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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5-01-13, (화) 7:29 am 

가입일: 2015-01-01, (목) 10:22 am
전체글: 9
53) 제법개공? / 공으로 볼 때 모든 것은 부질없는 것이 될까?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 故心無가애 無가애故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지혜를 얻을 바 없는 까닭에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는 고로 마음의 장애가 없다.
마음의 장애가 없기 때문에 공포가 없으며, 전도몽상을 벗어나 열반을 증득하니라.

그 다음에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지혜도 없고 또한 지혜의 증득도 없다.
얻을 바 없는 고로. 반야경에서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은 반야 지혜예요. 근데 여기서는 지혜를 부정해 버렸어요. 지혜도 없어. 역무득, 무득이라고 하는 것은 지혜 또한 얻을 게 없다고 하는 뜻이에요. 지혜도 없고, 또한 지혜로 얻을 것도 없어. 증득할 거도 없어~~~.

지혜는 빛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해와 달, 별과도 연결이 되죠. 인도의 고대인들이 생각했던 지혜는 해와 달과 별과 같은 빛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지혜는 선(善)이예요. 그리고 그 반대가 되는 무명은 불선(不善)이 되죠, 악(惡).
인도의 신을 데바라고 부르는데, 데바라고 하는 말 자체가 빛나는 존재라고 하는 뜻이에요. 신이라고 하는 것은 빛나는 존재예요. 지혜를 성취한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인도 고대인들에게는 자기가 신이 되는 걸 뜻하였는지도 모르죠. 왜 그러냐 하면 지혜를 얻는다고 하는 것은 빛나는 존재가 되었다는 걸 뜻하니까요.
그러기 때문에 바라문의 이 논리가 성립되었는지도 몰라요. '하늘에는 천신(天神)이 있고, 땅 위에는 인신(人神)이 있다. 인간의 신, 그들이 바로 우리다'라는 논리가 성립됐는지도 몰라요. 그래서 지혜는 빛이에요.

근데 여기에서는 그 자체를 다 부정해버렸어요. 공이라고 하는 절대적 입장에서 보면, 지혜도 공할 뿐이죠. 왜 그러냐하면, 제법이 다 공하기 때문이죠.
조주선사의 삼전어(趙州三轉語: 泥佛不渡水 金佛不渡爐 木佛不渡火)라고 하는 것이 있어요.
중국 당나라 조주 스님이 어느 날 법상에 올라가서 이런 법문을 하죠. 니불은 불도수하고, 금불은 불도로하고, 목불은 불도화한다. 즉 진흙으로 빚은 불상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쇠붙이로 만든 불상은 용광로를 건너지 못하고, 나무로 만든 불상은 불을 건너지 못한다...
흙으로 만든 불상은 물을 건너지 못해요. 왜냐면 흙은 물에 풀어져 버리니까. 쇠붙이로 만든 불상은 용광로를 건널 수 없죠. 왜 그러냐면 녹아버릴 테니까. 나무로 만든 불상은 불을 건너지 못해요, 타버리니까. 이게 조주스님의 조주 삼전어라는 거예요. 전어라고 하는 것은 전환시켜 주는 말이에요.

'조주삼전어'와 '무지역무득'의 공통점이 무엇이냐 하면 절대의 부정이 아니라는 거죠. 여기서는 부정의 논리로다 전개하고 있지만 이건 부정도, 긍정도 아니에요, 사실. 내가 처음에도 얘기했지만, 인도의 논리는 이래요. 니띠 니띠 니띠,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 '아니야'를 거듭하면 뭐가 돼요? 하루 종일 아니야를 외치면 뭐가 되겠어요? 이것이 인도의 논리 방식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그런 말을 쓰잖아요. 강한 부정은 긍정이다.

여기에서는 일단 표면적으로 지혜도 부정하고, 지혜를 얻는다고 하는 것도 부정하죠. 지혜라는 말은 깨달음이라는 말과 거의 동격으로 쓰이기도 해요. 지혜라고 하는 것은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예지를 말하는 거예요. 우리가 말하는 ‘머리가 좋다, 아 저 사람 참 똑똑하고 지혜가 많아’와 같은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지혜라고 하는 용어와 불교에서 쓰는 지혜라고 하는 용어는 같은 용어를 쓰지만 그 의미는 조금 달라요.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라고 하는 의미는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예지(叡智), 즉 정견을 말해요.
앞에 8정도에서의 정견과 정사를 말해요.
조주 스님도 '금불은 불도로하고, 목불은 불도화하고, 니불은 불도수다' 라고 하는 것은 조주 선사가 던지고자 하는 그 의도와 목적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눈에 보여 지는 자체는 진실이 아니라는 거예요.

금강경에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이면 즉견여래(則見如來)라고 하는 뜻과 조주의 삼전어는 궤를 같이하는 거예요. 범소유상이, 보여지는 바, 보여지는 것, 여기서 상은 부처님의 몸을 말해요.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니, 다 거짓이다. 약견제상비상이면, 만일 부처님의 육신과 비상, 육신이 아닌 것, 부처님의 정신입니다, 그것을 보면. 즉견여래라, 여래를 본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이걸 어떻게 해석하느냐면, 약견제상비상, '만일 상이 상 아닌 줄 보면' 이렇게 해석하는데, 이게 한국 불교가 가지고 있는 가장 폐단으로 그저 자기 식으로다 아전인수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이면 즉견여래(則見如來)라고 하는 것은 보여 지는 바 상, 즉 부처님의 육신, 32상 80종호라고 하는 것은 다 거짓이라는 거예요. 왜 거짓이냐? 붓다라고 하는 것은 붓다의 32상 80종호, 즉 인격으로서의 붓다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즉 다르마 붓다, 진리로서의 붓다를 얘기하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상과 비상, 그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봐야 비로소 여래, 붓다를 본다. 라고 하는 것과 조주 삼전어의 뜻은 궤를 같이하는 거예요.

보여 지는 것, 우리 불자님들도 불상을 다 부처님, 부처님 하는데, 그건 잘못된 표현이에요. 그저 불상은 눈에 보이는 부처(상)일 뿐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초기불교에서는 불상을 엄금했어요. 불상을 만들어서는 안 돼요. 엄격히 말하면 불교의 교리에서 보면, 불상은 존재하면 안돼요. 이건 위배되는 거예요.

54) 보살이라는 용어의 변천과 대승행자의 여섯 가지 수행
지난주에는 '지혜도 없고, 또한 지혜의 증득도 없다, 얻을 바 없는 고로' 했는데, 지난주에는 지혜를 부정했어요. 그러기 때문에 지혜도 없고, 지혜를 얻을 것도 없다. 그리고 여기 와서는 논리 전개가 완전히 또 바뀌었어요.

보리살타는 보살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보살이라고 하는 것은 보리살타의 준말이에요. 우리가 앞에서 관자재보살이 관세음보살이라고 이야기했지마는, 정식으로 이야기하면 관세음 보리살타예요. 관자재 보리살타이고. 보리살타의 원어는 보디사트바(Bodhisattva)인데, 이걸 우리가 보통 음사(音寫)라 그러죠, 음역, 번역을 하지 않고 그대로 적는 거예요. 원어 그대로 중국말로 적은 거예요. 우리말로 보리살타이지 쭝국어로 읽으면 보디사트바 비슷하게 나오죠. 외국어를 우리 한국어로 적었다 이렇게 보면 딱 맞아요.

보리살타의 뜻은 우리가 이걸 보통 각유정(覺有情)이라고 번역하죠. 초기에는 이걸 각유정이라고 번역했는데, 나중에는 하지 않습니다. 그냥 다 음사해 버리죠. 각유정이라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이냐면, 깨달음을 지향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뜻이에요.
본래 이 보살이라고 하는 용어는 보통 명사가 아니고 고유명사였어요. 즉 부처님의 전생, 그리고 보리수 하에서 성도하기 이전의 붓다를 지칭할 때 보살이라고 하는 용어를 썼어요. 경전에 보면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깨달음 이후에는 붓다라 칭하지만, 그 이전에는 보살이라는 명칭을 써요. 고타마 싯다르타라고 하는 본명을 쓰지 않고, 대체적으로 경전에서 기술할 때는 성도 이전에, 태어나서 출가 이후를 보살이라고 칭해요. 그래서 이 보살이라고 하는 용어는 본래 붓다의 전생이나 깨달음 이전의 시기에 한정해서 쓰는 용어예요.
근데 이것이 후기 대승불교 시대에 오면, 육바라밀을 닦는 대승 수행자를 지칭하는 용어로다가 일반화 되죠.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는 까닭에(菩提薩陀 依般若波羅蜜多). 반야바라밀다는 우리가 다 알고 있다시피 반야의 지혜입니다. 빤냐를 번역하면 지혜가 되고. 반야는 이거 음사한 거예요. 바라밀다(到彼岸 Paramita)는 보살의 수행을 말하는 것으로 고통이 없는 피안의 세계로 건너간다는 뜻이예요.

