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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6-12-21, (수) 1:33 am 

가입일: 2015-01-01, (목) 10:13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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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 이중표 교수-오취온과 십팔계

보고있는 놈이 인식의 주체이고 '나'
색은 형태라는 개념, 물질로 보면 안돼

오온은 구체적으로 가진 자아의식이며
감정은 조건이 있으면 기쁘고 즐거운 것

왜 부처님은 오온을 괴로움의 뿌리 자체라고 말했을까. 우리는 일반적으로 나라는 말을 사용한다. 나는 뭐를 하고 싶다거나 기분이 좋다, 생각한다 등등의 말을 많이 한다. 이것은 일상에서 우리 모두가 나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 말이나 의식이 지시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일까. 예를 들어 펜이라는 말을 한다면 펜이라는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라고 할때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나라고 부르는 것이다.

나라고 부르는 것들을 생각해 보자. 너무나 자주 무의식적으로 쓰기 때문에 생각해보지 않는다. 나라는 단어가 소리가 같기 때문에 동일한 내가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면 나에 대해 생각해보자. 나를 때렸다고 할때의 나는 나의 몸이 맞는 것이다. 나는 기분이 좋다고 할 때의 나는 감정이 좋은 것이다. 이처럼 매맞은 나와 기분좋은 나는 같은가. 신체를 나라고 부르기도하고 감정을 나라고 사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생각하는 놈은 또다른 나이다. 이처럼 나라고 지칭하는 대상은 다 다르다. 지금 강의를 듣고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의 나는 의지이다. 이러한 생각은 의욕, 욕망의 주체로서의 나이다. 감정을 나라고 하거나, 사유하는 것을 나라고 하거나, 의혹을 나라고 하기도 한다. 보고있는 놈이 인식의 주체이고 나이다. 이것을 부처님은 식이라 했다.

지금 말한 것 이외에 내가 또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그것을 일체라 한다. 오온을 일체법이라 할때는 나라고 표현한 모든 것들이다. 몸, 감정, 생각, 의혹, 인식을 나라고 불렀던 것을 제외하고는 나라고 할만한 것들은 없다.

태어났다면 몸이든, 감정, 생각, 의혹, 의식이든 어떤 것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는 태어나사 죽을 때까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유교에서는 늙어 죽을때까지 몸을 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효의근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신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감정도 있다. 내 감정이 안맞으면 미워한다. 감정이 상해서 그런 것이다. 그 감정을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그 무엇이라고 한다. 문제는 죽고난 이후 그 감정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죽을 때까지는 동일한 감정이 있다고 믿고 있다.

생각하는 놈도 마찬가지다. 생각하는 놈이 있다. 나에게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부 존재로서 실제한다. 이것이 존재이다. 12연기에 보면 노사는 생을 연하여 있다. 생은 유를 연하여 있다. 여기서 유가 존재이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존재한다는 생각이 있어 태어나 죽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의식이 그렇게 작용하고 있다. 내몸 지키려 하고 때리면 화가 난다. 감정을 지키려 하고 기분좋게 하려고 노력한다. 생각을 지키려 하고 틀리면 말도 안한다. 욕구를 충족 시키려 하고 자기와 타자를 구분한다. 이렇게 나와 바깥을 구분하는 나가 있다. 이것을 좀더 면밀히 있는 그대로 살펴보자는 것이다.

여러분의 몸은 태어나 죽을때까지 존재하고 있을까. 우리 몸은 먹은 것이 쌓이고 새로운 것이 계속 생겼다 없어지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 흘러가는 강물은 똑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어제의 강물이 오늘의 강물이 아니다.

사실은 흘러가고 있어 이를 무상이라고 한다. 색이 무상하다는 것은 물질이 무상하다는 것이 아니다. 색을 물질로 보게된 것은 아비달마 때 색법과 심법, 물질과 정신의 이분법으로 보았던 데서 기인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둘오 나누어 본적이 없다.

색을 물질로 이해하려 해서는 안된다. 색은 형태라는 개념이다. 몸은 형태를 지니고 나타난다. 지각을 지니고 나타나는 형태를 총괄하는 개념이 색이다. 따라서 색을 물질이라 번역해서는 안된다.

반야심경을 말할 때 물질이 공하다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색은 형태가 무엇을 가리키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닌다. 소리도 지각에 의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모두가 색이다. 이를 물질이라 말하면 기본적인 의미가 탈색된다.

