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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5-01-13, (화) 7:21 am 

가입일: 2015-01-01, (목) 10:22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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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부파불교의 유아론을 깨기 위해 도입된 공'-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그러므로 공속에는 물질인 몸도 없고, 마음의 작용인 수상행식도 없고, 눈 귀 코 혀 몸 마음도 없고,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대상도 없다.
눈의 영역도 없고, 내지 마음의 영역도 없다.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의 소멸도 없고, 내지 늙음과 죽음도 없고, 또한 늙음과 죽음의 소멸도 없다.

부파불교의 유아론을 깨기 위해 도입된 공 / 그러나 무상 무아의 의미에서 멀리 벗어나버렸다.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그러므로 공 속에는 물질인 몸도 없고, 마음의 작용인 수상행식도 없고.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눈 귀 코 혀 몸 마음도 없고,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대상도 없고, 눈의 영역 내지 마음의 영역도 없고, 여기서 논리 전개가 바뀌었습니다.

앞에서는 '오온은 공하다'라고 하는 논리를 전개했었는데, 여기에 와서는 그 논리를 완전히 뒤집었어요. 여기선 공한 것이 오온이다,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반야심경은 철저하게 기존의 모든 구조를 해체시켜 버린다는 거예요. 철저하게 해체시켜요. 그 해체시킨 위에다가 새로운 구조를 세우죠. 우리가 일상적인 표현으로 할 것 같으면, 도시를 개발하는데 있어서 뉴타운 방식을 쓰지 않고, 도시 전체를 아예 밀어버리죠. 그리고 그 위에다 도시를 세워요.
뉴타운 방식이라고 하는 게 뭐예요? 부분 부분적으로 하잖아요. 여기 찔끔, 저기 찔끔. 그런데 아예 도시 자체를 철저히 밀어버리죠. 아예 없애 버려요. 그리고 그 위에다 새롭게 도시를 건설하죠. 그래서 반야심경의 논리는 이거예요.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우리가 보통 표전(表銓)과 차전(遮詮)이라는 말을 쓰는데, 표전은 긍정한다는 말이고, 차전은 부정한다는 뜻이에요. 반야경은 철저히 부정하죠.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우리가 논리에 있어서 보면 인도나 구라파의 논리는 소통의 언어 논리예요.
근데 중국은 뜻의 언어 논리죠. 그래서 기본적으로 언어 논리구조가 달라요. 지금 이 반야심경 같은 경우는, 본래 반야심경은 소통의 언어논리 구조예요. 그래서 원전은 상당히 지루할 정도로 말이 많죠. 그런데 현장스님은 소통의 언어논리 구조와 중국의 전통적인 뜻의 언어 논리구조를 절충해서 이 반야심경을 번역했어요.
우리가 아함경이라는 걸 보면 정말 지루해요. 왜 그러냐면 언어논리가 반복되걸랑요. 근데 중국의 논리구조는 뜻이기 때문에 굉장히 단순하죠. 대신 중국의 뜻의 언어논리 구조는 그 뜻을 왜곡시킬 수 있는, 즉 소통에 많은 장애를 일으킬 수 있는 구조를 갖죠.

시고 공중무색(是故 空中無色)이라 그랬어요. 그러기 때문에 공 속에는 색이 없다고 그랬어요. 색수상행식은 오온이잖아요. 이것이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인간 존재를 이해하는 건데, 경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죠.
아난다여! 자아와 자아에 속한 모든 것은 공하므로, 세계는 공하다고 불린다. 자아, 또 자아에 속한 모든 것은 다 공하다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세계 자체가 공하다는 거죠.
불교에서 말하는 세계는 오온, 육근, 육경, 육식이예요. 이걸 세계라 그래요. 이거를 단순화시키면, 나와 대상이 되죠. 사실 우리가 오온이 공이 되었든, 공이 오온이 되었든 간에, 공이라고 하는 논리를 전개하게 되는데, 우리가 이 공이라고 하는 개념의 이해가 쉽지 않죠.
내가 이 공이라고 하는 것은 무상과 무아를 뜻한다고 했지만 공의 특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아요, 사실. 굉장히 이게 어떻게 보면 난해하죠. 난해한 이유는 이론적으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아요.
사실 이거는 이론적이기보다는 경험적인 거예요. 특히 반야경에서 공을 강력히 주장하는 이유는, 대승불교 전에는 부파불교 때는 독자부의 개아설, 아니면 유부의 법체설을 겨냥하고 있어요. 독자부에서 개아설을 주장하는데. 개아라고 하는 것은 푸트갈라(pudgala)라고 그래가지고, 금강경에 보면, 아상(我相) 인상(人相)할 때 그 인상이 푸트칼라예요. 사람이라고 하는 뜻, 아니에요. 인도에는 자아라고 하는 개념도 있고, 개아라고 하는 개념도 있고, 영혼이라고 하는 개념도 있고, 여러 가지 유사한 개념이 있어요. 그런데 부처님이 '오온은 무아다'라고 그랬단 말이에요. 오온은 무아다.
독자부에선 뭐라 그랬냐면 붓다가 오온은 무아라 그랬다, 고로 오온이 아닌 것은 유아다. 아주 독특한 논리죠. 부처님이 오온은 무아다 그랬으니까 오온이 아닌 것은 유아라는 거지요. 그게 개아설이예요.
설일체유부에서 삼세에 걸쳐서 법체는 항존한다고 하는 주장 같은 것들, 이따가 12연기에서 이야기 되어야 되지만, 여기서는 공 속에 수상행식이 없다고 하는 것, 우리가 이거는 일체개공이라고 표현하죠. 일체개공, 모든 것이 다 공이다.

38) 18계를 사띠로 분별하는 것이 계분별관 / 육근 육경 육식에 아트만이 없는 것을 보는 수행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라고 하는 것은 이것의 내용은 18계라고 되어 있잖아요. 이게 지금 18계에 대한 이야기예요. 18계에 관한 이야기인데, 근(根), 경(境), 식(識)이라고 되어 있고, 계라고 하는 것은, 육근, 육경, 육식이 동시작용할 때를 계라고 불러요. 그래서 이 18계를 하나하나 분석해서, 사티로 관하는 수행을 계분별관이라고 해요. 계분별관. 일단 표를 보고 설명을 해야, 이 논리가 이해가 가요.

