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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6-03-11, (금) 9:08 am 

가입일: 2015-01-01, (목) 10:13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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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부 경전은 이미 저 언덕으로 건너간 분에게 설하는 경”

중론(中論)은 사상체계가 아니라 테크닉, 책장을 덮으면 잊어 버려야 할 것

김성철 교수의 중론을 듣고 있다. 유투브에 올라 있는 ‘해인사 20003 중론 김성철’ 시리즈이다. 해인사 학인 스님들을 대상으로 해인사에서 강연한 것이다. 그런 김성철 교수는 중관학의 권위자로 알려져 있다. 현재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대학 교수이다.

“공의 논리는 사상이 아니고 테크닉입니다”

김성철 교수는 중론에 대한 강연에서 공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설명하였다. 중관논리를 잘못 받아 들였을 경우 “자칫하면 관념만 다 파괴 시키고 감성은 전혀 정화되지 않았을 경우에 가치판단이 상실되어 막행막식도 하는 그런 비윤리적 행동을 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습니다.”(중론11강) 라 하였다.

중론 강연을 들어 보면 공은 갖가지 사견을 논파 하는 것이라 하였다. 언어와 문자로 이루어진 개념을 해체 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생관, 세계관, 우주관은 공의 논리로 모두 파괴 된다. 또 중론에 따르면 온갖 희론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공의 논리라 하였다. 그런데 누군가 “공이 올바른 세계관이구나.”라고 공을 가슴에 두고 살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도 그런 사람을 교화하지 못한다.”라 하였다. 구제불능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김성철 교수는 강연에서 이렇게 말한다.

“중관논리, 공의 논리는 사상이 아니고 테크닉입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될 게 구사나 유식 같은 이런 교리는 다 사상이죠. 내용이 있죠. 세계관이 있고, 체계가 있는데 중관사상은 내용이 없습니다. 다만 부수어 버리는 방법만 알려줄 뿐이지 테크닉이기 때문에 테크닉에서 나온 결론들을 인생관으로 삼고 세계관으로 삼을 경우에는 어떻게 되냐 하면 결론은 퇴보를 하게 됩니다.”
(김성철교수, 중론11강)

김성철 교수에 따르면 중관논리는 ‘테크닉’이라 하였다. 기교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사상체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개념을 논파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사상체계로 오해하여 인생관으로 삼으면 공병에 걸릴 수 있음을 말한다.

대승경전의 정수 반야심경

대승불교에 반야심경이 있다. 아침저녁 예불에서 빠지지 않고 모든 법회의식에서 대승경전 정수로서 간주 되어 독송되고 있다. 그런데 반야심경이 철저하게 공의 논리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내용을 보면 모두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부정하고 있다. 무안이비설신의부터 시작하여 십이처가 부정되고, 사성제가 부정되고 십이연기 등 모든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부정된다. 이쯤 되면 반야심경은 ‘훼불경전’임에 틀림없다.

김성철 교수에 따르면 반야심경의 공의 논리는 비방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공의 조망 하에서 본다면 심지어 부처님 말씀조차도 근본실체는 없다 이걸 알려 주는 거죠.”라 하였다. 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모두 공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반야심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소승불교에서 해탈을 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교법을 사용하셨죠. 오온 십이처 십팔계 아니면 사성제 십이연기 이런 겁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는 어떤 얘기 하냐 하면 그런 것은 다만 교법일 뿐이기 때문에 뗏목일 뿐이기 때문에 도달하고 나면 버려라 이 말이에요. 그래서 ‘뗏목 버려라, 뗏목 버려라’가 사실은 반야심경이에요.”
(김성철 교수, 중론11강)

김성철 교수는 소승불교라는 말을 거침없이 사용한다. 2003년 시점이라면 그렇게 사용할 만도 하다. 하지만 요즘 소승불교라는 말을 사용하면 ‘비교양인’이다. 전 세계적으로 양식 있는 불교인들은 소승을 뜻하는 ‘히나야나’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테라와다불교’라는 말을 사용한다. 현재 한국에도 한국테라와다불교가 창립 되어 종단으로 등록 되어 있다.