처음에 행심반야에서 이야기 했듯이, 처음에는 번역을 했는데, 나중에 오면 번역을 안 해요, 그냥 음사를 해버려요. 왜 음사를 하냐면, 중국에서 얘기하는 지혜라는 의미와 불교에서 말하는 반야라고 하는 의미가 차이가 있어요. 차이가 있기 때문에 나중에는 음사를 하죠.

반야바라밀다라는 용어가 반야심경에 다섯 번 등장해요. 그마만큼 중요한 용어라는 얘기예요. 여기서 반야바라밀다는 육바라밀을 뜻하는 거예요. 반야바라밀다라고 하나만 나오지만 반야바라밀다, 하나를 들어서 여섯 가지를 표하고 있는 거예요. 왜냐면, 대승 수행자가 닦는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육바라밀 수행이걸랑요. 육바라밀 수행이 뭐냐 하면 보시(報施)바라밀, 지계(持戒)바라밀, 인욕(忍辱)바라밀, 정진(精進)바라밀, 선정(禪定)바라밀, 지혜(知慧)바라밀. 이게 육바라밀이에요. 이 육바라밀은 대승 수행의 근본이기도 하지요.

첫 번째가 보시바라밀. 보시라는 것은 요새 식으로 말하면 나눈다고 하는 나눔의 의미인데, 정확히 대승불교적인 용어로 말하면 순수 증여를 뜻해요. 증여하는 것, 증여인데 순수 증여죠.
사실 우리의 증여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는 순수 증여를 하지 않걸랑요. 우리가 어떤 것을 증여하면 반드시 대가가 있죠.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 마음속에는 내가 무엇을 증여하게 되면, 마음에 뭔가 남는다는 거예요. 즉 증여한 것에 대한 마음이 남아 있다는 거죠.

그래서 금강경에 보면, 무주상 보시(無住相布施)라고 하는 말이 나오잖아요. 무주상보시라는 말은 뭐냐면, 순수 보시라고 하는 뜻이에요. 불교에서는 순수 증여가 돼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왜 순수 증여를 이야기 하느냐?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내 앞에 있는 것, 내 것, 즉 내 앞에 등기되어 있고, 내 통장이라고 할지라도 그거 내꺼 아니에요. 이 세계에 존재하는 물질은 어느 누구의 소유라고 보지 않아요. 누구의 소유도 아니기 때문에 내가 주는 거 아니에요. 단지 나는 이 세상에 살면서 그거를 관리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관리자일 뿐이야! 내가 소유자가 아니고 관리자이기 때문에 내 소유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관리하는 것을 누군가에게 증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 것이라고 하는 관념을 가져서는 안 돼요. 기본적으로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은 어느 누구의, 개인의 소유라고 보지 않는 거예요. 단지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그 물질을 사용하는 거죠. 즉 물질을 사용할 권리를 갖고 있는 것이지, 물질에 대한 소유의 권리를 획득하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무주상 보시를 이야기 하죠. 본래 내 것이 아니니까.

그래서 부처님은 증여라는 것은 상호 증여라 하는 거지요. 어떤 일방적인 증여가 아니라 상호 증여하는 거예요. 서로가 서로에게 증여하는 거지요. 대체적으로 불교에서는 두 가지 증여를 이야기해요. 물질의 증여, 그리고 정신의 증여. 어떤 사람은 물질을 증여하고, 어떤 사람은 정신을 증여한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물질로만 행복할 수 없걸랑요. 물론 정신만으로도 행복 할 수 없죠. 물질과 정신이 균형이 맞아야 되걸랑요. 그러기 때문에 상호 증여예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재가자는 물질을 증여하고, 출가자는 정신을 증여한다는 거죠. 그래서 상호 증여의 원리예요.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쌍가라고 하는 것은 재가자와 출가자의 공동체걸랑요. 출가자는 정신적인 것을 증여해 주고, 재가자는 물질적인 것을 증여해 준다, 그래서 상호 증여하는 것. 그것이 보시 바라밀이예요.

본래 이 육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대승불교에서 주장을 했지만, 본래 아함경에서도 누누히 강조되는 것들이에요. 근데 그것을 바라밀이라고 하는 말을 붙였죠, 바라밀다. 바라밀다는 바라밀과 같은 말인데....... 바라밀이라고 하는 말은 완성이라고 하는 뜻이잖아요. 그러니까 좀 더 강조한 것이지요. 즉 보시라는 것에 바라밀을 붙여가지고 좀 더 강조한 거예요.

두 번째는 지계 바라밀. 지계는 윤리와 도덕이에요. 우리가 계를 지킨다고 하는 것이 뭐냐면, 그 당시의 수행자가 지켜야할 보편적인 윤리, 도덕을 말해요. 살생하지 않는다, 도둑질하지 않는다, 거짓말 하지 않는다, 뭐, 술 먹고 해롱대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그 당시 수행자들이 당연히 지켜야 될 윤리, 도덕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처음에는 계라고 하는 것을 설하지 않아요. 왜 설하지 않느냐 하면, 설할 필요가 없었던 거예요. 왜? 이런 것들은 단순히 불교 수행자뿐만이 아니라 그 당시 자이나교나 아지비카교나 또는 바라문 출가 수행자들이나 모두 말하지 않아도 지켜야 되었던 윤리 도덕이에요. 그렇게 때문에 특별히 그걸 이야기 하지 않는 거죠.

근데 나중에 이걸 범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계라고 하는 것이 제정이 되는데, 왜 계가 제정이 되냐 하면 그 당시는 누구나 윤리 도덕이기 때문에 필요가 없었어요. 근데 계가 제정된다는 것은 뭐예요? 형벌을 가하기 위해서죠. 어떤 것을 범하게 되면, 교단에서 축출해버리는 형벌이 따르게 되죠. 계라는 것은 반드시 거기에 벌칙이 따라요. 그래서 지계의 의미는 본래 윤리, 도덕이에요. 지금은 계라는 것을 설하고, 받고 하지만 그 시대에는 수행자들이 당연히 지켜야 했던 것이죠.

우리가 여기서 중요하게 짚어야 할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런 주장들을 많이 해요. 깨달음은 윤리, 도덕을 초월한다! 스님들이 뭐 그런 이야기들 많이 하잖아요. 맞아요. 깨달음은 윤리, 도덕을 초월해요. 왜냐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윤리나 도덕과 같은 그런 관념하고는 관계가 없걸랑요. 그러니까 초월해요.

그렇지만 우리가 여기서 분명하게 알아야 될 것이 있어요. 깨달음은 윤리 도덕을 초월하지만, 깨달은 인간은 윤리, 도덕 안에 있다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안 가시는 가요? 깨달음이라는 것 자체는 윤리 도덕을 초월하죠.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경지를 뜻하는 거니까. 그러지만 깨달은 인간은 윤리 도덕 안에 있다는 얘기예요. 깨달은 인간은 가장 윤리, 도덕적인 인간이죠.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이라고 하는 경지는 윤리, 도덕을 초월하지만 그 인간은 윤리, 도덕을 초월할 수가 없어요. 윤리 도덕 안에 있다는 거예요.

윤리 도덕이라는 게 뭐예요? 인간이 지켜야할 근본을 말하는 거예요.
우리나라 불교의 문제점 중 하나는 인간이 지켜야 될 근본을 지키지 않고 마치 깨달음이 따로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마치 윤리 도덕을 파괴하는 것을 깨달음처럼 생각하는데, 만약에 부처님이 보면 이렇게 이야기 할 거예요. 저 사악한 자들은 어떤 자냐? 이건 절대 사악한 자예요, 깨달은 자는, 가장 윤리 도덕적인 사람이 깨달은 자예요.