十八界;
六根 / 六境 / 六識 *
眼根 / 色境 / 眼識 *
耳〃 / 聲〃 / 耳〃 *
鼻〃 / 香〃 / 鼻〃 *
舌〃 / 味〃 / 舌〃 *
身〃 / 觸〃 / 身〃 *
意〃 / 法〃 / 意〃 *
육근이라고 하는 것은, 근이라고 하는 것은 감각기관이라는 뜻이예요. 감각기관, 근은 감각기관이라고 하는 뜻이예요. 그래서 감각기관에는 여섯가지가 있다는 거예요. 첫째는 안근, 그러니까 시각이죠. 두번째는 이근, 청각. 세번째는 비근 후각. 네번째는 설근, 미각. 다섯번째는 신근, 이거는 촉각이예요. 그리고 여섯번째는 의근, 이건 마음이예요.
그러니까 시각과 청각과 후각과 미각과 촉각, 이 다섯가지 감각기관을 불교에서 오근이라고 불러요. 그래서 안이비설신은 아까 우리 색성향미촉법할 때, 색이예요. 18계라고 하는 것은 오온이 확장되고, 세분화되었다 그렇게 보면 맞아요.
인간은 시각과 청각과 후각과 미각과 촉각을 통해서 외부 세계와 소통하죠. 이 다섯 가지 감각이 완전히 소멸되어 버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경전에서는 이걸 썩은 나무토막보다도 더 소용이 없다고 그랬어요. 이건 시신이에요. 죽은 거예요. 인간은 철저하게 다섯 가지 감각을 통해서 소통하죠.
우리가 태어나서 다섯 가지 감각을 통해서 뇌가 성장하고, 뇌의 회로가 연결되었거든요. 그래서 4세 이후가 되면 더 이상 뇌는 성장하지 않죠. 뇌의 회로도 새롭게 연결되지 않고. 수행을 통해서 뇌의 회로의 연결을 바꿀 수가 있어요.
뇌의 회로는 바뀔 수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가 일상적인 삶 속에서, 그냥 살아가는 중에는 뇌가 새롭게 연결되고 하는 법은 없어요. 인간에게는 이 다섯 가지 감각이 가장 근본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육경이라고 하는 것은, 경은 대상이라고 하는 뜻이예요.
색경이라고 하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자연이 되겠죠. 산, 별, 해, 달 이런 것들. 눈으로 볼 수 있는 건 전부 다예요. 색깔도 들어가요. 색깔, 청황적백흑, 이런 색깔. 그러니깐 눈으로 볼 수 있는 건 모두 다 색경이에요. 눈의 대상이라고 하는 뜻이에요.
그 다음에 성경은 소리이죠. 청각이 감지할 수 있는 것, 향경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 냄새가 되었든, 나쁜 냄새가 되었든 냄새를 말하죠. 그 다음에 미경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먹는 음식물이예요. 인간은 철저히 외부에서 에너지가 공급되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해요. 우리가 음식물을 섭취해야 살죠. 왜냐하면 우리는 에너지를 외부에서 얻거든요. 우리에게는 자가발전 기계가 없어요. 이슬만 먹고 산다? 뭐, 이런 거는 상상 속에서나 있는 얘기죠. 인간은 철저하게 먹어야 살아요.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먹어야 산다고 하는 것은 똑 같아요. 그래서 중요한 것이 어떻게 먹냐는 거죠.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는 것. 그게 그 사람의 심성이나 어떤 육체의 건강이나 이런 데 많이 좌우하죠.
그 다음에 촉경은 피부가 느낄 수 있는 감촉이예요. 여기에 법이라는 게 나오는데, 법이라는 것 자체가 여기선 대상이라고 하는 뜻이에요.
그리고 안식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설명하면 보는 마음이 되고, 이식은 듣는 마음이 되고, 비식은 냄새를 맡는 마음이 되고, 설식은 맛을 보는 마음이 되고, 신식은 감촉을 느끼는 마음이 되고, 의식은 마음의 인식작용이에요.
그래서 눈으로 대상을 보잖아요. 대상을 보게 되면, 거기에 마음이 움직이죠. 그걸 안식이라고 그래요. 보는 마음이 움직이고, 동시에 의근이 작용하죠. 또 동시에 의식도 작용하고요. 안근과 색경과 안식과 의근과 의식이 다 작용해요. 계분별관은 이것을 낱낱이 사띠로 보는 것을 말해요. 우리가 볼 때 어때요? 눈알이 움직이잖아요. 안구가 구르잖아요. 안구가 구르고, 눈동자의 조리개가 확장과 축소를 하죠. 그걸 느끼는 거예요. 그걸 느끼면서 동시에 색경, 대상을 볼 때 눈의 눈동자가 움직이게 되는데, 안구가 구르고 눈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을, 움직임과 동시에 마음이 작용해요. 그거를 실제적으로 느끼는 거예요.
이근이라고 하는 것은 청각이 소리를 듣고, 소리를 들을 때, 거기에 또 마음이 움직인다 말이에요. 그리고 냄새를 맡게 되며는 코의 후각이 움직이고, 거기에 마음이 작용하게 되고. 외부에서 음식물이 공급되면 어떻게 돼요? 미각이 작용하잖아요.
수행에서는, 실질적인 수행에서는 안구의 움직임, 청각의 움직임, 후각의 움직임, 미각의 움직임, 맛의 느낌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맛을 혀에서만 느끼는 것 아니에요. 구강에서도 느끼고, 인후에서도 느껴요. 그 자체를 다~아 느끼게 되고. 신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피부에서 느끼는 건데, 사람이 피부 접촉이 굉장히 중요해요. 피부 접촉이 많을수록 정이 들어요. 그래서 어린 애기일 때, 엄마가 얼마나 많이 보듬어 주느냐? 이게 굉장히 중요하죠. 우리가 낳은 정이냐, 기른 정이냐 하는 것도 이래서 나오는 거예요.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 훨씬 더 영향이 커요. 왜 그러냐면 태어나서 기른 정은 피부 접촉이 많걸랑요. 피부 접촉을 함으로써 우리가 어떤 강한 유대감을 갖죠. 피부 접촉이라는 것은 환경적인 것을 뜻하기도 해요. 그래서 우리가 이걸 보통 후성이라고 그러는데, 선천적으로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온 것 보다는 후천적으로 얼마만큼 피부 접촉이나 어떤 환경을 조성해 주느냐, 이것이 굉장히 중요하죠.
일란성 쌍둥이는 거의 같은 환경에서 키우면 유사한 성장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환경에서 키우면 어떻게 될까요? 일란성 쌍둥이라 그래도 다른 환경에서 키우면, 유사한 점이 25% 밖에 안돼요. 그러니까 지능 여부, 질병 여부, 이런 부분 같은 경우가 일란성 쌍둥이를 다른 환경에서 키우면 25% 정도 밖에 동일하지 않아요. 그런데 같은 환경에서 키우면, 이게 굉장히 높아요. 그렇기 때문에 피부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 감촉으로 느껴지는 접촉이라고 하는 거는 굉장히 중요해요. 어떻게 보면 제2의 자궁이라고도 할 수 있죠. 우리가 가장 편안하고 안정되어 있을 때가 어머니 자궁 속에 있을 때거든요. 우리가 어머니가 안아 줄 때가 가장 편해요. 안정되어 있죠. 그래서 선천적으로 우리가 낳은 정을 이야기하지만, 후천적으로 기른 정이 더 깊은 거예요.

39) 根 境 識 / 界(계는 근경식을 두고 계로 펼쳐 있는 모습) / 界分別觀 –
여기서 법경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대상이에요. 우리가 여기서 육근, 육경, 육식이라고 해서 법경을 나눠놓고 있지마는. 보통 부파불교에서는 색성향미촉법은 법경에서 제외된다고 그러지마는 제외될 수가 없지요. 또 제외되어서도 안 되고. 의근이라고 하는 것이 마음인데, 색성향미촉 자체가 다 마음의 대상인데, 법경에서 분리될 수가 없죠, 이거는.
이들 근 경 식을 합친 18개가 모인 것을 18계라고 그래요. 계는 영역이라고 하는 뜻이예요. 근, 경, 식, 세 개가 모이면 계라 그래요, 영역이에요. 그래, 이 하나 하나를 사티로 직관하는 것을 계분별관이라고 그러죠, 수행에서.
이것도 수행에서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사티로 무엇을 직관하느냐? 육근, 육경, 육식 모두를, 그 어느 것도 아트만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는 거예요. 무상과 무아를 보는 거죠.
18계는 쪼금, 이게 좀 복잡합니다. 여기서 질문을 받고 넘어가죠? 뭐 질문할 것 없어요?

40) 심의식과 89법 / 마음은 단순한가 복잡한 것인가?
의근은 마음이에요. 마음이라는 것이 어떤 형체가 있는 것이 아니니까. 의근이나 의식은 사실 구분할 수 없는 거예요.
부처님의 말씀에 보면 우리가 마음 심(心)으로 번역되는 것은 '칫다'라고 하는 말이에요. 그리고 의(意)라고 번역되는 거는 사실 '마노'거든요. 예, 원어 자체는 달라요. 다른데.. 여기 식(識)이라고 하는 것도 또 다르단 말이에요. 윈냐나니까. 근데 이것이, 우리가 언어적으로는 이것을 분리할 수 있지만, 마음이라고 하는 것에서는 크게 다를 게 없죠.
그래서 부파불교에서는 심의식(心意識)은 동의어라고 그렇게 주장을 했어요. 물론 어떤 분들은 다르다고 주장을 하는 분들도 있지마는, 엄마와 여자가 다른 것이 아니죠. 엄마와 여자가 다른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의근이니, 의식이니, 마음이니 하는 말을 쓰지마는 실제적으로는 같은 거예요. 또 같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남방불교에서는 마음을 89심으로 나눠요. 그리고 부처님은 14심을 이야기 하고. 근데 우리 마음의 작용이 뭐 89개만 되고 그러겠어요? 똑같은 것을 봤을 때도, 어떤 때는 좋고 어떤 때는 나쁘고. 그 사람 아니면 죽을 것 같아 가지고 그 사람하고 결혼했는데, 지금은 그 사람하고 같이 있는 것 때문에 죽을 것 같고. 우리 마음의 움직임라고 하는 게 굉장히 복잡하죠.
부파불교 시대에는 이런 것 가지고 굉장히 논쟁을 많이 하고 그래요. 의근이나 육식이나 다 마음의 움직임이죠. 안근과 색경과 안식이 작용할 때는 동시에 의근과 의식이 작용해요. 다섯 개가. 우리가 이제 안근서부터 신근까지는 우리 육체에 속하잖아요? 의근은 우리가 색심2법으로 나누거든요, 부파불교에서 보면.
색심2법으로 나누게 되면 안근에서 신근까지는 색법에 속해요. 근데 의근은 심법에 속하걸랑. 육식은 다 심법에 속한다고. 근데 법경은 절반은 색법에 속하고, 절반은 심법에 속해요.
부파불교에서는 그렇게 분리했어요. 그 이야기는 뭐냐면, 이게 이론적으로다가 앞에 것들은 쉽게 와 닿죠. 시각은 보고, 청각은 듣고, 뭐, 이런 부분 같은 경우는 분명하니까. 이거는 재론의 여지가 없는데.
의근과 육식은 마음의 작용이거든요. 마음의 작용이라고 하는 거는 움직임의 형체가 보이지 않죠. 계분별관인 이유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사띠로 직관한다 이거죠. 직관이라는 말은 지혜를 말해요. 그래서 이거는 혜해탈에 속하는 거죠. 지혜로써 감각의 움직임과 그 대상과 마음의 작용을 동시에 보는 거예요. 이거야말로 체험을 해야 돼요. 이건 경험하지 않으면 이거를 이해하기가 어려워요.
우리가 보통, 이것을 온처계(蘊處界)라고 그러거든요. 온처계. 오온, 그리고 육근, 육경은 12처예요. 계라고 하는 것은 이 세 가지를 모아서 온처계라고 하는 말을 쓰는데, 불교에서는 이 온처계를 세계라 그러죠. 나와 대상. 엄격히 얘기하자면 이 세상에 나와 대상 밖에 없단 말이에요. 우리가 그렇잖아요. 나 그리고 대상. 나 이외에는 모두가 다 대상이거든요. 그 외에는 없죠. 그래서 우리가 온처계라고 하지마는 단순화시키면 나와 대상이에요.

