은 스님들이 이 인도의 아트만 사상의 지배를 받았다고 봐요. 그렇기 때문에 이 불성 사상이라는 것도 나오고, 이 푸트칼라(불성?)라고 하는 사상도 나오고, 법체라는 말도 나왔다고 보는 것이죠.
사실 대승불교에서 주창하는 공이라는 것도 바로 이 아트만 사상을 배제한 불교의 무아 사상인데, 인도의 전통적인 아트만 사상이 주류이기 때문에 무아만을 주장하는 것을 회피하고, 공이라고 하는 제 3자적인 용어를 선택한 거예요.
엄격히 이야기해서, 부처님 이후의 불교는 단 한번도 주류(아트만)사상과 격렬한 논쟁을 해 본적이 없어요. 그건 중국에 와서도 마찬가지고, 현재 대한민국에서도 마찬가지고. 언제나 숨고, 회피했지요. 부처님 이후에 주류(아트만, 영혼) 사상과 격렬하게 논쟁하고 싸운 적이 없어요.
그러니깐 불성이라고 하는 거, 푸트갈라(개아 pudgala)라고 하는 거, 법체라고 하는 거, 이런 것들이 다 그래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불성은 근본불교사상이 아니다고 하는 거예요.
불성이라고 하는 거는 있을 수가 없지요. 무아인데 불성이라는 것이 언제나 청정하게 존재할 수가 있겠어요? 아트만과 어떻게 다른데? 그래서 불성이라고 하는 거는 아트만 사상이에요, 이건 불교사상 아니에요.

그래서 기본적으로 불성상청정이라고 하는 것은 성립되지 않아요. 신수게와 혜능게는 동일한 사람이 지었을 거예요. 원래 육조단경이라고 하는 것은 육조 사후에 누군가에 의해서 찬술된 건데, 기본적으로 불성상청정이라고 하는 것은 논거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 기본적으로 논거가 성립되지 않느냐면, 부처님의 심해탈과 반대가 되니까요. 오히려 신수게가 심해탈의 입장에 서 있죠. 그래서 이 혜능게 같은 경우에는 굉장히 시원해요.

35) 수행은 영화 보듯이 해야 하는 것
내가 재미있는 말씀을 하나 드리죠. 우리나라 스님들이 미얀마에서 너무 열심히 수행을 하니까 떼자냐 샤아도께서 한 번은 그러시더만. 너희는 전투하러 가냐? 뭐 그렇게 앉아서 좌선하는데 그렇게 살기가 번뜩이느냐 이 말이에요. 코리아에서 영화 구경 안 해봤냐? 그래, 다들 영화 좋아한다, 그러니까 영화 볼 때도 극장에 그렇게 들어 가냐? 수행이라는 것도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는 거죠. 영화 볼 때 긴장하고 보지 않잖아요? 뭔가 이빨 뽀드득 뽀드득 갈면서 안 보잖아요? 모든 것이 다 릴렉스 되죠. 편안하게 보잖아요. 그게 수행이라는 거예요. 수행이라고 하는 거는 뭔가를 극복하는 게 아니에요.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즐겁고 재밌는 것이지, 뭔가를 극복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기본적으로 수행에 대한 오해가 없어야 돼요. 지금 우리나라의 가장 핵심 문제는 뭐냐 하면, 수행에 대한 기본 개념에 대한 이해조차 없다는 거예요. 기본적인 어떤 이해조차 없어요. 그러니까 불교도 모르고.

불교수행은 세 가지를 통합해요, 간단히 설명하면 개념과 직관, 경험. 이 세 가지를 통합하는 거예요. 첫째는 개념, 둘째는 직관, 세번째는 경험. 개념과 직관과 경험이 통합된 거, 그게 불교 수행이에요. 다른 것이 수행이 아니고. 뭐 불성상청정이라 그래서 불성을 찾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찾아야할 불성이 어디 있나? 마음과 다른 어떤 불성이라는 게 있을 수 없잖아요. 내 아까 얘기 했잖아요. 마음은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경험이 결합된 거다.