중국에서 보면 특히, 명나라 말기 이탁오(李卓吾)하고 경정향(耿定向)이 인륜지지(人倫之至)와 미발지중(未發之中)으로 충돌하게 되는데, 이 둘은 다른 게 아니에요. 인륜이라는 게 뭐예요? 인간이 지켜야 될 근본 도리를 말해요. 미발지중이란 게 뭐예요? 희로애락이 일어나기 이전의 단계를 말해요. 인간의 본성을 뜻하는 말이 미발지중이걸랑요. 인간의 근본도리와 인간의 본성. 그러면 인륜도 그 본성이에요.

그러면 왜 이것 때문에 충돌하느냐 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인륜이라는 거는 오륜(五倫)이예요. 이 오륜이라는 것은 엄격히 말하면 유교의 본질은 아니에요. 군신, 부부, 부자, 부모 이런 오륜이라고 하는 것은 한나라 시대 때 동중서(董仲舒)가 만든 거예요. 한나라 때 동중서가 인륜지지 이론을 바탕으로 해서 한나라의 중앙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만든 것이 오륜이에요. 이 오륜이라는 것이 본래 동중서 이전부터 있던 게 아니라 동중서가 만든 거라고요. 동중서가 이걸 만들어 가지고 결국은 모든 사람에게 굴레를 씌운 거죠. 오직 한 사람에게 충성하게 하기 위해서. 국가와 황제에게 충성하고, 집에서는 아버지에게 충성하고. 그래서 인륜지지와 미발지중이 다른 것이 아니죠. 인륜을 떠나 미발지중이 있을 수 없고, 미발지중을 떠나 인륜이 있을 수 없걸랑요.

내가 왜 이 이야기를 말씀드리는가 하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윤리와 도덕을 초월하는 것이 맞지만, 깨달은 인간은 윤리와 도덕을 초월할 수 없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면, 윤리와 도덕을 초월한 인간은, 그 인간은 사악한 인간이거든요. 초월할 수가 없어요.

세 번째, 인욕바라밀. 인욕이라고 하는 것은 인내죠. 그 당시에 수행자가 반드시 갖춰야 될 덕목이 인내입니다. 왜 인내가 강조 되냐면, 인내하지 않으면 수행할 수 없어요. 그저 풍찬노숙(風餐露宿)을 밥 먹듯 하잖아요. 본래 수행자는 나무 밑에 3일 이상 머물러서는 안 돼요. 지붕 아래 들어가선 안 되죠. 비바람을 맞고 강변에서 그냥 자야 되고, 풀 벌레한테 뜯겨야 되고, 탁발하려면 그 무서운 개한테 물리기도 해야 되고, 오직 인욕하고, 인내하지 않으면, 수행자 생활을 할 수가 없어요.
뭐, 요새는 미안마 떼자냐 사야도의 표현을 빌리면, 출가라고 할 것도 없죠. 그저 편안하니까. 밀림에 들어가서 독사하고 동거할 일도 없고, 뭐 풍찬노숙할 일도 없고, 편안하죠.

그래서 인욕이라고 하는 것은, 인내라고 하는 것은 수행자가 필수적으로 갖춰야 될 덕목이에요. 부처님도 이 인욕을 굉장히 많이 강조하셨어요. 인욕과 인내라는 게 뭐예요? 견디는 힘이에요. 견디는 힘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죠. 우리가 제일 잘 못하는 게 이거예요, 견디지 못하는 것. 쪼끔만 불편하면 못 참걸랑. 쪼끔만 내 맘에 안 들면 못 참걸랑. 반찬이 쪼금만 맛이 없어도, 그저 당장에 그냥 얼굴 표정이 달라지고. 수행자는 반드시 견디는 힘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네 번째는 정진 바라밀. 이 정진이라고 하는 것은 간단하게 생각하면 불퇴전의 의지와 행동을 말해요. 불퇴전의 의지와 행동이 정진이에요. 다른 게 정진이 아니고, 불퇴전의 의지와 행동. 의지만 있어도 안 되죠. 행동이 있어야죠. 부처님도 말씀하시잖아요. 불퇴전의 의지와 행동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고.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도 이거잖아요. “아난다야! 방일하지 말고 정진해라”. 정진이라고 하는 말은 끊임없는 노력이에요. 끊임없이 노력하고, 끊임없이 인내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격려하는 게 정진이에요.

다섯 번째는 선정 바라밀. 이 선정 바라밀은 뭐냐면, 언제나 마음이 평정되어 있고, 안정되어 있는 것을 말해요.
우리는 선정 그러면 앉아 가지고 도를 닦아서 무슨 뭐 목석처럼 아무 감정도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하~ 그거야 망부석이 더 잘하지. 그거는 망부석이 더 잘 하잖아요. 영릉에 가보니까 예종 때 그 자리에 있던 망부석이 아직도 선정에 들어 있더라고! 선정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평정되어 있는 거를 말해요.

그리고 지혜 바라밀. 여섯 번째죠. 지혜바라밀은 뭐를 말 하냐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지혜는 무분별지를 말해요. 무분별지, 분별하지 않는 거. 우리는 분별을 많이 하잖아요.
선종에 신심명(信心銘)이라고 하는 책이 있어요. 보통 중국 선종의 3조라고 하는 승찬대사가 지었다고 하는데 그 신심명은 처음에 '지도무난(至道無難)이요, 유염간택(唯嫌揀擇)이라'고 나와요. 지도무난이요, 유염간택이라. 보통 이걸 어떻게 번역하느냐면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게 없다. 오직 간택을 염의(嫌疑: 꺼리고 미워함)할 뿐이다. 이렇게 해석하죠. 성철 스님도 이렇게 해석하고, 다 이렇게 해석해요.

근데 나는 '지도무난'을 '지극한 도'는 이라고 해석하는 거에, 나는 동의하지 않아요. 왜 그러냐 하면, 지도무난이거든요.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게 없다?' '지(至)'라고 하는 말은 만약 '지도(至道)'를 하나의 단어로 보게 되면, 여기서 '지'는 의미가 없어요. 한문에서 지는 '궁극의 단계'를 뜻하기 때문이지요.
왜냐면 도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인데, 그럴 필요 없거든. 지도무난에다,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어려울 게 없다'. 나는 이렇게 해석해야 맞다고 봐요.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게 없다가 아니라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어려울 게 없다. '유염간택'이라, 오직 간택을 꺼리는 것뿐이다.

간택이라고 하는 것이 뭐예요? 가리는 것이에요. 우리가 세자빈을 간택한다고 그러잖아요. 간택이라는 말이 뽑고 가린다는 뜻이걸랑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어려울 게 없어요. 단지 분별심만 떨쳐내면 된다. 이게 신심명의 첫째 구절이에요. 그러니까 지혜라고 하는 거는 뭐냐? 분별심을 떨쳐내는 것이예요. 그게 지혜예요.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예지를 말하걸랑요.

그래서 우리가 보통 지혜라고 하는 것은 불교에서는 간혜(乾慧)라고 그래요. 메마를 간(乾)자를 써가지고 간혜.... 간혜라는 말은 성숙되지 않은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이 지혜라고 하는 말이나 반야라고 하는 말이 같은 말인데, 나중에 반야를 지혜로 번역하지 않는 이유는 거기에 있어요.
그래서 반야라는 것은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예지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보통 지혜라고 할 때는 불교에서는 이것을 간혜라고 그런단 말이에요. 그런 부분에 차이가 있죠.

