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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5-03-17, (화) 6:14 am 

가입일: 2015-01-01, (목) 10:22 am
전체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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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스님, 반야심경강의 전문 / 반야의 지혜! 마음으로 흐르다...]
이 강의는 2012년 2~4월간 춘천 흥천사에서 혜천스님께서 강의하신 반야심경강의 8회 분을 하나로 모은 것입니다.
실상사에서 도법스님과 함께 강원을 열어 후학을 양성하기도 하셨던 혜천스님께서, 대승불교의 학문에 더하여 미얀마 등지의 상좌불교국에서 근본불교의 교학을 연구하고 깊이 수행하신 다음, 반야부경전을 재해석하신 강의를 여러 재가 제자들이 녹음 녹취해서 보리도량 카페에 올린 것을, 혜천스님께서 원불사 등 모든 불자들이 읽고 근본불교의 교학을 익히는데 도움 되라는 말씀에 따라 올린 것입니다.
저 역시, 혜천스님의 세상 학문에다 대승과 근본교학을 아우르는 해박한 지식과, 무상 무아 연기 불교의 근본진리가, 짧은 반야심경 한 편을 새롭게 해석해 내는 가운데서 여실히 드러나 있는 것을 보고, 대승불교적 관점에서 해석한 기존의 반야심경 주석 해설서들만 읽어서 불교관이 심하게 왜곡 변질되어 있는 한국 대부분의 불교인들이 이 강의록을 읽는다면, 그야말로 불교의 본래면목을 확실히 깨닫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절실합니다.
또한 이 강의는 스님이나 불자들이 불교의 핵심과 맥을 뚫는데 큰 도움이 되고, 대승불교의 실체를 명백히 파악함과 동시에 근본불교의 교학이 저절로 정립되어, 흔들림 없는 불교적 진리를 체득하게 될 것이라 확신하여, 제목 외에 아무런 표기가 없었던 강의를, 책으로 출판하고 누구나 읽기 좋도록 외람되지만 제가 임시로 소제목을 될수록 많이 붙였습니다. (원불사 단현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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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은 무엇인가?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원래 반야심경은 제목이 없습니다.
이건 번역을 하신 현장 스님이 붙인 거죠. 마하(摩訶)라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크다~' 라는 뜻이죠. 근데 무엇이 큰가요? 마하는 크다, 높다 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이 우주겠죠.
우주 보다 더 큰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왜 그러냐면 마음은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가장 크지만, 또 가장 적은 것이 마음이기도 해요. 왜 그러냐면, 인간의 마음은 모든 것을 담을 수 있지만, 무언가를 용납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담을 수 없죠. 그래서 인간의 마음은 가장 크기도 하고 동시에 가장 작습니다.
크고 작은 것은 비대칭 같지만은 사실 크고, 작음은 대칭이에요. 왜냐면 크고 작음이 있기 때문에 대칭관계가 유지되는 것이지요.
‘마하’라는 것은 크다! 라는 것이지만, 동시에 가장 적은 것이기도 해요. 대칭이 유지되려면 비대칭이 있어야 해요 그렇기 때문에 대칭이 유지되는 거예요.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라고 하는 말은 지혜의 완성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반야바라밀다를 현재형으로 보면, '지혜의 완성'이 되고, 또 과거형으로 보면 '완성된 지혜'가 되죠. 그래서 반야바라밀다는 완성된 지혜, 완전한 지혜이기도 해요. 그렇지만 진행형으로 보면, 현재 진행형으로 보면, 지혜의 완성이에요. 아직 완성된 건 아니에요. 지혜의 완성 도중에 있는 거죠.

즉 반야심경은 지혜를 완성하는 도중에 있는 걸 이야기하죠, 그래서, 여기의 심(心)은 마음이라고 하는 뜻이 아니고, 핵심이라고 하는 뜻이에요.
원래 중국 고어에서는 마음 심心은 심장을 뜻하는 말이에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음이라는 말을 중국 고대에서는 성性이라고 하는 말을 썼어요. 마음 성자(性). 그래서 중용(中庸)에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다. ‘천명이라는 것은 바로 성이다’라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보통 이것을 성명론(性命論)이라고도 이야길 하는데.
여기에서 심은 핵심이에요. 경(經)은 가르침이라고 하는 뜻이고요.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관자재보살이 깊은 지혜의 완성을 수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보고, 일체의 고를 벗어났느니라.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은 우리가 흔히 관세음보살이라고 부르죠. 관세음보살. 관세음이라고 번역한 것은 구마라집(鳩滅什: 344∼413)이라고 하는 중국 요흥의 진나라 때, 우리가 보통 전진, 후진이라고 부르는데, 전진왕 부견이 고구려에 불교를 전해줬다 그러잖아요. 전진왕 부견이 동진을 공격하다가, 부견이 80만 대군으로 동진을 공격했는데, 10만 동진군의 기습을 받아 가지고 부견이 거기서 죽어요. 그의 아들도 죽고. 그러고 나서 그의 부하 장수였던 요흥이 권력을 장악해서 진나라를 세우는데, 우리가 그걸 후진이라 그러죠. 구마라집은 바로 그 후진 때 사람인데, 그는 관세음이라고 그랬고, 현장스님은 관자재보살이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관세음보살이나 관자재보살은 같은 뜻인데, 이것은 부처님의 자비를 인격화시킨 거예요.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 오온개공)라고 그랬죠.
‘깊은 지혜의 완성을 수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본다’라고 그랬습니다.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密多時) 심(深)은 깊다고 하는 뜻이니까. 부처님은 이렇게 표현 하셨어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심심미묘(甚深微妙)한데, 어찌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겠는가? 부처님이 처음 깨달음을 얻었을 때, 이렇게 표현하죠. 그래서 '깊다'라고 하는 것은 '심심미묘하다'라는 뜻이에요.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密)는 아까도 얘기했지만, 지혜의 완성이에요, 그러니까, 관자재보살이 심심미묘한 지혜의 완성을, 행(行)은 행한다고 말할 때, 수행(修行)을 말하죠. 우리가 실천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실천이라는 것이 수행을 뜻하니까. 시(時), 때에. 관자재보살이 깊은 수행의 완성을 할 때에. 조견 오온개공(照見 五蘊皆空)이다.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보고. 조견(照見)이라는 말은 비추어 본다라는 얘기걸랑요. 비추어본다라고 하는 것은 뭐냐며는,

