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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6-12-01, (목) 10:57 pm 

가입일: 2015-01-01, (목) 10:13 am
전체글: 192
모든 종교 철학 사상에서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 있다. 내가 있고, 내 밖의 세상이 있다는 것이다. 그 생각 때문에 내가 태어서 어디로 갈까라고 생각하게 된다. 전생이 궁금하고 내생이 궁금한 것이다. 그래서 삼세에 걸쳐 윤회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생각을 윤회 생사라 한다. 생사는 내 밖에 세계가 있기 때문에 벌어진다. 불교는 그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주관과 객관 이원적 구조속에서 수행을 통해서 생사의 세계인 이 세상이 다른데 있을까를 알아보려 한다. 부처님은 그러한 생각이 일어나는 자리가 12처라고 말했다. 일체가 12입처라는 것이다. 나와 세계가 따로 존재한다는 생각 속에서 이런 생각을 일으켰는데 깨닫고 보니 그게 아니더라는 것이다. 우리는 드러나는 현실이 신이 만든 세상이 아니고 원자도 아니다. 보고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세계다. 우리가 보는 이 세계는 보기 때문에 드러나는 것이다.
이 자리는 생사가 없는 자리이다.

부처님은 죽음의 신과 타협하지 말라고 한다. 시간 속에서 보는 것을 죽음이라 보는 것이다. 그래서 미래가 걱정스럽고 과거가 후회스럽다. 부처님은 과거를 괴념하지 말고 현재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일체법이 참회하는 자리이다.

백겁적집죄 일념돝탕진 이라고 했다. 중생들이 업보를 받아들이는 것은 중생의 업이다. 갈등속에 있지만 업보의 진실을 제대로 보면 일체유위법은 허망한 것이다. 여기있는 현실만이 완전한 것이다. 이게 공의 깨달음의 자리이다. 차별분별심이 사라진 자리이다. 공즉시색이니 지금 여기서 본다면 보이는 놈 보는 놈이 없다는 것이다.

반야심경은 신비한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나 알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부처님 법을 여실하게 본 사람이 법을 전해 왔다. 용수도 그랬고, 선에서도 그런 법문을 다 했다. 혜가스님이 달마에게 가서 물어본 “마음이 불안하다 편안하게 해달라”고 했을때 달마는 “불안한 마음을 가져오라”고 했다. 혜가가 찾아보니 없다고 하니까. “내가 이미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고 한 것이다.

그 말을 이해하려면 혜가가 되어야 한다. 혜가가 찾아보니 없다고 함으로써 불안한 마음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혜가는 3조승찬에게 법을 전했고 깨달은 후 승찬이 신심명을 썼다.

도를 구하는 사람이 수행을 하는데 분별을 하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잡으려 노력한다. 조계종은 이 도리를 벗어나서는 안된다.

밖에 있는 인연 접지 말고 안에있는 허망에 머물지도 말라. 세계와 내가 함께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때 마음이 평안해 진다. 밖의 인연과 망상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보이는 대상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보이는 것이니 세상에 빛이 없다면 눈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너와 내가 따로 일 때 생사가 벌어지니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리이다. 부처님의 말씀과 하나도 틀린게 없다. 진정으로 깨달았는지는 그것으로 검증해야 한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육입처가 없다고 한다. 다른 말로 이해한다. 같은 말을써도 의미가 다르면 전혀 다른 말이 된다. 부처님이 말하는 존재는 공간속에서 너와 내가 따로 존재한다. 우리는 세계를 존재로 인식해 왔다. 이 존재는 시간적으로 존속성을 가지고 있다. 얼마동안 존재해야 한다. 얼마동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가 아니다.

다르마인 법은 얼마동안이란 기간 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걸 공이라 한다. 불교에서 공이라는 것은 존재들은 시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걸 부처님은 무상이라고 했다.

여러분은 자신을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나라고 이해한다. 그러니까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있게 된다. 그러니까 유를 연해서 생이 있고, 생이 있으니까 사가 있다. 태어나서 죽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살게 되는 것이다.

깨달으면 안태어 난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아무런 답이 없다. 지금 스님들은 안태어나는 것이 열반이라 한다. 그들에게서 안태어나면 어떻게 된다는 대답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것은 단멸론자들이 죽으면 그만이라 말하는 것과 다를게 없다.