반야심경에서 공의 개념으로 부처님 근본 가르침을 모두 공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 가르침을 뗏목으로 보았기 때문이라 한다.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너가기 위한 뗏목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뗏목을 버리라고 하였다.

뗏목을 버려야 할까?

뗏목을 버려야 할까? 초기경전에 따르면 뗏목을 버리라고 하지 않았다. 부처님 역시 뗏목을 버리라고 하지 않았다. 거센 흐름을 건넜다고 하여 뗏목을 불살라 버리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뗏목을 사용하였다면 누군가 또 활용 수 있다. 다음 사람을 위하여 물 가까이 놓으라는 말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버려야 할 것은 가르침에 대한 ‘집착’이라는 말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뗏목은 무엇을 의미할까? 일반적으로 법, 또는 가르침을 뜻한다. 구체적으로 ‘팔정도’를 뜻한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뗏목이라는 것은 바로 여덟 가지의 고귀한 길이다. 그것은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S35:238) 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

만약 대승에서와 같이 공의 논리로 뗏목을 버려 버려야 한다면 팔정도를 버리는 것과 같다. 만약 팔정도를 버리면 더 이상 불교라 볼 수 없을 것이다. 부처님은 팔정도가 없으면 부처님 가르침도 없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았을 때 붓다의 뗏목은 절대로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버려야 할 것은 법에 대한 집착이다.

반야심경은 초심자용이 아니다

초기불교 입장에서 보았을 때 대승경전의 정수 반야심경은 부처님 교법을 파괴하는 훼불경전이다. 그럼에도 대승불교에서는 법회 때 마다 조석으로 독송하고 있다.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김성철 교수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반야경은 우리가 불교에 입문할 때 사실은 독송하는 경전이 아니에요. 반야경을 보면 듣는 분이 어떤 분들이냐 하면 대게 다 아라한들이에요. 소승교법, 십이연기 사성제에 의해서 피안으로 건너 간 분들이에요. 그런 분들한테 뗏목 짊어지지 말고 버리라고 던져 버리라고 얘기하는 거에요. 이게 반야경이에요. 그러니까 실제로 반야경이 엄청나게 수준 높은 경전이에요.”
(김성철 교수, 중론11강, 5:00)

대승에 반야부 경전이 있다. 반야부 경전을 요약한 것이 반야심경이다. 그런데 반야부경전은 매우 수준 높은 경전이라 하였다. 초기불교로 따지면 아라한에 해당 되는 경전이라 하였다. 이미 저 언덕으로 건너 간자들에게 설한 경이라는 것이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무학(無學)의 아라한들에게 부처님의 교법은 더 이상 필요 없다. 마찬가지로 공의 원리를 터득하여 저 언덕으로 건너간 자에게 뗏목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런 취지로 설한 경이 반야심경이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교입문자나 초심자가 반야심경을 접하였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잘못 하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모두 부정하는 공병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은 초심자용이 아니라 피안으로 건너 간 자용이라 하였다.

빨래의 비유

김성철 교수는 중관이 사상체계가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모든 개념을 부수는 공은 단지 논리이자 테크닉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어떤 테크닉일까? 이를 빨래의 예로 설명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우리가 빨래를 하는데 어떻게 빨래를 합니까? 흰 천이 얼룩이 묻었을 경우에 비누를 묻혀 가지고 빨죠. 나중에 때가 빠져 하얗게 되죠. 그럼 그걸 말리면 됩니까? 안됩니까? 그냥 말리면 색깔은 하얗지만 비누냄새가 펄펄 나요.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물에 헹궈야 되요. 그 비누가 공이에요. 공의 논리.”
(김성철 교수, 중론11강, 7:00)

빨래 할 때 비누칠을 한다. 마지막으로 물에 헹구어야 비누 냄새가 안 난다. 공의 논리가 그렇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공의 논리에 의해서 불교를 조망했으면 그 다음에는 공도 다시 버려야 됨을 말한다.

