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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6-11-09, (수) 11:01 pm 

가입일: 2015-01-01, (목) 10:13 am
전체글: 189
부처님은 재물을 버리고 오신 분이다
지금 출가자의 문제는 재물 추구에 있다

옷 한벌 밥 한그릇의 삶이 수행자다
그 속에서 깨달아 행복을 찾자는 것이다

불교가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게 뭔가. 세상을 보는 세계관이 다르다.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보이는 게 있고, 들리는 것이 있고, 냄새나는게 있고, 만져지는 것들이 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게 뭐냐는 것이다.

기독교는 신이 창조했다고 한다. 따라서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움직이고 세상은 창조물과 피조물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여기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물으면 신의 뜻대로 살라는 것이 답이다. 우리를 만든 신이 어떻게 살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신의 종이다. 기독교에서 가장 잘 사는 것은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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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계관을 어떻게 갖느냐는 것은 호기심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것인가와 직결돼 있다. 종으로 사는 것이 진실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다. 그걸 믿고 살았던 시기가 중세 천년으로 기독교가 사회를 지배했을 때 이다.

인도에서도 비슷한 사상이 있었다. 브라만이 세상을 창조했다. 브라만은 인간을 네가지로 만들었다. 입에서 바라문, 어깨에서 크샤트리아, 생식기에서 바이샤, 발바닥에서 수드라가 나왔다.

따라서 바라문은 베다를 배우고 제사지내며 살면 된다. 크샤트리아는 무기들고 나라 지키는 군인으로 살면된다. 바이샤는 세상 생산에 기여하고, 수드라는 종노릇하며 살면 된다. 이게 인도에서의 다르마이다. 각 계급마다 해야할 법이 있는 거다. 각각의 계급마다 다르마를 지키는 것이 인생이라고 보았다.

인도의 소설 라마야나가 있다. 거기에 많이 등장하는 말이 다르마다. 마땅히 해야할 일에 목숨걸고 죽더라도 다르마를 위해 죽는다. 이것이 인도당시의 세계관, 삶에 대한 태도인 것이다.

그런데 서구에서 신이 창조했다는 기독교 사상에 의심을 가진 사람이 나타났다. 누가 이걸 만들었단 말인가.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유물론이 나타났다. 불변의 법칙이 있다.

이것에 기초해서 물리학에서 질량불변의 법칙이 나왔다. 우주는 처음부터 동일 중량을 가지고 존재했다. 우주는 본래부터 만들어지도 않았고 없어지지 않는 실체로서의 원자가 있다. 원자는 질량을 가지고 있다. 총 질량의 수는 변하지 않는다. 원자의 중량을 모두 합하면 우주의 질량이 된다.

문제는 원자도 쪼개지더라는 것이다. 없어진다는 것이다. 우라늄이 다른 원자로 변하면 질량이 줄어들어 버린다. 질량불변의 법칙은 효과가 없다. 질량이 주는 대신 에너지가 나타난다. 그래서 질량은 줄고 늘지만 에너지는 일정량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서 발견한 것이 ㎡*c=E 공식이다. 질량의 제곱에 빛의 속도를 곱해주면 에너지 양이 측정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다. 질량을 가진 것은 에너지가 되고, 세상은 에너지가 원자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에너지로는 세상을 설명할 수 없다. 어떻게 책상이 만들어졌는지 설명이 안된다. 구체적인 답이 아니다.

이 때문에 여전히 원자론과 공존한다. 깨지지 않는 존재일지라도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데 다양한 원자들이 모여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된다. 이것이 현재의 세계관이다.

현재의 세계관은 원자론

이러한 생각은 부처님 당시에도 있었다. 원자론과 같지는 않지만 아이디어 형태가 같다. 세상은 지수화풍 사대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당시 모든 존재는 브라만이 창조했다.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본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믿으라 하는가. 하지만 믿을 수 있는게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믿을 수 있지 않은가. 안보이는 것은 배제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서 답을 찾자는 것이다.

답을 찾는 근거는 현실이 확실한 근거가 된다. 보지 못한 것을 말하면 누가 믿겠는가. 그런데 우리가 아는 것은 보아서 아는 것이 아니다. 원자를 본적이 없다. 그래서 신을 본적이 없는데도 믿고 사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느끼지만 근거를 철저히 규명해 보면 사실은 애매모호하고 알지 못하는 것에 근거해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이 창조했다. 브라만이 창조했다. 시킨대로 살라. 형태는 다르지만 구조는 같다. 태어날 때 태생적으로 주어진 존재라는 것이다. 신의 종으로 태어났으니 따라서 살면 된다. 인도는 지금도 카스트 제도로 복잡하다.