41) 부파불교 논장불교 / 철학불교 심리불교 –
우리가 보면, 대체적으로 경전에서는 육식이 따로 설해져요. 12처가 설해지고, 육식이 따로 설해져요. 우리가 18계니, 근경식이니 이런 것은 실질적으로 부파불교 시대 때 이런 말들을 갖다 붙인 거예요. 부처님이 이야기할 때는 뭐라 하냐면, 내가 대상을 볼 때는 당연히 마음이 움직이죠. 내가 대상을 보고, 그 마음의 움직임을 보고, 단순하게 이야기하죠. 그런데 부파불교에서는 굉장히 복잡하게 온처계를 도표를 그려가지고, 이쪽 저쪽에다 막 연결시키니까 굉장히 복잡해요. 실제적으로 이거는 단순해요.
내가 대상을 볼 때, 마음의 움직임을 보고, 내가 소리를 들을 때 마음의 움직임을 보고, 내가 맛을 볼 때 마음의 움직임을 보고, 내가 냄새를 맡을 때 마음의 움직임을 보고, 내가 참 보드라운 것을 걸치고 부딪쳤을 때 마음의 움직임을 보고, 우리가 단순히 보면 그거예요.
우리가 몸을 보는 것은 마음을 보기 위해서예요. 마음을 보는 것은 다르마를 보기 위해서예요. 반야심경에서는 철저히 무무무 하잖아요. 다 부정해 버리죠. 중국의 무문혜개(無門慧開) 선사는 무자 28자로 무자송을 딱 지었죠.

무무무무무무무 무무무무무무무 무무무무무무무 무무무무무무무
(無無無無無無無 無無無無無無無 無無無無無無無 無無無無無無無)
이거 어떻게 해석할 거예요? 28자로다가 무문혜개 선사는 무자송無字頌을 지었어요. 원래 무자라는 것은 없을 무자지만 동시에 아닐 무자예요. 우리가 무자라고 하는 것을 없다라고만 해석하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없다'라고 하는 의미도 있지만, '아니다'라고 하는 부정사의 의미도 있어요.

42) 12연기 -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의 소멸도 없다. 내지 늙음과 죽음도 없고, 또한 늙음과 죽음의 소멸도 없고.

이거는 12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동시에 설명하고 있는데, 그냥 내지라고 해버렸어요. 앞에서도 안계 내지 해버렸고. 다 생략해 버린 거예요. 원래 원전에서는 길게 다 나오는데, 현장 스님은 그냥 짤라 버렸어요.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아래와 같이 12연기, 12인연이라고 하는 것을 나열해 놓고 설명을 해 나가겠습니다.

十二緣起 - 無明 行 識 名色 六入 觸 受 愛 取 有 生 老死 / 因緣觀 12연기.
조금 전에 12연기에 대한 얘기걸랑요. 첫 번째는 무명(無明)이고, 무명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의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예요. 무명의 반대되는 말이 명이걸랑요. 명. 밝을 명자 명. 띠띠야. 명은 지혜라고 하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무명은 지혜가 없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무지(無知). 무엇이 무지냐 하면 낡은 의식을 말해요.
부처님이 처음 성도하셔 가지고, 낡은 의식에 사로잡힌 자는 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걸랑요. 낡은 의식이 뭐예요? 과거의 사고체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말하죠.
얼마 전에 이병철 삼성 전회장이 돌아가시기 전에 종교인들에게 질문한 것에 대해서, 세 분이 답한 것이 시중에 나왔는데, 차동엽 신부하고, 김홍도 목사하고, 허정이라고 하는 스님.
내가 발췌된 것을 읽어 보니까 과거의 낡은 답을 고대로 다시 되판 것에 불과 하더라구요. 새로운 답이 없어요. 과거, 옛날에 답했던 것을 그대로 또 답했어요. 왜 그러냐면, 우리는 과거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거든요. 낡은 의식에 고착화되어 있으면, 우리는 항상 낡은 의식 속에서 모든 걸 판단하죠.

부처님은 무명이라고 하는 것은, 연기와 무상 무아를 이해를 못하는 것을 무명이라 그랬어요. 우리가 쉽게 설명하자면 무명이라고 하는 것은 낡은 의식이에요. 무명으로 인해서 행(行)이 생긴다는 거예요. 무명으로 인해서 행이 생긴다. 이것을 순관(順觀)이라고 그래요. 유전연기(流轉緣起)라고 하는 말도 쓰죠. 유전이라고 하는 것은 물이 흐른다 이 말이에요.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 그래서 무명으로 인해서 행이 있고.

이 행이 굉장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행이라고 하는 거는 형성된다고 하는 뜻인데, 무엇이 형성되느냐? 그릇된 행동, 그릇된 언어, 그릇된 마음으로 인해서 무언가가 형성되는 것을 말해요. 우리가 이것을 신행, 구행, 의행이라고 하는 말로 쓰는데, 이건 업(業)이라고 하는 말과 표리의 관계예요. 행이라고 하는 말은 현재 진행형이에요. 업이라고 하는 말은 과거 완결형이죠. 그래서 행은 업설하고 바로 연결돼요.

무명으로 인해서 행이라는 것이 있게 되는데, 그 행의 완결형이 업이에요. 불교 윤회설의 핵심이 되는 용어가 이 행이라고 하는 말이에요. 형성되는 거, 뭔가가 형성되는 거. 우리가 행동하고, 우리가 어떤 말을 하고, 우리가 어떠한 마음을 썼을 때, 그것이 어떤 하나의, 마치 뭔가를 자취를 만들어 낸다는 거예요.
우리가 길을 가면 발자국이 남듯이 남아요. 그게 진행형일 때는 행이라고 그러고, 그것이 완결형일 때는 업이라고 하는 말을 써요. 그래서 행과 업은 표리 관계예요. 손등과 손바닥의 관계죠. 이것은 분리가 안돼요.

그 다음에 식(識)이라고 하는 것은 의식이에요. 우리가 아까 안이비설신의 육식을 이야기 했잖아요. 그 의식을 말해요. 그 다음에 명색(名色)이라고 하는 것은, 명은 마음이라고 하는 뜻이에요. 색은 몸이라고 하는 뜻이고. 색수상행식 오온을 여기서는 그냥 명색이라고 단순화시켜 버렸어요. 몸과 마음이요. 그 다음에 육입(六入)은 육근(六根)을 말해요. 앞에서 나왔죠, 육근. 그 다음에 촉(觸)은 근경식이 접촉되는 것을 말하고, 수(受)는 그 근경식이 접촉됐을 때 느낌을 말해요. 그리고 애(愛)라고 하는 것은, 근경식이 접촉되어 느낌이 있으면 거기에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잖아요. 그것을 애라 그래요.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면, 취(取), 집착이 생기죠.
대념처경에서는 '움켜쥐다'라고 표현을 하죠. 움켜쥐는 거예요. 움켜쥐게 되면 유(有)가 생기죠. 이거는 존재의 욕망이에요. 뭔가 존재하고 싶어지는 거예요. 존재의 욕망이 있게 되면 생(生), 태어난다는 거예요. 그러게 되면 태어났으면, 늙고(老) 죽는 것(死)이 있게 돼요.
그러니까 무명으로 인해서 행이 있게 되고, 행으로 인해서 식이 있게 되고, 식으로 인해서 명색이 있게 되고, 명색으로 인해서 육입이 있게 되고, 육입으로 인해서 촉이 있게 되고, 촉으로 인해서 수가 있게 되고, 수에 의해서 애가 있게 되고, 애에서 취가 있게 되고, 취에 의해서 유가 있게 되고, 유에서 생이 있게 되고, 생에 의해서 노사가 있다. 이 흐름을 순관이라고 그래요.

반대로 무명이 소멸하게 되면 행이 소멸하고, 행이 소멸하면 식이 소멸하고, 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쭉~ 내려와서, 생이 소멸하고, 노사가 소멸한다. 이걸 역관(逆觀))이라고 그래요. 또 환멸연기(還滅緣起)라고 하는 말을 후대에서 썼죠. 환멸이라는 말은 소멸된다는 뜻이에요. 소멸되어서 열반을 얻는다고 하는 뜻인데, 이거는 부처님께서 보리수와에서 깨달음을 얻을 때, 이 12연기를 순관과 역관으로 관했다고 되어 있어요. 경전에.
마하박가(율장)에도 그렇게 되어 있고. 그래서 부처님의 깨달음은 연기인데, 이 12연기를 보리수 아래서 순관과 역관으로 관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43) 이해하기 쉽지 않은 12연기법과 무아윤회-
근데 나는 여기에 의문이 있어요. 12연기인데, 부처님이 보리수하에서 순관과 역관으로 이걸 관하셨다 그러는데, 그래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는데, 부처님이 최초의 5비구에게 가르침을 전할 때, 중도와 사성제에 대해서는 설명했는데, 12인연은 설명했다고 하는 기록이 없어요.
만약에 부처님이 보리수하에서 순관과 역관으로 12연기를 관했으면, 당신의 깨달음의 내용이 이건데, 이거를 설명을 했어야 되지 않겠어요? 근데 왜 안했을까?
나는 이것은 불멸 후에 누군가가 무아 윤회를 설명하기 위해서 구성했다고 봐요.

