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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6-10-27, (목) 9:10 pm 

가입일: 2015-01-01, (목) 10:13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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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중도론은 상호의존 관계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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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 이중표 교수-불교와 일반시스템이론

부처님의 깨달음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말한다
창조론에 대한 의문이 원자론을 탕생시킨 것처럼
또 원자론을 깨고 나온 것이 양자역학이론이며
시스템 이른이다. 불교는 이것과 맥을 같이 한다

현대사회는 개인주의가 되면서 영웅이 없어졌다. 인기인은 있는데 인류를 이끌어 갈만한 귀감이 될만한 스승은 나타나지 않는다. 대통령도 인기있는 사람이 된다.

미국은 세계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나라다. 그런데도 정치는 인기도로 뽑고, 감각적 쾌락과 만족이 추구하는 가치가 됐다. 과거는 도덕 윤리가 중요했는데 지금은 목숨유지가 최고의 가치가 됐다. 목숨유지를 위해서는 별짓을 해도 좋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구조는 언제든지 붕괴될 수 있다.

지난번에 불교와 일반 시스템이론을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시스템이론을 가지고 이야기하려면 흥미 없을 것 같고,어떤 이론인지 개요만 이야기하고 불교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시스템 이론 이전에 원자론이라는 이론이 있다. 이는 물질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단순히 물질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아이디어이다. 세상을 생각할 때 출발점은 항상 보이고 있는 현실이다. 그리고 보고 있는 나 자신이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다.

내가 보고 있는 것, 보고 있는 나를 통털어 세계라 한다. 아무리 생각없이 살더라도 세계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묻지 않아도 답은 있다고 보고 의심이 없으니까 안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세계가 진실이냐는 물음을 갖는 것이 문제의 출발점이다. 그럼 어디서부터 문제를 제기하고 답을 찾아야 할까. 바로 내가 서있는 자리이다. 부처님은 노사가 있다는 것에서 시작했다. 삶 속에 일어나는 노사는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태어나 늙고 죽어간다고 인식하는 것이 현실이다.

12연기가 노사의 문제를 해결했다. 그럼 부처님은 늙지 않고 죽지 않았는가. 무슨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인가. 불교를 공부하면서 어디서 출발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올바로 진행되지 않는 것이다.

기독교의 창조론

모든 문제는 지금 현실이 무엇이냐를 물었을 때 답을 해야 한다. 기독교는 창조했다고 했다. 언젠가 세상이 열리는 날 태초에 신이 다 만들어 놓고 그 속에 생명을 불어 넣었다. 이것이 기독교의 시작이다. 내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답이다. 여기서는 물음이 나올 필요가 없다.

그런데 르네상스이후 신의 창조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창조론을 대신한 것이 원자론이다. 창조론에서는 신이 만들었으니 창조자와 피조자의 대립이 필요하다. 창조자는 안보이고 피조자만 보인다. 확인이 안된다. 무조건 믿어야 한다. 모든 창조론의 신념에는 믿음이 주가된다.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의심이 생긴 것이다.

창조론에서 설명하는 대로 현실을 적용하기가 어려웠다. 모든 것이 신에 의해 움직인다고 했다. 번개도 신이 노한 것이라 했다. 그런데 과학은 전기가 부딪쳐 일어나는 방전현상임을 발견했다. 전에는 신이 노해서 소돔과 고모라를 파괴했다고 했는데 단순한 자연현상일 뿐이다. 이러한 의심들이 새로운 것을 찾도록 했다.

르네상스 이후의 원자론

과학자들은 확실한 것만 보자는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 내 앞에 있는 것을 가지고 설명을 하는 방법은 첫째 신이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다면 전부터 신과는 무관하게 스스로 존재했을 것이다. 찻잔은 없어진다. 그래도 부서진 조각들은 안없어진다. 안깨질 때까지 부수어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것을 찾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도저히 안깨지는게 나타났는데 이것을 원자라 부른 것이다. 원자라는 개념이 나타남과 동시에 개별적인 원자들이 모여 전체가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했다.

원자는 누구 때문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 본래 저혼자 존재했다. 저 혼자만 있으면 다른 것이 만들어지지 않지만 둘이 붙으니 다른 존재가 됐다. 따라서 그 존재는 실체가 아니며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원자는 자체는 안없어지고 있을 것이다. 개체적 실체가 있다고 믿는 것이 원자론이다.