지금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보편화된 세상이다. 인도사람들은 민주국가 이지만 삶의 세계에서는 힌두 전통이 그대로 살아 움직인다. 인도사람들은 자기 할 일을 이것 저것 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다르마로 살면된다고 생각한다. 의식이 무서운 것이다.

생각을 지배하는 것이 사상이고 세계관이다. 지수화풍 사대는 각자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이 만들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만들어져 다양하게 됐다. 사람은 특별할 것이 없다. 물질은 다 똑같다. 심지어 사대만 있지 인간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한다. 칼로 사람 베었다고 해서 그게 무슨 살인이냐고 생각했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재미있게 살다 죽으면 되지 않는가.

윤회한다는 사상이 있었다. 착한일 하면 죽어 좋은 과보 받는다. 그런데 유물론에서는 그런게 어딨냐는 생각에 쾌락주의가 만연했다. 내세에 잘산다 못산다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사는 시대는 지금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현상은 달랐지만 사람들 의식 구조는 다르지 않은 상태였다.

한쪽은 신이 만들었다. 신의 법대로 살아라.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무슨소리냐. 물질이 흩어졌다 모였다 하니 신나게 살면 되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와 어디가 다른가. 요즘은 돈벌어야 잘 산다는 게 유물론의 극치다. 작은돈 훔치면 벌, 큰돈 훔치면 상을 받는다. 작은 돈 투자해 큰 돈을 번다는 것은 도둑질 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재화인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가치가 한정돼 있다. 그런 가치는 인간들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더구나 노력도 안하고 주식 조작해서 일거에 큰 돈을 벌었다. 이거는 엄밀한 의미에서 도둑질이다. 부처님은 주지 않은 것을 취하는 것을 도둑질이라 했다.

요즘은 그런 도둑질을 잘하면 유능하다고 한다. 이 사회는 어찌보면 이런 유물론적 구조를 가지고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여서 돈만 벌면 된다는 것이다. 선도 악도 윤리도 없는 것이다. 기업가가 윤리적이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대기업 총수가 사업을 해서 수조원을 벌었다. 수조원의 가치가 생긴 것은 모두가 함께 만들어 놓은 가치인 것이다. 그런데 한쪽으로 쏠려있는 것이라 보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교육을 잘 시키는 것은 도둑놈 만드는 것이다. 교육이란 의도적은 아니지만 도둑놈 키우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러분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구조가 그렇게 돼있다. 윤리적인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관을 잘못 가지면 도덕이라거나 윤리가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지금 시대가 그런 시대다.

부처님은 왜 출가를 결심했는가. 많은 사람이 도를 구하기 위해 출가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부처님에 대해 많은 오해를 하고 있다. 경전에 생사문제를 해결하고 열반 해탈한 도인이돼 부처님 되자고 나온다. 그 언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면 우리가 이해하는 모습의 부처님이 보인다.

부처님은 왜 왕자로서 사회적 신분을 버리고 출가했을까. 부처님이 춘경재에 처음 아버지를 따라 나갔다. 그때 자기는 수레를 타고 가는데 마부는 땀을 흘리며 간다. 왜 그럴까. 농부들이 힘들어 하는 것을 보고 왜 저렇게 고생할까 하고 생각했다. 싯달타는 세상의 불평등함, 노력이 착취되는 것을 본 것이다. 다시 춘경재 행사에서 밭을 갈 때 땅에서 벌레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 왜 인간들은 저런 생물들을 해쳐야 될까를 고민했다. 그리고 새들이 날아와 벌레들을 먹는 것을 보고,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세상을 본다. 부처님의 출가 의미가 거기에 있다.

싯달타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를 고민하고 명상 했다. 다른 사람들은 축제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데 태자는 고민하고 있었다. 이때의 모습을 경전에는 “나무신이 그림자를 옮기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싯달타의 명상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안옮겼다고 한다. 정말 가장 귀중한 사유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 모습을 태자사유상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국보인 미륵 반가사유상은 그 모습을 본뜬 것이다. 미륵이 부처가 되려면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출가 동기나 해결해야 할 과제는 세상사는 존재들이 참으로 행복하게 살게하는 것이다. 태자는 모든 중생들이 다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그런데 고통받으며 사는 것을 생각하니 불쌍한 마음을 가눌수가 없었다.