중관에 따르면 가장 먼저 공으로 모든 개념을 부수는 것이다. 그렇게 부수면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사성제도 없고, 십이연기도 없고, 열반도 없고, 윤회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개념을 공으로 부순다. 모든 것은 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런 공도 역시 공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때를 벗긴 빨래에서 비누냄새가 나지 않도록 물에 다시 한 번 헹구듯이 공도 버려지는 것이라 하였다. 공도 공한 것이기 때문에 공도 버려야 진정한 공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자만이 제거되는가?

김성철 교수는 공의 논리를 빨래의 비유로 설명하였다. 유사한 비유가 초기경전에도 있다. 초기불교에 따르면 아라한이 될 때 모든 오염원은 소멸된다. 가장 마지막 까지 남아 있는 오염원이 있다. 그것은 색계집착(rūpa-rāga), 무색계집착(arūpa-rāga), 자만(māna), 들뜸(uddhacca), 무명(avijjā) 이렇게 다섯 가지이다. 이 중에서 ‘자만’은 어떻게 제거될까? 이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케마까]
벗들이여, 예를 들어 더러워져 때가 묻은 옷이 있는데, 주인은 그것을 세탁업자에게 맡겼고, 세탁업자는 그것을 소금물이나 잿물이나 쇠똥에 고루 뒤섞어, 맑은 물에 세탁했다고 합시다.

아무리 그 옷이 청정하고 깨끗하더라도 아직 거기에는 남아 있는 소금물 냄새나 잿물냄새나 쇠똥냄새가 가신 것은 아닙니다. 세탁업자가 그것을 주인에게 주면, 주인은 그것을 향기가 밴 상자에 넣어 보관해서, 그는 거기에 배어있는 소금물냄새나 잿물냄새가 쇠똥냄새를 없애버립니다.
(Khemaka sutta-케마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89, 전재성님역)

‘냄새가 밴다’는 훈습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무리 옷을 깨끗이 빨아도 비누 냄새 등이 남아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그 냄새를 제거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경에서는 ‘향기가 밴 상자(gandhaparibhāvite karaṇḍake)’를 언급하였다. 향기가 밴 상자 안에 세탁물을 넣으면 비누 냄새 등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초기경에 따르면 비누냄새는 물에 헹군다고 해결 되는 것이 아니다. 향기가 밴 상자에 넣어야 된다고 하였다. 여기서 향기상자는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번뇌를 부순 자가 가진 계행의 향기와 비교된다. 배우지 못한 범부의 정신은 흙 묻은 옷과 같다. 세 가지 특징(삼법인)에 대한 명상은 그것을 씻는 세 가지 세척제와 같다. 돌아오지 않는 님(불환자)의 정신은 이 세 가지 세척제로 세탁을 한 것과 같다. 거룩한 경지를 향하는 길의 지혜는 향기로운 냄새가 배어 있는 상자와 같다. 길을 통한 모든 번뇌의 파괴는 옷이 향기 상자에 넣어진 뒤에 세척제의 남은 냄새가 모두 제거 되는 것과 같다.” (Srp.II. 317) 라 하였다.

주석에 따르면 냄새가 배어 있는 옷은 배우지 못한 범부의 정신상태와 같은 것이라 한다. 탐욕, 성냄 등 온갖 오염원으로 가득 찬 범부의 옷을 세탁하려면 불환자의 정신으로 세탁해야 함을 말한다. 불환자가 되면 다섯 가지 거친 결박은 제거되기 때문이다. 특히 탐진치 삼독 중에 탐욕과 성냄이 완전히 제거 된 상태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이 있다. ‘자만’ 등 다섯 가지 미세한 마음의 오염원이 그것이다. 이런 오염원은 아라한이 되어야 없어진다.