36) 질량불변의 법칙과 연기법
그 다음에, 우리가 심해탈이 되면, 불구부정(不垢不淨)의 경계가 되는 거예요. 그 다음에 부증불감(不增不減 )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부증불감,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나니. 여기서 늘어나면 저기서 줄고, 저기서 늘면 여기가 줄어요.
사실 우리가 증감이라고 하면,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면 쉽죠. 내 주머니에서 돈이 나갔다고 하는 것은 뭐예요? 누군가의 주머니로 돈이 들어갔다는 걸 뜻하죠. 그렇지 않습니까? 네 꺼 없어졌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걸 가졌다, 습득했다는 걸 뜻해요. 누군가의 것이 없어졌다는 것은 내가 습득했다는 거죠.

그러면 부증불감은 뭐냐? 그렇지마는 총 질량은 변한 게 없죠. 총량은 변하지 않아요. 내 주머니에서 나가서 저 사람 주머니에 들어갔든, 저 사람 주머니에서 나와서 내주머니에 들어왔든, 총 그 양은, 그 질량은 변하지 않고 같죠, 항상.
언론에서 가끔 풍선효과라고 하는 말을 쓰잖아요. 이 풍선 효과라는 말을 쓸 때는 부정적인 의미로 쓴 말이긴 한데, 풍선이란 것이 어때요? 누르면 어떻게 돼요? 반대쪽으로 풍선이 밀려 나가잖아요. 내가 손으로 풍선을 쥐면 반대쪽으로 나가지만, 풍선의 그 전체적인 질량은 변한 게 없어요. 똑 같에요. 다만 어디에 힘을 가하느냐에 따라서 그 형태의 변화는 있죠. 그렇지만 총질량은 변하는 게 없어요. 부증불감이죠.

不生不滅-生滅 / 滅生
不垢不淨-垢淨 / 淨垢
不增不減-增減 / 減增
위 표를 보세요.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내가 이렇게 따로 띠어 논 거는 전체적으로 평면에 눌러 붙어 있으면 이게 잘 안 들어와요. 그런데 요것만 따로 띠어 가지고, 우리가 이렇게 보면 딱 눈에 들어오죠. 옆에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이거는 제쳐놓고, 결국은 생멸(生滅)이예요. 구정(垢淨)이고, 증감(增減)이고. 이걸 반대로 놓으면, 멸생(滅生)이 되고, 정구(淨垢)가 되고, 감증(減增)이 되죠.

세계는 점과 선으로 이루어져 있죠. 나는 그렇게 봐요, 점과 선. 하나의 점, 하나의 선. 내가 이해하는 세계는 하나의 점과 하나의 선일 뿐이에요. 점과 선으로 연결되는데, 연결된 점과 선은 변환되죠. 하나의 점과 하나의 선이 영원히 하나의 점과 하나의 선 인게 아니에요. 전환되고, 변환되면서 어떤 때는 점이 선으로 변하고, 어떤 때는 선이 점이 되죠. 점과 선이라고 하는 것은 유기적으로 전환되고, 변환돼요. 그건 유기적이에요. 이거는 생각으로다가 점과 선이 끊임없이 전환과 변환으로 거듭되면서 팽창되고, 축소되는 거 상상하면서 봐야 돼요. 그래야만 딱 들어와요. 그러기 때문에, 세계는 점과 선이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불생불멸하고, 불구부정하고, 부증불감하죠. 부처님이 이걸 연기라고 이야기했죠.
나는 연기를 점과 선으로 이해하죠. 점과 선. 모든 것은 점과 선이다. 하나의 점과 하나의 선이 끊임없이 전환과 변환을 거듭하는 거. 마치 물이 흐르듯이 끊임없는 흐름 속에서 전환되고 변환되죠, 점과 선은!!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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