불교는 공산주의와 달라

부처님은 그 해답을 불교에서 찾은 것이다. 모든 고통의 문제,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함께 잘살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공산당 같은 소리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듯하면 공산주의로 몰아붙여 적대감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불교는 공산주의가 아니다. 공산주의는 혁명이며 서양적 사고이다. 항상 주객이 있고, 피아가 갈려있다. 그 이념의 핵심은 유물론적 변증법이다. 변증법에는 항상 모순이 대립한다. 대결을 통해 투쟁을 통해 새로운 단계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공산주의가 보고있는 것도 이런 세계관에 근거한 것이다. 노동자와 사용자는 모순된 대립이다. 노동자는 사용자가 아니고 사용자는 노동자가 될 수 없다. 타협점이 없다. 투쟁을 통해 새로운 계급으로 올라가 새로운 단계가 설정되면 또 새로운 단계를 잉태하게 돼있다. 칼 막스는 유물론에서 노동자 농민이 역사적인 필연이라고 말한다. 혁명이 완성되는 순간 새로운 세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유물론의 피해가 극렬하게 나타나고, 그 핵심적 구조에서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나라가 우리 대한민국이다. 우리는 이념 전쟁으로 대리전을 폈다. 정치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려 하지만 그 뿌리가 철학에 있기 때문에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한국전쟁은 자본주의를 신봉했던 사람과 공산주의를 신봉했던 사람이 벌인 전쟁이다.

대립아닌 상호이해의 인연법

부처님은 두 관계를 대립적 관계로 보지 않았다. 노동자가 없으면 사용자도 없고, 사용자가 없으면 노동자도 없다고 보았다. 이렇게 연기로 보았다. 어떤 철학도 보여준적이 없는 부처님 만의 안목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연기적으로 상호 이해가 있어야 한다.

부처님 당시도 마음에 드는 사회가 아니었다. 부처님은 왕에게 가서 왕의 눈을 뜨게 해주고, 자본가한테 가서 자본가의 눈을 뜨게 해준다. 유산자의 편에 서거나 가난한자의 편에 서지 않았다. 부처님의 안목으로는 둘다 불쌍한 사람이기 때문에 동시에 구제하려고 했다. 이게 불교다.

부처님은 왕자로서 부를 가져 봤다. 그리고 출가해 걸식하며 가난도 경험 해봤다. 부처님은 유물론의 행복이 우리가 구하는 행복이 아니라는 것은 아신 분이다. 부처처럼 빌어먹고 살라고 하면 누가 부처가 되고 싶겠는가. 출가자들은 부처가 되면 신도들이 절하고 재물을 갖다줄거라 생각한다. 부처님은 재물을 버리고 오신 분이다.

지금 출가자의 문제는 재물을 추구하는데 있다. 부처님은 옷 한벌 밥 한그릇으로 살았다. 그게 수행자의 삶이다. 비구는 그렇게 산다. 그렇게 평생을 사셨다. 그 속에서 행복을 찾는자는 깨달은 자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는 서구 유물론과 개인주의에 기인한다. 유물론이 지배하고 있다면 부처님 가르침 속에서 이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투쟁이 아니라 함께 공존하는 법을 깨닫고 지혜를 찾아가야 한다.

부처님은 재물을 버렸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부처님의 삶을 살아가기 위함이다. 불교는 수행의 종교라며 수행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 많이 하는데 뭐가 수행인가. 수행이란 자기 인식을 바꿔서 자기 삶을 바꿔가는게 수행이다. 그런데 자기 생각가지고 앉아서 생각할수록 아상만 굳어진다. 자기 생각으로는 수행이 안된다. 자기 생각이 어디가 잘못됐는지를 깨닫고 반성해야 한다. 잘못을 깨우치고 정견을 찾아가는데서 수행이 시작된다.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해야만 수행도 가능한 것이다. 교리는 놔두고 참선만 하면 된다는 풍토가 중국에서 생겼다. 그런 의도가 아닌데 와전돼서 경보는 것을 창피해 하고, 참선만 한다. 무조건 수행만 하면 된다는 것을 반성해야 한다. 이제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을 정확하게 볼 것을 가르친다. 처음에 유신론도 안되고 창조론도 올바른 세계관이 아니고, 원자론도 진리가 아니라면 진리를 찾기 위해서는 어디서 출발해야 할까. 출발점을 모르고 진리가 뭘까에 빠져있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진리가 안나타난다. 출발점이 있어야 길도 나오고 목적지도 설정된다.