경에서는 부처님이 이걸 관했다고 하시고, 마하박가에서도 말 하지마는, 실제에서는 그러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많아요. 무아인데, 무엇이 윤회하느냐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거는 후대에 고안되고 구성되었을 거예요. 그리고 12인연이, 이게 엉성하걸랑요.
식(識)은 육식이에요. 명색(名色)은 오온이에요. 육입(六入)은 육근과 육경이에요.
부파불교 설명에 의하면 육내입, 육외입이라 그러는데 육입에 육경이 들어가야 할 이유가 없걸랑요. 그런데 육입에 들어간다고 그래요.
그리고 촉수애취유(觸受愛取有)는 마음의 작용이에요. 식에서부터 유까지는 다 겹쳐요.
의식하고 명색의 마음하고 다른가요? 육입에서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은 색이예요. 그리고 의근은 마음이라구요. 그리고 촉수애취유는 다 의근에 속해요. 마음에 속하고. 이거는 후대에 조합했다고 봐요. 불교의 역사는 무아인데, 무엇이 윤회하느냐? 이걸 설명하는데 가장 고심했어요.
근데 그거는 아직도 답을 못 내놓고 있어요. 무아인데 무엇이 윤회하느냐? 윤회의 주체가 뭐냐는 거죠.

윤회의 주체에 대해서 업이라는 걸 세우는데, 이게 또 문제가 있거든. 행과 업은 표리의 관계인데 이게 문제가 있어요. 뭐가 문제가 있냐면 붓다는 제행은 무상이라 그랬거든. 우리가 전생의 업, 전생의 업 하는데, 제행이 무상이야. 제행이라고 하는 것이, 업이라고 하는 것이 영원할 수가 없어.
근데 과거의 업이 어떻게 현재의 나를 반드시 지배할 수 있는가? 이게 굉장히 많이 충돌하는 부분이에요, 이런 부분이 요령부득이지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부처님이 윤회설을 방편으로 말씀하셨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부처님이 윤회를 설하지 않았다.... 라고도 하죠.
그런데 윤회라고 하는 것을 부정을 하면, 수타니파타에서 수없이 이야기하는 거센 흐름을 건넜다고 하는 표현이 성립이 안돼요. 거센 흐름은 윤회를 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처님은 영원이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물었을 때 답하지 않았어요. 부처님이 사후에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도 답하지 않았고. 부처님은 도리어 독화살의 비유를 들어서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답 아니거든요.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이라고 하는 스님이 그 독화살의 비유를 들고 나왔는데, 그것은 답한 게 아니에요. 부처님이 독화살 이야기를 든 거는 환자가 있을 때, 이론으로 치료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럼 뭐예요? 약을 쓰고 집도를 해야죠. 말룬카가 붓다에게 물었을 때 독화살의 비유를 든 이유는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것이에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관심을 갖는 부분에 대해서 붓다는 관심이 없었다는 거예요. 내가 왜 낡은 의식이라는 말을 쓰냐면 우리는 어떤 의식이 있어요. 무언가가 있어야 돼요. 우리는 끊임없이 뭔가를 세우려고 하죠. 그런데 아까도 이야기 했듯이, 붓다는 구조 자체를 철저히 해체시켜 버리걸랑요. 12연기라고 하는 것은 무아 윤회를 설명하기 위해서 누군가가 엄청나게 고심한 끝에 나온 작품이에요. 그래서 부처님의 여러 가지 말씀을, 우리가 법수라고 하는 것을 모아서 이것을 집성했다고 보는 것이 옳죠. 이게 불교의 핵심적인 교리라고 가르쳐지는 건데, 나는 그렇게 봐요. 나는 전부터 이 12연기를 보면 의심이 갔는데... 어떻게 이게 전혀 연결이 안 되걸랑. 적어도 부처님께서, 부처님이 했다면, 이렇게 띨띨하게 했을 리가 없다, 그게 내 생각이에요. 오온 12처라든가 이런 부분은 거의 논리적으로 완벽한데, 이론적으로도 그렇고. 근데 이거는 굉장히 중첩되는 게 많아.

식명색육입촉수애취유(識 名色 六入 觸 受 愛 取 有)는 다 이거 겹치는 얘기들이라. 더군다나 촉수애취유 이것은 마음의 움직임이거든. 다 이 근경식이 움직일 때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오온 18계하고도 다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거예요.

44) 12연기 이론은 후세에 만든 것인가? –
식도 마음의 작용이고, 명도 마음의 작용이에요. 우리가 마음, 마음하여 마음을 절대화시키니까 마음이라는 것이 마치 어떤 형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하지만. 부처님이 마음을 심유주라고 그랬거든. 마음은 흐르는 것이다. 흐른다고 하는 것이 뭐예요? 고체가 아니라는 이야기죠. 우리는 마음이라는 걸 고체로 파악하걸랑요. 대체적으로 나는 그렇게 인식한다고 봐요. 선종의 명심견성설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기 때문에 명심견성설이라고 하는 것이 나온다고 보는데, 사실 12연기는 아까도 얘기했지만 무아 윤회를 설명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나는 봐요. 경에서 주장하듯이 부처님이 만드셨는지, 내가 주장하듯이 후세에 만들어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난 적어도 부처님이 만들었다고는 안 봐요. 부처님이 만들었는거 치고는 너무 허술하죠.

무아라고 하는 말 자체가 나를 부정하는 말은 아니거든요. 아니다라고 하는 말이지. 여기서 ‘아니다’ 라고 하는 말은 어떤 자아의 실체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죠. 사실 불교의 무아 이론은 굉장히 논리적으로 어렵습니다, 이게. 대체적으로 보면 서양에서도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도 영혼을 이야기하고, 인도의 주류사상도 다 그렇고. 대체적으로 영혼이나 자아나 개아나 푸트칼라나 지와나 뭐, 온갖 것을 다 이야기하는데, 불교만 그 실체성을 인정을 안 해요.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인도 불교라고 하는 거는 그 실체성을 인정하는 쪽으로 가는 거예요. 무아라고 하는 말을 피해서. 왜냐면 무아라는 말을 전면적으로 하게 되면 불교가 아니게 되니까. 불교라는 깃발을 세울 수 없으니까, 불교라는 깃발을 세우면서도 어떻게 이 부분을 인정할 것이냐? 그 쪽으로 가는 거죠. 사실 무아라고 하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체험을 말해요. 이건 체험 되어지는거예요. 우리가 무아라고 하는 것이 체험돼어져야 모든 자의식이 해체되고, 열반에 이를 수 있어요.

현대 과학이 이렇게 발달했어도, 구체적으로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해서 아직 몰라요. 이제 마음에 대해서 알아가는 초입에 들었죠. 우리가 무아설이라는 것도 2,500년간 이야기 돼어졌지마는 아직도 구체적으로 설명을 못해요. 구체적으로 설명을 못하는 이유는 사실 무아라는 개념 자체가 굉장히 난해한 개념이에요. 개념 자체가 난해한 개념이에요. 업설과 윤회설 자체도 추상적인 용어인데, 이게 이론적으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죠.

부파불교 시대에 구사론이라는 것이 옛날식으로 딱 100권인데, 대부분이 무아인데, 무엇이 윤회하는가를 설명해요, 70%가. 100권에서 70권은 그걸 설명한다고 보면 맞아요. 근데 문제는 거기에 대한 답을 못 내놓는다는 거예요. (부처님 가르침이니까)그저 믿어라, 믿으면 복 받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결론을 낸다고 하는 것이 가장 쉽죠.

조금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행에서 식이 성립된다고 12연기에서는 이야기 하는데, 아! 참 이것이 자아와 무엇이 다른 건가? 라는 의문이 들죠. 만약에 그렇다면 식이라고 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식이라고 하는 것이 자아 이론의 아트만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왜 그러냐하면 명색보다 먼저 와 있거든요.

여기 몸이 없거든, 아직. 아직 몸이 없잖아요. 몸이 없고 의식만 있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러면 의식만 따로 존재한다면 아트만하고 무엇이 다른가? 우리가 근본적인 질문을 안 할 수가 없죠. 붓다의 근본 관심사는 현생에서의 평안, 아까도 말씀드렸지마는 기본적으로 붓다는 윤회하는가 안하는가에 대해서는 나는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봐요.

그럼 붓다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무엇이냐면, 해탈이에요. 동요되지 않는 열반을 얻는 거예요. 말룬카가 붓다에게 14가지를 물을 때, 세상이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이런 여러가지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했을 때, 독화살의 비유를 든 이유도 거기에 있죠. 형이상학적인, 추상적인 이론이라고 하는 것은 죽은 뒤에 영혼이 있는가, 없는가를 알고 싶으면 죽어보면 알아. 그게 가장 효과적인 거예요. 천국과 극락이 좋은지 안 좋은지는 죽어서 가보면 알고, 지옥이 고통스런 곳인지 아닌지는 죽어서 가보면 알아.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지옥이 못살 것 같으면, 도망 나오는 놈이라도 있을 텐데, 없다는 거예요. (이 부분 녹음 안되었음)

45) - 재가신자도 무소유하고 스님처럼 수행해야 하는가? -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 고집멸도도 없고, 지혜도 없고, 또한 지혜의 증득도 없다.

무고집멸도 無苦集滅道. 사성제는 5비구에게 처음 가르침한 내용이에요.
苦는 生老病死로 근본이 된다. 줄여서 生死로 표현. 생사는 윤회의 생애입니다. 集은 원인이라는 뜻. 즉 고의 원인을 말한다. 갈애라고 표현되기도. 고의 원인은 무명. 무명이란 다르마에 대한 무지. 즉 달리 말하면, 연기의 도리에 이르지 못하는 것. 연기 도리에 이르지 못하면 무상과 무아를 알 수 없다는 것.
어떤 사람들은 부처님이 윤회를 주장한 것은 방편설이라고 주장을 해요. 스님들도 그렇게 이야기하는 분들이 있고요. 어떤 분들은 부처님이 업과 윤회를 이야기하지 않았다고도 이야기 해요. 부정했다고도 하고. 왜 그러냐면 부처님이 그거를 물었을 때 답하지 않았다고 하는 기록이 있걸랑요. 그거는 부처님이 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부처님이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주장을 해요.