55) 정혜쌍수는 육바라밀 중 2개만 강조한 것
그래서 보시 바라밀, 지계 바라밀, 인욕 바라밀, 정진 바라밀, 선정 바라밀, 지혜 바라밀 이 여섯 가지를 실천, 수행하는 것을 대승 수행자라 그래요. 원래 대승의 수행은 6바라밀을 닦는 거예요.
그렇게 본다면, 후대에 정혜쌍수(定慧雙修: 선정, 지혜를 함께 닦는 수행법)만을 주장한 것은, 뒤에 다섯 번째, 여섯 번째니까, 앞에 4개는 빠져 부족하게 됐죠. 사실 본래 육바라밀은 하나가 전체 여섯 개를 표하고, 여섯 개가 하나를 표하게 돼요. 그래서 8정도와 6바라밀은 8개와 6개로 나뉘어 지지만, 하나가 전체를 포함하는 것이죠.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이라고 하는 말이 여기에 해당되지요. 마치 우리가 내리는 비를 보고, 내리는 눈을 보는 거와 같죠.
내리는 비를 보면 어때요? 한 방울의 빗방울과 전체의 빗방울이 동시에 내리잖아요. 눈도 마찬가지고요. 한 송이의 눈송이와 전체의 눈송이가 동시에 내리잖아요. 하나냐 전체냐를 구별하고, 구별 짓는다고 하는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내리는 비와 내리는 눈을 보고 있으면 하나의 눈송이냐 전체의 눈송이냐, 하나의 빗방울이냐 전체의 빗방울이냐 라고 하는 것을 구별하고, 구별 짓는다고 하는 자체가 의미가 없어져요. 한 번 눈이 내리고, 비가 내릴 때 지켜보세요.
연기의 이론이라고 하는 것도 같아요. 점과 선의 논리도 마찬가지고요. 비가 내릴 때 한 번 지켜보세요. 한 방울과 전체의 방울, 그것을 구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요? 그래서 육바라밀과 팔정도는 하나와 전체가 구별되고 하는 게 아니에요.
보시 바라밀을 닦으면 나머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과 지혜가 동시에 같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왜? 순수 증여라고 하는 것은 이 다섯 가지가 없으면, 이루어질 수가 없걸랑요.

내가, 이 부끄러운 얘기지만 여기도 정기적으로 수금하러 오는 친구가 있어요. 우리가 마음이 약해 가지고, 어떤 때는 일주일에 한 번씩만 와줘야 되는데, 한 이 삼일 돌이로 오면 햐, 쟤가 너무 자주 오는 것 아니야? 이런 생각이 들어요. 실제로 그래요. 뭐, 내가 나가서 돈벌어서 주는 것도 아닌데, 아, 쟤는 좀 너무 자주 오네, 솔직히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우리가 증여를 한다고 하는 것도 순수 증여가 되려면 그 다섯 개가 같이 움직여 줘야 되거든요.

56) 심무가애, 마음에 장애가 없다는 핑계로 / 불교에서 윤리 도덕을 깔아뭉갠 사악한 경허
심무가애 무가애고(心無가碍 無가碍故), 마음의 장애가 없다. 마음의 장애가 없는 고로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기 때문에 마음의 장애가 없다. 마음의 장애가 없기 때문에'라고 했어요.

가애(가碍)라고 하는 말은 장애라고 하는 뜻이에요. 여기서는 마음의 장애를 들었지만, 불교에서는 두 가지 장애를 얘기해요. 물질적인 장애, 그리고 정신적인 장애. 그러기 때문에 수행자는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 이 두 가지 장애가 적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 두 가지 장애가 많으면 수행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수나라 시대 때, 천태지의(天台智의) 선사는 수행을 하려면 반드시 다섯 가지를 구족해야 한다고 그랬어요. 수습지관 좌선법요((修習止觀坐禪法要)라는 책에서 구족 오연(具足 五緣)이라고 주장을 하셨죠. 중국 불교에서 딱 한 명의 스님만을 선발하라면, 이 수나라 때 천태지의 선사를 선발해야 돼요. 그래서 천태지의 선사를 중국 불교의 완성자라고 불러요. 천태지의 선사는 나중에 선종이나 교종, 둘 다 이 천태지의의 영향을 안 받은 종파가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천태지의 선사는 중국 불교의 완성자예요.

천태지의 이후에는 실제적으로 더 이상 불교가 나아진 게 없어요.
천태지의 선사는 오연을 구족해야 된다 그랬어요. 첫 번째는 지계청정(持戒淸淨)이예요. 윤리와 도덕을 갖추고 지켜야 된다는 거예요.
윤리와 도덕을 불교에서 깔아뭉개기 시작한 거는 경허 성우(鏡虛 惺牛) 이후예요. 소위 한국 불교 근래의 중흥조라고 하는 경허 성우 이후에, 불교가 윤리 도덕을 깔아뭉갠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그런 적이 없어요.
일제 강점기 때 대표적인 불교 학자였던 이능화는 경허를 사악한 자라고 그랬어요. 지금 한국 불교에서 하늘같이 떠받드는 경허를 이능화는 사악한 자라고 그랬단 말이에요.

두 번째는 의식 구족(衣食具足)이예요. 입을 것과 먹을 것이 부족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헐벗고 굶주려서는 수행할 수 없다는 거예요. 이 부분에서는 원효하고는 분명히 다르죠. 원효는 발심수행장에서 그저 주린 배를 움켜쥐고서 이런 식으로 수행하라고 그랬는데, 천태지의는 그것을 한 칼에 베어버리죠. 그래서는 수행할 수 없다는 거예요. 입을 것과 먹을 것이 궁핍해서는 안 된다고 선을 그은 거지요.

세 번째는 한거정처(閑居靜處). 주거 환경이 좋아야 된다는 거예요. 주거환경이 열악하면 수행하기 어렵다는 거예요. 우리가 맹모삼천지교라고 하는 것도 주거 환경을 이야기 하는 거거든요. 맹모가 주거 환경이 나빠서 세 번을 이사했다고 그러잖아요. 천태지의 선사가 이 주거환경을 이야기해요. 주거 환경이 좋아야 된다는 거예요.

네 번째는 식제연무(息諸緣務). 간단히 말하자면, 일을 너무 많이 만들지 마라! 이 소리입니다. 일을 너무 많이 만들면 수행할 수 없다는 거예요. 요새는 스님들이 쓸데없는 일에 너무 많이 나서요. 어떤 스님은 세상에 명성을 얻더니, 뭐 당을 만들겠다고 설치다가 안 되니까 외국으로 피신 갔다가 돌아오기까지 하고 있어요.

다섯 번째는 득선지식(得善知識). 다섯 번째는 좋은 스승을 만나야 된다는 거예요. 선지식은 선우(善友)라고 하는 뜻과 같아요, 좋은 친구. 불교에서는 가장 좋은 스승이 가장 좋은 친구라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잖아요.
“아난다여! 좋은 친구와 함께하는 것은 이 도의 전부다.” 이 말은 아난 존자가 좋은 친구는 이 도의 절반에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했을 때,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에요. 좋은 친구와 함께하는 것은 이 도의 전부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을 원용해서, 이렇게 쓰죠. 좋은 친구는 우리 삶의 전부다.
선지식은 좋은 친구를 말해요. 가장 좋은 스승이 가장 좋은 친구걸랑요. 좋은 친구가 내 옆에 있다면, 내 삶의 전부예요. 나는 성공한 사람이에요. 부처님은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나야말로 너희들의 가장 좋은 친구다.”

천태지의 선사는 이렇게 다섯 가지를 구족해야 된다는 거예요. 윤리와 도덕을 준수해야 되고, 입을 것과 먹을 것이 부족해서는 안 되고, 주거 환경이 좋아야 되고, 일을 너무 많이 만들지 말고, 좋은 스승을 만나라!
이 다섯 가지가 구족해야 장애가 없다는 거예요. 우리는 그저 발심수행장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도를 닦으라니까 너무 거기에 매몰되어 버리는 경향이 있죠. 왜 천태지의 선사가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그렇게 해서는 한 달, 두 달은 어찌 버틸 수 있지만, 1년, 2년, 10년, 20년은 버틸 수 없다는 거예요.

57) 무상 무아를 체득한 자에게 공포는 없다
그 다음에 무유공포(無有恐怖). 마음의 장애가 없다. 마음의 장애가 없기 때문에 공포가 없으며, 공포는 두려움이죠. 두렵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하는 거.