사유의 출발점은 눈앞의 현실

출발점은 눈앞의 현실, 바로 여기이다. 여기에는 내가 있고 보이는 놈이 있고 보는 놈이 있다. 어디를 가도 항상 언제나 어느때나 그게 세상의 전부다. 다른게 있는가. 없다. 이게 뭐냐고 묻는 것이 철학이고 과학이다.

신이 만들었다고 생각한다면 신이 시킨대로 하라. 유물론적으로 재미있게 살다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한다면 환락에 젖어 살아라. 이게 문화다. 돈벌어 멋있고 재미있게 사는 것이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행복이다. 엔조이 하는 것 말고 뭐가 있는가. 이것이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런 생각은 부처님 당시의 인도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부처님은 우리가 살아갈 새로운 길을 제시하셨다. 부처님은 현실을 잘 보라는 것이다. 보는놈과 보이는놈이 있다.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 이게 12처다. 이걸 토대로 따라 가면 중생계이다. 이것을 되물어 가는 것이 수행이다.

보는놈과 보이는놈이 나눠져 있다. 그런데 좀더 마음 가라앉히고 삼매 하라. 욕심의 대상이 있어 둘로 쪼개져 있는 것이다. 마음을 가라앉혀라. 습관적으로 일어나는 생각을 쉬어라. 멈춰라. 그리고 봐라.

집중하는 것이 사마타, 그 자리에서 관하는게 위빠사나이다. 이게 사띠이다. 사마타 위빠사나가 일어난다. 주의를 집중하고 보면 올바로 알아차려 보게된다. 그걸 수행이라고 한다.

보는놈과 보이는놈은 둘이 아니다. 눈감으면 보는놈이 없고, 눈뜨면 보는놈이 있다. 보니까 나온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여실하게 보는 것이다. 생각으로 보지 말라는 것이다. 사려분별을 끊으라고 하는 것이다. 불교는 내가하던 습관대로 보지말고 지금 이 자리에서 보는것에 대해 집중해서 보라는 것이다. 이를 보기위해 문제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냥 앉아있어봐야 답이 안나온다. 수행법은 교리는 상관없이 있는 것이다.

보는 놈이 생길 때 오는것도 없고, 보이는 놈이 갈 때 가는 것도 없다. 보고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야따나이다. 보는나라는 놈이 안에 있다고 하면 안볼 때 딴데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아주 없는게 공이고, 있다 없는 것은 없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면 뱀이 나타나서 있을때는 올 때 오는 것이 있고, 갈 때 가는 것이 있다. 나도 그런 나로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생각이 십이처 가운데 육입처다. 이것으로 사는 것이다. 명색은 식 때문에 있다. 부처님은 항상 12처로부터 벌어지는 것을 설명한다. 일체는 12입처다. 어떤의도인지 모르고 다양한 연기법을 예기했다고 학자들이 말한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말했다고 말한다.

생각해 보라 부처님이 문제를 가지고 세계관 철학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깨달아 연기법을 설했다. 부처님은 스스로도 알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고 심심미묘해서 말하려 하지 않았다.

큰 법문인줄 알고 이생에 깨달음을 성취하고 밝은 빛이 되겠다고 원을 세우고 각오를 가지고 살아야 겠다. 이게 불교다. 이걸 부처님은 공이라 했다. 안은 공이다. 보는놈은 공이다. 볼때는 나타나지만 안볼때는 사라진다. 업보로구나. 업보는 있지만 작자는 없다. 나라는 존재는 이렇게 업을 통해 드러나는 존재다. 존재는 업보의 구조다. 거짓말을 하고 있어 거짓말쟁이인 것이지 처음부터 거짓말쟁이는 없다.

무아와 공, 업보는 지금 여기 있는 현실을 잘 보게되면 드러나는 진실 실상이다. 이 때문에 공을 실상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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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08 주간불교 한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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