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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6-12-08, (목) 6:51 am 

가입일: 2015-01-01, (목) 10:13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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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 이중표 교수-오취온과 십팔계

부처님은 오취온이 괴로움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설명한 것이 12연기다
그 과정 속에서 오온이라는 것이 덩어리 진다
온은 망상덩어리이니 부숴버리면 없어진다

깨달음의 연기법을 시작할 때는 한번에 할수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하다보니 시간이 부족했다. 공부가 쉽지 않음을 느낀다. 이번 강의가 끝난 다음에는 중론을, 그 다음에는 유식에 대해 공부할 계획이다.

지금 계획하고 있는 것은 근본불교 1년, 중관 1년, 유식 1년, 대승기신론 1년을 공부하는 4년 과정의 공부이다. 불교공부 4년 과정을 마치게 되면 누구나 스스로 자신의 삶속에서 깨달음을 성취하고 법을 전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우리가 공부할 4년의 과정은 실제로 불교의 역사다. 불교는 근본경전을 통해 연기의 도리를 설파하고, 우리가 이것을 깨달아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이끄는 길을 열어줬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시간이 지나며 어리석은 사람들에 의해 외곡되기 시작했다. 부처님의 뜻을 잃어버린 오늘의 불교는 바로잡아야 한다.

부처님이 설파하신 근본 뜻을 되살리려고 했던 것이 반야 중관이다. 그리고 중관에 기초해서 연기의 도리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려 한것이 유식사상이다. 그리고 중관과 유식사상을 기반으로 해서 어떻게 대승적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종합적오로 논하고 있는 책이 대승기신론이다.

이것이 불교의 전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며, 근본사상을 관철하고 시대를 초월해 진리를 배워가는 과정이다. 불교의 출발은 근본적으로 왜 우리는 괴로운가를 알아 가는데 있다. 고통스러운 자기 현실의 문제에서 시작한다.

부처님은 “나의 모든 가르침은 4성제로 되어있다”고 말한다. 즉 고집멸도의 가르침이 불교다. 보통 성제는 거룩한 진리를 말한다. 그러니 불교의 진리가 4성제이다. 그럼 4성제가 왜 진리인가. 고성제란 무엇인가. 만약에 괴로움이 없다면 부처님 출가는 없었다. 그래서 고성제의 의미를 이해해야만 불교를 공부할 수 있다.

불교를 공부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고성제를 중요시하지 않고 불교가 뭐냐고 접근한다. 부처님은 고성제가 뭐냐는 물음에 대해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은 생로병사의 문제인 것이다.

불교는 생사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생사가 뭐냐, 여기에 주목해야 한다. 부처님이 말한 생사를 이해해야 하는데 우리는 자기 생각대로 이해한다. 생사를 해결하는 것을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생사가 없는 존재가 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불교를 처음 공부할 때 부처님은 생사문제를 해결했다고 배웠다. 내가 볼 때 부처님의 생사는 해결된게 하나도 없었다. 부처님은 태어났고 늙고 병들어 돌아가셨다. 해결한게 뭔가. 무엇을 해결했다는 것인가.

만약에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 그렇게 생사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답을 구할 수 없다. 그 문제는 중국의 도가에서 해결하려 했다. 그들은 불로장생을 추구했다. 생사문제를 불로장생으로 여긴다면 도가에서 구하라. 여기서는 신선이 되는 것을 주장한다. 신선이 되기 위해 생식을 하고, 채식만 하고, 화식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 몸이 가벼워져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아나오며 구름을 타고 돌아다닌다고 했다.

불교는 신선이 되자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고성제를 말하며 팔고를 말했다. 생로병사에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불득고, 오음성고가 팔고이다. 그런데 마지막 모든 괴로움을 간략하게 말한다면 그것은 오취온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우리가 주목해야 한다. 오취온이 괴로움이고 생로병사다. 얘기가 되는가. 오취온이 뭔데 생로병사인가. 이 부분에 대해 잘 생각해야만 불교를 공부하는데 어려움 없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전에도 말했지만 안수정등이란 이야기가 있다. 법당에 가보면 벽화에 우물에 사람이 빠져 칡넝쿨을 붙잡고 있는 그림이다. 부처님이 이야기한 고성제를 그린 그림이다. 코끼리가 쫓아오니까 피해 달아난 곳이 우물이었다. 우물에는 나무뿌리가 늘어져 있어 내려가다가 밑을 보니 무서운 용이 우글거리고 있어 내려갈 수가 없다. 그리고 사방에는 네머리 독사가 있어 사면초가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 나무뿌리를 흰쥐와 검은쥐가 갉아먹고 있다. 그런데 입으로 꿀이 떨어지니까 꿀을 먹기위해 탐착한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이 비유에서 우물을 부처님은 생사라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꿀을 먹기 위해 쫓아 가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겪고있는 생사는 우물, 용은 죽음, 흰쥐 검은쥐는 세월, 꿀은 오욕락, 4방의 독사는 지수화풍이다. 설상가상으로 벌들이 내려와 쏜다. 이것을 부처님은 사견이라고 했다.