우리가 하나 알아야 될 것은 불경에는 상호 모순되는 이야기가 많다는 거예요. 상호 모순되는 이야기가 많은 이유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대기설법(對機說法)이예요. 대기설법이라는 말은 맞춤설법이라는 말이에요. 어떤 사람이 와서 물었을 때, 그 사람의 물음에 대해 답을 주는 것이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답을 제시하지는 않아요. 의사가 앉아 있다가 감기환자가 오면, 감기약을 주고, 독감환자가 오면 독감약을 주죠.
뭐 50년대 군대에서는 정말인지는 몰라도, 그랬다고 그러지만. 배 아프다고 그러면 군의관이 배에다가 아까징끼를 발라주었다데. 뭐 이게 군대에서 전설같이 나오는 이야기니까 실질적으로 그런 군의관도 있었겠죠. 우리가 모든 환자에게 동일한 처방을 할 수는 없죠. 동일한 약을 줄 수는 없는 거고.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서 가르침을 주죠. 말룬카가 와서 14가지를 질문했을 때, 붓다가 답하지 않고 독화살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 비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당장 생사의 해탈이지, 그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그 비구에겐.
그런데 우리는 한 사람한테 한 이야기를 일반화시키니까 문제죠. 대표적인 것이 무소유예요. 부처님이 무소유를 이야기한 것은 비구들한테 했어요. 부처님이 무소유를 이야기한 것은 최소한의 소유를 이야기한 것이지,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래서 비구는 가질 수 있는 것이 삼의(三衣). 삼의라고 하는 것은 옷 세 가지예요. 허리 아래 걸치는 가사, 윗몸을 덮는 가사, 아랫가사, 윗 가사, 그리고 대가사라고 그래 가지고 딱 그 세 가지. 그리고 밥그릇 하나, 물을 걸러 먹을 수 있는 걸름망 하나, 왜 그러냐면 물에 벌레들이 있기 때문에. 단순히 벌레 때문만은 아니에요. 위생적으로 그건 중요하거든요. 그리고 비구는 반드시 맨바닥에 앉으면 안돼요. 보자기 비슷한 게 있어요. 나도 그걸 가지고 있는데, 반드시 그걸 깔고 앉아야 돼요. 엄격히 규정을 적용하면, 나도 지금 비법이에요. 그걸 깔고 앉아 있어야 되는데, 안 깔고 앉아 있으니까요. 반드시 비구는 어디든지 앉을 때, 그걸 깔고 앉아야 돼요. 규정이 그래요.

그 이야기는 뭐냐 하면 2,500년 전 인도의 비구들이 유행을 하기 때문에 땅바닥에 앉고 그런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게 위생상 문제가 생기죠. 그러니까 그걸 까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방석이에요. 방석은 두터우니까 가지고 다닐 수 없으니까. 얇은 천을 가지고 다니는 거예요. 그걸 까는 거예요. 그래서 비구는 그 위에 앉고, 그 위에서 자고. 요것만 소유할 수 있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무소유라고 하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일반화시켜서 얘기하면 곤란하죠.

내가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인간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소유한다고 하는 뜻이에요. 소유하지 않으면 인간은 존재하지 않아요. 인간은 소유하지 않으면 굶어 죽어요. 인간은 반드시 소유를 전제로 인간이에요. 그래서 존재해요. 결국 무소유의 주장은 정말 아름다운 스포츠카이긴 한데, 사진 속의 스포츠카예요. 타고갈 순 없어요. 나는 무소유의 주장은 사기라고 봐요. 그건 거짓이에요. 무소유한 인간은 있을 수가 없어요. 부처님도 비구들에게만 그 이야기를 한 것이지.

부처님이 재가자들에겐 이렇게 얘기 했어요, 돈 많이 벌어라~! 부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붓다는 얘기 했어요. 돈 벌라고 했어요. 단, 정당하게 벌라고 그랬죠. 뭐, 사기를 치거나 이러면 안 되죠.

46) - 불교는 인간해방의 평등한 종교 –
불교에서 재물을 천시하는 것은 중국적인 사고방식이에요. 원래 초기 불교의 지지자들은 상인계급이었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부유했지만, 신분적으로 보면, 차별받는 신분이었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아니었어요! 상인들이 부유했지마는 신분적으로는 차별 받았거든요.
불교가 중국식으로 말하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기 때문에 상인계급의 지지를 받았어요. 그리고 붓다의 법회장에는 가장 귀한 빠세나디나 빔비사라와 같은 왕부터, 그의 왕비인 말리카나 위제이 같은 왕비에서부터, 평민들, 하다 못해 유녀들 까지도 같은 자리에 앉아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었던 것은 그 당시에 비춰보면 혁명적인 것이죠.
그것 때문에 붓다는 비난 받았고. 이상한 집단이다. 유녀라고 하는 게 뭐예요? 요새로 말하면, 그저 길거리 여자예요. 그런 여자들까지도 가장 권력자였던 왕이나 그런 사람들하고 같은 자리에 앉아서, 동등하게 붓다의 가르침을 들었어요.
우리가 불교를 왜곡하면 안돼요. 무소유의 주장은 불교를 왜곡하는 거예요.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대못을 박는 소리죠. 먹고 죽고 싶어도 먹고 죽을 게 없어. 모든 것은, 업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성립이 될라그러면 의도가 있어야 돼요. 의도가 없으면 업은 성립되지 않아요. 만약에 의도가 없는데, 모든 것이 성립이 되면, 우리는 영원히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게 돼요.

중국에서 이게 초기에 논쟁이 되었죠. 중국에 불교가 왔을 때.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는 것이 살생이냐? 그리고 업이 성립되는 거냐? 였어요. 사자가 사슴을 잡아 먹는 것이 살생입니까? 한 번 말씀해 보세요....... 아니 뭐, 자타가에 보면 살생하지 않으려고 굶어 죽는 사자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게 붓다의 전생이다, 이런 얘기. 이런 사자는 붓다의 전생 한 마리면 충분하고....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는 것은 살생과 업이 아니예요.
그건 도덕과 윤리의 문제니까요. 그건 도덕과 윤리의 문제지, 업의 문제는 아니에요. 도덕과 윤리라고 하는 것이 뭐예요?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양식이거든요. 우리는 그러한 것이 업이 성립되든, 안되든 간에, 내가 고의였든 실수였든 간에 어떠한 사건이 생기면, 거기에 대해서 마음이 아파요. 그게 뭐냐? 붓다는 그것을 비심(悲心)이라 그랬죠. 아파하는 마음. 우리가 자비(慈悲)라 그럴 제, 자(慈)가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비(悲)는 아파하는 마음이지요. 원래 자비라는 것은 붙여 쓰기도 하고, 따로따로 쓰기도 하고 그래요. 우리가 그러한 거를 아파하는 거는, 그건 당연한 거예요. 왜? 내 마음 속에는 따뜻한 피가 흐르니까요. 만약 그거에 대해서 아무렇지 않다면, 그게 도리어 어색한 거 아닌가요? 업이 성립되고, 성립되지 않고 하는 것은 2차적인 얘기예요.

47) - 깨달음과 열반은 같은가 다른가? / 돈오 점오 돈수 점수, 어느것이 옳고 어느것이 그른가? –
오늘은 지난주에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에서 고와 집을 설명을 하고, 멸과 도를 설명을 못 드렸죠. 오늘은 멸과 도를 설명하겠습니다. 멸은 고가 소멸된 것을 말하죠. 고집멸도라는 것은 불교에서 사성제라 그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르침인데, 멸은 고가 소멸된 겁니다.

고가 소멸된 것에 대해서, 부처님은 안온(安穩)이라는 표현도 썼고, 안락(安樂)이라고 하는 표현도 썼고, 불사(不死)라고 하는 표현도 쓰죠. 불사, 영원히 죽지 않는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표현도 쓰고, 또 해탈(解脫)이라고 하는 표현도 씁니다. 그리고 열반(涅槃)이라고 하는 말을 쓰죠.
경에 보면, 안온이나 안락이나 불사나 해탈이나, 이런 것보다 열반을 상위 개념으로 쓴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유심히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열반이라고 하는 개념과 깨달음이라고 하는 개념이 동일한 것이냐 아니면 차이가 있느냐는 거죠. 우리는 깨달음이라고 하는 말을 많이 써요. 그런데 열반이라고 하는 말도 부처님이 동시에 쓰거든요. 근데, 우리가 실제적으로 보면 부처님이 보리수 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표현을 하지마는 경전에서 일상적으로 쓰이는 단어는 열반이라고 하는 말이에요.

어떻게 보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순간에 오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우리가 매 순간의 깨달음이라고 하는 표현도 쓰지만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경지를 뜻한다고 보기는 좀 어려워요.
무슨 말이냐 하며는, 열반이라는 것은 지속되는 것을 말해요.
그렇지만 깨달음이라는 것은 어떤 전환을 뜻하죠. 무엇이 바뀐 걸 뜻해요.
그런 면에서 우리가 진지하게 보면, 깨달음이라 것은 어떠한 경지의 활로를 연 거라면,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일상화 되어 있는 거를 뜻하죠.