그럼 왜 부처님은 오온이 공하다고 했는가. 오온은 사실 현실적으로 의식하지 않더라도 구체적으로 가진 자아의식이다. 그것이 정말 나라고 한다면 오온 가운데 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몸은 내가 아니지만 참된 내가 들어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사람은 몸이 죽어도 참된 나는 다음 세상에 갈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을 영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종교가 많이 나타난다. 부처님은 영혼이니 정신이니 하는 말을 쓰는 것이 아니라 느낌 현상 등 네가지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정신은 욕망으로, 존재가 가지고 있는 네가지 성질이다. 정신이 있어 네가지 작용을 하는 것이 실제로 있을까. 상상의 산물이다. 존재를 본적이 없다. 느낌이 존재한다는 사실뿐이다. 통합해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경험할 수 없는데 그 몸에 정신을 붙여 바라볼 뿐이다.

과연 우리는 느낌이 있어 느끼고 있는지 살펴보자. 종교는 가설을 내세워 현상을 설명하려 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개념이다. 약속해 설명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어떤 존재인가. 만든 존재가 있다고 가정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이라 부르자고 약속한 것이다. 그런 존재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어 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진리를 이데아 라고 했다. 현상을 설명하려다 보니 설정해야 설명이 되니까 설정하는 것이다. 자연과학도 다 그런 것이다. 과학에서는 원자를 깨지지 않는 것으로 설정했다. 그런데 실험을 통해 원자가 깨지니까 원자는 남겨둔체 양자역학이 나왔다. 이 또한 가설이다. 인류 지성사는 이렇게 언어를 조작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부처님은 내 눈앞에 현상을 그대로 보고 이해하자는 것이다. 언어 속에 빠져서는 안되는 것이 불교공부이다. 그 방법이 수행이다. 수행은 알아차리고 관찰하라는 것이다. 실제로 수행을 하고 있으면 괴로운 생각이 사라지니까 좋구나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깨달음이 올 것 같다. 그런데 깨달음은 가르침을 이해하고 관을 이해할 때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오온에 대해서도 못보고 살았다. 그만큼 부처님이 보여준 세상은 현상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세계관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눈뜨고 못보는 것이다.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라 있는걸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이론을 새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지혜의 눈을 뜨도록 하는 것이다. 지식을 가지고 다녀서는 의미가 없고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론을 알아서 떠드는 사람은 언어적으로 아는 사람이다. 제대로 하는 사람은 우리 마음이 저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구나 보이는 것이다. 지식으로 아는 세계가 아니다.

이야기 하자면 우리는 눈을 가지고 있고,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지각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 구조가 중생세계를 만든다. 우리는 세계 속에 태어나 산다고 한다. 세계와 내가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다.

내가 있냐 없는 물음에 부처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도 안되는 얘기니까. 본래 불거불래다. 감정이라는 것이 뭔가. 촉으로부터 나타난다고 했다. 대상을 접촉하지 않으면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다. 조건으로 감정이 발생한다. 이 말이 연기라는 뜻이다. 연기하고 있음을 보라는 것이다.

꼬집으면 아프다. 왜 아픈가. 사실을 느끼니까 아는 것이다. 말하자면 불교에서 알아가는 것들은 체험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다. 촉으로 느끼는 것,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다.

감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이 있으면 기쁘고 즐거운 것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지 느끼는 놈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몸이 먹은 것이 쌓이듯이, 생각도 그렇다. 우리는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불교로 보면 무명망상이다. 불교가 나타나면 세상 모든 것들이 자취를 감춰 새세상이 되는 것이다. 불교 공부는 새 세상을 세우는 공부이다.

경전에서는 부처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여섯가지 진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우리 삶의 기본 토양들이 무너져 버려 새로운 것들이 일어난 것이다. 지진은 공포였다. 부처님 설법을 그것에 비유했다. 삶의 기반이 무지로 깨지고 새로운 사상이 도래한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지식의 세계는 언어 개념이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체험적으로 알라는 것이다. 그럼 세계가 뭐냐, 부처님은 12입처라고 말했다. 이 세상을 설명할 때 유물론자들은 지수화풍 4대라고 했다, 브라만교에서는 브라만이 일체라고 했다, 부처님은 그런 존재를 말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지각구조가 곧 세계의 근본이라고 말한 것이다.

개가 한 마리 있다고 하자.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간계이고 동물이 사는 세계는 축생계이다, 그럼 지금 이 공간을 축생계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 속에 마음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안과 색을 연하여 안식이 발생한다. 지각활동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눈이 없는 생명들도 많다. 박쥐도 눈이 퇴화됐다. 그들에게 색계가 있겠는가. 안계가 없으면 색계가 없다. 서로 짝을 이루게 되어 있다. 따라서 세계와 내가 따로 구별되어 있지 않다.