신이 만든게 아니라 본래 존재하는 것들이 모였다 흗어지면서 다양한 물건을 만들었다. 이러한 원자론적 사유 패턴이 모든 세상을 이해하는 틀로 작용한다. 패러다임이라 한다. 패러다임은 한 시대나 사회 집단이 공유하고 있는 사유의 틀이다.

르네상스 이전의 패러다임은 창조론이다. 하나님의 뜻이었다. 별이 빛나면 천국의 징표이다. 죽으면 하늘의 별이된다. 하늘로 올라간다. 그런데 갈릴레오가 망원경으로 보니 땅덩어리였다. 코페루니쿠스는 지구가 돈다고 주장했다. 단 한번도 지구가 돌것이라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다는 생각에서 거꾸로 생각한 것이다. 코페루니쿠스적 전환이다. 인식한다는 것도 칸트는 내가 만들어 낸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말하는 것이다.

원자론이 설명하는 사회는 개체들로 구성돼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적으로는 하나님이 시킨대로 산다. 왕은 신이 시킨 것이다. 왕권신수설이다. 그런데 신이 없어져 버렸다. 그러니 신 대신 권력이 왕을 차지했다. 더 힘센 놈이 나오면 새로운 왕이 나왔다.

이렇게 원자론이 나온 후 개인이라는 것이 나오고 개인주의가 나왔다. 동양에서 인간은 다른 인간과 관계가 단절되면 인간이 못된다. 존재론적으로 개인이 이해가 되겠는가. 사람은 개인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 속에 있는 존재이다.

원자론과 서양의 개인주의

그런데 서양에서는 개인은 혼자 있을 수 있다. 이게 개인주의이다. 개인주의와 원자론이 무관하지 않다. 세상을 보고 안다고 할 때 반드시 앎을 형상시키는 틀이 있다. 개인으로 볼 때 작용한 것이 진화론이다. 진화론은 물질만 있는데 생명은 어떻게 가능할까. 물질로부터 진화해 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윈식의 사유방식이다. 진화론의 토대는 원자론이다. 원자론은 물리학 이론이 아니라 창조론을 무너뜨리고 나온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여기서 힘을 앞세우고 개인주의를 앞세운 서양문명이 탄생했다. 서양의 폭력적인 식민정책, 기계문명이 모두 여기서 나왔다.

원자론적 세계관과 기계론적 세계관은 맞물려 있다. 시계를 분해하면 부속품들이 각각 존재한다. 서로 무관하게 원자적으로 있는 것이다. 그런데 조립을 하면 시계가 된다. 그렇지만 부속품들은 변화가 없다. 그걸 엄밀하게 계산해내는 것이 수학이다. 원자론을 이해할 때 설계해낼 수 있는 도구로 수학이 각광을 받았다.

수학은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다. 떼어놔도 양적 변화가 없다. 이게 수학이 작용하는 룰이다. 이게 논리학과 결합되면서 합리주의 사고가 나타난다. 그 시대의 사유의 틀로서 유물론, 원자론, 합리론, 이런 것들은 동류의 철학이다. 여기서 인간은 개인들이 사회를 구성 할때 약속에 의해 구성한다는 사회계약론이 나왔다.

사회의 기반은 개인이다. 개인은 다른 사람과 관계없이 존재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 개인은 각자 개체적으로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인권이다. 그런데 인권을 말하려 하면 모든 사람이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하는데 제대로 안된다.

각각의 개인은 인간이고 똑같은 권리를 같는다는 것이 기본권이다. 그러나 본래 개인은 이기적이다. 자기 살길을 찾는다. 여기서 계약론이 나오고, 이익 추구는 고유권한으로 인권은 자기 권리이다. 이것이 계약론의 핵심이다. 법에 위반 안되면 어떤 악행도 처벌할 수 없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 사회이다.

옛날 임금들은 못된 놈을 그냥 처벌했다. 지금은 법조항이 없으면 처발할 수 없다. 지금 민주주의는 이런 패러다임에서 나온 것이다. 왜 수긍해야 하느냐면 원자론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본래 가지고 있는 이성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사회구조 속에서 형성된 형태들이지 고유한 것이 없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부처님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세계의 틀이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 모르고 살기 때문에 이걸 바꾸려 했던 것이다.
우리는 부처님의 깨달음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번뇌 망상 고민을 해결하며 살다가 가면 좋지 않을까 하는데만 그칠까 우려하는 것이다.