경에서 빨래를 마친 옷에서 나는 비누냄새 마저 없애기 위하여 향기가 배어 있는 상자 이야기릏 하였다. 향기가 배어 있는 상자에 빨래한 옷을 넣으면 비누 냄새도 잡을 수 있음을 말한다. 이때 향기가 배어 있는 상자가 아라한의 정신과 같은 것이다. 아라한이 되면 자만 등 미세한 오염원이 남김없이 소멸되기 때문이다.

비누냄새를 비누로 잡을 수 없다. 향기가 배어 있는 향기박스에 넣어야 비누냄새를 잡을 수 있다. 그럼에도 김성철 교수에 따르면 물에 한 번 더 헹구는 것으로 비누 냄새를 잡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다지 적절치 못한 비유라 본다. 이렇게 초기경전에는 정확한 해법이 이미 제시 되어 있다.

왜 막행막식하는가?

모든 것이 공하다면 공도 역시 공한 것이다. 공으로 모든 개념을 부수었을 때 그 공 역시 부수어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그런 공도 역시 공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공은 테크닉이다. 심오한 사상체계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사상체계로 받아 들였을 때 어떤 문제가 일어날까? 더구나 자신의 인생관으로 삼았을 때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도 “모든 것이 공한 것이여”라며 공을 입에 달고 다닐 것이다. 이것이 공병이다. 이를 공견(空見)에 빠졌다고 한다.

공견에 빠지면 어떻게 될까? 아마 이 세상에 잡을 것이 하나도 없게 될 것이다. 이미 이 세상만사가 모두 다 해체 된 마당에 따로 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선도 악도 없고, 계율도 없고, 보시도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공병 걸린 자들은 ‘막행막식’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아유법공’으로 설명한다. 그렇다면 아유법공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김성철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실제 대승은 아공법공이죠. 진정한 대승은 나도 없고 법도 공하다. 이게 진정한 대승이죠. 그런데 잘못된 악취공자 공견론자는 ‘아유법공’이에요. 관념은 다 깼어요. 하늘땅이 다 뒤집히고 일체가 다 아무 것도 없죠. 그런데 자기 구심점은 있어요. 구심점이 있으니까 탐욕심 분노는 그대로 남아 있어요. 교만심까지.

아유법유는 탐욕과 분노와 교만이 있더라도 계율이 있기 때문에 감히 그 선을 넘지 못해요. 그런데 관념이 깨질 경우에는 어떻게 되요? 그 다음 부터는 탐욕과 분노와 교만을 발휘할 때 죄책감조차 못 느껴요. 그러니까 일반사람보다 더 못한 행동을 할 수가 있어요. 공을 공부하다가 공병이 되어 가지고. 엉망진창이 되어 가지고서. 이게 악취공자에요. 그래서 폐인같이 돼요.”
(김성철 교수, 중론11강, 23:00)

김성철 교수는 네 가지 타입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아유법유, 아공법유, 아유법공, 아공법공을 말한다. 이 중에서 ‘아유법유’는 일반사람을 말한다. 자아가 있고 법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법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도덕적인 삶을 살아간다.

‘아공법유’는 소승불교를 지칭한다고 하였다. 아가 무아인 것은 알지만 법이 공한 것임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테라와다불교 역시 아공법공이다.