공포는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우비고뇌(憂悲苦惱)를 말해요. 생로병사. 생로병사는 고(苦)에서 제가 이야기했죠, 근본 고입니다. 우리가 가장 두려운 것이 뭐예요? 우리가 가장 두려운 것은 사실 미래에요. 우리는 미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두렵죠. 우리 미래는 생로병사 안에 걸려 있기 때문이지요.
미래를 알면, 걱정하지 않아요. 쉽게 설명하자면, 식량이 떨어져도 내가 내일 300억 복권이 당첨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아무 걱정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양식이 떨어지면 걱정이 되는 거죠.
생로병사와 우비고뇌. 우는 근심, 비는 걱정, 고는 고통, 뇌는 번뇌, 이것이 공포예요.
고통에는 부처님은 여기에다 붙여서 몇 가지를 더 이야기 하죠.
원증회고(怨憎會苦). 원증회고는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거예요. 내가 정말 싫걸랑. 근데 싫어하는 것과 만나요. 내가 정말 저 사람 싫거든, 그런데 직장에서 그 사람 만나야 돼. 원수를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는 듯이 어쩔 수 없이 만나는 것이죠. 옛날에는 그 남자가 아니면 죽을 것 같아서 결혼했는데, 지금은 그 남자 때문에 죽을 것 같은 거. 그게 원증회고예요. 싫어하는 것과 어쩔 수 없이 만나는 것, 피할 수 없이 만나야 되는 고통이 원증회고예요.
그리고 애별리고(愛別離苦). 애별리고는 내가 좋아하는데 그 좋아하는 것과 별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내가 원하지 않는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물건, 내가 좋아하는 것과 어쩔 수 없이 결별해야 되는 것. 아까는 내가 싫어하는 것과 어쩔 수 없이 만나는 것인데, 이번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과 어쩔 수 없이 떨어진단 말이에요.
구부득고(求不得苦). 내가 얻고 싶은데, 얻을 수 없는 것. 나는 강론에서도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명예와 권력과 돈과 사랑을 추구하는 것을 나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봐요. 나는 그것을 욕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욕망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있어요. 욕망이 나쁜 게 아니에요. 긍정적인 욕망은 좋은 거예요. 나를 발전시키고, 역사를 발전시키거든요. 부정적인 욕망은 안 되겠죠. 모든 것을 파괴시키니까. 파멸하니까.
돈, 권력, 명예,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에요. 뭐, 그거는 칭찬해도 괜찮아요. 권력을 얻기 위해서 힘쓰고, 명예를 얻기 위해서 힘쓰고, 돈을 얻기 위해서 힘쓰고, 사랑을 얻기 위해서 힘쓰는 것은 부끄러워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부자가 되고 싶으면서도, 부자가 되고 싶지 않은 척 하는 것이죠. 가식이죠. 권력을 보면, 그 권력 앞에 고개를 숙이면서도 그 권력을 무시하는 듯이 이야기 하는 것이죠. 대표적으로 한국 사람들이 이런 경향이 있어요. 정치를 우습게 깔보면서, 막상 권력자들 앞에는 맥을 못 추는 면이 분명히 있어요.
명예를 얻으려고 추구하는 것, 사랑을 얻으려고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에요.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아요. 원래 돈과 명예와 권력과 사랑은 한 가지예요. 우리가 이걸 네 가지라고 생각하시죠. 이건 한 가지예요. 돈, 권력, 명예, 사랑은요, 언제나 같이 움직여요. 돈이 없으면, 명예와 권력과 사랑을 얻을 수가 없어요. 권력이 없으면 다른 것도 얻을 수 없고요. 명예가 없으면 다른 것도 얻을 수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뭐냐 하면, 돈과 권력과 명예와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지만 추구해도 얻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그걸 알면, 문제가 없죠. 얻고 싶어서 추구할 순 있지만, 얻어지지 않았을 때 그것이 얻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돼요.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고가 생로병사와 이 세 가지예요. 우리가 뭐, 오음성고(五陰盛苦)도 이야기하는데, 사실 오음성고라 하는 것은 생로병사 그 자체를 뜻하기 때문에, 특별히 이야기할 필요가 없죠. 이것이 공포예요.

공포가 없으며....... 왜? 마음의 장애가 없으니까, 마음을 다 비우고 털어버렸으니까. 오온이 공하기 때문에, 오온이 공하다고 보면, 무슨 마음의 장애가 있겠어요? 돈과 명예와 권력과 사랑을 추구했다가 얻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공하기 때문에, 본래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래 내 주머니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어놔도 아까울 게 없죠. 그런데 참 이상해요. 왜 내 주머니에 들어오면, 나갈 때는 아까운 생각이 들까요?

58) 자아 영혼이 있다는 맹신에서 벗어나야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 전도몽상을 벗어나.... 원리라고 하는 말은 멀리 여읜다고 하는 말인데, 멀리 여읜다고 하는 것은 벗어난다고 하는 뜻이죠.
전도라고 하는 말은 뒤집어져 있다고 하는 말이에요. 전도는 뒤집어져 있는 것, 즉 무슨 말이냐면 거짓이 진실을 가리고 있는 것을 말해요. 그게 전도예요. 거짓이 진실을 가리고 있는 것. 몽상이라고 하는 건 뭐예요? 허구적인 관념이죠. 전도 몽상을 벗어나. 그래서 전도몽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릇된 것을 진실로 믿는 거예요.
인간은 먼저 입력된 정보를 맹신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요. 인간은 먼저 입력된 정보를 맹신해요. 그게 아주 인간의 치명적인 약점이죠.
먼저 강론에서 이야기를 했었는데, 1년 7개월간의 러일 전쟁(1904.2.8~1905.9.4) 때 일본에서 영양소파와 각기균파가 치열하게 논쟁하게 돼요. 러일 전쟁 때 해군에서 3만명이 각기병으로 죽고, 육군에서 2만명이 각기병으로 죽어요.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죽었어요. 5만 명이 죽어나갈 때는, 죽지 않고 살아는 있지만 그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다까키 가네히로(高木兼寬)라고 하는 사람이 해군 군의관인데, 이 각기병을 퇴치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죠. 그러다 혹시 영양 문제가 아닐까 싶어서 이것저것 먹이다가 보리밥을 먹였는데, 해군에서 이것을 퇴치해요. 그렇지만 해군에서 이미 3만 명이 죽었어요. 러일전쟁이 약 1년간 진행 되는 그 와중에요.
그래서 해군에서 일본 육군에 병사들이 죽어가는 것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보리밥을 먹이니까 괜찮다라고 하는 통보를 해주는데, 일 육군의 군의부장이었던 모리 린타로((森林太郞)라고 하는 사람은 각기병은 균에 의해서 생기는 병이라고 봤어요. 병균에 의해서 생기는 병. 다까키 가네히로가 영양소파의 우두머리고, 모리 린타로, 이 사람 필명이 모리 오가이(森 鷗外)인데, 이 모리 린타로가 각기균파의 우두머리예요. 모리 린타로는 해군이 통보한 것을 믿질 않아요. 그 와중에 2만 명이 또 죽죠.
1910년에 최초로 일본의 스즈끼 우메타로(鈴木梅太郞)라고 하는 사람이 비타민 B1을 발견하죠. 최초로 비타민 B1을 발견한 사람은 스즈끼 우메타로라고 하는 농예화학자예요. 그러면서 비로소 각기병은 병균에 의한 병이 아니라 영양소에 의한 병이라는 것이 밝혀지죠.
근데 재밌는 것은 모리 린타로는 각기병은 각기균에 의한 병이라고 하는 그 소신을 꺽지 않아요. 이미 다 밝혀졌는데, 이 모리 린타로는 죽는 순간까지도 각기병은 각기균에 의한 병이라고 하는 소신을 안 버려요. 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참, 소신이 있다고 해야 할지, 이렇게 멍청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싶죠. 그릇된 것을 진실로 믿는 거예요. 모리 린타로는 각기균에 의한 병이라고 하는 것을 진실로 믿는 거예요, 죽을 때까지.

59)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올바른 뜻
그러기 때문에 금강경에서는 유아상 유인상 유중생상 유수자상(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을 이야기하죠. 여기서 상(相)이라고 하는 것은 허구적인 관념을 말해요.
유아상, 나라고 하는 허구적인 관념, 인상, 개아라고 하는 허구적인 관념, 이거 사람이라고 하는 뜻이 아니에요. 유중생상, 중생이라고 하는 허구적인 관념, 유수자상, 영혼이라고 하는 허구적인 관념, 이러한 관념들이 있으면 즉비보살이라~ 보살이라고 할 수 없다.
나라고 하는 허구적인 관념, 개아라고 하는 허구적인 관념, 중생이라고 하는 허구적인 관념, 영혼이라고 하는 허구적인 관념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다(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非菩薩)라는 것이죠.