부처님이 라훌라한테 이렇게 말씀하시죠. ‘라훌라여, 생각할 때, 말할 때, 행동할 때, 거울에 비추어 보라!’ 거울에 비추라는 것은 마음의 거울을 말해요. 즉 마음에 비추어 보라는 거예요. 그래서 조견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거울에 비추는 걸 뜻하죠. 우리가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어요.
우리는 거울은 보지 않는다는 거예요. 우리가 거울 앞에 서는 것은 나를 보기 위해서 서는 것이지, 거울을 보기 위해서 서진 않아요. 그런데 우린 거울을 본다고 하는데, 거울을 보지 않아요, 나를 보지. 조견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보는 거예요.

2) 사티(깨어있음)의 반댓말은 미망(迷妄) / 무엇으로? 사티(sati)로.
그래서 조견이라고 하는 말은 사티라고 하는 말과 같아요. 사티라는 말은 불교 수행에서 가장 핵심적인 용어 중의 하나인데, 사티라는 말을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굳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번역한 것을 보면, 마음집중이라고도 번역하고, 마음 챙김이라고도 번역하는데, 나는 '깨어 있음'이라고 보통 쓰죠.
왜냐하면 사티라고 하는 말의 반대말은 미망(迷妄)이예요. 미망은 혼돈의 상태지요. 미망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착각하는 걸 말해요.
그래서 사티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사티라고 하는 말은 지혜라고 하는 뜻과 같아요, 사실. 사티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깨어 있는 상태'. 미망의 상태가 아니라 깨어있는 상태를 말하죠.

조견이라고 하는 말을 우리가 이해를 해야 하는데, 중국 남송 때 굉지 정각(宏智 正覺)이라고 하는 스님이 있죠. 우리가 보통 천동 정각이라고도 하는데, 천동(天童)산 경덕사(景德寺)에서 30년간 주지를 했기 때문에 천동이라고도 하고, 굉지는 돌아가신 후에 황제가 준 시호예요. 그래서 굉지 정각이라고도 하고, 천동 정각이라고도 하는 스님이 있는데,
이 분(天童 宏智 正覺 : 1091~1157)은 중국 조동종, 우리가 흔히 묵조선(默照禪)이라고 하는 조동선의 확립자죠. 이 굉지 선사가 묵조선이라고 하는 것을 확립했는데, 그 분이 묵조명(默照銘)이라고 하는 것을 지었어요. 딱 288자. 반야심경이 255글자걸랑요.
근데 이 굉지 선사의 묵조명은 288자예요. 묵조명에 보면 뭐라고 얘기 하냐 하면 '묵묵히 일체의 언어를 끊고 좌선 할 때, 불성의 영묘한 작용이 분명히 깨달음의 세계로서 그대로 드러난다.' 이게 지금 묵(默)을 굉지 선사가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묵묵히 일체의 언어를 끊고 좌선 할 때, 불성의 영묘한 작용이 분명히 깨달음의 세계로서 그대로 드러난다.'라고 했어요.
'비출 때에는 확연하게 텅 비어 있지만, 그 불성의 본체는 영묘히 작용하고 있다.' 이건 지금 조(照)를 설명하고 있는 거지요. 그러니깐 조견이라고 하는 말은 묵조라는 말과 같아요, 사실은. 묵조(默照)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쓰는 거예요. 묵묵할 묵(默)자와 비칠 조(照)자.
그래서 이 조견이라고 하는 말은 라훌라의 거울, 사티, 굉지 정각이 말한 묵조의 뜻하고 같아요. 여기서 공통점은 뭐냐면 나를 본다는 거예요. 비춰 본다고 하는 것은 거울을 본다는 뜻이 아니에요. 나를 본다는 거예요.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는 것이에요. 사티라고 하는 것도 대상을 보는 것 같지만 기실은 나를 보는 거예요.