김성철 교수는 ‘아공법유’에 대하여 남방불교의 계율로 설명하고 있다. 남방스님들이 담배를 피운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승불교는 계율을 지켜도 법공을 모르기 때문에 지금 남방불교 스님들은 다 태시잖아요. 큰 스님들 같은 경우도 남방불교에서는 담배 태우는 경우 많아요. 왜? 율장에 안 나오니까.”라 하였다. 빅쿠가 담배 피우는 것에 대하여 법유로 본 것이다. 율장에 담배 피우지 말라는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법공을 안다는 이야기는 계율에도 정해진 상이 없기 때문에 새로운 계율이 계속 만들어질 수 있다는 얘기에요. 계 취지만 알면 새로 만들 수 있고 상황에 따라 폐지할 수 있고 이게 법공이에요.”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유법공’은 막행막식하는 자들을 말한다. 최악의 공견론자들이다. 그런데 아유법공의 공견론자들은 ‘아유법유’, 즉 세상 사람들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법을 지키며 살지만 모든 것을 공하다고 보는 공견론자들은 법을 지키지 않음을 말한다.

아유법공에 대하여 현대 서양문화의 예술인들과 문학인들을 들 수 있다고 하였다. 미술, 문학 등 기존 관념을 깨거나 해체 한 사람들이나 기인들의 삶의 방식을 말한다. 마치 막행막식하며 사는 공견론자와 다름 없음을 말한다.

“책장 덮은 다음에는 잊어버려야 해요”

김성철 교수는 중관을 설명하면서 공의 위험성도 알려 주었다. 그런 중관은 테크닉에 불과 하며 사상체계가 아님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모든 개념을 해체하고 부수는 공 역시 공한 것이라 하였다. 공도 부수고 버려야 할 것임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김성철 교수는 다음과 같이 의미 있는 말을 하였다.

“공을 공부할 때는 열심히 하지만
딱 책장 덮은 다음에는 잊어버려야 해요.”
(김성철교수, 중론11강, 23:04)

중관학을 전공한 김성철 교수는 공을 공부하지만 책을 볼 때까지 만이라 하였다. 책을 덮고 나서는 깨끗이 잊어버리자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이는 공의 폐해가 너무 심각해서 일 것이다.

말끝 마다 “공한 것이여”라고 말한다면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 생사가 열반이고 번뇌가 보리라면 누가 수행을 하려 할까? 더구나 생사도 없고 열반도 없고 윤회도 없다고 떠벌리고 다닌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걸림 없이 대자유를 누리며 사는 도인이라고 보아야 할까? 분명한 사실은 테크닉에 불과한 공견에 사로 잡혀 있으면 부처님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런 예를 주변에서 볼 수 있다.

낚시바늘을 삼킨 물고기가

법문이나 강연을 듣다 보면 공의 논리로 불교를 설명한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이 공한 것이 되어 버린다. 또 모든 것이 본래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비록 ‘진제’라는 단서를 달기는 하지만 법문이나 강연을 들어 보면 열반도 없고 윤회도 없다. 오로지 자신이 새롭게 해석한 불교가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주장한다. 이런 이야기를 신뢰한다며 오로지 법사의 입만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마치 낚시 바늘에 꿰인 물고기와 같다. 초기경전에 이런 말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어부가 미끼를 단 낚시바늘을 깊은 연못에 던지면 눈을 가진 어떤 물고기가 그것을 삼키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어부의 낚시바늘을 삼킨 물고기는 불행에 빠지고 재난에 빠져서 어부가 원하는 대로 이끌리게 된다. (S17:2)

공의 논리로 ‘모든 것이 공하다’거나 ‘본래 없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면 공병에 걸린 것과 같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공의 논리로 재단하였을 때 모든 것이 공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이런 경우 낚시에 걸린 물고기신세와 같다. 낚시바늘을 삼킨 물고기가 어부가 원하는 대로 이끌리듯, 공견론자의 입만 바라보며 사는 것과 같다. 이런 위험이 있어서일까 중관학의 권위자 김성철 교수는 ‘중관은 테크닉이다’ 라든가 ‘책장 덮은 다음에는 잊어버려야 해요’라고 말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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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속의연꽃’의 불교이야기] 66- 중관은 테크닉이다
“반야부 경전은 이미 저 언덕으로 건너간 분에게 설하는 경”
2016-03-09 (수) |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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