안태어난다는 것은 나는 존재하는데 안태어나고 존재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그런말 하지 말라고 했다. 부처님은 애매한 말로 현혹하지 않고 정확히 살아가는 길을 가르치신 분이다. 현재의 스님들은 알지도 못하면서 꾸며낸 이야기로 우리를 현혹하는 것이다.

생사는 유가 있으니까 있다고 했다. 여기서 유라는 말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은 유를 다시 태어나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터무니 없다. 생사는 움직임이 있어야 생사가 있다. 그렇다면 존재로서의 유는 취를 통해서 있다고 한다. 취는 자기존재화 시키는 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12연기에 육입, 촉, 수, 애, 취 등이 나온다. 촉 앞에 육입이 있다. 나라는 놈은 밖에 대상이 있으면 나오는 놈이다. 눈으로 명색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내가 대상을 인식할 때 이름 없는 것은 볼수 없고 나도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는 것을 보면 보는 내가 나온다. 촉이 일어난 것이다. 느낌이 일어나고 생각이 일어나 취하게 된다. 12연기는 이처럼 실제의 구조이다.

의식을 분석 관찰하면 매 순간순간 관찰되는 것이다. 18계는 촉이 일어나는 자리이다. 촉한다는 것은 의식 구조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걸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여러분의 마음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다르마를 이해해야 한다. 세상을 존재로 이해하면 불교를 이해할 수 없다. 부처님은 모든 존재를 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법이라는 말을 존재라고 이해하면 안된다. 부처님은 존재 때문에 생사가 벌어졌다고 했다.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설명하면서 달마를 말한다.

법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경전을 보면 언어라는 것은 문맥 속에서 의미를 지닌다. 법대로 살자는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자는 것이다. 우리에게 윤리적으로 계율에 따라 살라는 것으로도 이해된다. 제법이 공하다는 말과는 다른 의미이다.

육근육경에서 의의 상대가 법이다. 5근은 각자 자신의 경계만을 인식하는데. 종합하여 의식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경계가 의지하고 있는 것이 의이다. 눈으로는 빛만 보고, 귀로는 소리만 듣는다. 그런데 사과를 어떻게 인지하는가. 형태로만 인지하지 않는다. 사과모양의 양초에 사과향을 뿌려놔도 심지에 불이 붙으면 양초로 인식한다. 이렇게 인식하는 것이 법이다.

우리의 지각은 다른 활동을 하지만 그 활동을 종합적으로 인식하는게 의근이다. 그리고 동시에 종합하여 경계로 인식 하는게 법이다. 사과라는 판단은 의가 하고, 드러나는 경계가 법이다. 경계의 의지처가 의이다. 사과가 내 의식으로 존재하는게 아니라 내 마음으로 인식한다. 아야따나는 자아가 있다는 상태로 주관과 객관을 파악 분별을 일으키는 것이다.

밖에 존재하는게 아니라. 존재로서 다르마, 즉 경계를 만들어 인식하는 것이다. 다른 것과 구별되는 것이다. 그때 잘못 생각해 사물 그 자체로서의 자성을 가지고 존재한다고 본게 아비달마이다. 그게 아니다. 사과를 구별할 때 똑같은 모양이었는데 의가 판단할 때 심지에 불이 붙으면 양초로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서양철학과 불교의 다른 점이다.

서양에서는 밖에 있는 것이 순수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불교는 의도를 가지고 존재한다. 인간은 모든 활동 토대에 욕구가 있어야 마음이 움직인다. 순수한 마음이라는 것은 없다고 보았다. 서양에서 순수마음 찾으려 했고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쓴다. 칸트의 순수한 마음은 의지 개입 안되고 있는 그대로 비춰보는 마음이다. 부처님은 그러건 없다고 했다. 연기하고 있고 원초적인 작용은 의지작용에 있다. 여기서 의와 상대하는 것이 법이다.

모든 활동은 욕구가 있어야 마음이 움직인다
불교는 순수한 마음이란 것은 없다고 보았다
연기하고 있고 원초적인 작용은 의지에 있다
이렇게 의식을 통해 분별해 아는 것이 식이다

이에 대한 부처님 제자들간의 활발한 논의가 남아있다. 생명현상은 육근이고, 의식현상은 육경이다, 우리의식이 작용하는 것은 볼 때 보이는 것은 밖에 있다는 생각으로 본다. 이걸 육입처라고 했다. 부처님은 육근을 수호하라고 했다. 내 마음이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망상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본래 하나인줄 알고보면 육근이 청정한 것이다. 청정하면 육입처가 사라진다. 근과 경은 따로있지 않고 연기한다.