3) 오온은 무엇인가? / 오온에 대한 바른 이해가 불교공부의 핵심
그리고 인제 오온(五蘊), 오온이 다 공했음을 비추어 봤다 그랬단 말이에요. 오온이라고 하는 것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예요. 이 5가지를 오온이라고 그래요. 불교의 핵심적인 개념이자 용어예요.

색(色)이라고 하는 말은 물질이에요. 물질. 동시에 우리 몸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오온이라고 할 때는 물질이라고 해석하면 안돼요. 우리 몸이에요. 근데 우리가 보통 이것을 다 물질로 해석해요, 물론 불교에서 우리 몸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로 봐요. 왜 물질로 보느냐면, 우리 인간의 육체라고 하는 것은 분자의 합성에 불과하니까요. 분자의 합성, 우리가 흔히 말하는 DNA 단백질 지방.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몸을 물질로 봐요. 그렇지만 우리가 오온에서는 이것을 물질로 해석하면 이해가 잘 안와요. 그냥 단순히 우리 몸이라고 이해를 해두시죠.

그리고 수(受)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느낌이에요, 느낌. 또 우리가 말하는 감수 작용, 우리가 말하는 감성이죠. 감성작용이 수예요. 인간은 감성의 동물이죠. 인간은 굉장히 민감해요. 왜냐하면 수의 기능이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쉽게 상처 받아요. 인간은 감성을 건드렸을 때, 불같이 화를 내죠. 누군가 내 감성을 건드리는 것은 마치 촉수를 건드리는 것과 같아요. 정확하게 말하면 독사의 대가리를 때리는 거와 같죠. 그래서 수라고 하면 보통 느낌, 감수라고 하지만 우리가 더 본질적으로 들어가면 감성작용이예요. 마음의 기능 중에서 감성작용.......

그리고 상(想)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생각을 구성하는 기억, 연상작용이에요. 우리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구성하는 거예요. 우리가 기억이라고 하는 말을 많이 쓰는데, 우리 기억이라고 하는 건요, 순서가 없어요. 정확하게 말하면 1살 때 입력된 기억의 정보와 80살 먹었을 때 입력된 기억의 정보가 순서로 보면 1살 때 입력된 기억의 정보가 가장 깊고, 깊이 있어야 되고, 80에 입력된 기억의 정보가 맨 끝에 있어야 되는데, 우리 뇌의 기억의 회로라고 하는 것은 좀 띨띨해 가지고 그런 게 없어요. 정확히 말하면, 두서가 없어요. 그래서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기억의 구상이에요. 연상 작용이죠. 그래서 상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생각을 구상하는 기억의 연상작용이 상이에요.

행(行)이라고 하는 것은 의도작용과 의지작용이에요. 행이라고 하는 것은 의도와 의지 작용을 갖고 움직이는 것이죠.

그리고 식(識)이라고 하는 것은 상황을 인식하는 작용. 즉 판단과 분별작용이에요.

그래서 색수상행식, 오온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화시키면 몸과 마음이에요. 색은 몸이고 수상행식은 마음이에요. 그런데 붓다가 마음을 4가지 작용으로 설명한 거예요.

첫 번째는 감수, 느낌인 감성작용, 두 번째는 생각을 구성하는 기억의 연상 작용, 세 번째는 의도와 의지의 작용, 네 번째는 상황을 인식하는 분별과 판단의 작용, 이렇게 4가지로 구분한 거예요.

4) 마음을 살피는 종교인 불교
남방 불교 논장에선 마음을 89가지 작용으로 구분해요. 그리고 대승불교, 유식불교에서는 마음을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6식에, 7식 마나식(말라식), 8식 아뢰아식, 9식 마타나식, 나중에 11식까지 선정을 하는데, 보통 8식까지 이제 이야길 하죠.

식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작용을 뜻하는 말이걸랑요. 그래서 보통 유식에서는 제8 아뢰아식, 보통 여래장식, 함장식이라고도 하는데, 보통 우리가 말하는 잠재의식을 말하는 거죠.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굉장히 중요하게 다뤘어요. 왜 중요하게 다루었냐면, 부처님께서는 마음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라고 얘기하죠. 왜 마음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냐면,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마음을 발견했기 때문에 인간이에요. 만약에 인간이 마음을 발견하지 못했으면, 그저 우리는 보노보노나 침팬지나 오랑우탄 등등하고 지금 사돈 맺고 살아야 돼요. 근데 우리가 마음을 발견했기 때문에 인간인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마음이 출발점이라고 한 거에요.
그래서 오온이라고 하는 것은 색, 수, 상, 행, 식을 말해요.

5) 공이란 무엇인가? / 힌두교에서 나온 용어, 공
여기 공(空)이라고 하는 말이 나왔잖아요. 공이라고 하는 말이 굉장히 어려운 말입니다. 우리가 공을 어떤 분들은 무(無)라고 해석하고, 어떤 분들은 수학에서 말하는 제로(0)라고 주장을 하는데, 수학에서 제로일 것 같으면, 그냥 제로라고 이야기하고, 무일 것 같으면 무라고 이야기하지, 왜 공이라는 말을 썼겠어요?