이 이야기는 코살라의 왕이 왔을 때 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큰 권력을 갖기를 원한다. 대왕이시여 당신은 그와 다를게 있는가. 돈이 많다고 해서 권력이 있다고 해서 다르지 않다. 다르지 않다고 올바로 본 사람들이 불자이다. 세상의 어떤 재물이나 권력에도 눈을 돌릴 필요가 없다. 재물이나 권력은 꿀방울이다. 꿀을 많이 먹는다고 상황이 달라지겠는가.

돈 많으면 근심걱정이 적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똑같은 근심걱정을 가지고 산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중생 모두가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일단은 죽음 앞에서 다를바가 없겠구나 하고 생각하면 돈 많은 사람이 부러울 것이 없다. 죽음을 벗어난 부처님이 부러울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이다.

칡덩굴을 붙잡고 있는게 인간인데 그것이 오취온이다. 생로병사가 벌어지고 있는 곳이다. 그러면 그러한 상황이 벌어지는 근본원인은 무엇일까. 우물로 내가 안 들어가면 문제가 안 생긴다. 결국은 우물로 들어가 나무를 붙잡고 있는 놈 때문에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 다시 말하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죽는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어떤 놈인지 성찰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남 얘기 듣듯이 하지 말고 성찰해 보라.

놀랍게도 인류의 역사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른 것은 없어도 나는 있다는 믿음으로 살고 있다. 서양의 데카르트도 이 세상을 의심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가서 분명하게 부정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이 나다. 의심하는 것도, 생각하기 때문이다. 생각하고 있으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생각하는 놈이 나라는 것이다. 나를 무엇으로 보고 있는가. 그는 생각하는 놈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생각한다면 생각하는 놈이 있어야하지만 증명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확정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다같이 자기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부처님은 자기를 정확히 보자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정확히 보고싶어도 어디서부터 보아야 하는지 모른다.

어디서부터 보아야 자기가 보일까. 본다면 있어야 볼 것이 아닌가. 자기라는 것이 뭔가. 말은 쉽지만 보려고 해도 안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불교는 흐리멍텅하게 말로하는 종교가 아니다. 나를 보기 위해서는 내가 있어야 한다. 나는 의식 속에 있는 나다. 내 의식 속에서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부처님이 관찰해 보니 거기에 다섯가지가 있더라는 것이다.

생사를 겪고 있는 놈이 있다. 태어난다는 것은 내가 태어나는 것이다. 죽는 것은 누가 죽는다는 것인가. 내가 죽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려면 생사를 겪는 놈이 어떤 놈인지 알고 이야기 해야할 것이 아닌가.

여러분은 전부 태어나 생일잔치를 한다. 누가 태어났는가. 내가 태어났다. 나밖에는 답이 안나온다. 이것이 내가 아는 전부다. 바로 볼 수 없다. 그래서 오취온에서 나를 피상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부처님이 설한 사성제이다.

부처님은 생로병사의 괴로움이 있는데 그 괴로움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오취온이라고 말했다. 괴로움의 본질이며 뿌리가 나라고 말한 것이다. 어떤 놈인지 제대로 보아야 한다. 오취온을 바로 보는게 나를 바로 보는 것이다.

불교는 오취온을 대상으로 한 공부

불교는 오취온을 대상으로 해서 공부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런 말을 어디서 들어봤는가. 지금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뭐를 하든 결국에는 그자리에 있는 것은 이런 공부를 안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오취온이 괴로움이니 오취온을 잘보자고 했다. 오취온의 실상이 집성제이다. 고성제의 원인이 집성제라고 하는데 집성제는 원인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취온이라는 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가를 설명한 것으로 그게 12연기다. 무명으로부터 생로병사에 이르는 과정 속에서 오온이라는 것이 모인다. 이렇게 모이면 온이 되는 것이다.

온은 덩어리라는 뜻이다. 본래부터 존재하는게 아니라 많이 모여 덩어리처럼 눈앞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흙이 덩어리지면 굴러다닌다. 그런 덩어리를 부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마찬가지로 나라고 생각하는 다섯가지는 망상덩어리라는 것이다. 무명으로부터 생긴 것이니 진짜있는 것이 아니라 헛생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오취온은 헛생각으로 만들어놓은 덩어리

12연기 마지막에는 이와같이 생로병사 우비고뇌와 같은 순수 괴로운 덩어리들만 모인다. 사람들은 이러한 괴로움의 덩어리에 별로 의미부여를 안하지만 우리 앞에는 매일 이런 사실들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봐라. 관찰하면 무명으로부터 다섯가지 망상덩어리가 모인다는 걸 와서 보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많은 사람들이 전생, 현생, 내생을 말한다. 볼 수도 없고 확인도 안되니 누구도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니 믿거나 말거나가 횡행하게 되는 것이다. 불교조차도 믿거나 말거나가 횡행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불교가 제대로 안되는 것이다.