우리나라에 나와 있는 금강경의 90%가 이걸 엉터리로 해석해요. 아상(我相)은 당연히 나 아(我)니까 나라고 해석하지, 인상(人相)은 나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이 인이라고 하는 것을 대체적으로 한문에서 '너'라고 하는 뜻으로도 쓰걸랑요, 그러니까 이거는 너라고 하는 뜻이다. 너라는 것이 아니라 '개아'라고 하는 뜻이에요. 원어는 푸트갈라(pudgala), 저 먼저께 강의에서도 얘기했죠. 푸트갈라, 개아. 여기 중생(衆生)이라는 말이 나오니까 수자(壽者)는 뭐 부처라는 뜻이라나? 또 이렇게 이야기 하는 분도 있었죠. 뭐 영원히 살고자하는 욕망이라고도 하는데, 수자라고 하는 것은 영혼이라고 하는 뜻이에요. 원어는 지와(Jiva)라고 하고, 영혼을 말하죠.
이미 이것이 원전이 번역 되어서 이것이 잘못된 해석이라고 하는 것이 다 알려져 있는데도, 아이고~ 참, 불교대학 총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라디오에 나와 가지고, 인상은 너라고 하는 뜻이고, 수자상은 영원히 살려고 하는 뜻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깐 이게 한번 정보가 먼저 입력이 되면 그만인 겁니다. 이것은 일본의 모리 린타로만 그러는 게 아니야. 불교 대학 총장도 그러니 참, 이게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런 면에서 우리는 굉장히 빨라요. 과감하게 버리니까.

60) 대승의 상락아정은 비불교적이다
불교에서는 사전도(四顚倒)를 이야기해요. 상전도(常顚倒), 낙전도(樂顚倒), 아전도(我顚倒), 정전도(淨顚倒), 이렇게 네 가지 전도가 있다는 거예요. 상전도라고 하는 것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을 부정하는 거예요. 즉 무상을 부정하는 거. 락전도는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부정하는 거예요. 그리고 아전도는 제법무아(諸法無我)를 부정하는 것, 즉 무아를 부정하는 것이고, 정전도는 열반적정(涅槃寂靜)을 오인하는 것, 즉 열반을 오인하는 것. 이것이 사전도예요.
네 가지 전도몽상이라는 거죠. 무상을 부정하고, 영원하다고 생각하고. 고를 부정하고, 고를 락이라고 생각하고. 무아를 부정하고, 자아를 있다고 여기고. 열반적정을 잘못 오해하는 것. 이것을 불교에서 사전도라고 그래요.

無가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고로 마음의 장애가 없다. 마음의 장애가 없기 때문에 공포가 없으며, 전도몽상을 벗어나 열반을 증득하느니라.

61) 열반은 팔정도 수행을 통해서 무상 무아를 뼛속 깊이 체득하는 것 / 그래서 탐진치의 불이 꺼지고 평안을 얻는 것
지난주에 원리 전도몽상까지 했죠. 전도몽상을 벗어나, 구경열반究竟涅槃, 열반을 증득하리라. 구경은 결과라는 뜻이고. 전도몽상을 벗어나면, 그게 바로 열반이에요. 열반은 고집멸도 할 때 설명을 했었는데, 오늘은 열반에 대해서 경전에서 부처님이 어떻게 열반을 규정하고 있는가에 대해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에서는 가장 높은 단계예요. 결국은 열반을 증득하는 것이 최종의 목표니까요. 이거는 이제 부처님께서 바차쿠다 화유경(밧차고타 화유경)이라고 하는 경에 부처님께서 열반에 대해 바차라는 사람이 질문한 것에 대해서 답하신 건데,
“이 인생은 두카로 차 있다. 그리고 그것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때문이다. 사람이 어리석어서 격정의 희롱하는 바가 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격정을 없애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 격정이 없어지고 보면, 불안이니 괴로움이니 하는 것도 없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치 훨훨 타오르던 불도 그 땔감이 다하고 나면, 꺼져 버리는 것과 같다. 그것을 나는 열반이라고 한다.”
바차라는 분이 열반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라고 질문했을 때, 부처님께서 답하신 거예요.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소멸되는 것이 열반이라는 거죠.
또 어떤 비구가 부처님의 수석 제자인 사리불한테, 열반에 대해서 질문한 것이 나옵니다. 열반이라고 하는, 이 니르바나(nirvana)라고 하는 말이 부처님 당시에는 굉장히 생소했던 용어예요. 니르바나라고 하는 말이 부처님 이전에는 불교 이외의 교를 외도라고 하는 말을 썼는데, 요새 말로 하면 이교도인데, 거기에서는 이 니르바나라고 하는 개념이 나오지 않아요. 그래서 이 열반이라고 하는 개념에 대해서 좀 상당히 어려워했어요. 비구도 이 열반이라는 개념이 이해가 안 되어서, 사리불한테 묻죠. ‘사리불이여! 열반, 열반하고 말하는데 열반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건 사리불의 답이에요.
“벗이여! 무릇 탐욕의 소멸, 분노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 이것을 일컬어 열반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벗이여! 그 열반을 실현할 방법이 있는가? 거기로 갈 길은 있는가?’
“벗이여! 이 성스러운 팔정도야말로 그 열반을 실현하는 방법이다.”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소멸되는 거라고 얘기하죠.
부처님이 가섭 3형제에게 상두산에서 그 제자 1000명들에게 설하신 설법 중에,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 라고 하는 설법이 이거예요.
그 대상을 향해서 불타고 있다. 탐욕의 불꽃에 의해, 분노의 불꽃에 의해, 어리석음의 불꽃에 의해 불타고 있다고 하는 연소(燃燒)의 경이 있는데, 결국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소멸되는 것, 소멸된 그 상태가 열반이에요. 그리고 그 소멸하는 방법은 팔정도라는 것이고.
부처님은 바차에게 그런 말씀을 했어요. 열반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거에 대해서 당연하다는 거예요. 왜 당연하냐면, “나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지 않는 한 열반을 얻을 수 없다”라고 이야기 하죠.
즉 팔정도를 행하지 않는 한 열반을 얻을 수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열반이라고 하는 것을 보통 탐진치 삼독(貪嗔痴 三毒)의 소멸이다 라고 그렇게 설명을 하죠.
내가 고집멸도에서 멸은 열반이라고 말씀드리면서, 열반이라는 것은 자의식이 해체되는 것이다, 라고 말씀드렸었는데. 결국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은 자아라고 하는 자의식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자의식이 없으면 이것이 일어나지 않걸랑요. 그래서 자아라고 하는 자의식이 해체되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도 소멸되죠. 부처님도 이야기하시잖아요. 땔감이 다하고 나면 꺼져버리는 거와 같다. 그 땔감은 결국 우리 자의식이예요. 나라고 하는 자의식. 이 자의식 때문에 이 세 가지가 일어나죠. 나라고 하는 자의식이 해체되어 버리면, 사실 탐진치 삼독이 일어날 이유가 없어요.

이것은 이제 경전의 설명이고, 그러면 열반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뭐냐? 이거는 철저히 자기 체험이에요. 사실 이거는 체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거예요. 왜 그러냐면, 그 당시 수행스님들도 이것이 이해가 안가가지고 지금 사리불한테 묻고 있잖아요. 열반이라는 게 뭐냐? 열반, 열반 하는데, 열반이라는 게 대체 뭐냐? 이 열반과 두카는 배치되는 개념이에요, 반대되는 개념이지요. 결국 탐진치 삼독이 일어나는 것, 사실 그게 두카(duhkha)예요. 다른 게 두카가 아니라 그게 두카예요. 우리가 보통 두카를 고(苦)라고 하는 말로 번역을 하는데, 두카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뜻을 괴로울 고자는 설명을 다 못해요. 원래 두카라고 하는 것이 불만족스럽고, 뒤틀려 있고, 뭔가 불안정한 것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지요. 뭐 고통이라는 것은 우리가 단순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니까요. 그런데 두카는 굉장히 커서 심리적인 거, 육체적인 거, 어떤 물질적인 거, 이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어요. 그것이 소멸되면 열반이고. 그래서 두카가 있다고 하는 것은 열반을 얻지 못했다는 걸 뜻하죠. 먼저도 얘기했지만, 깨달음의 문턱을 넘어서 열반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깨달음의 문턱을 밟고 열반에 들어가는 거예요.

62) 불교는 오직 일불사상, 붓다 외에는 없어
三世諸佛 依般若波羅密多 故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과거, 현재, 미래의 붓다도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아뇩다라삼먁 삼보리를 증득하시니라.