이것은 중국 불교에서 돈오돈수(頓悟頓修)나 돈오점수(頓悟漸修)의 논쟁, 또 티벳에서 있었던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돈오냐, 점오냐 하는 논쟁하고도 다 밀접한 관련이 있죠.
중국에서는 돈오돈수론을 주장했어요. 물론, 뭐 규봉 종밀(圭峯 宗密)이나 하택 신회(荷澤 神會)같은 경우는 돈오점수론을 이야기했는데, 적어도 중국 불교에서 마조 이후에는 돈오돈수설을 고수한단 말이에요. 돈오돈수라고 하는 것은 무슨 말이냐면, 깨치고 나면, 더 이상 닦을게 없다는 거죠.
근데 돈오점수론이라고 하는 것은 깨쳤더라도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다 바뀌지 않는다고 하는 주장이에요. 그것이 이제 훈습론(熏習論)인데, 훈습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과거에서부터 일깨워온 어떤 습관을 말하죠. 정확히 말해서 훈습이라고 하는 용어는 어떤 향기가 옷에 밴 거나 내 몸에 밴 거를 뜻하는 말인데, 원래 훈습이라고 하는 것은 부파불교의 시대 때에 아주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였어요.
훈습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에부터 내가 익힌 걸 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뭐, 습기라고 하는 용어도 썼고. 근데 우리가 어떤 생각의 전환이 왔다고 그래서 모든 생활이 360도로 전환이 될 수 있느냐, 그게 인제 돈오점수설의 기초예요.
그런데 돈오돈수설은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다 바뀐다는 거죠. 사실 돈오점수설, 돈오돈수설 두 가지 자체가 사실 논리적으로다가 굉장히 문제가 있죠. 어떻게 보면, 중국에 중요한 선종의 논쟁이긴 했지만 돈오점수설이 되었든 돈오돈수설이 되었든 원래 그 자체가 문제점이 있어요.
티벳 라싸에서 중국 선종의 마하연(마할리안사 摩訶衍) 선사와 인도 출신 카마라실라의 점오(漸悟)냐 돈오(頓悟)냐 라고 하는 논쟁 같은 경우도 보면 확실하게 들어나지요.

부처님은 숫타니파타에서 이렇게 이야기 하거든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한 순간에 오는 것도 아니고, 점차적으로 오는 것도 아니다. 이게 붓다의 근본적인 입장이에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일순간에 오는 것도 아니고, 곧 돈오도 아니고 점오도 아니라는 거예요.

그리고 어떻게 보면, 돈점의 논쟁, 돈오점수냐 돈오돈수냐라고 하는 논쟁은 비불교적인 논쟁이죠. 결국은 인도의 부파불교라고 하는 것이 지나치게 이론적으로 그야말로 번잡해지고 쓸데없는 걸 가지고 논쟁을 하는 그런 형태로 세월을 보냈었죠.

48) - 해탈과 열반은 같은가 다른가? -
그리고 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한 순간에 오는 현재 진행형으로다가 우리가 볼 것이냐, 아니면 완성된 과거형으로 볼 것이냐 하는 거죠.
그런데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완성된 과거형이에요.
그렇지만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을 완성된 과거형으로 볼 수 있느냐? 왜 그러냐면 부처님이 해탈 자체를 열반이라고 하는 것 보다 아래 단계의 개념으로다가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는 거는 분명해요.

물론 뭐, 여러 가지 표현을 쓰시지마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대기설법이라 그때그때에 사람에 따라서 가르침을 주기 때문에, 우리가 경전을 보면 사실 당혹스러울 때가 많죠. 당혹스러운 이유는 모순을 많이 노출시킨다는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영혼과 윤회의 질문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 뭐 이런 부분들 같은 경우. 그 사람에게 그 답이 적합하냐 안하냐에 따라서 답하고, 답하지 않고 그래요.
우리가, 스님들도 그렇고, 우리 불자님들도 그렇고, 많은 부분에서 간과하는 것이 뭐냐면, 어떤 특정인 한테 한 이야기를 일반화시켜 다 적용시킨다는 거예요.
일반화시키면 안 돼요. 열반이라고 하는 것을 경전에서는 뭐라고 설명 하냐면, 탐진치 삼독의 불꽃이 꺼진 것이다. 그것이 열반이라고 그러죠. 결국은 고를 불태우는 것, 고를 있게 한 것이 탐진치 삼독이라는 거죠. 고의 원인이 사실 탐진치 삼독이걸랑요. 왜 그러냐면 무명에 의해서 탐진치 삼독이 생기니까. 그래서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무명이 소멸된 거, 결국은 탐진치 삼독의 불꽃이 꺼진 걸 말하죠. 이것이 전통적인 해석 방식이에요. 경전에서도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내가 이해하는 것은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자의식이 해체된 경지라고 보죠. 자의식이 해체된 경지.

49) - 자의식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
부처님은 자(自) 자의식의 특성에 대해서 세 가지를 얘기해요.
뭐냐 하면, 첫째는 아(我), 나, 두 번째는 나의 것, 세 번째는 나의 본질이라고 하셨죠. 나의 본질이라고 하는 말은 나의 실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죠.
나라는 것은 인도말로는 아트만, 아르마라고. 나의 것이라는 것은 한문에서는 아소(我所)라고 해요. 그리고 나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아체(我體)라는 말을 쓰는데, 몸 체자를 써서, 아체.
여기 후대에 개체나 법체, 이런 말은 다 아체라고 하는 말의 이 체의 용어에서 파생되는 거예요.
부파불교 시대 때에, 개체나 법체라 하는 것들을 그렇게 보면 정확해요.

결국 반야심경에서 중점으로 두고 설파하는 것은 공이거든요. 공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 공의 사상은 제법의 공인데, 무엇을 겨냥하고 있냐면, 설일체유부의 법체라고 하는 걸 겨냥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돼요.
그래서 부처님은 이 자(自)의 특성을 나, 나의 것, 나의 본질.... 나의 실체라고 하는 거는 내가 붙인 건데, 이 세 가지를 든단 말이에요.
나의 본질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고, 나의 실체라고도 이야기 할 수 있어요. 이 세 가지가 자(自)의 특성이라는 거예요.
근데 이런 것은 실체가 없다는 거죠. 이 세 가지가 자의식을 만드는 거거든요. ‘나’라고 하는 의식을 만드는 것이 이 세 가지예요. 우리 인간의 근본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태어나서 6세까지 입력된 정보에 의해 형성된 유년기의 의식이에요. 유년기의 의식이 사고와 생각의 토대가 되죠.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과거의 의식과 현재의 일반적 경험이 통합되는 것을 말해요.

우리가 유년기를 중요시 여기는 이유는 유년기 즉, 태어나서 6세까지 외부에서 입력된 정보에 의해서 의식이 형성된다는 얘기예요. 그것이 평생의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게 되죠. 우리가 성년이 돼도, 이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이 시기에 형성된 자의식에 의해서 80이 된 사람도 무엇을 판단하고, 결정할 때 이것이 작용하는 거예요. 우리가 좋은 환경 속에서 자라야 되고, 좋은 환경을 조성해줘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죠.

천재는 만들어지는 것이지 태어나는 게 아니에요. 엄마의 자궁 밖에서 나와서 6세까지 어떤 양육 환경 속에 놓여 있느냐에 아이가 천재가 되기도 하고, 보통 아이가 되기도 하죠.
물론 태아 때부터 선천적으로 문제가 되는 아이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자궁에서 나올 때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고, 태어나서 6세까지 형성되는 그 어떤 것들이죠.

우리가 자의식이 해체된다고 하는 것이 뭐겠어요? 과거의 의식이 지워지고, 새로운 의식이 형성되는 것을 말하죠. 그저 뇌과학에서 말하면, 뇌의 새로운 회로가 연결되는 것을 뜻해요.
우리의 뇌는 6세까지 완성되죠. 그 이후에는 더 이상 뇌가 성장 한다던가 하는 것은 없어요. 끝이에요. 그래서 과거에는 뇌라고 하는 것은 6세 때 결정되면 더 이상 새로운 거는 없다고 봤지요.

명상수행을 통해서 뇌의 회로가 새롭게 연결된다고 하는 것을, 지금은 과학적으로 인정하죠. 뇌도 성인이 되어도 새롭게 연결된다는 거예요. 우리의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뇌의 회로를 따라서 전자신호가 움직이는 거거든요. 사실 알고 보면, 별 거 아니죠. 우리가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알고 보면 그거예요.

자의식이 해체되어야 뇌의 새로운 회로가 형성되고, 그래야 새로운 삶이 시작되죠. 우리가 맨 날 똑같은 것을 반복하고, 똑같은 것을 고민하고 하는 이유는 우리 뇌의 의식이 똑같은 전자회로를 따라서 전자신호가 움직이기 때문이에요.
내가 굳이 윤회의 주체를 찾는다고 하면 자의식이라고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죠. 굳이 윤회의 주체를 찾는다면 자의식이예요. 굳이 윤회의 주체를 내세우고 싶다면.