공이라고 하는 말은 무의 개념이 아니에요. 사실 중국에서는 이걸 무의 개념으로 봤던 것 같아요, 내가 보니까. 무의 개념으로 봤는데, 이 무라고 하는 말은, 이 공이라고 하는 말은 무의 개념이 아니에요.
이 공이라고 하는 말을 이해하기가 굉장히 쉽지가 않아요. 이 공이라고 하는 말은 대승불교에서 주로 공관 철학에서 이걸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데, 공이라는 말은 정확하게 말하면 무언가가 비어 있는 것을 말해요.

물질적으로 무엇이 비어 있는 것. 정신적으로 무엇이 비었느냐 않느냐는 우리가 논한다는 것은 좀 그렇지 않아요? 대체적으로 보면 물질적인 것이죠. 그래서 우주가 비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공간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 들어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공이라고 하는 개념은 우리가 쉽게 이해한다면, 공중관(空中管)의 개념으로 보면, 아마 좀 아주 가깝지 않은가 해요,

공중관. 공중관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인체에 공중관이라고 하는 것이 있지요. 무엇을 공중관이라고 하냐면 입에서부터 식도, 위, 장, 그리고 항문까지를 공중관이라고 불러요. 공중관은 뭐예요? 그야말로 비어 있어요.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인간이 살아서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공중관이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입에서 항문까지 비어 있기 때문이에요. 입으로다 들어가서 항문까지 가보세요? 비어 있어요. 우리가 비어 있기 때문에 음식을 섭취하죠. 그러면 그 음식이 장으로 내려가서 장에 흡수되잖아요. 그리고 배출돼요. 비어있기 때문에. 근데 이 공중관이라는 것은 비어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에요. 분명히 우리가 있잖아요. 있는데, 공중관 내부는 비어 있어요. 입에서 항문까지는 비어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인간은 존재할 수 있는 거예요.

우리가 공이라고 하는 개념을 쉽게 이해한다면, 공중관의 개념으로 보면 돼요.
그래서 이 공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옛날식으로 설명하면, 체성이 없다. 무체성(無體性), 몸 체자, 마음 성자 써서 체성. 무체성이라고 하는 말은 어떤 씨앗 같은 것은 없다는 얘기예요.
마치 양파를 까는 것처럼. 양파를 까서 들어가면 어떻게 돼요? 없죠. 파초를 까면 어떻게 돼요? 없죠. 파도 까보세요? 없어요. 그렇지만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걸랑요.

그래서 우리가 이 공이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불교의 흐름을 알아야 돼요. 왜 흐름을 알아야 되냐 하면, 대승불교 시대에 이 공이라는 말을 썼어요. 대승불교 이전에 물론 근본불교에서도 공이라는 말이 없다 비었다는 뜻으로 두어곳에 나오지만, 공이라는 말을 중요한 개념으로다가 다룬 것은 나가르주나예요.
우리가 말하는 용수(龍樹).

그래서 나중에 또 이야기 되겠지만, 공이라는 말 전에 어떤 용어를 쓰냐면, 계체(戒體)라고 하는 말을 쓰죠. 불교는 기본적으로 오온(五蘊)은 무아(無我)라고 하는 논리 위에 서 있어요. 오온은 무아다. 지금 오온 개공이라고 하는 것도 오온은 무아라고 하는 뜻이에요.
근데 무아라는 말을 안 쓰고, 대승불교 시대에 오면 공이라는 말을 써요. 아마 무아라고 하는 개념 자체가 좀 부담스러웠던 것 같아요. 그래서 공이라고 하는 말을 쓰는데, 그 전에는 계체라고 하는 말을 쓰걸랑요.

누군가가 출가를 해서 비구계를 받게 되면, 계체라고 하는 것이 형성된다고 주장하는 부파가 있었어요. 계를 파하든 안 파하든. 이것이 계체론(戒體論)이에요. 그 계를 받게 되면 계의 체성이 생기는데, 그것은 영원하다. 이 계체론 이외에 설일체유부에서 주장하는 것이 법체론(法體論)이에요. 법의 체성은 영원하다. 삼세에 걸쳐서 영원한 것이다.
그런데 이 계체나 법체나 다 영원하다는 거걸랑요. 근데 불교는 어떤 영원성도 인정하지 않아요.

6) 공은 부파불교의 유아론을 공격하기 위해 만든 대승불교의 용어
그래서 이 공이라고 하는 말은 부파불교에서 주장하는 그런 체성이라고 하는 것을 공격하기 위해서 공이라는 말을 사실 써요.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그런 체성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는 거예요. 계체가 되었든, 법체가 되었든 그런 체성이라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어떤 불변의 영원한 씨앗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그것이 공이라고 하는 용어로 쓰게 된 이유에요.

五蘊皆空 五蘊無我 人無我 法無我 我空 法空 無自性
7) 불교의 두 기둥, 무상과 무아 / 영원한 나라는 것은 없다
나열한 한문자(표시)를 보면,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되어 있고, 오온무아(五蘊無我)라고 되어 있죠. 오온개공이라고 하는 말은 오온무아라는 말과 같아요. 사실 반야심경은 조견 오온개공으로 끝나요. 왜 그러냐 하면, 나머지는 사실 이것을 부연 설명하는 거예요. 오온개공이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아까도 얘기했듯이 불교는 기본적으로 오온은 무아라고 하는 거예요. 오온, 색수상행식은 무아다. 이건 부처님이 일관되게 강조하는 건데, 오온이 무아라고 하는 말은 오온이 무상이라는 말과 같아요.