삼세는 과거, 현재, 미래죠. 제불은 모든 부처님. 불교에는 부처가 참 많습니다. 아미타불, 로사나불, 비로자나불, 약사여래불 등 수없는 부처님이 있죠. 오죽하면 3,000명의 부처님 이름도 나오고 하니까요. 이 다불 사상은 힌두교의 다신사상이 유입되어 들어와서 정착된 거예요.

불교는 본래 일불 사상이에요. 붓다 이외의 붓다는 인정하지 않아요. 오직 붓다는 한 붓다만 있죠. 대승 시대에 오면 수 없는 붓다가 만들어지는데 본래 불교가 일불사상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대승경전에서 뭐라고 그러냐면 다른 세계의 부처님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죠. 이 사바세계의 부처님이 아니라 서방세계의 부처님이다. 동방세계의 부처님이다. 약사여래는 동방세계의 부처님이다. 이런 식으로 그걸 얘기하는 거죠. 그렇지만 본래 불교는 일불 사상이에요. 그래서 현재는 우리가 부처님이라고 부르는 고타마 싯다르타, 그리고 대승에서 미래에 오실 부처님으로 마이트레야(Maitreya), 미륵. 그 외에는 인정하지 않아요.

과거, 현재, 미래의 붓다도 의반야바라밀다(依般若波羅密多).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한다. 앞에서도 반야바라밀다를 얘기했지만, 육바라밀을 대표해서 여기서는 지혜 바라밀을 드는 거예요.

먼저 지혜가 뭐냐? 그렇게 질문들도 하시고 그랬는데, 다른 게 지혜가 아니라 그저 오온이 공함을 알면 그게 지혜예요. 지혜, 열반, 깨달음, 이런 건 다 추상적인 용어예요. 그래서 이것은 어떤 규정을 지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사실은 반야경에서 주장하는 지혜는 오온이 공함을 알면, 그것이 지혜예요. 왜냐하면, 오온이 개공이거든요. 오온이 개공인 줄 알면 그게 반야 바라밀이예요. 지혜예요. 반야바라밀을 통해서 오온이 공함을 보고, 또 오온이 공함을 알면 그게 곧 그대로 지혜가 되는 거예요.

고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故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고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시니라.
아뇩다라삼막삼보리는 보리수하 부처님의 깨달음을 뜻하는 말이에요. 그래서 보리수 하에서의 부처님의 깨달음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그래요. 그래서 가장 궁극의 깨달음, 가장 높은 깨달음, 뭐 그런 뜻이에요. 이거보다 더 높은 깨달음, 더 궁극의 깨달음은 없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깨달음이다, 그런 얘기죠. 우리가 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이 뭐냐? 그건 12연기 때 내가 충분히 이야기했고. 붓다의 깨달음이란 연기(법)의 눈뜸이고 동시에 다르마의 체현이에요. 그래서 깨달음의 다른 표현을 눈을 뜬다! 라고 하는 표현을 쓰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열반을 뜻하는 말이기도 해요.

63) 지혜(무상 무아)의 수행은 주문으로 가능한가? / 염불진언은 불교가 아니다
故知 般若波羅密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그러므로 알라. 반야바라밀다는, 크게 신묘한 주며, 큰 지혜의 주며, 깨달음의 주며, 비교될 수 없는 주다. 신이라는 것은 신묘하다는 거예요. 대명할 때, 명은 지혜라고 하는 뜻이에요. 경에 보면, 우리가 지혜라고 붙여 쓰지만 지혜 지(智)자와 지혜 혜(慧)자를 따로 분리해서 이야기하기도 해요. 밝을 명(明)자도 쓰고, 빛 광(光)자를 쓰기도 하고. 그러니 지와 혜와 명과 광, 이 네 가지는 유사한 같은 개념이에요.
무상(無上)은 깨달음이라고 하는 뜻이에요. 아뇩다라를 번역하면, 무상이 돼요. 무상, 위 없는, 즉 깨달음을 말해요.
중국 선종에서는 이 무상이라는 말을 향상이라고 하는 말로 고쳐서 썼어요. 향할 향자, 윗 상자, 향상(向上). 특히 중국 오대 시대 때 운문 문언선사는 향상과 향하(向下)라는 말을 많이 썼어요. 그래서 선종에서 향상일로(向上一路)라고 하는 말은 여기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향상일로라 그러면, 위로 향한 한 길, 그렇게 직역할 수 있지만, 뜻은 깨달음의 한 길이라고 하는 뜻이에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유일한, 한 길 밖에 없다는 거죠. 그래서 향상의 반대되는 말로, 운문선사는 향하라고 하는 말을 썼죠. 향상이 깨달음을 상징한다면, 향하는 어리석음을 뜻한다고 보면 맞죠.

무등등주(無等等呪), 비교될 수 없다. 무등등은 비교될 수 없다고 하는 뜻이에요. 비교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주(呪)라고 하는 말은 주문(呪文)이예요. 만트라(Mantra). 보통 우리가 번역해서 진언(眞言)이라고 하는 말을 쓰죠.
천수경을 보면 전부다 만트라로 되어 있잖아요.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은 수리수리, 신묘장구 대다라니, 이게 다 만트라죠.

본래 부처님은 이 만트라를 인정하지 않았어요. 붓다는 아타르바 베다의 제식을 행하는 바라문을 강도 높게 비판하걸랑요. 아타르바 베다는 인도 고대의 바라문교의 이 만트라, 주문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베다예요. 지금 힌두교의 가장 원형이 되는 성전으로 이 아타르바 베다라고 하는 것은 주문으로만 이루어져 있어요. 그 제식을 행하는 바라문들을 부처님은 강도 높게 비판해요. 그리고 주법(呪法)을 엄격히 금지해요. 불교는 원래 주법을 하면 안 돼요. 그런데도 불교가 주법의 관행을 벗어던지지 못해요. 그리고 붓다의 말씀을 주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죠. 부처님이 주법을 금지하는데, 부처님의 말씀을 주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요.
부처님이 그렇게 엄격히 주법을 금지하는데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주법으로 이해해 버리걸랑요. 그리고는 앉아 가지고 맨날 수리 수리 마하수리만 하고 있잖아요. 하지 말라는 걸 하면서 복받기를 바라니, 이게 참 웃기는 얘기라. 이걸 우리가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될까요? 부처님이 금지하는 걸 하면서 복 받기를 바래? 참, 예쁜 사람 복주기도 바빠 죽겠는데, 말 안 듣는 애까지 챙겨야 돼.

그래서 나는 기억의식을 잘라내는 것이 수행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해야 된다고 보는 사람이에요. 제 아무리 초선, 이선, 삼선, 사선을 얻고, 멸진정을 설사 얻었다할지라도, 기억의식을 잘라버리지 않는 한 열반이라고 하는 거는 있을 수가 없어요.

64) 수행은 과거의 나쁜 기억의식을 잘라내는 것
이 예를 보면, 인간이 기억의 의식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죠. 그래서 나는 그렇게 보죠. 기억의 의식을 잘라내야 해요. 특히 나쁜 기억의 의식을 잘라내지 않으면 안 되죠. 그래야만 경험의식의 오류를 범하지 않아요.
이성의식은 평형이 회복이 되죠. 그것이 깨달음이고, 그것이 열반이에요.
기억의식을 잘라내지 않는 한 열반은 없어요. 나는 기억의식은 잘라내야 한다고 보는 사람이에요. 특히 나쁜 기억의식은 잘라버려야 돼요. 기억의식은 과거의 기억의식을 말하는 거예요. 우리가 여태까지 살면서 입력되어 있는 기억의식을 잘라버려야 돼요. 기억의식을 잘라버리지 않으면, 경험의식의 오류를 범하게 돼요. 그렇게 되면, 이성의식이 평형이 안 돼요.

우리가 현재 경험의식의 판단오류가 생기는 것은 결국은 이 기억의식을 잘라내지 못하기 때문이니 반드시 기억의식을 잘라내야 해요. 수행을 한다는 것은 기억의식을 잘라내는 것을 말해요.
그저 앉아서 들숨/날숨을 보고, 몸의 현상을 보고, 이거는 그저 수행을 하기 위한 전 단계의 준비과정이지, 이것을 수행이라고 볼 수는 없는 거예요.
수행이라는 것은 내 나쁜 기억의식을 잘라내는 거예요. 완벽하게. 기억의식을 잘라내야, 자의식이 해체되죠. 그런데 우리가 기억의식을 잘라내지 못하걸랑요. 특히 나쁜 기억의식을 잘라내야 되는데, 그걸 못 잘라내거든. 그러니까 맨날 똑같은 것에, 똑같이 고민하고, 똑같은 생활에 똑같은 생각을 하죠. 보세요. 우리는 항상 똑같은 것을 가지고 충돌하잖아요.