입처라는 것은 실체가 머물러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입처가 무아인줄을 알도록 설법하는 것이다. 육입처에 대해 무상이고 공이고 무아라고 하고 있다. 실체가 없이 비어있고, 보는 순간만 있다, 내가 붙잡고 있으니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불교해설에서 12처 육근 육경을 잘못된 의식현상으로 보고 소멸 해야 한다고 하는데 육근은 죽으면 없어지는 것으로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육근과 육입처는 다르게 이해돼야 한다.
법이라는 것은 이렇게 연기하는 것으로 조건하에서 일어난다. 처음 눈앞에 벌어지는 것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은 모두가 현실에 대한 물음이다. 어떤 존재가 먼저 있었느냐는 것이다. 신이 있었느냐 물질이 있었느냐는 것이다. 불교는 무엇이 먼저 존재했느냐는 논의는 의미없다는 것이다. 존재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태어날 때의 내가 현재의 나인가. 태어날 때의 몸은 지금의 몸이 아니다. 시간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이처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정견이다. 몸만 그런게 아니다. 마음은 한결같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은 순식간에 바뀌어 버린다. 마음도 무상하고 오온도 무상한데 나라고 붙잡고 사니까 문제가 생긴다.

법이 무었이고 존재가 무었인지 이해가 되는가. 다르마는 어떤 인연이 주어지고 욕심을 가지면 귀결이 된다. 그건 안변한다. 내가 행복해지는 것도 법이다. 행복해지려면 행복이 나오는 법을 써야 한다.

착한일을 하면 착한 결과를 받는 것은 정해져 있다. 연기법 인과법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행복이 아닌 것을 행복이라 믿었다가 불행해지니까 불행한 것이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것은 행복한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게 선법이다.

존재라고 알고있는 모든 법은 조건에 의해 존재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법이다. 연기하는 법이 있을 뿐이다. 그 법은 똑같다. 부처님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 연기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걸 연기법이라 한다. 생로병사의 고통은 무명에 의해 나타난다. 무명을 깨쳐야만 열반한다.

중생인한 고통에 빠지고 중생을 벗어나야 열반을 얻는 것이 법이다. 이것이 상주하는 것이다. 이때 상주는 법이 상주하는 것이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물이 상주하는 것이 아니다. 법은 법계에 머물고 있다. 나는 그것을 깨달아 등정각을 이루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깨달아 누굴 제도한다는 것은 부처님 설법이 아니다. 함께 깨닫는 것이다.

내가 깨달아 남을 제도하겠다는 것은 망상분별에 차있는 것이다. 교만심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부처님을 잘 이해해야 한다. 부처님은 차별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중생들 조차 평등한 마음으로 대할수 있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부처님을 교황 쯤으로 생각하는데 불법은 줄세우는 법이 아니다. 같이 깨달음을 구해가는 것이다. 누구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내가 보고있는 이것을 올바로 보자는 건데 나만 보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의계와 법계와 무명계가 있다고 말한다.

법계는 의계와 연결돼있다. 의계는 살아있는 존재들의 마음이다. 그 세계이다. 이 구조를 모르는 것이 무명계이다. 어리석은 범부들이 알고 보았다는 것은 존재를 보았다는 것이다. 촉이 수행처이다. 육입이 망상임을 관찰해 상호의존관계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수행이다. 연기를 모르고 유무 개념에 빠졌다가 그것이 망상임을 알 때 지혜의 밝은 삶이 벌어진다.

촉을 일으키는 구조가 18계이다. 12처 안이비설신의에서 색성향미촉법이 생긴다고 보는 것이 무명촉이다. 잘못된 생각이다. 안식이 일어나는 것을 보는 것이다. 일어난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는 것이다. 식이 벌어지면 분별해서 안다는 것이다. 구별해 낸다는 것이다. 그 구별을 계라고 한다. 분별심이 일어나면 의식속에 경계선이 그어진다.

18계는 육근 육경 육식이다. 식에 의해 보는 모든 것들 즉, 안계라는 영역으로 보이는 것은 색을 경계로 식이 발생하면 보는 놈으로써 경계선이 주어진다. 식이발생하니까 18계가 된다. 18계에 의해서만 촉이 일어난다.

식은 의식하는 실체가 아니라 분별의 구조들이 모여있는 것이다. 인식하는 경험의 세계는 18계의 내면 구조속에서 촉이 일어난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이 계다.

전남대 이중표교수-존재와 법(2) / 주간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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