무엇이 무지 인지를 가르치는 것이 불교다. 무지로부터 자아가 만들어지고, 자아를 갖고 있는한 죽는다는 생각에 빠져 있다. 이러한 생각이 잘못된 헛생각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라면 없애 버려야 한다. 색수상행식 오온을 멸해야 한다. 오온이라는 것이 망상이니 깨부숴야 한다. 무명이 사라지면 이것이 사라진다.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정견이다. 정견으로 무명을 버리고 살면 생사의 괴로움이 나타나지 않는다. 죽네 사네 고민 안하고 살게 된다.

솔직히 내일 죽을지 누가 아는가. 현실을 얼마나 행복하고 보람있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내일을 본적이 있는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느날 갑자기 내일이 나타나고 내생이 나타난 적이 있는가. 여기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 잘 살면 그것이 내일이 된다. 여러분은 어제도 내일도 오늘을 살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은 여기이다.

이 사실을 알면 현실에서 문제가 없고, 현실에서 문제가 없으면 문제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내일 배고플지 모른다고 재물을 쌓으려 한다. 그래서 문제가 생긴다.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진실에 대한 무지, 행복을 피하기 때문에 고통이 나타난다는 것을 깨닫고 실현하자는 것, 그것이 팔정도이다.

정견은 의혹을 일으키고 바른 말, 바른 행동을 하게 한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나를 해코지 한 사람이라면 자비로운 마음을 일으킬 수 없다. 그러나 어제는 이미 지나가 버렸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상대하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이것을 팔정도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생활을 내팽개치고 선정을 하러 간다. 이것은 잘못이다. 사람은 누구나 신구의 삼업을 짓게돼 있는데 업을 지으면 윤회를 받으니까 업을 안짓는 수행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팔정도에 따르면 정견을 가지고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이 있다. 정견을 가지고 의업, 구업, 신업을 잘 지으라고 하고 있다. 업을 떠나서는 수행이 없다.

삼업을 잘 지으면서 바른 직업을 가지고 생활하고, 잘못된 짓을 하면 안된다. 이렇게 정명을 통해 정정진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면 정념, 싸띠가 가능해 진다. 그리고 몸이 수상행식의 마음 움직임을 통해 사성제, 다르마에 대해 현상들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정확히 보게 되는게 4념처다. 이런 수행과정에서 사마디가 일어난다.

정정은 계정혜 삼학의 수행이다. 만약 해탈을 위해 생업을 버리고 수행한다면 그건 아마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것이다. 부처님은 생사를 벗어나기 위해 생업은 가치가 없다거나 버리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생업을 버리고 수행하라는 것은 영생을 얻기 위해 교회 오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것은 수행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의 문제라고 본다. 정견으로 바르게 살면 처처가 수행처다. 그게 불교수행이지 어디 산에가서 앉아야 수행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나치게 교회만 가려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마찬가지로 참선한다고 앉아 생활에 관심을 갖지 않아도 문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관찰하고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 알고가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분명하게 오온을 중심으로 해서 설했다. 교리들의 핵심에 오온이 자리잡고 있다.

반야심경에 조견오온개공.. 이라고 나온다. 왜 오온개공이 먼저 나오는가. 이는 오온을 대상으로 성찰했다는 것이다. 실체없이 무명으로 연기해 나타난 허망한 것임을 깨달아서 모든 괴로움이 소멸했다. 한마디로 오취온, 일체의 괴로움이 사라져 버린다.

어떤 학자는 이것을 해설하며 물질은 공하다고 말한다. 깨달으니 모든 괴로움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이해할수 없는 말이다. 부처님이 오온이 공하다고 말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이 몸을 실체로 보지 말고 인연따라 나타났다 사라지는 연기하는 몸으로 보아야 한다. 물질을 그렇게 보면 뭐하겠는가.

오온이라는 것의 가장 기본이 되는게 12입처설이다. 12입처로부터 나와 세계, 분별의 세계가 벌어진다. 중생들의 모든 것들은 12입처에서 비롯되고 있다. 일체가 벌어지는 것이 연기법이다.

18계가 중요한 것은 중생들의 의식세계를 형성하는 촉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촉에 대해서는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12연기를 삼세양중인과로 해석하면서 사람이 태어나 세상에 접촉하는게 촉이라고 말한다.

부처님은 촉을 그런식으로 설명한 적이 없다. 부처님은 18계를 연하여 촉이 발생한다. 18계설 촉을 이야기 해야 나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우리에게 나라는 것이 만들어짐을 알 수 있다. 나라고 생각하는 이것들이 어떻게 실제하는 것처럼 나타나는지 성찰을 통해 관조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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