65) 두카는 자유의지가 박탈된 윤회 / 해탈은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는 것, 윤회를 끊는 것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般若波羅蜜多呪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반야바라밀다주

능히 일체의 고를 제거하며 진실하여 거짓되지 않으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설한다.

능제일체고(能除一切苦) 능히 일체의 고를 소제 하느니라. 능히 일체의 모든 두카를 제거한다는 것이죠. 육바라밀의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열반에 이른다. 사실 대승불교에서 주장하는 것이 이거라고 보면 맞아요. 육바라밀의 배를 타고, 보시바라밀, 지계바라밀, 인욕바라밀, 정진바라밀, 선정바라밀, 지혜바라밀......, 이 육바라밀의 배를 타고, 두카의 강을 건넌다는 거예요.

두카는 다른 말로 하면, 윤회입니다. 윤회와 두카가 다른 게 아니에요. 우리는 윤회와 두카를 분리해서 이야기하지만 두카가 윤회고, 윤회가 두카예요. 왜냐하면 윤회라고 하는 것은 모든 자유의지가 박탈된 것을 말해요. 이거보다 더 큰 두카가 없죠.
해탈이라고 하는 것이 뭐예요?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것이예요. 속박을 벗어났다는 것이 뭐예요? 자유를 얻었다는 것이지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자유를 얻었다는 뜻하고 같아요. 그래서 불교는 무엇보다도 자유를 이야기하죠.

불교는 복종을 이야기하지 않아요. 기독교는 복종이에요. 오직 복종을 통해서만이 모든 것이 얻어지죠. 우리가 그걸 알아야 돼요. 복종은 행복이 아니에요.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자유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지, 복종을 통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에요.
노예는 아무리 행복해도 노예일 뿐이에요. 마치 복종이 행복인 것처럼 우리가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인간이 가장 편한 것은 복종하는 거죠. 복종하면 지시만 받고, 행동하면 되니까요.
자유라고 하는 거는 내가 선택해야 되기 때문에 굉장히 위험성이 많아요. 실패할 수도 있고. 오너의 선택은 기업을 망치기도 하고, 흥하게도 하죠.
그렇지만, 노예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책임지지 않아요. 그저 복종만 하면 되죠.

진실불허(眞實不虛). 진실하여 거짓되지 않으므로. 진실하여 거짓되지 않기에 다르마죠. 진리라고 하는 것은 거짓되지 않기 때문에 진리예요. 다르마이기 때문에 진실한 것이 아니라, 진실이기 때문에 다르마라.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뭐라고 이야기했어요? 진실하라! 그러잖아요. 부처님은 오직 한 말씀만 하셨을 뿐이라, 진실해라!... 진실이 다르마라. 진실하지 않으면, 사선 팔정을 얻는다 할지라도 그건 다 허구고 망상일 뿐이라.

66) 윤회의 강을 건너 저 행복의 피안으로
說般若波羅密多呪 卽說呪曰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
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반야바라밀다주를 설한다. 바로 주를 설하나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이게 주문이에요. 까떼까떼 빠라까떼 빠라쌍갓떼 보디스바하. 보통 이것, 주문은 해석하지 않아요. 그래서 주문이거든. 뜻은 이렇습니다.
건너갈 수 있는 이여, 건너갈 수 있는 이여, 저 편 언덕에 건너갈 수 있는 이여, 저 편 언덕에 건너갈 수 있는 이여, 깨달음이여 행복하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라는 뜻이 이거예요.

건너갈 수 있는 이여, 건너갈 수 있는 이여, 저 편 언덕에 건너갈 수 있는 이여, 저 편 언덕에 건너갈 수 있는 이여, 깨달음이여 행복할지니.
건너간다고 하는 것이 뭔가요? 윤회의 강을 건넌다는 거예요. 즉 두카의 강을 건넌다는 거죠. 재미있지 않습니까? 왜 강을 건넌다는 표현을 쓸까요? 동서양 종교를 막론하고 다 강을 건너잖아요. 기독교에서도 요르단 강을 건너고, 불교에서도 강을 건너고, 중국에서도 황천을 건너잖아요. 왜 강을 건널까? 참 재미있지 않아요? 그리스 신화에서도 반드시 강을 건너죠. 기독교에서도 세례를 하고, 불교에서도 머리에 물을 부어서 관정을 하고, 원래 불교의식에서도 관정의식이 있어요. 물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을 상징하기 때문이죠. 저 편 언덕은 열반이라고 하는 뜻이에요. 피안. 우리는 이 쪽에 있고, 이 쪽은 두카의 땅이걸랑. 저 쪽은 열반의 땅이고. 그러니 저 편 언덕에 건너간다 이 말이에요. 강을 건너죠. 강을 건너니까 깨달음이고, 행복이죠.

사실 건넌다고 하는 것은 의식의 전환이기도 하죠. 내가 아까 기억의식을 잘라버려야 된다고 그랬는데, 우리가 기억의식을 잘라 버리는 것, 그것이 저 편 언덕에 건너가는 것이기도 하죠.

반야심경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뭐냐? 반야심경의 대의는 오온은 공이라는 거예요.
반야경이 지혜를 강조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지혜는 도구일 뿐이라. 즉 오온이 공함을 아는 도구. 그러기 때문에 오온이 공(무상 무아로 해석)함을 알면 그대로 지혜예요. 오온이 공함을 알지 못하면 지혜가 아니고, 오온이 공함을 알면 지혜라는 거지요.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이라 그랬잖아요. 깊은 반야바라밀다(지혜의 수행)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함을 조견했다. 반야심경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오온이 공하다는 거예요. 그러니 오온은 무상이고, 오온은 무아라는 거죠. 결국 무상과 무아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무상하고, 무아인 줄 알면 나라고 하는 의식을 고집할 필요가 없죠.
여기까지 하고 반야심경 전문을 이어서 해석하기로 하겠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이 깊은 지혜의 완성을 수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보고, 일체의 고를 벗어났느니라.
사리자야!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 그대로가 공이요, 공 그대로가 색이다. 수상행식도 또한 그렇다.
사리자야! 이 모든 존재의 공한 특성은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더러워지지도 않으며 깨끗한 것도 아니다.(더러움도 아니고 깨끗함도 아니다.)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나니,
그러므로 공 속에는 물질인 몸도 없고,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 식도 없고, 눈 귀 코 혀 몸 마음도 없고,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대상도 없다. 눈의 영역도 없고, 내지 마음의 영역도 없다.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의 소멸도 없고, 내지 늙음과 죽음도 없고, 또한 늙음과 죽음의 소멸도 없다.
고 집 멸 도도 없고, 지혜도 없고, 또한 지혜의 증득도 없다.
지혜를 얻을 바 없는 까닭에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는 고로 마음의 장애가 없다.
마음의 장애가 없기 때문에 공포가 없으며, 전도몽상을 벗어나 열반을 증득하니라.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증득하시니라.
그러므로 알라, 반야바라밀다는 크게 신묘한 주문이며, 큰 지혜의 주문이며, 깨달음의 주문이며, 비교될 수 없는 주문이다. 능히 일체의 고를 제거 하나니라.
진실하여 거짓되지 않으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설한다.
바로 주문을 설하나니, 건너갈 수 있는 이여, 건너갈 수 있는 이여, 저 편 언덕에 건너갈 수 있는 이여, 저 편 언덕에 건너갈 수 있는 이여, 깨달음이여 행복할지니.

이로써 반야심경 해석은 끝났습니다. 반야심경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간단해요.
오온이 공함을 알라는 것이에요. 오온이 공함을 알아서 열반에 이르라는 거예요. 두카의 강을 건너서 열반에 이르라. 그게 반야심경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거예요. 또 그걸 권하는 것이기도 하구요.
자 이것으로 반야의 지혜! 마음으로 흐르다.... 라는 강좌를 끝맺겠습니다.
모쪼록 이번 강론에서 선우님들께서 약간의 기쁨이라도 얻으셨길 바라면서 늘 노력하고, 또 행복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혜천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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