그것이 궁극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인류가 가지고 있는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부처님의 생각이다. 부처님은 모든 것이 무명에서 생겼기 때문에 무명을 없애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부처님 사후, 개인 문제의 해결에 국한하면서 소승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대승은 모두 함께 가야할 세계를 지향한다. 대승은 공부하는 방향이 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원자론을 대체한 일반시스템이론

이런 원자론이 서양에서 깨졌다. 유지될 수 없는 현상이 나왔다. 원자가 쪼개져 쪼가리가 안나오고 에너지가 나와 버렸다. 이제는 개체적인 알갱이들, 물질들이 유지될 수 없게 된 것이다. 핵이 분열되면 열이 생겼다. 핵이 쪼개져 엄청난 폭탄이 됐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걸 설명해야 한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인류 사회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다. 양자역학이론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부처님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끌었던 분이다. 부처님은 사람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급선무다. 올바른 생각을 갖고 삶의 토대가 되는 패러다임으로 살아가는 삶이 팔정도이다. 팔정도의 정견으로 볼때 창조론보다 원자론의 삶이 더 고통스럽다. 인간 내면의 고통이 커져 고통스러우니 정신병자가 생긴다. 우리가 지금 경제적으로 더 부자가 되면 행복해지겠는가.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경제적 부보다도 행복해야 한다. 서양합리론 원자론 과학은 실패한 것이다.

원자론의 문제를 직시하고, 서양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등장하는 것이 시스템이론이다. 다양한 쪽에서 나와서 다시 종합해 총체적으로 이야기 할 때 일반시스템이론이라 말한다. 생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지금 까지는 인과로 원인을 찾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창조했으니까, 이것이 원인과 결과이다. 하나님을 배제하니 원자가 나왔다. 모든 존재는 근본존재로 환원이 가능하다. 원자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되돌아가는 것을 진리라고 보았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오늘의 결과가 나왔다. 원인으로부터 결과가 나오지만 결과는 원인에 어떤 영향도 줄수 없다. 이것을 선형 인과율이라 한다.

인과관계는 항상돼야 하고 예상할 수 있다. 원자론까지 가능하다고 봤다. 모든 존재는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면 다음에 어떻게 움직일지 알수 있다는 것이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됐다. 미신이 없어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다. 서양 인문학은 인간의 자유성을 연구한다.
자연과학은 이제 다른 인문학 영역이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시스템 이론에서는 모든 존재가 시스템이라고 본다. 혼자는 시스템이 아니다. 관계를 맺어가야 시스템이다. 상호관계성 속에 있다. 더 큰 시스템은 작은 시스템을 구성하며 있다. 시스템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시계바늘은 시계에 들어가야만 의미가 만들어지듯이 시스템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시스템 이론은 인과관계로 세상을 달리한다는 것이다. 선형적이 아니라 상호적 인과관계이다. 그래서 일반 시스템이론이라 하는 것이다. 불교의 연기설이 상호의존적 인과율로서 작용한다. 식과 명색의 상호관계라고 보아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식과 명색을 개별적 존재로 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식은 공이다. 상호적으로 있어야만 식도 있고 명색도 있는 것이다.
원자는 너 없어도 내가 있다. 그런데 상호적으로 본다면 네가 없으면 내가 없는 것이다. 상호적인 것이다. 유교적인 효는 일방적이다. 죽을 때까지 은혜를 갚으라고 한다. 불교는 서로 잘하라고 한다. 부처님은 연기의 도리를 깨달았고, 상호관계를 가지고 세상을 보면 창조론 원자론 문제가 모두 해결된다.

시스템 이론은 과학에서 주목받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양자역학도 소화할 것으로 보고 있다. 생명의 그물이라는 책이 있다. 시스템 이론이 현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잡게 되면 새로운 윤리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각각의 위치에서 해야할 일이 있을 것이다.

정말 철학이 중요하다. 저는 수행자가 아니지만 수행을 통해 올바른 정견을 깨닫기 위한 것이 진정한 수행이지 다른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외 다른 것이어서는 안된다. 마음의 평화를 얻는 정도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없으면 언제든지 깨지는 평화다.

수행을 많이 해도 화도 잘내고 판단도 흐리고 삼매에 잘 돌아 다니지만 나오면 도루묵이다. 부처님은 그들의 최고삼매에 들어가 보지만 깨어나서는 똑같다는 것에서 포기하고 버린 것이다. 궁극이 아니라 이런 경지에 가봐도 필요없다. 버려야 할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설해진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상대가 폭행하려하면 나도 방어하려 한다. 먼저 스스로 자기를 놔버려야 상대도 놓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무아와 공이라고 보는 것은 허무적인 표현이 아니라 소통 관계속에서 나 없음을 자각하고 공이고 연기임을 자각해야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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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6 주간불교 한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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