근본적으로 깨달아야할 자리가 그 자리이다, 신심명에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밖에 인연을 쫒지 말라고 했다. 우리 의식은 밖으로 나돌아 다닌다. 그 의식을 안으로 모으는 것을 삼매 선정이라 한다. 그 마음을 붙잡으려 한다.

신심명에는 안에 있는 자아에 집착하지 말고 사물과 하나되어 평온을 이루라고 했다. 이것이 무아이다. 평안한 마음이 된다. 밖의 것에 대해 좋다 나쁘다는 생각없이 둘이 아니라고 아는 자리에 있으면 평안해 진다. 그런데 주관으로 말미암아 보이고, 주관은 대상으로 말미암아 보이나니. 보는 놈과 보이는 놈이 누구냐고 물을 것이 아니다.

이런 경지에서는 나와 나라는 생각, 안팎이 모두 사라질 것이다. 보는 주관은 대상으로 말미암아 생기나니 하나인 공의 자리로 가면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도 없는 것이다. 신심명에서는 반야심경과 똑같은 얘기를 하는 것이다. 원래 하나이며 공이다. 연기할 뿐이다. 그러니까 둘이 아니며 공이라고 하는 것이다.

12처에서 분별이 일어나고 18계가 벌어진다. 거기서 촉이 발생한다. 무명촉이다. 촉은 태어나서 감각기관으로 인식하고, 그러한 인식을 통해 지금까지 생각하는 것이다. 실상을 그렇지 않다. 만약 대상을 접촉하는 것이 촉이라면 이 앞의 컵을 컵으로만 봐야한다.

그런데 실상은 다르다. 속담에 자라 보고 놀란 놈 솥쭈껑 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다. 과거에 자라를 보고 놀랐던 사람은 나중에 솥투껑만 보아도 자란줄 알고 놀란다는 말이다. 하지만 과거에 자라에 놀라본 적이 없는 사람은 솥투껑을 보고 놀라지 않는다. 반면에 자라를 맛있는 음식으로 경험했던 사람은 솥투껑을 보면 자란줄 알고 입맛을 다실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매실의 신맛을 경험하면 매실 이름만 들어도 침이 고인다. 이것이 촉이다. 우리는 석류하면 신맛이 떠오른다. 하지만 사막에서 나오는 석류는 엄청 달다. 그곳 사람들은 석류를 생각하면 단맛이 생각날 것이다. 촉에 의해 느낌이 생긴다.

그때 촉을 설명하는 것이 명색이다. 식을 연해 명색이 나온다. 보통 물질과 정신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석류라는 이름에 대해 형태를 가지고 있다. 경험에 의해 혀로 맛보아 신맛을 경험한다. 안과 색을 연해 안식이 생긴다. 눈으로 보고 식이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처음 어떻게 봤느냐에 따라 촉의 내용이 다를 수 있다. 촉은 공간 속에 벌어지고 있는 대상이지 접촉이 아니다.

서양의 안식은 대상과의 접촉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나와 접해 느낌이 일어나는 것이다. 촉을 일으키고 있구나, 감정을 일으키고 있구나, 식이 있으면 감정도 달라진다. 의욕도 촉으로부터 일어난다. 갖고 싶은 의욕이 일어난다. 이런 것을 설명하는 것이 촉이다. 촉으로부터 수상행식이 일어난다. 내정신이 맞다고 싸우는 것이다. 오온 무상은 이런 성찰을 통해, 식에서 촉되어 명색이 의식화 감정화 된다는 것이다, 연기됐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연기를 관찰할 수 있도록 수행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경험때문이었구나. 미워하는 것이 잇으면 왜 미워해야 하지,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왜 좋아해야 하지 하고 관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연기 때문임을 알게되면 그런 감정을 버리게 되고, 그것으로 고락이 생기지 않으며 자비심으로 나아간다. 자비희사 무량지혜로 나아간다.

그것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정확히 알지 않고서는 참된 수행으로 가기 어렵다. 그 이야기를 촉을 통해 색수상행식 오온이 어떻게 발전하고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어떻게 자아라는 생각으로 이어지면서 여러 고통을 야기 시키는지 알아야 한다. 12연기로 설법하는 촉을 연하여 느낌과 생각과 의식이 발생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 것들이 어떤 것들을 의미하는지, 12연기 전체구조를 이해하고, 12연기를 체득하도록 자기화시키고 자기화되도록 해야 한다. 이걸 체득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수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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