불교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의 골격이 있어요. 기둥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무상과 무아예요. 무상과 무아가 불교의 골격 이예요.
무아라고 하는 것은 아트만(atman)이 아니다라는 그 뜻이에요. 우리가 무아라는 말을 아트만이 없다고 해석하면 안돼요. 아트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지, 아트만이 없다고 하는 의미가 아니에요.
아트만이 뭐예요? 자아사상이죠. 불교를 이해하려면 필수적으로 인도의 사상에 대해서 정통해야 돼요, 사실은. 인도의 사상을 모르면 불교를 이해할 수 없어요. 그래서 오온은 무아다. 오온이라고 하는 것, 색수상행식, 이 다섯 가지는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색도 나라고 할 수 없고, 수도 나라고 할 수 없고, 상도 나라고 할 수 없고, 행도 나라고 할 수 없고, 식도 나라고 할 수 없다. 아니라는 것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나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왜 나라고 할 수 없다고 이야기 하느냐 하면, 나라고 하는 것은 인도 고대 브라만들이 뭐라고 주장 하냐 하면, 나라고 하는 것은 영원한 것이다 그랬걸랑요.
나라고 하는 것은 영원해서 불생의, 불멸의 존재예요. 이거는 지옥 불에 들어가도 아트만은 영원해요. 아트만은 불변의 존재예요, 영원해요. 근데 불교는 기본적으로 영원성을 인정하지 않걸랑요.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영원한 자아라는 건 있을 수가 없어요.

8) 무상의 뜻은 변한다는 것이 아니라 흐름
그래서 무상과 무아라는 것은 병렬 교차해요. 무상과 무아는 분리해 놓고 설명할 수가 없어요. 무상하기 때문에, 즉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영원한 나라는 것이 존재할 수가 없어요. 영원한 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영원한 것은 없어요. 무상이라고 하는 말은 변화한다는 말이에요. 변화하면 어떻게 되죠? 변화하면 어떻게 돼요? 새로워지잖아요.
우리가 무상이라고 하는 용어를 주역에서 이야기하는 변화처럼 생각하면 안돼요. 주역에서 이야기하는 변화와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변화는 달라요. 불교에서 말하는 변화는 뭐냐 하면, 흐른다고 하는 뜻이에요. 흐른다 이 말이에요.

우리가 한번 보자고요. 몸이라고 하는 것은 뭐예요? 분자의 합성이잖아요. 그래서 분자의 합성과 분자가 분해되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 인간이걸랑요. 분자의 합성과 분자의 분해과정이라고 하는 것을 뭐라고 설명하느냐 하면, 우리가 흐름이라고 설명할 수 있어요, 흐름. 우리의 이 단백질이라고 하는 분자가 합성된다 말이에요. 그리고 분해되잖아요. 그 과정이 흐름이에요. 우리는 언제나 흐름 속에 있는 거예요.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왜 그러냐면, 우리는 언제나 흐름 속에 있죠. 내 그 전에 강론에서 이야기 했잖아요. 우리는 언제나 과정 속에 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인과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왜 그러냐면, 과라고 하는 것은 결과인데, 인간세계에는 결과라고 하는 것은 없어요. 오직 과정만 있어요. 하나의 과정에서 또 하나의 과정으로 흐르는 것이지, 결과물이 아니에요.
내가 목표가 서울대다. 서울대 가서 졸업했다고, 그게 결과라고요? 아니죠, 과정이죠. 내가 서울대 가는 건 왜 서울대 가요? 그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요. 자아실현이니 뭐니 그거는 참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고, 폼 나게 나 잘 먹고, 잘 살겠다. 그래서 서울대 가는 거예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은 그저 잘 먹고, 잘 살면서 나를 복제하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결국 복제한다는 게 뭐예요? 분자를 새롭게 전이시키는 것. 그러니까 흐름 속에 있는 거예요. 우리는 언제나 흐름 속에 있는 거예요.
무상하다는 말은 뭐냐면, 흐름 속에 있다는 얘기예요. 흐름 속에 있다. 영원하게 어떤, 무엇이 결정 지워져 있어서 영원하게 무엇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언제나 영원한 흐름 속에 있다는 거예요. 하나의 과정에서 또 하나의 과정으로 넘어가고, 분자와 분자가 전이되고.... 다른 거 없어요.

9) 몸과 마음은 실체가 없는 것
요새, 마음공부라고 하는 표현을 쓰는 스님들도 많아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교에서는 마음공부라고 하는 말을 안 썼어요. 요건 도(道)쪽에 있던 분들이나 쓰던 말인데, 불교에서는 마음공부라는 말이 성립이 안돼요.

왜 성립이 안 되냐면, 오온은 무아이기 때문에. 마음공부라고 하는 말이 성립하는 것은 마음을 아트만화 시키기 때문이에요.