50) 윤회는 주체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사실 사성제는 고와 멸이예요. 고와 멸은 윤회하고도 관계있는 이야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생로병사 자체가 윤회걸랑요.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고라고 하는 것은 생로병사 자체가 근본 고에요. 그저 노병은 떼어 버리고, 태어나면 노화현상이 있는 건 당연하고, 노화현상이 있으면 병드는 건 당연하잖아요. 결국은 생사란 말이에요. 생사라고 하는 게 뭐예요. 과거와 미래예요.
생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이지만 동시에 과거예요. 사라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사라는 것도 현재이자 동시에 미래이고 과거이기도 해요. 그러니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시간의 개념에서는 따로 존재하지만, 공간의 개념에서 보면 과거, 현재, 미래는 언제나 같이 존재하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보면, 윤회라고 하는 것은 굳이 윤회의 주체가 있어야 할 이유가 없죠. 왜냐하면 윤회라는 것은 흐름이에요. 하나의 흐름. 어떤 흐름이 반드시 어떤 흐름의 주체가 있어서 흐름이 있는 건 아니죠. 바람이 부는데, 뭐 주체가 있어서 바람이 부는 건 아니잖아요. 굳이 주체를 찾는다면, 자의식이라고 할 수 있지만 윤회(흐름에 있는 상태)라는 것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굳이 윤회의 주체가 있어야할 이유는 없어요.

사실 부처님의 불멸 이후에 2,500년간 윤회의 주체를 집요하게 찾았는데, 알고 보면 밥 먹고 할일 없는데, 쓸데없는 짓거리 한거죠. 그래서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자의식이 해체된 것이다.
결국은 생로병사를 지속시키는 것은 자의식이걸랑요. 부처님도 자의 특성을 나, 나의 것, 나의 본질이라고 하고 있으니까요.

51) - 불교의 수행, 어떤 수행이 가장 좋은 것인가? –
네 번째는 도(道)입니다. 도라고 하는 것은 고를 소멸시키는 방법이에요. 열반에 이르려면 그 길을 따라 가야 되는데, 길이라고 하는 건 방법이란 말이에요. 내 요전에 강론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보고, 새로운 방식으로 듣고, 새로운 방식으로 느끼고,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걸 이야기 했는데, 도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쉽게 이해하면 새로운 방식이예요. 새로운 방법이죠.
그래서 경전에서는 도는 팔정도라고 이야기하죠. 부처님이 그렇게 이야기해요. 도는 팔정도다. 불교의 수행이 뭐냐? 기도냐, 간경이냐, 명상이냐? 뭐, 우리나라에서는 간화선이 최고다. 누구는 위빠사나가 최고다.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그들만의 이야기고, 불교 수행의 근본은 팔정도예요. 왜 그러냐하면, 모든 것이 팔정도 안에 있거든요.

부파불교 때는 이 팔정도를 계정혜(戒淨慧) 삼학(三學)으로 나누기도 했지요. 우리가 흔히 많이 듣잖아요. 정혜쌍수(定慧雙修)라고 하는 것. 정혜라고 하는 것도 결국 팔정도 안에 있는 거예요. 결국 불교의 수행은 팔정도예요.
四 聖 諦 / 苦 集 滅 道 - 八 正 道 / 正見 正思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念 正定 –
팔정도의 첫번째는 정견(正見)입니다, 정견. 위 표시 글자를 참조해 주시지요. 사성제 8정도 표에 정견이라는 것은, 여기서 견(見)이라고 하는 것은 '본다'는 뜻도 있지만, 정확히 말하면, '이해한다'고 하는 뜻이에요.

올바른 이해. 보통 이걸 견해라고 해석하는 스님이 많이 있는데, 견해라고 하는 뜻은 아닙니다. 왜 그러냐면 견해라는 거는 다음에 사(思)가 있기 때문에, 견해나 사고나 같은 뜻이걸랑요.
여기에서 견은 이해예요, 이해. 무엇을 이해하는 것이냐? 다르마에 대한 이해를 말하죠. 그래서 정견은 다르마에 대한 이해예요. 다르마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된다는 거죠.
8정도를 이야기하지만, 그래서 부처님은 8사도(八邪道)도 이야기하걸랑요. 정견의 반대말은 사견(邪見)이예요. 그릇된 이해. 그래서 정견은 곧 정안(正眼)이예요.
정안은 뭐냐 하면 눈, 올바른 눈이죠. 불교에서는 이 안목이라는 말을 굉장히 많이 써요, 눈이라고 하는 말. 그래서 깨달았다고 하는 말을 '눈을 떴다'라는 표현을 쓰죠.
오비구 중에 교진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했을 때, 붓다는 이렇게 표현했죠. “콘다냐가 진리의 눈을 떴다.” 그래서 정견은 정안이예요. 올바른 눈. 안목이 있어야 돼요.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은 안목이에요. 눈이 있느냐, 없느냐에요. 그래서 보통 지혜의 눈을 제3의 눈이라고 그러죠.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부처님은 오안(五眼)을 갖췄다고도 이야기하잖아요. 그만큼 눈이라는 걸 중요시 여기는 거예요. 우리는 눈을 통해서 세상을 보걸랑요. 우리가 안목이 없으면, 봐도 모르죠. 인간은 오직 자기 눈높이에서만 봐요. 그 이상은 못 봐요.
오직 자기의식의 세계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는 이야기죠. 자기의식을 넘어간 건 몰라요. 가르쳐 줘도 모르고. 그래서 정견이라고 하는 것은 정안과 같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 정사(正思). 두 번째는 정사예요. 정사는 사고나 의식, 사유 그런 뜻이죠. 내가 항상 말씀드렸지만 깨달음의 문제가 아니에요. 사고의 문제지요. 우리가 어떻게 사고하느냐에 따라서 보는 것이 달라져요. 사고가 근본적으로 잘못 되어 있으면, 수행을 해도 결국 그 곳으로 낙착되죠.
내가 아는 스님은 사회 있었을 때, 사주관상을 공부했었는데, 절에 와가지고 스님이 되어 토굴에 가서 공부를 하더니만, 어느 날 내려와서 하는 말이, 깨달음을 얻었는데, 사주에 도가 틔었다 이렇게 이야기 하드 만요. 그럴 수 있어요. 왜 그럴 수 있냐면, 인간은 자기 사고의 의식을 벗어나지 못하걸랑요. 깨달음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의 문제예요. 어떤 사고를 하고 있느냐 하는 거죠. 근본적으로 사고에 문제가 있으면, 아무리 그거해도 소용이 없어요.

그래서 경에서는 말하죠. 소가 우유를 마시면 우유를 만들고, 독사가 물을 마시면 독을 만든다. 왜 그러냐 하면, 사고라고 하는 것은 그 본질이 그렇기 때문이에요. 사고라고 하는 게 뭐예요? 인간의 의식이잖아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우리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의 의식과 현재의 일반적 의식이 결합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의식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데, 어떻게 올바른 결과가 나올 수가 있어요. 그래서 부처님이 정사를 강조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어요. 올바를 이해를 통해서 올바른 사고와 의식이 형성돼야 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처음에 깨달음을 얻었을 때 이렇게 말씀하시죠. 낡은 의식에 사로잡힌 자들이 어찌 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부처님이 그래서 법을 설하지 않고 침묵하시려고 그랬다 그러잖아요.

그 다음에는 정어(正語)입니다. 정어는 올바른 말이죠. 올바른 언어 논리예요. 말과 지금 같은 경우 보면 글도 해당돼요. 부처님 당시에는 문자로 기록한다고 하는 것은 없었어요. 다 암기예요. 그러기 때문에 불경을 보면 참말로 보통 인내를 가지지 않고서는 불경을 보기가 어려워요. 왜 인내를 가지지 않고는 불경을 보기가 어렵냐 하면, 특히 아함경 같은 경우에는 같은 이야기가 세 번씩 반복되어 나온다는 거예요. 아이~~ 우리도 참 지리해요, 그런 거 보면. 편집하면서 다 잘라버리지, 뭐 하러 이리 지리하게 나왔을까!
그거는 인제 그 당시에 청중들 때문이기도 하고 인도적인 언어 논리 때문이기도 해요. 인도나 구라파의 언어 논리는 소통의 논리에요. 소통의 언어 논리. 소통하기 위한 언어 논리예요. 그러기 때문에 소통 쪽에 치중하죠.
원래 인도 사람들 하고 유럽 사람들은 본래 인종이 거의 같아요. 인도의 아리안 족들이나 게르만족들이나 북게르만족이나, 뭐 앵글로색슨족이나 다 같은 인종이에요. 고대로 올라가면 지금 이란이나.
그런데 중국 같은 경우는 뜻글자잖아요. 그래서 근본적으로 중국의 한문이라고 하는 것은 뜻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함축되어 있죠. 그렇기 때문에 외교문서를 중국 한문으로다가 작성을 하면 낭패를 볼 수가 있어요.
왜 그러냐면,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으니까요. 어디에서 끊느냐에 따라 완전히 문장이 달라지니까요. 정어라고 하는 것은 올바른 언어논리예요. 언어논리가 그릇되거나 왜곡되어선 안 된다는 이야기죠.

그 다음에 정업(正業). 정업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업이라고 하는 것은 행동이라고 하는 뜻이에요. 행동하는 것.
정명(正命)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살잖아요. 먹어야 생명을 유지하고. 명은 바로 그거를 말해요. 생명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그 방법이 정당해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서는 편법과 불법을 많이 용인하잖아요. 뭐, 특히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더하고. 정명은 그야말로 정의와 같은 뜻이에요. 생명을 유지하는데 정의로워야 된다는 거죠. 대한민국에서 정명을 이야기하고, 정의를 이야기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건 없죠. 대한민국에서 정명 운운하다가는 태반이 굶어 죽습니다. 그저 이런 것은 살면서 잊어 먹으셔도 돼요! ㅎㅎ..