실질적으로 중국 선종에서 마음을 아트만화 시키고 있고, 우리나라 대승불교에서도 마음을 아트만화 시키고 있거든요. 마음을 자아처럼 인식하죠.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이야기 하듯이 흐른다고 했어요.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우리의 몸이라는 것이 뭐예요? 흐름 속에 있다고 이야기 했잖아요. 분자와 분자의 흐름 속에 있는 거예요, 우리 몸이라고 하는 것은 흐름 속에 있다고 말하는 거예요.

또 우리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몸과 떼어 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어요.
미안한 얘기지만, 마음을 작동시키는 기계는 우리 뇌예요. 우리 마음이 우리 육신과 분리되어 있다면 왜 치매가 옵니까? 아주 더 직설적인 표현으로 모가지가 떼어져도 움직여야 될 거 아니야? 모가지가 떨어지면 다 끝이잖아.

그러니까 마음공부라고 하는 말은 불교에서 성립되지 않아요. 왜? 마음이라는 것은 아트만처럼 어떠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흐름과 흐름 속에 있기 때문에. 몸도 흐름 속에 있고, 마음도 흐름 속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무상과 무아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병렬 교차 되죠. 병렬 교차된다고 하는 말을 쓰니까 조금 뭐 그런가요? 이진법을 연상시켜 보세요. 무상과 무아는 이진법처럼 병렬되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오온의 무아와 오온의 무상은 이진법의 원리로 이해하면 가장 쉬워요. 그래서 무상과 무아는 분리해서 우리가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근본불교식으로 말하면, 오온이라고 하는 것은 무아예요. 왜? 어떠한 아트만, 우리가 말하는 자아나 영혼이나 이런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예요. 오온이라고 하는 것은 몸이 되었든, 마음이 되었든 흐름 속에 있는 거예요. 분자의 흐름 속에. 이것을 물질이라고 우리가 이야기 하죠. 몸을 물질이라고 보는 이유는 그거예요. 무리 몸은 분자의 흐름이걸랑요.

이거는 현대 분자 생물학에서도 밝힌 것이지마는. 분자생물학에서도 우리 인간이라는 것을 분자와 분자의 흐름일 뿐이라고 이야기해요.

10) 위빠사나, 오온이 무상 무아임을 보는 것
그래서 사념처관(四念處觀)이라고 하는 것이 있잖아요. 보통 우리가 위빠사나라고 하는 거. 위빠사나라고 하는 것은, 오온이 무아임을 확인하는 것이 사념처관이예요.

신수심법(身受心法) 사념처라고 하는 것이 뭐예요? 오온이잖아요.
신(身)이라는 것은 몸이고, 수(受)라는 것은 색수상행식의 수(受)고, 심(心)이라고 하는 것은 상행(想行)심이고, 법(法)이라고 하는 것은 오온 자체를 말해요.
그러니까 위빠사나라고 하는 것은 오온이 무아라고 하는 것을 확인하는 거예요.

정확하게 말하면, 불교수행이라는 것은, 오온이 무아이고, 오온이 무상한 것을 확인하는 것이 위빠사냐 수행 이예요. 뭐 몸을 보느냐, 마음을 보느냐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런데 아쉽게도 위빠사나 한다는 사람들 마음공부니, 마음을 보느니 이런 헛소리를 해 싸요. 기본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불교를 모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불교의 골격이라고 하는 것은 무상과 무아가 병렬 교차하는 거예요. 그것을 확인하는 거예요. 무아를 확인하면 어떻게 되나요? 자의식이 해체되잖아요.
무정물(無情物)은 자의식이 없어요, 인간만이 자의식이 있어요. 자의식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상처받고, 화나는 거예요. 내가 길을 가는데 하! 저 스님 멋지네! 그 날 나 기분 좋아요. 아따, 겁나게 못생겼구먼! 이래 보세요. 기분 되게 나빠요. 왜 그러냐면, 나라고 하는 자의식이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자의식이 있기 때문에 함께 하기 어려운 거예요. 왜 부부싸움 하는지 아세요? 자의식 때문에 싸우는 거예요. 내 감성을 건드리걸랑. 충성을 외치면 싸울 일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충성 안 한다고 그러니까 싸우지, 충성하라고. 내가 똑똑한데 네가 왜 충성 안 하냐?
무아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무아라는 것을 확인하면 자의식이 해체되어 버리죠. 자의식이 해체되면 거기에서 자비가 나오는 거예요.

11) 오온무아를 다르게 표현한 부파불교와 대승불교 / 인무아 법무아, 아공 법공
그래서 오온이 무아라고 하는 것은 사념처관이예요. 오온개공이라고 하는 것도, 오온이 무아임을 보는 것이 오온개공이에요. 그래서 오온이 다 공했음을 비추어 봤다고 그랬잖아요.
위에 있는 한문자(표시)에다 오온무아라고 되어 있잖아요. 요거는 어떤 분이 질문을 했는데, 내가 설명을 해드릴 필요가 있어 가지고 조금 부연해 설명을 드립니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오온무아를 얘기해요. 부처님도 오온무아를 굉장히 강조해서 얘기했어요.
미안한 얘기지만, 무아라고 하는 말은 독립되어 쓰이지 않습니다. 오온이 무아라고 하는 의미로 쓰지, 무상과 무아와 고(苦)가 삼법인(三法印)이라고 하는 것은 부파불교 시대 때 그렇게 조직화시킨 것이지, 부처님은 오온이 무아라고 표현을 써요. 우리 몸과 마음 어디에도 우리가 말하는 자아라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 오직 흐름 속에 있다, 라는 것이 불교의 기본적인 입장입니다.

오온무아라는 말은 부처님이 제시하신 것인데, 이 말이 부파불교 시대가 되면, 인무아(人無我), 법무아(法無我)로 쓰이게 돼요. 오온이라는 것이 사람이잖아요. 그러니 인무아예요. 사람은 무아의 존재라는 거지요. 법이라고 하는 말은 대상이에요. 즉 우주죠. 정확히 말하면, 나 이외에는 다 대상이에요. 내 아내도 대상, 내 남편도 대상, 내 자식도 대상, 내 부모도 대상, 다 대상이에요. 이 세상에는 딱 두 가지 존재 밖에 없어요. 나와 대상. 나와 대상 외에는 아무도 없어요. 나 이외에는 인간도 대상이고, 동물도 대상이고, 자연도 대상이에요. 오직 나만이 나예요. 그 외에는 다 대상이에요. 그러니까 나라고 하는 것이 무아라면 당연히 대상까지도 무아가 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부파불교에서는 인무아, 법무아라는 것을 중요한 개념으로 쓰죠. 여기서 법은 대상도 되지만, 동시에 다르마(dharma)가 되기도 하죠. 그래서 여기서 법무아를 주장하는 것은 실제로 앞에서 나온 법체에 대한 의식이기도 해요.

설일체유부에서 법체를 주장하기 때문에. 이게 어떻게 보면, 복잡한 이야기이긴 한데, 대승불교 시대가 되면, 아공(我空), 법공(法空)이라는 말로 바뀌죠. 나도 공하고 법도 공하다.

중관불교(中觀佛敎)에서 아공, 법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죠. 아공, 법공이라는 것을 유식(唯識)에서는 무자성(無自性)이라고 이야기해요, 무자성. 자성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
자성이라는 것은 자아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우리가 오온무아라고 하는 말을 본질적으로 이해를 해야 돼요. 오온무아라고 하는 말이 본질적으로 이해가 안 되면, 오온 개공이라고 하는 말이 이해가 안 되죠.

12) 영원이나 자아라는 개념은 환상 / 자아가 있다는 것은 착각
조견 오온개공이라고 했는데, 오온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실제적인 자성이 없음을, 조견했다는 거예요, 사티로. 사티로 봤다는 거예요. 어떻게? 검색해서 봤다는 예기예요.

왜 조견이라고 하는 말을 쓰냐면, 불교에서 두 가지 개념을 중요하게 쓰는데, 삔냐타와 빠라마타예요. 삔냐타(Pinnyata)라고 하는 것은 환상이에요. 실재하지 않는 거죠. 그럼 빠라마타(Pramatta)라고 하는 것은 그 실재하는 본질을 말해요.

불교에서는 자아사상을 삔냐타로 보는 거예요. 미안한 얘기지만, 우리는 아직 과거 속에 머물러 있어요. 과거 속에 머물러 있다고 한 이유는 영원과 자아니 이런 개념 같은 경우는 3,000년 전에 성립된 거죠.

근데, 현대 생물학에서 보면 인간은 분자 덩어리일 뿐이에요. 몸이 되었든 마음(뇌의 작용)이 되었든, 분자가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하지요. 어떻게 보면, 우리는 3,000년 전의 가설을 아직도 믿고 있는 거지요.

그런데 붓다는 영원한 자아라는 것은 삔냐타라고 보는 거예요. 그건 삔냐타라는 거죠, 실재하지 않는 것.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거죠.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거짓이라는 뜻이죠. 다른 표현으로 하면 불선(不善)이죠, 선하지 않은 것, 악이에요.

빠라마타라고 하는 거는 뭐예요. 실재하는 거예요. 사실이고. 그것이 선이죠.
불교에서만 무아를 사실로 보는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 했듯이 인간 존재라고 하는 것은 분자의 흐름일 뿐이걸랑요. 거기에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어요. 하물며, 유체이탈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죠. 도 닦는 분들이 유체이탈 된다는 얘기 많이 하잖아요.
나도 20년 전에 도 닦을 때 보니까 어느 날 몸이 없데? 이거 다 삔냐타예요. 환상이걸랑요. 20년 전에 내가 앉아 있는데, 몸이 없어? 몸이 없는데, 그가 어떻게 살았겠어? 그건 환상이걸랑요. 정확히 말하면 뇌의 전자신호죠. 뇌가 그렇게 전자신호를 보내는 거예요. 본인 스스로 그 전자신호를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실은 우리가 자아라고 하는 것도, 자아 사상이라고 하는 것도 일종의 착각으로 보는 거예요. 뇌가 보내는 전자신호.

그래서 오온이 무아라고 하는 것은 인무아, 법무아를 낳고, 인무아, 법무아는 아공, 법공을 낳고, 유식불교에서는 이것을 무자성이라고 해버렸죠. 모든 것은 다, 자아라고 하는 것이 없다. 뭐 이해가 가시는 가요?