그 다음에 정정진(正精進). 정정진이라고 하는 것은 부단한 노력이에요. 물론 경전에서는 선(善)을 지향하는 거를 뜻하죠. 선, 선과 악, 할 때 선 말이에요.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거를 말해요. 그래서 미얀마에서는 반드시 이야기하죠. 사띠에 위리야를 밀착시킨다. 위리야라고 하는 말도 노력이라는 뜻이걸랑요. 그래서 정정진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 일곱 개에 다 붙는 거예요. 또 붙어야 돼요.
정정진이라는 것은 부단한 노력. 선을 향해 나가고자 하는 부단한 노력이죠.

그 다음에 정념(正念). 정념이라는 것은 대념처경에서도 이야기 했고, 강론에서도 수없이 이야기했는데, 염이라고 하는 이 말이 생각 념(念)자이지만, 실제로 생각하고는 관계가 없어요.
이건 사실 우리나라 말로다가 옮기기 어려운 말인데, 여기선 깨어있는 것을 말해요. 깨어 있다고 하는 것이 뭐예요? 혼돈의 상태에 있지 않는 거죠. 언제나 몸과 마음의 움직임을 아는 것을 말해요. 깨어 있어야 알잖아요.
성철 스님께서 일관되게 주장하신 동중일여(動中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가 바로 이 염이예요. 그래서 정념이라고 하는 것은 일상의 생활 속에서 깨어있음이 유지되는 걸 말해요.

그 다음에 여덟 번째는 정정(正定). 정정은 올바른 선정(禪定)이예요. 올바른 선정.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싸마타(samatha)냐 싸메디(samadhi)냐 해 가지고 많이 따지는 것 중의 하나가 이 정정이예요. 이 정정은 선정을 말하는데, 선정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집중되어 평정되어 있는 상태를 뜻하죠. 그것이 지속되는 걸 뜻하고.
그래서 이 정정은 반니원경(般泥洹經)에서는 이것을 구차제정(九次第定)이라고 그래서 아홉 단계로 설명을 해요. 사선(四禪), 사무색정(四無色定), 멸진정(滅盡定).
사선은 초선(初禪), 2선(二禪), 3선(三禪), 4선(四禪), 그래서 네 단계고, 그 다음에 사무색정은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 그래서 이게 사무색정이고, 아홉번째는 멸진정(滅盡定)이죠.

52) 正定 - 九次第定 / 四禪 - 初禪 二禪 三禪 四禪 * 四無色定 - 空無邊處定 識無邊處定 無所有處定 非想非非想處定 * 滅盡定 - 확대 재생산된 부파불교의 교학과 논장 –
사선에서 초선, 이선 삼선, 사선은 굳이 뭐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거 뭐 부파불교 시대에 설명한 것처럼 그렇게 규정지어서 설명하는 것이 합당한가? 하는 의문이 있고.
여기 구차제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일곱 단계 무소유처정, 여덟 단계 비상비비상처정, 아홉 단계 멸진정입니다.
왜 무소유처정이 문제가 되냐면, 이 무소유처정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알라라 깔라마 밑에서 수행할 때 얻었다고 하는 것이거든요, 이 무소유처정.
그리고 비상비비상처정은 웃타카 라마푸타 밑에서 얻은 건데,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궁극의 단계가 아니다’라고 해가지고 고행림에 들어가게 되는데, 어떻게 무소유처정과 비상비비상처정이 여기에 일곱 단계와 여덟 단계에서 열거될까? 하는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반니원경에 의하면 붓다가 입멸할 때, 초선에 들고, 이선에 들고, 삼선에 들고, 사선에 들고, 공무변처정에 들고, 식무변처정에 들고, 무소유처정에 들고, 비상비비상처정에 들고, 마지막으로 멸진정에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과거에 본인이 부정했던 것을 왜 갑자기, 여기 들어갔을까요? 이상하지 않아요?
그 다음에 멸진정. 멸진정이라고 하는 것은 마지막 아홉 단계인데, 멸진정은 의식과 인식과 지각 등 마음의 작용이 멈춘 거예요. 의식, 인식, 지각, 모든 마음의 작용이 멈추고 호흡마저 끊어진 상태. 이게 멸진정이예요.
아라한이 이 선정을 얻는다고 이야기하는데, 근데 여기서 중대한 문제점이 하나 있어요.
불교에서는 마음이 지시하지 않으면 몸을 움직일 수 없다고 이야기하죠. 마음이 지시하지 않으면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요. 아니, 실제적으로 그래요. 그렇다면. 마음이 지시했다고 하는 거는 뭐예요? 의식과 인식과 지각이 있다는 걸 얘기해요. 마음이 작용하니까. 그러면 멸진정에 들 수 없죠. 왜냐하면 멸진정이란 의식과 인식과 지각의 마음 작용이 완전히 멈추고 호흡마져 끊어진 상태니까요.

증지부 경전에 보면 이 말이 나오죠.
그는 정려(靜慮)하고 있어, 정려는 정념 한다고 하는 뜻과 같아요. 그는 정려하고 있어, 들숨 날숨 즐기며, 내심 깊이 선정에 들어가 있다. 코끼리는 걸으면서도 선정에 들어가 있다.
코끼리는 머물면서도 선정에 들어가 있다. 코끼리는 모로 누우면서도 선정에 들어가 있다. 코끼리는 앉아서도 선정에 들어가 있다.
여기서 '그'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에요. 부처님이 정려하고 있어 들숨 날숨 즐기며, 내심 깊이 선정에 들어있다.
여기서 코끼리도 부처님이에요. 코끼리는 걸으면서도 선정에 들어가 있고, 코끼리는 머물면서도 선정에 들어가 있다. 코끼리는 모로 누워서도 선정에 들어가 있다. 코끼리는 앉아서도 선정에 들어가 있다.
걷는다고 하는 것은 뭐예요? 의식과 지각이 살아 있다는 걸 뜻해요.
결국은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에서 의식과 인식과 지각이 없다고 하는 것은 뭘 뜻해요? 정념의 이론에 합치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사띠라고 하는 것은 몸과 마음이 언제나 함께 존재해야 돼요. 이것이 불교에서 주장하는 정정이에요. 그래서 사실 정념과 정정은 분리할 수가 없어요. 왜? 분리되지가 않아요. 실제적으로 정념이 없는 정정은 존재하지도 않고, 정정이 없는 정념은 있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8정도라고 하는 것은 8개지만 사실 이건 동시에 하나예요.

그런데 멸진정을 마지막 아홉 번째 단계로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지각과 인식과 의식이라고 하는 마음 작용이 없는데 어떻게 움직일까? 마음이 지시하지 않으면 몸은 움직일 수 없다.
현대과학의 표현에 의하면, 뇌가 지시하지 않으면, 손가락도 움직여지지 않는다. 결국은 멸진정이라고 하는 것은 반니원경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붓다가 멸진정에 들어서 입멸하거든요. 결국 이거는 죽음을 뜻하는 말이에요. 결과적으로 살아서는 멸진정에 들을 수가 없어요.
이건 걸으면서도 들을 수가 없는데, 앉아서 한 순간은 들을 수도 있을지 모르죠. 그런데 인간이 호흡이 끊어지면, 뇌사상태가 오기 때문에. 호흡은 끊어질 수가 없어요. 호흡이 끊어진다고 하는 것은 끊어졌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식이지, 호흡은 끊어질 수가 없어요.
실제적으로 수행의 단계에서 무호흡의 상태를 느끼걸랑요. 호흡이 미세하게 되면 마치 호흡이 완전 정지된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와요. 실제적으로 거의 호흡이 정지된 거와 같죠.
그렇지만 무호흡의 상태는 있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5분만 딱 무호흡의 상태로 있다면 인간은 뇌사에 들어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멸진정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아홉 단계 마지막에 들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좀 주의 깊게 봐야 되요.
반니원경이라고 하는 것을 유심히 보면, 후대에 편집되었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여기저기서 끌어 모아서 편집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우리가 부처님의 경전이라고 하는 것을 마치 부처님 시대에, 부처님 당시에 그것이 편집되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오산이에요.
적어도 우리가 보는 선정에 관한 내용은 후대에 누군가의 손에 의해서 조금 달라진 거예요. 결국 무소유처정과 비상비비상처정이 일곱 단계, 여덟 단계에 들어오는 것도, 그래서 나는 그렇다고 보죠.

정확히 말하면 정통적인 상카야의 수행 방법과 불교의 수행방법을 잘 구별하지 못했어요.
왜 구별하지 못했냐면 붓다는 붓다의 스승이었던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는 상카야 계통의 사람들이었어요. 그 차이를 붓다의 제자들도 잘 몰랐어요. 난 그렇게 봐요.

우리가 2,500년간 윤회의 주체를 찾는 이유도 과거의 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바로 거기에 있는 거고, 거기에서 오는 문제라고 보죠.

결국 8정도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중도(中道)예요. 그래서 8중도라고도 하죠. 중도는 중정이라고 할 수도 있고, 중심이라고 할 수도 있고, 중행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중정(中正), 중행(中行), 중심(中心). 8정도라는 것을 아주 단순화시키면 중심, 중행이에요. 우리가 길게 설명하니까 8정도이지. 고의 원인은 무명이고, 그 고가 소멸되면 열반이고, 그 고를 소멸하는 방법은 팔정도다. 이것이 부처님이 최초에 5비구에게 가르쳤다고 하는 것이지요.
<3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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