13) 오온이 무상하다는 것을 조견하면 곧 열반
조견 오온개공하니까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다. 오온이 다 공했음을 비추어 보고 나니까 일체의 고를 벗어났다 이 말이에요. 왜? 자의식이 해체되어 버리니까 고라고 하는 관념이 없어졌다 이 말이에요.

이 고(苦dukkha)라고 하는 것이 뭐냐면, 불만족스러운 것, 뒤틀려 있는 것, 동요되는 것, 불안정한 것을 말해요. 이 고라고 하는 말, 두카라고 하는 말은 뒤틀려 있다는 거예요. 뒤틀려 있다는 것은 뭐를 말해요. 불안정한 걸 말하죠. 뭔가가 불안정한 거예요. 안정되어 있지 않은 것을 말해요. 왜 안정되어 있지 않을까요? 착각 때문이죠.

영화 매트릭스(Matrix)를 보면, 매트릭스에 나오는 인간들이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고, 사랑하고 다 하잖아요. 근데 영화를 보면 그 인간은 통 속에 인간 건전지로 담겨져 있지요. 그 통속에서 인간 건전지로서 컴퓨터에 전원을 공급하기 위한 건전지로 있는데, 컴퓨터가 프로그램에 의해서 그 통속에 있는 인간 건전지의 뇌에 전자신호를 보내는 거죠.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고, 사랑하는 것은 다 컴퓨터가 그의 뇌에 전자신호를 보내서 그를 조종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이 실재인양 그렇게 느끼게 되거든요.
영화 매트릭스 보셨어요? 이 영화가 굉장히 중요한 영화예요, 거기는 불교뿐만 아니라 기독교, 고대 조로아스터교, 힌두교나 현대 심리학, 인지 과학, 모든 분야가 다 녹아 있는 것이 매트릭스라고 하는 영화에요. 근데 매트릭스라고 하는 영화를 보면, 오직 가상의 세계에서만 안경을 써요. 현실세계로 왔을 때는 안경을 안 써요. 네오가 매트릭스라고 하는 프로그램 속에 들어가 있을 때만 안경을 써요. 밖으로 나오면 안경을 안 써요. 왜 그 속에서만 안경을 쓸까요? 중요한 포인트예요. 그건 현실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현실이라는 것이 뭐예요? 실재하는 거잖아요.

14) 영원한 자아가 있다는 착각 때문에 괴로운 것
우리가 착각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내 자존심이라고 하는 것도 알고 보면, 착각이걸랑요. 막말로 이 세상에 자존심 없는 인간 어디 있나요? 자존심이라고 하는 건, 다른 표현으로 하면 뭐예요? 생존 본능이에요. 내가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존에 위협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에 거기에 대응하는 거예요.

대통령이 불러서, 너 총리할래? 그렇게 이야기 하면, 기분 나쁜 사람 없어요. 중국의 주은래(周恩來)는 마오쩌뚱(毛澤東) 앞에 무릎을 꿇고 보고를 했어요. 주은래가 자존심이 없어서 그런지 자존심이 있는데도 그랬는지, 그건 알 수가 없어요. 그러나 적어도 모택동과 함께 중국을 양분했다고 하는 주은래가 모택동 앞에서 무릎을 꿇고 보고를 했다는 거예요. 내 생각에는 주은래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어도 별로 자존심 상하지 않았을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모택동을 황제처럼 생각했으니까 그랬을 겁니다.

내가 자존감이 상하고, 내가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나에게 이익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나에게 이익이 주어지면 우리는 자존심, 자존감 그런 것 아무 소용없어요. 대통령 시켜 준다면 대낮에 옷 벗고 서울을 한 바퀴 돌라 그래도 돌려는 사람이 최소한 백만은 될 거예요. 그거 아무런 자존심 상하지 않아요. 부끄럽게 느끼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결국 우리가 고를 느끼는 것은 뭐냐면, 뒤틀려 있기 때문이에요. 뭐가? 미망(迷妄)에 의해서 착각과 착시죠. 자아라고 하는 것이 실재한다고 믿는 그 착각, 그 자의식. 그것이 해체되고 나니깐 자유로워 진 거예요. 왜? 하나의 흐름일 뿐이니까. 하나의 과정과 과정으로 넘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안 사안마다 열 받고, 화나고, 삿대질 할 일이 없는 거예요.

아까 얘기했듯이 서울 시내를 옷 벗고 한 바퀴 돌면 대통령 시켜준다 해도, 그건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에 부끄러울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근데 문제는 다른 측면에서 강요되면 다르겠죠.

그래서 오온이라고 하는 것이 공함을 비춰 보니까 모든 고액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거예요.
도일체고액은 원래 현장 스님이 끼워 넣은 거예요. 맨 뒤에 보면 능제일체고(能除一切苦 )라고 하는 말이 나오잖아요? 여기까지 끌고 가면 논리전개가 재미가 없으니까, 현장스님이 오온개공에서 결론을 끝내고 다시 시작을 한 거예요.

실질적으로 이 반야심경이라고 하는 것은 번역이지만 동시에 현장 스님의 창작 작품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원전보다 현장 스님의 반야심경이 훨 낫걸랑요. 훨씬 논리적이고, 훨씬 수준이 높아요.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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